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처음 들어와 보는 이현의 집무실은 향긋한 미니로즈 화병이 중심을 차지한 깔끔한 공간이었다. 평소 그의 성격대로 군더더기 없는 인테리어와 정돈된 책상. 이현은 다짜고짜 그녀를 자신의 업무용 의자에 앉혔다. 두툼한 쿠션감과 묵직한 머스크 체취가 밴 회전의자. 자꾸만 일어나려는 그녀를 강제로 앉힌 그가 재킷을 벗으며 마주한 책상에 걸터앉았다.
“숍을 정리했다는 거 진짜였어요? 아깝게 왜 그랬어요. 나는 꽃 만지는 선아 씨 예뻤는데.”
강아지처럼 큰 눈을 치켜뜬 그녀가 희미하게 웃으며 열이 오르는 뺨을 쓱 문질렀다.
“힘들어서요. 새벽시장에 가는 것도, 주문이 들어오면 밤샘작업을 해야 하는 것도…. 그럴 시간에 고모님 말대로 이현 씨 식사를 한 끼 더 챙겨드리는 게 맞는 것 같아요.”
이현은 한숨을 내쉬며 그녀의 머릴 쓰다듬었다.
“고모님 말씀 듣지 마요. 유난히 제 주변에만 냉철한 잣대를 세우는 분이잖아요. 어차피 우리가 결혼한 이상 내 가족은 선아 씨가 유일해요.”
“그러지 마세요. 고모님은 이현 씨를 생각해서,”
“나는 선아 씨만 생각해요.”
그의 다정함은 가끔 도를 지나쳐 오히려 잔인하게 느껴졌다. 어찌 보면 집착, 다르게 보면 소유욕. 선아는 머리를 쓰다듬는 그의 손을 당겨 강인하고 단단한 손가락 마디마디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러다 그의 손등에 작게 입 맞추며 이마를 기댄다.
“많이 생각해 봤어요. 이현 씨가 저한테 해준 말들부터 요즘 들어 바뀐 행동들에 대해서요. 이현 씨는 똑똑해서 제 말 한마디에 많은 걸 유추해낼 수 있잖아요. 그래서 사실 함부로 대답하기가 겁났어요.”
“겁날 정도로 잘못한 게 있어요?”
“아뇨. 우리 둘에게 혹시라도 상처가 될까 봐 무서웠을 뿐이에요. 두렵지만, 부끄럽지는 않아요. 알고 계셨어요? 저에게 좀 다른 성향이 있다는 걸….”
선아는 고개를 들어 지그시 저를 내려다보는 이현과 시선을 맞췄다.
그녀의 목소리는 언제 들어도 낮고 차분하며 매혹적이다. 마치 혼잣말을 읊조리듯. 하지만 또렷하게. 이현은 그녀의 입술을 어루만지다 살짝 벌려 엄지를 밀어 넣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한곳에서 교차해 소리 없이 움직였다. 선아는 떨리는 손으로 그의 반대편 손목을 잡아 제 목으로 가져왔다. 그가 반사적으로 손가락을 모아 그녀의 숨을 옥죈다.
그는 하복부에서부터 시작된 뻐근한 열기를 느끼며 그녀의 입속 깊이 손가락을 넣었다.
마치 관계를 나누듯 관능적이며 음란한 신호였다.
그가 입안을 헤집던 손가락을 빼내자 길게 늘어진 타액이 그녀의 입술 끝에 매달렸다.
“키에를 알아요. 사실 그곳에서 이현 씨와 처음 만났어요…. 거짓말했어요…. 순진한 척, 깨끗한 척했어요…. 그러니 벌주세요. 저는 이현 씨의 유일한 서브미시브가 되고 싶어요. 주인님….”
나른하고도 은밀하게 가라앉은 음성에 그의 흉곽이 크게 부풀었다.
키에에서 처음 만났다는 그녀의 말에 이현은 빠르게 기억을 되감았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도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 기억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선아의 목을 쥐었던 그가 가늘게 떠는 그녀의 어깨를 잡아 혼란과 정염으로 가득한 시선을 끌어올렸다.
“내가…. 왜 당신을 기억 못 해. 아니야, 난…. 선아 씨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키에에서 우린 만난 적 없어. 선아 씨…. 내가 선아 씨를 플레이 상대로만 여겼다는 건, 말도 안 되는…!”
“있어요. 이현 씨가 저를 기억 못 하는 건 당연해요. 아니…. 알아볼 수 없었어요.”
“….”
“저야말로 이현 씨에게 첫눈에 반했어요….”
