13화
명숙은 작게 고개를 주억이며 사빈을 내보냈다.
아무래도 큰 사달이 벌어질 것만 같다. 명숙은 비서실에서 보내온 이현의 일정을 컴퓨터 화면에 띄우고 18박 20일이라고 체크 된 달력을 응시했다.
사빈을 두고 사근사근한 맛은 없어도 지독하게 순종적이라 이현과 잘 어울릴 거로 생각했다. 돔이니 섭이니 하는 요상 망측한 단어에 대해선 아는 게 없어도, 최이현의 지배적인 혹은 통제력 강한 성격이 분명 성벽으로 나타날 거라고는 짐작하고 있던 터. 그런 이현이 제 어미가 밀어 넣은 선 자리에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결혼에 승낙했다.
녀석의 말대로 정말 첫눈에 반할만한 이유가 있던 걸까?
명숙은 비서실과 연결된 키폰을 들어 박 실장을 호출했다.
[네, 전무님.]
“본부장 자리에 있어? 최이현이.”
[지금 막, 회사를 나가셨습니다.]
“그래?”
[예. 아내분과 함께셨습니다.]
“선아하고? 둘 다 표정은 어때?”
[평소와 같습니다. 본부장님의 성격 아시잖습니까.]
아아, 알다마다. 제 아내 앞에선 반푼이 칠푼이처럼 구는 최이현을 모를 리 있나. 안경을 벗은 명숙이 푹 꺼진 눈 앞머릴 누르며 짙게 쌍꺼풀진 두 눈을 껌뻑였다.
“본부장 집 근처에 사람을 좀 붙여. 아니, 선아한테. 접근하는 사람들부터 일거수일투족을 보고해. 내가 괜찮다고 할 때까지, 그저 감시만.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것인지 좀 알아야겠어.”
***
붉은색 라넌큘러스 한 송이가 촉촉한 물을 머금은 채 활짝 피어났다. 선아는 화병 너머 서 있는 이현에게로 초점을 옮겼다.
그의 서재는 청소할 때가 아니면 들어와 본 적이 없었다. 그가 읽는 책은 그녀에겐 너무 어려웠고, 특유의 중후한 분위기는 지나치게 위압적이라 선뜻 발을 들이기 어려웠다.
하지만 지금 이곳에 그녀는 들어와 있었다.
기름을 먹여 관리한 반질반질한 나무 바닥, 검고 묵직한 소파, 그리고 그에게 잘 어울리는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이 그녀의 존재를 압도했다. 선아는 꿇은 무릎이 저려 오는 감각에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제 모습이 오늘따라 유난히 왜소해 보였다. 그녀가 무릎에 놓인 검은 레이스 안대를 쳐다보다 서랍 여는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퇴근할 때와 다름없이 성장(盛裝)한 이현이 책상 맨 아래 칸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 든다.
선아는 심장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끼며 그가 꺼낸 물건들을 응시했다.
“승마용 채찍, 목줄, 수갑. 그리고 플래그. 이 중 싫은 건?”
평소보다 훨씬 더 낮고 음험한 그의 음성.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지나치게 낮은 음성이 그녀의 피부를 얇게 베어내며 지나갔다. 희미하게 차오르는 희열을 느끼며 선아는 플래그를 가리켰다.
“경험해본 적 없습니다, 주인님….”
은색 구슬이 줄줄이 달린 플래그를 집어 든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서랍 안에 다시 넣었다.
검은 가죽 안에 검은 토끼털이 덧대어진 수갑이 그녀의 손목에 채워진다. 그녀의 뒤로 다가온 이현은 긴 머리를 하나로 모아 높이 묶으며 가는 목덜미를 핥았다.
“아프지 않아. 자국을 남기지도 않아. 내가 자국을 남기는 곳은, 나만 볼 수 있는 곳이어야 해.”
“네.”
“턱 당겨.”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목덜미 뒤쪽으로 버클이 조여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볍게 부딪치며 만들어내는 사슬의 마찰음. 그의 숨이 피부를 스칠 때마다 젖가슴의 정점이 동그랗게 솟아올라 뾰족하게 섰다. 저도 모르는 사이 느끼고 있었나 보다.
그는 무릎에 놓여있던 검은 안대로 그녀의 두 눈을 가린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갑고 단단한 바닥, 이현의 체향. 그리고 저를 옥죄는 시선….
선아는 가려진 눈을 천천히 감았다. 그에게 모든 걸 고백한 이상, 그의 말대로 되돌아가는 일 따위는 없을 것이다. 동정을 받는다 해도, 경멸을 받는다 해도 상관없다. 아니…. 조금은 슬플 테지만, 그녀는 다시금 나타난 서경준이 두려웠다.
