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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63화 (263/271)

〈 263화 〉 262화

* * *

엘레아노르는 마지막 피자조각을 먹고 난 뒤에야 다시 말을 하기 시작했다.

그저 잡담에 불과했지만 아무런 대화도 하지 않는 것보다야 훨씬 나았다.

지금 내가 엘레아노르에게서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아쉽게도 제한적이다.

재창조교단의 목적이 무엇인지, 흔히 그 분이라고 불리는 교주의 정체가 무엇인지, 대체 왜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지 너무나도 궁금해서 지금 상황이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내 사랑들은 내가 지금처럼 가면쟁이들에게 너무 집착하는 것 같다는 말을 종종 했었고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그 이유야 아주 간단하고 명료하다.

놈들에게 정의를 구현하겠다는 마음도 물론 있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바로 호기심 때문이다.

나를 둘러싼 음모가 무엇인지 너무 궁금해서 견디기가 힘들다.

그래서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서 마리아의 뜻에 따라서 노르헤임으로 가고 있는 것이다.

라우라에겐 미안하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물론 호기심 해소가 제일 큰 목적이지만 우리 모두의 안전을 확보하려면 결국 재창조교단을 파괴하거나 굴복시켜야한다.

따지고 보면 놈들은 새로운 세상에서 내 마음대로 살아갈 수 없게 만든 원흉이니 말이다.

나는 급한 마음에 법정에서 쓰이는 사람의 머릿속을 읽을 수 있는 수정구를 엘레아노르에게 사용하면 어떨까 싶었다.

하지만 그런 간단한 방법이 통할 것 같으면 벌써 재창조교단이 무너졌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 곧바로 수정구를 훔치려는 계획을 포기했다.

“레베카, 너 내 말 듣고 있어?”

“그럼. 잘 듣고 있지. 네가 사관학교에서 베로니카 언니랑 술파티를 벌였다가 정학당할 뻔 했었다며.”

“맞아, 맞아. 그땐 정말 아찔했었는데 우리가 가장 중요한 규칙 중 하나를 어기지 않아서 살아남았어.”

“그게 뭔데?”

“방에 남자를 들이지 않았다는 거! 사관학교에서 이성을 기숙사에 들였다가는 바로 퇴학이거든. 어쨌든 그래서 우리는 정학처분 대신에 온갖 봉사활동을 하러 다녔었지.”

“그렇구나. 언니가 사고를 친다는 상상은 잘 안 되네.”

내가 아는 베로니카 언니는 말 그대로 기사다운 사람이라서 정해진 규칙을 어겼다는 말을 들으니 참 생소했다.

물론 베로니카 언니도 목적을 위해서 편법을 동원하기도 했지만 적어도 위법을 저지르거나 도덕적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지는 않았었다.

내가 모르는 베로니카 언니를 알게 되니 꽤나 흥미롭다.

“그게... 내가 주도해서 벌인 일을 베로니카가 말리려다가 휩쓸린 경우가 대부분이야. 하지만 베로니카가 선배 하나와 싸울 때는 내가 말리는 입장이었어.”

“왜 싸웠는데?”

“그 선배는 공작의 장남이라서 교수들도 쩔쩔매는 상대였어. 그래서 자기 멋대로 생활하면서 여자 생도들을 제법 곤란하게 만들었었지. 그러다 베로니카에게 딱 걸려서는 묵사발이 나버렸어.”

“베로니카 언니가 그 선배를 때렸다고?”

“그래. 베로니카는 본인에게 그 선배가 껄떡대는 건 참았지만 선후배나 다른 동기들을 희롱하자 눈이 돌아가 버렸어. 사람을 1년 동안 유급해야할 정도로 박살을 내버리는 바람에퇴학을 당할 뻔 했었지.”

“아까는 정학이고 이번엔 퇴학이야? 베로니카 언니도 참 대단하네.”

“그렇지. 대단한 친구야. 아무튼 베로니카는 자기가 퇴학당할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해서 짐을 챙기고 있었는데 늘 성적이 수석인데다, 생도들이 베로니카를 위한 탄원서를 제출했고, 선배네 가문에서도 수치스러운 일을 덮으려고 해서 무사히 넘어갔어. 대신 이번에도 봉사활동을 해야 했지만 말이야.”

“나도 베로니카 언니랑 같이 사관학교를 다녔으면 재밌었을 텐데 아쉽네.”

“몇 년 만 더 일찍 태어나지 그랬어. 기왕이면 귀족가문의 영애로.”

“그게 내 맘대로 될 것 같으면 벌써 너희 가면쟁이들은 다 지옥으로 떨어졌을 걸.”

“그건 좀 곤란해. 아직 난 하고 싶은 일이 많거든.”

엘레아노르는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곤란스러워했다.

하고 싶은 일이 뭐냐고 물어봤자 말 못해준다고 하겠지만 나쁜 예감이 든다.

흐음... 엘레아노르에게 제동을 걸 방법이 없을까?

아! 그래. 그 방법을 써보자.

“엘레아노르, 이건 내가 진지하게 하는 말인데 베로니카 언니와 다시 만나는 게 어때?”

“싫어.”

“지금까지 베로니카 언니만 신나게 늘어놓고는 싫다고?”