그녀가 손을 뻗어 이현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자그마한 가슴팍으로 안긴 그의 귓가에 콩닥콩닥 뛰어대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몹시도 빠르고 선명하다. 이현은 그녀의 허리춤을 조금 더 강하게 끌어안으며 달콤한 체취를 깊게 들이켰다. 제가 모르는 그녀와의 과거가 있다는 사실에 그는 불안하게 떨었다.
혹여 과거 첫 만남에 상처라도 준 게 아닐까? 그녀만이 기억하는 과거에 자신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돔과 섭으로 만났다고? 아니야…. 절대 아닐 것이다. 그녀를 기억하지 못할 리 없다.
무언가 소중하다고 여겨 본 적은 처음이었다. 그 대상이 사람이란 것도. 이선아라는 여자를 보자마자 아끼고 아껴 간드러지게 잡아먹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 그로서는 기억나지 않는 과거가 그저 두려울 뿐이었다.
그의 불안을 읽은 듯, 그녀가 이현의 정수리에 입 맞추며 부드럽게 고개를 저었다.
“이현 씨, 우린 한마디도 나눠보지 못했어요.”
그녀가 잠시 뜸 들이다 모든 걸 내려놓은 사람처럼 유연하고도 담담히 말을 이었다.
“니르 씨가 그러더라고요…. 이선아 씨를 구해준 그 남자는 잘 나가는 성인용품 업체 직원일 뿐이라고. 그래서 찾을 수가 없었어요. 누구도 이현 씨에 대해 알려주려 하지 않았거든요….”
“니르?”
“네. 4층 4호…. 검은 방.”
이현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벼려졌다.
서서히 떠오르는 희미한 기억. 잊고 있던 불편한 기억 하나가 그의 뒤통수를 가열하게 후려쳤다.
“말할 수 없었어요…. 알은체할 수 없었어요. 이현 씨는 저를 못 알아봤거든요. 오히려 다행이었어요…. 제 성향을 알고 혹시라도 이현 씨가 저를 밀어낼까 봐 무서웠어요. 창피…했어요. 처음으로.”
그가 뻣뻣하게 굳어버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시울이 붉어진 모습에, 거칠게 뛰어대던 심장박동은 오히려 차분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의 기억이 사실이라면, 서경준은….
소름 끼치는 분노가 무릎 꿇은 그의 발밑에 진득하게 고여 스멀스멀 기어오른다. 첨예하게 날 선 감각은 그의 평정심에 균열을 일으켰고 그녀의 팔을 잡은 손엔 힘이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악력에 선아는 고통을 호소했다. 하지만 쉬이 힘이 풀리지 않았다.
어둠 속에 온몸을 묶인 채 쓰러져있던 여자를 떠올렸다. 마치 죽어버린 짐승처럼 마르고 볼품없고, 불쌍했던 여자를.
자신을 보자마자 살려달라며 까무룩 정신을 잃었던 여자가, 선아였다고?
마치 급체라도 한 기분이다. 이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선아의 어깨에 둘러주었다. 그리곤 티 나지 않게 떨고 있는 그녀를 끌어안고 머리카락이 들러붙은 뺨에 입술을 눌렀다.
“선아야….”
다정한 어투 속, 소름 끼치는 노기가 느껴진다.
눈물이 나올 것 같은 마음을 억누르며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전과는 달라. 이번엔 한 번이라도 시작하면, 절대 되돌릴 수 없어. 난 이미 안전범위를 벗어났고….”
그의 존대가 사라졌다. 살짝 거칠어진 호흡이 귓가를 간질인다. 그가 머리카락 사이에 숨어 있는 귓불을 짓씹으며 그녀의 뒷머리 안으로 갈퀴처럼 만든 손을 서서히 집어넣었다.
“너는 많이 위험해 질 거야….”
“…제가 원해요.”
뒷머리를 강인하게 잡아채는 손길을 느끼며 그녀가 눈을 떴다. 이현은 상체를 세워 그녀의 고개를 꺾어 저를 보게 했다. 긴 속눈썹 사이로 그녀의 개암 색 눈동자가 거울처럼 빛난다. 이현은 맑은 눈동자 안에 비치는 제모습을 보며 천천히 그녀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마치 맛을 보듯 도톰한 입술을 느릿하게 핥다가 살풋 벌어진 잇새로 침투했다.
그가 깊숙하게 파고들수록 그녀의 고개는 점점 더 뒤로 꺾였다. 고고한 학처럼 젖혀진 목덜미에 그의 손이 닿았다. 가는 목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뒤섞인 가학적 욕망. 선명하게 다가온 압도적인 관능에 선아는 속옷 안쪽이 축축하게 젖어듦을 느꼈다.
빨갛게 부어오른 입술을 한 번 더 끈적하게 핥은 그가 그녀와 턱을 맞댄 채 열 오른 시선을 내리뜬다.