완벽한 통제, 지배. 그리고 평온 속에 안심하며 잠들고 싶다. 이렇게 어수선하게 흔들리는 마음을 이현이 잡아주길 바란다. 이현이라면…. 최이현이라면….
얇은 승마용 채찍이 그녀의 유두를 차갑게 긁었다.
“이제 너는 내 말에 토 달 수 없으며 반항할 수 없고,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으며, 내 허락 없이는 절정을 느끼는 것도 안 돼.”
정수리 위로 쏟아지는 이현의 음성에 그녀의 앞가슴이 크게 흔들렸다.
“네.”
“다시.”
“네, 주인님….”
“좋아.”
미쳐 날뛰고 싶은 욕망을 누르고 그가 그녀의 콧날과 입술에 차례로 키스하며 가느다란 채찍을 그녀의 허벅지 위에 아슬아슬하게 올린다. 조금만 움직여도 떨어트릴 것만 같아, 그녀는 뒤꿈치에 힘을 주어 균형을 잡았다.
“절대 떨어트리지 마. 채찍이 떨어질 때마다 엉덩이를 맞을 것이고, 그에 합당한 벌을 받을 거야…. 혹여 버틸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세이프 워드를 외쳐. 네 세이프 워드는 비올라레(violare). 사람들이 나를 부르던 이름이야. 너에겐 불리고 싶지 않았던.”
어쩐지 그와 잘 어울리는 단어였다. 그의 지배적인 성격에 반하는. 유린과 짓밟힘, 모욕을 뜻하는 이탈리아어, 비올라레. 선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턱 끝을 잡은 그가 다시 한 번 나른하게 물었다. 너의 세이프 워드는? 불그스름한 입술을 달싹이던 그녀가 마음을 다잡은 듯 또렷하게 발음했다.
“violare….”
그의 손에 감겨있던 사슬이 당겨졌다. 균형을 잡기 위해 반사적으로 그녀의 몸에 힘이 들어가고 허벅지에 올려져 있던 채찍이 흔들린다. 어떻게든 버티려 애쓰는 입 끝이 비틀리고 주먹 쥔 손은 하얗게 질렸다.
도미넌트는 지배하고 싶은 욕망을, 서브미시브는 지배당하고 싶은 욕망을 갖는다. 돔이 섭을 함부로 대한다고 해서 강자가 아니듯, 섭이 돔에게 순종한다고 해서 약자가 아니었다. 물론 돔은 섭을 이끌어야 하는 위치에 있는 자였지만 디엣 관계처럼 상호 협조가 절실한 관계도 드물었다.
섹스를 하고 싶은 게 아니라 절정에 달하고 싶은 것이 정확하다. 자신의 내면, 잠재되어 있던 비틀린 성욕을 멋대로 방출해도, 자존감에 상처 입지 않는 방식이 바로 디엣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버티는 선아를 보며 이현은 처음 느껴보는 통증에 숨을 한번 크게 쉬었다. 가슴 안쪽이 요란하게 삐거덕댄다. 그가 사슬을 조금 더 당겨 그녀의 얼굴을 바지 앞섶에 묻었다.
“빨아.”
단호한 말투에 선아는 마른침을 삼키며 벨트를 풀고 지퍼를 열었다. 드로어즈 안에 불룩 솟은 그의 성기를 꺼내자 평소 그가 사용하던 보디샴푸 향이 났다. 희미하게나마 잔재하던 두려움이 사라진다. 플레이를 하고 있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이현은 여전히 그녀가 아는 최이현이었다.
선아가 입을 벌려 그의 성기를 물었다. 목젖을 누르는 부피감에 헛구역질이 솟았지만, 그는 허리를 들썩이며 멈추지 않았다.
그가 불룩 튀어나온 그녀의 뺨을 감싸곤 깊숙하게 들어오자, 목구멍이 아닌 한쪽 볼이 크게 부풀고 그녀의 입가엔 타액이 흘렀다.
“으음,”
신음을 낸 건 이현이었다. 타액으로 엉망이 된 입가, 빨갛게 열 오른 광대를 보며 저도 모르게 그녀를 끌어안고 싶었다. 도미넌트로서의 자질을 잃은 게 분명하다. 그녀의 모습에 쾌락이 차오르는 게 아닌 사랑스러운 마음이 먼저 들다니.
“그만.”
이현은 마음이 약해지기 전, 그녀의 뒷머리를 잡아당겼다. 철컹하는 사슬 소리와 함께 균형을 잃은 그녀의 허리가 휜다.
덩달아 허벅지 위에 올려두었던 채찍이 굴러떨어졌다. 상체를 숙인 그가 바닥에 떨어진 채찍을 집어 들어 뒷머리를 당긴 손에 힘을 준다. 무릎 꿇은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인 채 오들오들 떨었다.
“겨우 이 정도도 못 버티고 말이지.”
