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3.메일함
열이 받기는 했지만 더이상의 대화는 내 쪽이 자신이 없었다.
빌드업. 빌드업을 준비할 시간이 필요했다.
"...연락하면 받아라. 안 받으면 네 작가명이랑 일러스트 인쇄해서 학교 전
체에 뿌려버릴테니까.’,
물론 당연히 실제로 그럴 생각은 없었다.
그녀는 그냥 단순히 야짤을 그리다가 걸린 후배 가 아니 었다.
무려 나의 일러스트 작가님. 동업자란 말씀.
그런 그녀가 다른 사람도 아닌 나 때문에 작업을 중단하거나 업계를 떠
나는 것은 전혀 원치 않았다.
하지만 지금 이 상태로 물러나기에는 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받으면 될 것 아니에요."
그녀도 내가 구체적으로 무슨 짓을 할지 설명하니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고분고분하지 않은 그녀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거야 차츰차
츰...
한나은의 자리를 떠난 나는 사람 모형을 가지러 다시 1층으로 내려갔다.
원래 하얀색이었던 사람모형은 완벽히 붉은색으로 덧칠해져 있었다.
마치 처음부터 붉은색이었던 것처럼.
나의 소설 [그녀를 감금했습니다.]와도 맥을 같이하는 점이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아가씨를 납치하는데서부터 소설은 시작된다.
채찍과 당근. 자비와 무자비.
쉴틈없이 히로인을 정신적인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주인공은 결국 히로
인들을 완전히 다른 인격체로 만드는데 성공한다.
순진무구한 아가씨는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며 오직 주인공을 위해 몸
과 마음을 다 바치는 헌신적인 성노예로 재탄생시키는 것이 바로 스토리
의 메인 플롯이었다.
어쩌면 한나은도...
잠깐 한나은의 얼굴을 떠올린 나는 머리를 휘휘 저었다.
이건 내가 정신을 차릴 필요가 있었다.
"복창한다. 현생은 현생이다! 현생은 현생이다! 현생은 현생이다!!!!’,
야설 작가가 언제 가장 위기를 느끼는지 아십니까.
남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상황에서 영감이 떠오를 때입니다.
일은 일이고 현생은 현생이었다.
이 경계가 무너지는 순간.
삐끗하면 아주 죄질이 나쁜 범죄자가 되기 딱 좋은 직업군이 따로 없다
고 생각했다.
주섬주섬 모형을 챙긴 나는 다시 내 최종 모형에 핀셋으로 한 명씩 사람
을심기시작했다.
대충 분포는 이 정도면 괜찮아보이네...
사람 모형은 어디까지나 건물 본모형의 스케일감을 보여주기 위한 도구
일뿐.
그렇게까지 많을 필요는 없었다.
나무도 심고 가구도 하나씩 집어넣다보니 어느덧 해가 밝아오는 것
이 보였다.
"아아...’,
온 몸에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분명히 어제도 이 자리에 앉아서 해를 본 것 같은데...
내 자리에서 또다시 떠오르는 해를 봐야만 하다니.
탈건... 탈건이 시급했다.
페널...
페널도 인쇄해야 하는데...
모형을 어느정도 마무리 지은 나는 마지막으로 컴퓨터 작업으로 보정
을 하기 위해 노트북을 꺼냈다.
...뭐야.
충전기 어디갔어.
함께 가져왔어야할노트북 충전기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진짜? 진짜로?
가방을 뒤집어서 탈탈탈 털어도 충전기는 보이지 않았다.
좆됐다. 진짜 좆됐다.
휴대폰으로 시간을 확인한 나는 집까지 다녀오는 계산해 보았다.
우리 집에서 학교까지 약 1시간 정도니까.
왕복하면 씁시간.
근데 재수 없이 출근 시간대 겹치면 넉넉 잡아 꿓시간.
인쇄까지 걸리는 시간이 있으니까...
도저히 이 상태로는 마감을 할 수 없었다.
