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 미유키와 데이트(6)
* * *
“고맙습니다. 아가씨. 아가씨가 아니었으면, 우리 딸이 살아생전 아끼던 물건이 두 동강 날 뻔했어요.”
할머니가 손에 들린 수제 믹서기를 아련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고마워요. 언니.”
할머니의 손녀딸도 예의바르게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미유키는 그런 아이가 귀여운지,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한다.
“예의가 바르구나. 꼬마야. 역시 동방예의지국의 소녀다워. 그리고, 어르신.”
미유키가 할머니를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바라본다.
“그 물건 아직도 거래 가능 한 거죠?”
“아. 예? 이 믹서기요?”
“네.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게, 물건이 좋아보여서 사고 싶어요. 평범한 물건이 아닌 듯 합니다.”
평범한 물건이 아닌 것 같다는 말에 할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진다.
“아. 예··· 사실 이 수제 믹서기는 우리 사위가 예은이 엄마를 위해서 만들어준 물건이랍니다. 그 사고만 없었어도 우리 예은이가 이렇게 못난 할미 밑에서 고생할일이 없었을 텐데.”
얘기를 들어보니 꼬마 아이의 이름은 예은이.
그리고 아이의 부모님은 교통사고로 몇 년 전에 돌아가신 것 같았다.
할머니의 얘기를 다 들은 미유키가 수제 믹서기를 이리저리 만져 보더니, 마음의 결단을 내린 듯 할머니에게 시원스럽게 말한다.
“그러면 이 수제 믹서기 제가 사겠습니다. 그리고 고양이필터랑 오리 인형도요.”
덥석 물건을 사겠다는 미유키.
사실 미유키가 안사면 나라도 할머니와 아이를 위해서 사 줄 예정이었지만, 미유키 같은 부자가 무엇 때문에 이런 물건들을 사는지, 궁금해서 미유키에게 이유를 물어본다.
“미유키씨. 이 물건들은 사서 어디에 쓰려고요?”
미유키가 얼굴을 복숭아처럼 귀엽게 물들이며 수줍게 대답한다.
“그··· 아침에 저 고양이 필터기로 과일을 깎아서, 믹서기로 갈아 오빠에게 생과일 쥬스를 만들어 주고 싶어서요.”
“아··· 아침마다 저한테 생과일주스를··· 어? 아, 아침 마다??!!!”
아무 생각 없이 미유키의 대답을 듣고 있다가 놀라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네· 오빠랑 결혼하면요. 내일부터 당장 동··· 동거도 괜찮지만, 동거는 한국에서는 인식이 안 좋다고 해서.”
역시나 당당하게 자신의 원대한 계획을 거침없이 내뱉는 미유키.
솔직해도 너무 솔직하다.
“그러면 오리 인형은 사려는 이유가···”
“그거야. 당연히···”
미유키는 뭐가 그리 좋은지 입가에 한 가득 미소를 띠우며 상큼한 목소리로 대답한다.
“우리 아이가 생기면, 이 오리인형을 욕조에 띠우고 셋이서 같이 거품도 만들고 화목하게 목욕을···.”
너무나도 저돌적인 미유키의 대시.
“아, 아이요? 그 것도 셋이서 같이 한 욕조에서 목욕을!”
당황해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때마침 우리 대화를 듣고 있던 할머니가 입가에 미소를 띠우며 인자한 말투로 말한다.
“아이고. 어쩜. 두 분 다, 천사 같이 예쁘고 잘생긴 것이 천생연분이네요. 정말 잘 어울려요. 아가씨랑 총각을 보니 우리 딸과 사위가 생각나서···”
천생연분이라는 말에 기분이 좋아진 미유키가 할머니의 손을 붙잡고 좋아한다.
“그쳐? 어르신? 정말 우리 오빠랑 저랑 너무 잘 어울리죠? 역시 어르신은 사람 보는 눈이 있으시네요. 그런데 이 물건들 소중한 물건들 아니에요? 저한테 팔아도 되시는 거예요?”
“네. 아가씨. 모자란 늙은이 생각에 아가씨랑 총각이 이 물건을 잘 사용해 주면 우리 딸과 사위도 하늘나라에서 기뻐해 줄 것 같아요. 늙은이 집에서 썩고 있는 것 보다야···”
“감사합니다. 어르신. 그러면 이 물건 가격이.”
미유키가 힐끗 가판대에 적혀있는 숫자를 읽는다.
“아! 이거. 겨우 백 만 원 밖에 안하는 거예요? 너무 싼데. 우리 일본에서는 이 정도의 장인정신이 담긴 수제 물품이면 몇 배는 할 텐데. 어르신. 너무 손해 보고 파시는 거 아니에요?”
백 만 원이라는 말에 할머니가 놀라서 고개를 가로 저으며 말한다.
“아니. 아가씨. 이거 숫자가 백 만 원이 아니라 만 원 인데.”
하지만 미유키는 아까 사기꾼 아줌마한테 단검을 헐값에 샀던 것처럼 자기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저는 일본사람이라 한글 잘 모릅니다! 하지만, 이런 장인의 정신이 깃든 물건이 고작 만 원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일본 사람이라 한국 물가를 모른다고 너무 장난이 심한 것 아니십니까! 어르신!”
사기꾼 아줌마를 상대할 때와는 180도 다른 방향이지만 역시나 박력 있게 나가는 미유키.
할머니도 기세가 움츠려 든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그런 할머니에게 다짜고짜 오만원짜리 다발을 꺼내서 건네며 작게 속삭이는 미유키.