작고 갸름한 턱에 가죽채찍의 서늘함이 닿는다. 그녀는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잘못했습니다….”
“일어나.”
오래도록 꿇어앉아 하얗게 변해버린 그녀의 발가락을 보며 이현은 사슬을 당겨 그녀를 일으켰다. 너무 오래 앉혀놨나? 설마 아픈 건 아니야? 빌어먹을, 마룻바닥.
그의 예상대로 선아는 휘청이며 균형을 잡지 못했다. 작게 욕지거릴 올린 그가 데스크 위에 올려져 있던 각종 서적을 쓸어버리고 그녀를 눕혔다. 강제적으로 보이나 그녀의 몸엔 그 어떤 충격도 전해지지 않았다.
엄청난 소리와 함께 엉망이 된 바닥. 그러나 선아의 눈에는 무엇도 보이지 않았다. 발끝부터 시작된 저릿한 통증에 절로 몸이 들썩인다. 쥐가 난 걸까? 테이블에 엎어져 발뒤꿈치를 들고 비비적거리던 그녀의 뺨이 눌리고, 모였던 양다리는 그에 의해 양쪽으로 벌어졌다.
“함부로 다리 모으지 마.”
“네.”
“벌려.”
“네….”
“아, 역시 젖었네?”
동그란 엉덩이 사이로 보이는 연홍색 음부 안으로 그의 손가락이 깊게 들어왔다. 그녀가 주먹을 말아쥐고 신음을 참는다. 그는 그녀의 성감대를 너무도 잘 알았다. 이현의 손이 스칠 때마다 선아는 자지러지고 싶은 충동을 눌렀다.
“네가 원하는 걸 말해 봐. 넌 어떤 플레이를 해왔지? 내가 모르는 네 모습이 좀 궁금하긴 한데…. 그건 또 나름 화가 날 것 같기도 하고. 아니, 난 지금 화가 많이 난 것 같아.”
그녀의 내부를 휘젓던 그가 어느 한 지점을 누르며 강하고 빠르게 자극을 주기 시작했다. 그녀의 호흡이 가빠진다. 이현은 그녀의 귓불을 깨물며 상체를 붙였다.
“새빨간 자국을 만들 거야. 네 엉덩이에.”
“하앙, 그, 그만!”
“참아.”
“꺅!”
그녀의 절정 직전 그의 손이 빠져나갔다. 순간 튀어 오른 애액이 그녀의 허벅지를 타고 무릎께까지 흘러내렸다. 그는 떨리는 선아의 허벅지를 벌려 천천히 음부를 핥았다. 그리고는 동그랗게 팽창한 클리토리스를 문지르며 그녀의 엉덩이를 강하게 깨문다.
“흣!”
고통에 겨운 비명이 터졌다. 이현은 빨갛다 못해 멍이 들어버린 그녀의 엉덩이를 핥으며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채찍을 들었다.
탄력 있게 휘어지는 채찍으로 그녀의 눈을 가렸던 안대 매듭을 건드리자, 눈물로 얼룩진 표정이 여실히 드러난다. 선아는 테이블에 떨어지는 안대를 보며 초점이 잡히지 않는 두 눈을 몇 번이고 깜빡였다.
“손으로 때려주고 싶었는데, 마음이 바뀌었어. 나는 네가 울었으면 좋겠어. 아프다고 질질 싸면서, 내 다리에 매달려주길 바라. 그러니 참지 마. 울어. 엉엉 울면서 나한테 박혀.”
서걱대는 음성에 오싹한 소름이 전신을 덮쳤다.
가느다란 채가 허공을 가르는 소리와 뒷목을 잡아 누른 악력에 그녀의 눈이 번쩍 뜨이고, 이내 화끈한 열감이 그녀의 둔부를 예리하게 후려쳤다.
짝!
가늘고 빨간 자국이 하얀 피부에 생겨났다. 선아는 떨리는 입술을 다물지 못한 채 두 번째 매를 맞았다. 툭, 툭 눈물이 떨어졌다. 이현은 목덜미를 눌렀던 손으로 그녀의 머리채를 당기곤 한 번 더 크게 채찍을 휘둘렀다. 험악해진 그의 두 눈에 고통에 몸부림치는 관능적인 여체가 새겨진다.
“셋! 숫자 안 세? 바닥을 기면서 내 발을 핥게 만들어줄까? 똑바로 해!”
천장을 울리는 고성에 선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셋!”
짝!
“넷! 흐윽,”
화끈한 열감과 함께 하복부 아래에 뜨끈한 열기가 고인다. 미친 듯이 괴로웠다. 이런 상황에 흥분하는 자신은 전혀 정상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선아는 고개를 들어 창문에 비치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재킷도 벗지 않은 그가 한 번 더 크게 팔을 휘둘러 엉덩이를 내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