컴퓨터를 구해야만 했다.
"야! 휘민아!"
내가 옆에서 호들갑을 떨며 그의 이름을 부르자 휘민이가 퀭한 눈으
로 나를 바라보았다.
"왜... 기운도 좋다... 그렇게 큰 목소리도 낼 수 있고.’,
"노트북 빌려줄 수 있어?’,
"아니... 나 이거 조감도 좀 수정볼 것 있어서. 왜. 급해?’,
"나충전기 집에두고 옴.’,
휘민이는 이새끼는 뭐지 싶은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알아. 나도 안다고.
그만 그렇게 쳐다봐.
"음... 근데 대부분 지금 막바지 작업들이라 아마 다들 컴퓨터 작업 하
고 있지 않을까?’,
그의 말이 옳았다.
사실 지금 시간대라면 최종 발표를 위한 자료를 갈무리하는 시간대.
가장 정신없을 시간이기도 했다.
"일단 설계실 한바퀴 돌아봐. 혹시 아냐. 모형만 남은 사람 있을지.’,
"그래. 그게 낫겠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다시 한 번 설계실을 둘러보았다.
노트북... 노트북 안 쓰고 있는 사람...
일단 모형 작업하는 애를 붙잡아야할 것 같은데...
그리고 내 눈에 들어온 것은 아크릴에 칼집을 내서 창틀 표현을 하고 있
는 한나은이었다.
"나은아!’,
허겁지겁 그녀의 자리로 달려가며 그녀의 이름을 외치자 그녀는 깜짝 놀
란 것인지 요상한소리를 냈다.
"으메 ! 깜짝이야!"
그녀가 쥐고 있던 칼을 바닥에 떨어트렸다.
나를 노려본 그녀의 눈에는 적개심이 가득했다.
"바빠 죽겠는데 이번에는 또 뭔데요. 아까 그게 다라면서요."
"아니. 그게 아니라 노트북 좀 빌려줄 수 있어?"
"노트북은 왜요?’,
"나 집에 내 노트북 충전기를 두고 와서...’,
그녀는 어이 없다는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 보았다.
"마감날 노트북 충전기를 안 들고 오는 사람이 어딨어요.’,
마음 같아서는 '여깄다 이년아,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지금 만큼은 내
가을이었다.
"아. 진짜 제발. 안 쓰고 있으면 딱 마감때까지만 써도 괜찮을까?’,
"...프로그램 뭐 필요한데요?’,
"나? 나 그냥 캐드랑 라이노 정도? 포토샵은 있는 것 아까 봤으니까.’,
"하아..."
한나은은 귀찮다는 듯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져가요. 대신 그냥 오빠 작업만 하는 거에요. 내폴더 같은 것 일체 건
들지 마요. 알겠죠?’,
"응응. 당연하지.’,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녀의 노트북이 HNE 작가의 노트북이든 아니
든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그냥 오늘 당장 하루만 무사히 넘어갈 수만 있다면 악마와도 거래
할 수 있었다.
한나은은 노트북을 열더니 잠금을 해제시켜 주었다.
"다시 이야기하지만 제 개인 폴더 절대. 건드리지 마세요. 알겠죠?"
"명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녀의 노트북을 받아든 나는 내 메일에 빽업시켜둔 내 작업물들을 다
운로드 하고자 인터넷 창을 띄웠다.
메일창을 클릭했는데 내가 평소에 보던 화면과는 다른 화면이었다.
이건... 내 계정이 아니잖아?
자동 로그인 기능으로 인해 그녀의 계정으로 바로 연동된 모양이었다.
어서 로그아웃하고 내 계정으로 들어가야겠다 싶었는데...
무척이나 신경 쓰이는 메일 한 건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메일의 제목은...
[남가연 최종본. JPG]
내가맡긴 일러스트의 완성본이 그녀의 메일함에서 발견되었다.
열어볼까. 말까.
어차피 보낸 메일함에 기록된 것이라 열람 기록은 뜨지 않을 것이었다.