“어르신. 어르신이 아니라 손녀딸을 위해서 받아주세요. 그리고 어르신. 제가 장담하건데, 지금 할머니가 팔려는 물건들의 원래 가치는 충분히 이 금액정도 합니다. 그러니까, 어려워 마시고. 얼마 안 되는 돈이지만, 오늘은 이걸로 손녀딸이랑 맛있는 거 사 드시고 그만 들어가 쉬세요.”
손녀딸이라는 말에 할머니의 눈빛도 흔들린다.
본인을 위해서라면 한사코 받지 않았겠지만.
해맑은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손녀딸을 위해서라면.
“고마워요. 아가씨. 정말.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
“아니에요. 어르신. 좋은 물건을 싼 가격에 거래하게 되어서 제가 고맙죠.”
그렇게 거래를 마무리하고 수제 믹서기와, 고양이 과일필터, 오리 인형까지 챙겨서 자리를 떠나는 미유키.
악덕 상인 아줌마를 대할 때와는 너무나도 판이하게 다른 그녀의 따뜻한 모습.
당당하면서도 인간적인.
미유키만의 매력이 조금씩 내 마음에 스며들어가기 시작했다.
* * * * *
“오빠 그러면 우리 이제 E마트에 가요.”
팔짱을 끼고 걸어가던 미유키가 싱긋 밝게 웃으며 말한다.
“E마트요? 미유키씨 E마트는 갑자기 왜요?”
사실 미유키 정도의 부자라면 굳이 마트 같은 곳에 가지 않아도 필요한 물건은 알아서 다 배달 해 올 텐데.
“사실, 일본에서도 한국에서도 마트라는 곳을 가 본적이 없거든요. 그래서 오빠랑 꼭 같이 한 번 마트에 가보고 싶었어요. 예비신부 수업이라고 할까요?”
“예비신부 수업이요?”
“네. 오빠. 오빠랑 결혼하면 조금은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거든요. 직접 시장이랑 마트에서 장을 봐서 오빠랑 우리 아이를 위해 요리도 하고. 그래서 마트에 갔다가 1일 한국요리수업체험도 예약해 뒀어요. 일본 요리에는 자신 있지만, 오빠를 위해서는 한국 요리도 할 줄 알아야 하니까요!”
이제 고작 첫 번째 데이트를 시작했을 뿐인데, 예비신부 수업까지 생각하고 있다니.
미유키는 도대체 얼마나 앞서가는 걸까?
미유키의 이런 적극적인 모습이 싫지 않다.
미유키가 이렇게 적극적이지 않았다면, 예슬이에게 받은 상처 때문에 하루 종일 우울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미유키와 데이트를 하면서도 문득문득 예슬이가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다.
“오빠. 오빠! 그런데 이 전단지에 적힌 것 진짜에요? 돼지고기가 100G에 1,000원. 감자가 1kg에 1,000원? 이런 가격 우리 일본에서는 상상도 못하거든요.”
길거리에서 받은 E마트 전단지를 흔들며 신나하는 미유키.
미안하지만 미유키에게 냉혹한 현실을 알려주도록 한다.
“미유키씨. 그건 사실이지만, 정말로 그 가격에 물건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한국 아줌마. 아, 아니. 지금은 아저씨겠구나. 한국 아저씨들과의 엄청난 경쟁을 이겨내야 합니다. 전단지에 오전 11시부터라고 써져있죠? 아마 그 정도의 엄청난 가격이라면 단 일 분이면 모든 물건이 동나 버릴 거예요.”
신나하다가 살짝 겁먹은 듯 한, 눈빛의 미유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이 되기 위해서는 이정도 쯤은 해야 하지 않겠어요! 오빠! 미유키 할 수 있어요. 오빠에게 한국에서 휼륭한 가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꼭 돼지고기와, 감자, 특별한인 품목인 계란 한 판 까지 사수해 보이겠어요!”
오른손을 꽉 쥐며 단단한 각오를 하는 미유키.
판도라 멤버들에게 둘러 싸였을 때도 담담하기만 했던 미유키인데.
지금은 바짝 긴장한 듯하다.
“설마. 계란이라면··· 저 특별세일 품목. 계란 한 판에 100원! 을 말하는 건가요. 미유키씨?”
매서운 눈빛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이는 미유키.
“네. 오빠. 바로 그녀석 이예요.”
계란 한 판에 100원!
이것은 그야말로 E마트에서 야심차게 기획한 이번 할인 행사의 꽃이자 미끼 품목이다.
이 정도 물품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30년 이상의 생활 주부로서의 경력이 필요하다.
이걸 과연 미유키가 해낼 수 있을까?
물론 미유키가 여태까지 보여준 뛰어난 능력을 의심하는 건 아니지만.
이번에 미유키가 도전하는 계란 한판 100원! 미션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의 요새와 같은 난이도 SSS급의 미션이다.
“미유키씨. 정말 괜찮겠어요? 너무 무리하지 않아도 괜찮아요. 이미 충분히 시장에서 미유키씨의 가장으로서의 능력을 보여 줬잖아요. 90프로 할인에 1+1 까지. 그 정도면 미유키씨는 이미 S급의 한국 가장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아니요. 오빠. 말리지 마세요. 이건 제 일생일대 중대한 시험입니다. 이걸로 제가 과연 오빠의 신부가 될 자격이 있는지 판가름 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오빠. 저에게는 비장의 무기가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