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일러레님!-2화 (2/276)

<2화 > #2.소심한 협박

사고 회로가 정지했다.

내가 지금뭘 본거지?

어째서 내가 신청한 일러스트가그녀의 노트북 속에 있단 말인가.

일러스트의 주인공은 내 소설 속 7번째 히로인 남가연.

최근 조금 더 자극적인 포즈의 일러스트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나

는 몇 번이고 메일로 작가님과의 회의를 했었다.

[그러니까 조금 더 엉덩이를 내리는 편이 낫지 않겠나요?]

[아니죠. 여자들은 자세를 더 들어올릴수록 수치심을 느낀다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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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어떻게 아는건데.

어디서 주워들은 건가.

아니면 실제로 경험이 많은 고수이신 걸까. 작가님은.

신청하기를 수치스러움이 가장 잘 느껴지게 표현해달라고 부탁드렸는

데 작가님의 일러스트 초안은 천박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건 그렇기는 한데 구도가 이쁘게 나올지...]

[전적으로 저를 믿으셔야 합니다.]

마치 자신만 믿으면 무조건 성공할 것이라는 저 말투.

[으음... 작가님이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확신에 가득찬 작가님의 답장에 나는 고집을 피우지 않기로 했다.

뭐... 여태까지 보여준 실적이 있으니까.

어련히 잘하시겠지.

[보자마자 바로 아랫도리에 반응이 오도록 그려보겠습니다!]

내가 신뢰하는 듯한 태도를 보이자 작가님은 반농담조로 내게 답

변해 주었다.

개인적 친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동업자라는 것은 이런 느낌인걸까 싶

었는데...

한나은이 노트북 화면을 쾅! 소리가 내도록 세게 접었다.

"...가져가요.’,

"어?,.

"라카. 필요하다면서요. 빨리 가져가라고요.’,

고개를 푹 숙인 한나은이 얼른 가라는 듯한 말투로 나를 재촉했다.

잠시 벙찐 표정을 짓고 있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내 자리로 돌

아왔다.

"뭐 야. 라카 구했네 ?’,

휘민이가 내 옆에 핑크색 라카를 내밀었다.

"서랍 찾아보니까 있더라고. 미안하다. 야. 그것도 쓸라면 써라. 다 써

도 상관없음.’,

"...어. 고마워.’,

분명 서둘러 작업을 해야하는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바보같

이 눈을 끔뻑끔뻑 뜨며 칼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잘못본 것은 아니겠지.

만약 그런 거라고 함은 한나은이 노트북을 그렇게 세게 닫을 필요는 없

을 테니까.

HNE... HNE 작가님 ...

하나은?

••• I ••• ••• •

진짜로?

진짜로 저 한나은이 나랑 꼴림이란 무엇인가 맹렬히 토론했던 작가님이

라고?

슬그머니 고개를 들어서 다시 한 번 한나은의 자리 쪽으로 고개를 돌렸

다.

한나은은 다시 작업을 시작하지는 않은 것처럼 보였지만 무척이나 평온

한 표정이었다.

사실 작가님은 다른 사람이고 그녀는 그냥 일러스트를 보고 있었던 걸까

?

아니 근데 아직 완성도 안된 일러스트를 작가님이 한나은에게 전송했

을이유는 없는것 같은데...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녀는 냅다 이마를 책상에 들이박았다.

오...

아프겠는데...

본인도 아팠는지 그녀는 양 손으로 이 마를 부여 잡고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 자세 그대로 다시 한나은은 책상에 고개를 묻었다.

...그래. 진실이 무엇이든 쪽팔리기는 하겠지.

다 큰 처자가 야한 그림 보다가 학교 선배한테 걸렸으니까.

머리를 두 번 정도 더 박아도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한나은이 무척이나 신경 쓰이기는 했지만 계속 그녀를 관찰할 수만은 없

는 노릇이었다.

주머니에 사람모형을 챙긴 나는 라카를 들고는 설계실 문밖을 나섰다.

건축대 건물을 벗어난 나는 바닥에 천천히 신문지를 깔고는 사람 모형

을 테이프로 붙여 똑바로 세웠다.

"아오씨. 좀 서라. 얘들아. 왤케 쓰러지는 거야."

당장이라도 쓰러지고 싶은건 난데 말이지.

간신히 고정을 완료한 나는 꼼꼼하게 스프레이를 뿌렸다.

말릴 때까지 30분 정도는 걸리니까...

라카의 뚜껑을 덮은 나는 다시 嬖층으로 올라갔다.

휘민이의 라카는 돌려줬고... 이제 한나은한테 이걸 돌려줘야 하는데...

지금은 좀 상태 가 괜찮나?

다시 한 번 창가 쪽으로 시선을 돌리 자 그곳에는 불과 20분만에 초췌해

진 한나은이 눈에 들어왔다.

반쯤은 초점이 없는 눈.

머리는 쥐어 뜯었는지 고데기를 한 것처럼 단정했던 그녀의 머리는 헝클

어져 있었다.

...그래도 다 썼으면 돌려주기는 해야겠지?

침을 한번 꿀꺽 삼킨 나는 한나은의 자리로 성큼성큼 나아갔다.

"저... 나은아?’,

그녀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건지 내가 자리 바로 앞까지 왔음에도 내

쪽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말을 걸자 그제서야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 보았다.

"아...!’,

그녀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잘 썼어. 고마워.’,

안 그래도 마감 하루 전이라 바쁠텐데 불편한 상황은 짧을수록 좋다

고 진단한 나는 등을 돌리고 내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하지만 손목에 느껴지는 따듯한 감촉에 나는 멈출 수밖에 없었다.