“따라와.”
***
톡톡, 책상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리다 불현듯 멈췄다. 테이블 모서리에 시선을 고정했던 사빈이 고개를 들어 명숙의 얼굴을 바라본다.
“피학적 성향이 있는 여자는 위험합니다. 자해, 겁박, 우울증에 시달리기 쉽습니다. 게다가…. 독특한 성벽입니다. 본부장님께 해가 될 겁니다.”
명숙은 소름 끼치는 말을 전하면서도 담담한 사빈을 보며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좋아. 그럼 묻자, 사빈아. 이 남자는 누구니. 네가 말한 그런 변태적인 관계라면, 선아 혼자 그런 짓을 하진 못했을 거 아냐?”
“상대 남자분은 누군지 모릅니다. 알아본 적 없습니다.”
“알아본 적 없다라…. 흠, 말이 앞뒤가 다르잖니. 나도 널 믿어주고 싶어. 하지만 이건 너무 과해. 네 말을 무조건 신뢰하기엔 이건 너무 치명적이야.”
“진실입니다.”
“그럼 말해. 상대가 누군지.”
엄하게 내리깔린 명숙의 음성. 그녀가 안경 너머로 사빈을 노려보았다.
아무리 당 대표의 막내딸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스캔들 조장은 곤란했다. 게다가 해당 사진 속 여자는 두 눈을 가린 채 묶여있었다. 선아의 민얼굴을 본 적도 없는 명숙으로선 사진 속 여자를 선아와 겹쳐볼 수 없었다.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조카며느리라 할지라도 그 우아한 분위기는 뭇 여자들과 급이 다르다. 그런 선아가 이런 꼴을 해?
“상대는 저희와 관련 없는 사람입니다. 피해를 줄 수 없습니다…. 이건 엄연히 사생활이고, 저는 전무님을 위해 불법을 자행한 거나 마찬가지잖습니까.”
“나를 위해…?”
“네. 혼인을 무효로 돌릴 수 있다면, 본부장님을 제게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전무님이 직접 저를 자극하신 거잖습니까…?”
“하, 맹랑하긴. 내 아무리 걔가 마음에 안 들어도 부부 사이를 억지로 이혼시킬 수는 없어. 그래…. 이현이는 제 처가 이런 여자라는 거 알고 있다니?”
사빈은 입술을 꾹 눌러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정신 나간 놈…. 그래. 일단 너도 이 일은 함구해. 괜히 언론에 알려져 봤자 좋을 게 없으니까. 확실하게 알아보고 나서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조용히 이혼시키마. 이번 일은 절대 외부에 알려져선 안 돼. 입 조심해. 우리 본부장 이미지에 문제가 생긴다면, 나는 사빈이 너도 가만두지 않을 거다. 알았니?”
명숙은 몇 대의 담배를 몰아 피우며 분한 듯 바닥을 보며 서 있는 사빈을 관찰했다. 사빈은 무언가 부족한 듯 주먹을 쥐고 꾹 다문 입술만 떨었다.
도대체 최이현의 어디가 좋다고, 멀쩡한 여자애가 이런 짓까지 하는 걸까?
물론 세상에서 제일 잘났다고 믿는 조카 놈이었지만, 엄연히 유부남에 혹여 일이 틀어진다면 돌싱이란 타이틀을 달게 된다. 김 의원이 아무리 이량에 줄을 대고 싶어 할지라도, 대선에 출마할 작정이 아니라면 돌싱 사위 같은 건 눈에 차지도 않을 터. 명숙은 자꾸만 피어나는 의문을 잠시 갈무리하고 사빈을 회유했다.
“좋아. 네가 그렇게 나오니 이 이야길 70%쯤은 믿어보마. 하지만 나머지 30%는 네가 상대 남자에 대해 알아오면 믿어줄 생각이야. 너도 알다시피 나는 우리 이현이에게 사활을 건 사람이야. 그러니 말할 마음이 생기거든 그때 다시 얘기하자꾸나. 지금 네 이야긴 우리 이현이 발목 잡는 치정밖에 되지 않아. 지금은 베트남 일정에 신경 쓰고, 우리 집안일은 내가 먼저 정리를 할 테니 사빈이 너는 퇴근 해. 머리가 복잡해서 야근도 못 할 것 같으니, 들어가서 쉬어. 마음 좀 추스르고.”
“네….”
“넌 대체 우리 이현이 어디가 좋아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응?”
꼿꼿하기만 했던 사빈의 입가에 여린 미소가 맺혔다. 마치 인형처럼, 마리오네트처럼 누군가 그녀의 실을 당기듯 그녀의 표정이 변한다.
“존재 자체를 원합니다. 전…. 본부장님이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