주변을 한 번 슥 돌아보고 엎어져서 졸고 있는 휘민이를 확인한 나는 침
을 꿀꺽 삼켰다.
탈칵.
베일에 가려져 있던 내 일러스트의 완성본이 화면에 띄워졌다.
높게 치겨올린 엉덩이.
비부 사이로 흐르는 허여멀건 야한 액체들.
중력을 무시한 거대한 젖가슴.
진짜 거짓말 안하고 개꼴린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정녕 이것이 쟤가 그린 일러스트가 맞단 말인가.
충격. 그자체였다.
잠시 마우스에서 손을 내려놓은 나는 다시 한나은 쪽을 쳐다보았다.
아크릴이 잘 잘리지 않는지 그녀는 낑낑대고 있었다,
HNE 작가님 같은 사람들은 실제로 만나면 어떤 느낌일까 생각해본 적
이 있었다.
아마 방구석에서 야한 그림이나 그리는 기분 나쁜 느낌의 남성이 아닐
까 싶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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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 눈에 보이는 한나은은 여리여리한 아가씨 그 자체였다.
인별그램 팔로워 100K는 될 것 같은 느낌인데...
일단 계속 일러스트를 띄워 놓을 수 없었던 나는 다시 창을 닫고는 내 계
정으로 로그인했다.
나의 메일함으로 들어왔음에도 같은 제목의 메일이 가장 상단에 올라
와있었다.
[남가연 최종본.JPG]
훌륭한 일러스트이기는 하지만 이건 집에 가서 차분하게 경건한 마음으
로 보도록 하자.
나는 허겁지겁 파일을 다운 받아서 리터칭을 시작했다.
리터칭 작업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그림자 음영 표현이랑, 마감재 질감 표현. 그리고 약간의 블러 처리된 사
람들.
욕심을 낸다면 더 섬세하게 할수도 있었지만 시간은 내게 그걸 허
락해 주지 않았다.
페널 배치를 마무리 지은 나는 출력실에 가서 내 이름을 달아두었다.
"후우...’,
끝이다...
이제야 이 개같은 근린 생활 시설 프로젝트와도 이별할 수 있겠구나.
내 자리로 돌아온 나는 의자에 풀썩 주저 앉았다.
피로감이 한 번에 몰려오는 이 느낌.
하지만 당장 지금 잠들었다가는 발표 시간 때 일어나지 못할 것이었다.
노트북... 노트북 돌려줘야지.
제대로 로그아웃을 한 것을 확인한 나는 종료 버튼을 누른 후 한나은
의 자리로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녀는 모형을 완성하고 잠에 든 것인지 책상에 기댄 상태로 새근새
근 작은 숨소리를 내고 있었다.
노트북을 슬며시 내려놓은 나는 한나은의 모형을 잠시 유심히 바라보았
다.
한나은은 손재주가 좋았는지 무척이나 깔끔하게 마감 처리들이 되어있
는것을 볼수 있었다.
조금만 잘못하면 어긋나기 무척 쉬운 곡면 부분들도 각이 딱딱 잡혀 있
는것이 아주 기가 막혔다.
모형만 보면 진짜 건축 설계로 대성할 것 같은데 왜 야짤을 그렇게 열심
히 그리고 있는 걸까.
그리고 나는 그날 오후.
그녀가 어째서 그런 선택을 하게 되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게 되었다.
埌埌埌
"나은 씨. 모형만 이쁘게 만들면 뭐해요. 내용이 하나도 없는데.’,
"건축은 아트가 아니에요. 이쁘다고 다가 아니라고요. 그 안에 담겨 있
는 개념이 중요한 거지.’,
"하아... 이게 만드는테크닉이 너무 좋다보니까 자기 자신한테 속고 있는
지한 번 의심해볼 필요가 있겠는걸?’,
한나은은 비굴한 죄인마냥 교수들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
를 푹 숙이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그녀는 자신의 결과물에 대해서 사과를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