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6화 〉 걸레들이 후회하며 집착한다(12)
* * *
*오전 출근시간
씨발. 자기들만 아는 이기적인 년들 같으니라고.
시현씨 퇴사를 막기라는 대의를 위해 참고 있으니까 이 짐승 같은 년들이 해도해도 너무한다.
출근하자마자 시현씨 몰래 가방만 자리에 두고 회사옥상으로 올라갔다.
뜨겁게 내려 찌는 여름의 아침 햇살 때문에 고운 피부가 다 타들어간다.
하지만 시현씨의 눈에 띠지 않기 위해서는 내가 머물 곳이 회사에 없다.
그 때 걸려오는 전화.
뚜르르 뚜르르
“여보세요?”
“아. 아영팀장님. 저 유리에요.”
“예. 유리씨.”
“지금 어디에요?”
“옥상이요. 유리씨.”
“아, 진짜요. 아이 진짜. 아영팀장님. 왜 거기서 그러고 있어요.”
역시 유리씨.
미우니 고우니 해도.
그래도 나를 챙겨주는 사람은 우리팀에서 유리씨 밖에 없다.
“유리씨. 나 걱정해서 그래········”
라고 말하려는데 서유리가 급하게 말을 끊는다.
“아영팀장님. 빨리 다른 데로 도망치세요. 지금 시현 씨랑 성현대리님이랑 옥상 올라가고 있단 말이에요.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도망가도 하필 옥상으로 도망가요. 시현오빠 거기 잘 가는 거 아시면서. 진짜 옥상에서 얼쩡거리다 시현오빠한테 걸리면 그거 다 팀장님 책임인거 아시죠?”
“예. 예? 유리씨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내가 지금 이 더운 여름날 아침에 누구 때문에 얼굴 타 들어가면서 옥상으로 피신 나와 있는데.”
“아. 몰라요. 하여간 시현오빠한테 걸려서, 시현 오빠한테 선물받기라도 해 봐요. 가만 안 있을 테니까. 시현 오빠한테 선물 받는 순간 시현 오빠 퇴사시기 빨라지는 거 아시죠? 닭대가리도 아니고 진짜. 아! 시현 오빠! 지금 엘리베이터 타요. 빨리, 튀어요! 빨리!”
“아, 알았어요!”
씨발! 이제 겨우 옥상 도착해서 한 숨 돌리나 했는데, 도망가란다.
서유리 개 같은 년.
나를 생각해 주는 걸로 잠시나마 착각했던 내 자신이 한심 하다.
하긴 생각해보면 지금 내가 이렇게 도망자 신세가 된 것도 다 서유리 개년이 시현씨한테 도망치라는 좆같은 아이디어를 제시했기 때문이다.
휴우·······
한숨을 쉬며 엘리베이터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간다.
짜증나고 힘들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다.
시현씨가 퇴사하게 되면, 다른 팀원들뿐만 아니라 나도 문제가 크다.
원래는 팀장이 해야 할 짜증나고 귀찮은 업무들.
전부 다 시현씨가 도맡아하고 있었다.
그 업무들이 전부 나에게 다시 돌아온다면.
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온 몸이 부슬부슬 떨릴 정도로 아찔하다.
띵!
엘리베이터 앞에 막 도착했을 때 쯤, 갑자기 문이 열리는 엘리베이터 문!
그리고 들려오는 목소리
“아, 성현대리님. 진짜 그런 거 아니라니까요. 무슨 팀원들이 저를 좋아해요. 생각만 해도 오한이 듭니다!”
이 목소리는 분명 시현씨다.
에이 씨발!!
나도 모르게 당황해서 일단 튀고 보았다.
덜커덩!
급하게 비상계단구를 향해 달린다.
두두두두두!
흐억! 우윽.
아침부터 달렸더니 속이 안 좋다.
하지만 나의 초인적인 민첩함으로 간신히 시현씨와 성현대리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어? 방금 아영사원 본 것 같은데? 대리님. 아영사원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지 않았어요?”
“응? 나는 못 봤는데.”
“아. 그래요? 제가 헛것을 보았나 봐요. 아영씨가 오늘 아침부터 안 보이네요.”
“왜? 아영팀장은 왜 찾는데?”
“선물 줄 것이 있어서요.”
“줄 거? 뭐? 선물? 설마 시현이 너 김아영한테 관심 있는 건 아니지? 아서라. 진짜. 아무리 그년이 이세계로 평행이동하면서 얼굴도 더 쌔끈해지고 몸매도 좋아졌다지만. 너도 알잖아. 그년이 우리 원래 세계에 있을 때 얼마나 괴롭혔는지.”
“아, 그런 거 아니에요. 대리님. 좋아하기는 무슨.”
내가 들은 시현씨와 성현대리의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그런데 들은 대화내용으로 유추해 볼 때.
설마.
혹시.
시현씨가 나를 짝사랑 하고 있는 걸까?
생각해보면 그 말도 일리가 있다.
화장실에서 그렇게 부끄러운 장면을 포착 당했는데도, 시현씨는 아무에게도 공개하지 않고 나를 감싸주고 있다.
그리고 보면 다른 팀원들에게는 다 선물을 주었지만 나만 아직까지 선물을 안주고 있는 것도 그렇고.
혹시 나만 특별하게 생각하고 있는 것일까?
하아·······
그러면 안 되는데.
나는 레즈비언이란 말이야.
나를 너무 좋아하면 시현씨에게 상처만 줄 텐데.
시현씨의 얼굴을 떠올려 본다.