"저... 저기요.’,

한나은이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목을 붙잡았기 때문이었다.

"봤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그녀가 내게 물었다.

음... 여기서 어떤 대답을 해주는게 좋을까.

역시 모르는 척 해주는 편이 좋겠지?

"뭐를?"

"제 모니터 화면이요...’,

"아니? 못 봤는데? 왜 뭐 띄워놨길래 그러는데?’,

그냥 못 봤다고만 말할껄 그랬다.

"아뇨. 봤잖아요. 오빠. 내 그림.’,

그냥 그림이 아니라… 내 그림이라...

그 말은즉. 한나은은 실제로...

"어디 가서 절대로 말하면 안돼요. 알겠죠?’,

그녀가 초조한 표정으로 내 두 손을 붙잡았다.

마치 겁먹은 강아지와도 같은 그녀의 표정.

...진짜 이러면 안되는데 나는 이 상황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실제 경험은 0에 수렴했지만 이미 백 화도 넘게 장편 야설을 집필한 나로

서는...

약점을 잡힌 미녀.

그리고 절대로 먹이를 놓치지 않은 평범한 남자.

내 안에 또하나의 자아가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민호. 더 이상 네 소설은 픽션이 아니야! 저질러버려!'

■아냐! 미친새끼야! 현실하고 구분은 할 줄 알아야 될 것 아냐!,

■야설이나 쓰고 있는 네가 언제 한나은 같은 애랑 말이라도 붙여보겠어!'

'왜! 나중에 돈 다 벌면 이 생활 청산하면 그만이지!,

"오빠...?’,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한나은이 불안한 듯이 살짝 고개를 기울

이며 내 표정을 살폈다.

설계실전용 복장.

트레이닝복과 후드티만 입고 있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빛이 나고 있었

다.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갸름한 턱선.

...나에게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H.N.E."

한 글자 한 글자 내뱉을 때마다 한나은의 큰 눈망울이 점점 확대되었다.

"아...우... 어...’,

단 세 글자 만으로 그녀는 말을 잃어버렸다.

마치 삐그덕거리는 인형과 같은 그녀의 몸짓.

한 걸음. 두 걸음.

내가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맨입으로 그걸 숨겨달라고?’,

내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렸다.

반면 한나은의 얼굴은 서서히 절망으로 물들어가기 시작했다.

"뭐... 뭐를 원하는데요?’,

궁지에 몰린 토끼 같은 그녀는 몸을 오들오들 떨기 시작했다.

"...전화 번호.’,

"네?’,

"네 전화 번호 달라고.’,

나는 그녀에게 내 휴대폰을 내밀었다.

[010—**88—0923]

나는 그대로 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뒤에서 경쾌한 팝송의 멜로디가흘러 나왔다.

"저장해둬. 내 번호야.’,

통화를 뚝 끊은 나는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이걸로 나도...

이민호. 25살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낸 날이 아니었나 싶었다.

나의 대범한 행동에 나는 속으로 박수를 쳐주고만 싶었다.

모쏠 아다인 내가 저정도 미녀에게 이렇게 무례하게?

한나은의 번호를 저장한 나는 대단한 수확을 얻었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네…’,

나는 이제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가서 당장 마감을 준비하려고 했다.

그녀의 연락처를 통해 무엇을 시도할 지는 차차 생각해보기로 했다.

밖에서 만나자고 해도 만나 주려나? 만나 주겠지?

그런 상상을 하며 등을 돌렸는데 한나은이 내 옷깃을 붙잡았다.

,.왜?,.

"끝이에요?"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바라보았다.

"뭐?’,

"끝이냐고요. 제 비밀을 숨겨주는 대가가."

...일단은 그렇기는 한데.

한나은의 반응이 잘 이해가되지 않았다.

겁을 먹은 것처럼 보이던 방금 전과는 조금 분위기가 달라진 것 같았다.

"으"

O•

그녀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렸다.

"알았어요. 그럼. 대신 그 번호로 연락하거나 다른 사람 주지는 마세요.’,

...분명 내가 갑의 입장에 있는 것 같은데 묘하게 나를 하대하는 듯한 느

낌에 나는 살짝 짜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 건가?

이게 내 소설이었으면 말이야... 너는 이미...

"진짜 존나 싱겁네.’,

등을 돌린 한나은의 혼잣말이 내 뇌리에 꼳혔다.

하. 지금 주제 파악을 못하고 그딴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발걸음을 멈춘 나는 자기 자리로 돌아가서 앉으려는 한나은을 붙잡아 세

웠다.

"또. 뭐요.’,

마치 벌레를 보는 듯한그녀의 시선.

그래. 언제나 내 소설 속 히로인들도 처음에는 그런 반응이지.

"진짜 인생 끝나볼래?’,

험 악한 표정 으로 그녀를 내 려 다보았다.

이 정도면 긴장 좀 하겠지... 싶었는데...

내 예상과는조금 다른 대답이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어떻게 끝내줄 건데요?’,

아니. 어떻게 끝내주냐니. 그거야... 네가 야한그림 그리는 일러레인걸 밝

히면...

내 가 머뭇거 리 며 대 답을 하지 않자 그녀는 한심 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

았다.

"하아... 제대로된 계획도 없으면서 센 척만하는 것 진짜 역겹거든요?’,

...지금쟤 스타야설 작가인 나한테 빌드업이 없다고욕하는것 맞지?

내 안의 또다른 자아가뜨겁게 불타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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