러시아 혼혈처럼 눈처럼 하얀 피부에 강아지 마냥 크고 별처럼 반짝이는 눈.
거기다가 루비처럼 붉고 귀여운 입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성 정체성이 흔들리는 것만 같다.
다시 마음을 다 잡아 본다.
엘리베이터 옆 비상계단은 안전하다고 할 수 있다.
계단을 걸어서 사무실로 내려간다.
헉. 헉·······
평소에 안 하던 운동을 오늘 다 하는 것 같다.
“어머, 아영팀장님!”
나를 발견한 김미희 주임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온다.
“아. 예. 미희씨. 좋은 아침·······”
이라고 말 하려는데 급하게 다가온 김미희 주임이 내 손을 덥썩 잡는다.
“아영팀장님! 미쳤어요! 여기를 왜 와요? 시현씨가 보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빨리 가요. 빨리 가!”
“네? 아, 아니 그게 아니라. 지금 시현씨랑 성현대리 옥상에 있거든요. 담배피고 있어서 잠깐 사무실에 내려 온 거예요. 조금만 쉬다가 다시 나가 볼게요.”
하지만 내 손을 잡고 질질 끌며 나를 사무실 밖으로 끌고 나간다.
“아니, 진짜. 그러다가 시현씨랑 동선이 겹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래요! 말귀를 못 알아 듣네. 진짜. 꺼지라고! 꺼져!”
이 미친년이.
오냐오냐 해 주니까.
이제는 직장상사한테 꺼지라고?
“야! 김미희 너, 지금 말 다 했어!”
라고 소리치는데 갑자기 김미희 주임이 내 입을 틀어막고는 재빨리 나를 사무실 안으로 끌고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귓가에 대고 속삭인다.
“팀장님, 지금 시현씨 내려오고 있다잖아요. 아이. 씨발. 그러니까 뭐 하러 사무실로 내려 와가지고. 화장실 같은 곳에나 짱 박혀 있지. 빨리 숨어요. 빨리!”
김미희 주임에게 끌려가면서 생각했다.
씨발! 개 같은 년들.
내가 무슨 화장실 청소하는 아줌마도 아니고, 어떻게 오전 내내 화장실에 처 박혀 있으라는 거야.
냄새도 나는데.
하여간 자기들 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년들.
이때까지 내가 이런 걸레 같은 년들을 감싸주고 시현씨를 막 대했다고 생각을 하니 후회가 물밀듯 밀려온다.
마치 쓸모없는 물건.
혹은 폭탄을 돌리 듯 나를 서유리한테 인계하는 김미희 주임.
“유리씨. 유리씨가 아영 팀장 좀 어떻게 해 봐. 눈치는 더럽게 없어가지고. 시현씨 옥상에 있다고 사무실로 왔어. 하여간 저런 빡대가리로 어떻게 팀장까지 올라 간 거야.”
서유리가 짜증난다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본다.
“아니. 팀장님. 어디 비상구 계단 구석에나 조용히 처박혀 있지 왜 사무실에 나타나요. 나타나길! 지금 시현 오빠랑 성현대리 사무실로 오고 있다고 다정 차장한테 연락 왔단 말이에요. 아이, 진짜. 킹 받네!”
씨발. 이 미친년들이.
아무리 시현씨 퇴사 못하게 하는 게 중요하다고 해도.
나한테 진짜 다들 너무하는 거 아니야!
열 받아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시, 시현 오빠다! 아이씨. 빨리 숨어요. 숨어!”
억지로 내 고개를 잡고는 유리씨 책상 아래로 집어넣는다.
나도 모르게 몸을 다람쥐처럼 둥글게 말고 그 좁은 공간에 들어간다.
“조용히 해요. 숨도 쉬지 말고. 들키면 끝장이니까.”
서유리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속삭인다.
“어머, 시현오빠! 오셨어요.”
곧 이어 들리는 시현씨의 목소리.
“팀장님이라고 해야죠! 유리씨. 어디서 친한 척 이예요.”
괜히 친한 척 한 번 해보려다가 모질게 까인 성유리가 울상을 짓는다.
고소하다. 이년아!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시현씨에게 달라붙는 서유리.
“오빠아~ 너무 딱딱하게 그러지 말아요.”
분홍색 슬리퍼를 신고 쪼르르 시현씨에게 달려가서는 팔짱을 끼려고 한다.
“아, 진짜. 왜이래요. 징그럽게.”
“에이. 징그럽긴요. 오빠도 나 같은 영계랑 팔짱끼니까 설레고 기분 좋잖아요. 치, 좋으면서 싫은 척 하시긴.”
“아, 진짜. 빨리 자리로 돌아가요. 돌아가라고요.”
계속해서 성추행하듯 엉겨 붙는 서유리와 거부하는 시현씨.
이, 미친년이.
우리 시현씨가 싫다잖아!
시현씨는 나만 특별하게 생각한단 말이야!
감히 내 시현씨에게!
나도 모르게 질투심에 볼이 뜨거워진다.
어?
그런데 이 감정은 뭐지?
원래의 나라면 레즈비언답게 서유리에게 질투를 느껴야 하는데.
지금 내 감정은 혼란스럽다.
자꾸만 시현씨만 내 눈에 들어온다.
두근두근 설레는 이 마음.
태어나서 남자에게 처음 가져보는 감정이다.
나 설마.
정말로 여자가 아닌 남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 한 거야?
그것도.
얼마 전까지 호구로만 생각했던 유시현에게?
진정되지 않게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서유리의 책상 아래 쪼그려서 시현씨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너무 아름다워서 눈이 다 부실정도다.
마치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온 것만 같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