“그야 너랑 나의 공통된 대화소재는 그것 밖에 없으니까 그랬지.”

“베로니카 언니는 더 이상 기사단에 소속되어 있지 않아. 그 이유가 뭔지는 알아?”

내가 묻는 말에 엘레아노르는 아무런 대답도 하질 못했고, 나와 눈도 마주치질 않았다.

역시나 이럴 줄 알았어.

“네가 엘쿠단의 시신을 빼돌리는 바람에 그 책임으로 부단장의 자리에서 물러났고, 기사단에서도 나가게 되었어. 넌 언니의 꿈을 빼앗았어.”

“그건...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애초에 그런 짓을 저지르기 전부터 베로니카 언니에게 갈 피해를 상정했어야지! 너 때문에 언니는 평생의 꿈이었던 기사단장의 자리에 올라가보지도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자리에서 내려오고 말았어. 넌 그 책임을 져야해.”

“내가 책임을 지는 것과 베로니카를 다시 만나는 게 무슨 상관인데?”

“베로니카 언니가 꼭 널 다시 만나고 싶어 하니까. 너한테 직접 사과를 하고 싶어 하니까 그렇지. 넌 아직도 베로니카 언니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고, 언니도 널 그리워하는데 이제 그만 쓸데없는 고집은 버리고 만나러 가자.”

“너 당장 중요한 일을 앞두고 있는데도 프랑카에 갈 여유가 있어.”

“나한테는 하루만에 다녀올 능력이 있으니까 그럴 걱정은 하지 말라고.”

“잠시 생각할 시간을 줘.”

엘레아노르는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탄산음료를 연거푸 들이마셨다.

그녀의 눈빛에서는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고, 뭔가 고통스러워하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거의 10분을 넘게 고민하던 엘레아노르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알았어. 일단은 가볼게. 하지만 그때 가서 내 마음이 바뀐다고 뭐라고 하지는 마.”

“그것만으로도 충분해. 자, 그럼 바로 출발하자.”

“뭐? 지금 당장은 곤란해. 동료들에게 연락을 해야 되고 또...”

“됐어. 그런 사소한 일은 대충 넘어가. 너희 파벌이 너 없으면 안 돌아가지는 않잖아.”

“그건 그런데... 알았어! 내 맘대로 해라!”

“좋은 자세야.”

나는 반쯤 포기해버린 엘레아노르의 손을 잡고서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가면쟁이를 특수상점으로 들이는 건 위험한 선택일지도 모르지만 여전히 베로니카 언니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 엘레아노르 괜찮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그저 감정적인 선택을 뿐, 이성적인 근거 따윈 전혀 없지만 말이다.

나는 코르셰핑을 떠나기 전에 내 사랑들에게 텔레파시를 보내서 오늘은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에서 자고 온다는 소식을 전했다.

다소 갑작스러운 소식에 다들 놀라는 분위기였지만 목적지가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이라서 다들 안심하고 보내주었다.

나는 허락을 받자마자 엘레아노르를 데리고서 전송실로 가서 프랑카로 워프했다.

그리고 나는 마치 고향에 돌아온 것만 같은 기분을 느꼈다.

지금까지 여러 도시를 들르고 여러 장소를 방문했었지만 프랑카처럼 편안한 마음이 드는 곳은 없었다.

“지금 프랑카 전체에 네 얼굴이 팔렸으니까 어떻게든 가려봐.”

“그거 베로니카의 작품이잖아.”

“언니 입장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고.”

“나도 알아. 그냥 그렇다는 거지.”

엘레아노르는 퉁명스럽게 말하면서 스카프로 얼굴을 반쯤 가렸다.

도시 곳곳에 있는 게시판에 붙어있는 얼굴은 조신하기 짝이 없는 귀족영애인 반면에 지금은 중요부위만 가리고 있는 수준의 노출을 자랑하는 복장에다가 피부도 혈색 하나 없이 창백하기 짝이 없으니 그 정도로 충분하겠지.

우리는 특수상점을 나와서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으로 향했다.

지도창으로 언니의 위치를 확인하니 다행히 저택에서 머무르면서 아들인 로베르트와 함께 있었다.

“넌 베로니카 언니의 아들을 본 적 있어?”

“멀리서 한 번 봤어. 베로니카를 닮아서 귀엽더라.”

“지금 베로니카 언니가 그 귀여운 아들이랑 같이 있으니까 미리 알아두도록 해. 괜히 사고치지 말고.”

“아들은 몇 살이래?”

“올해로 6살이야. 작년에 생일파티에 가서 알아.”

“그러면 졸업하자마자 바로 결혼해서 애를 낳은 수준이네. 하긴 예전부터 알론을 엄청 좋아했으니 당연한 결과긴 하지.”

엘레아노르는 겉으로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그녀의 눈동자 너머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분명 상실감이었다.

나는 그 감정에 조금 공감이 되면서도 선을 그으려고 했다.

다른 사람의 화목한 가정에 민폐를 끼칠 수는 없지.

“저번에는 기왕 백수가 되었으니 둘째를 만들 거라고 하더라.”

“그래? 둘째란 말이지.... 아, 몰라! 될 대로 되라지.”

엘레아노르는 괜히 짜증을 내면서 길가의 돌멩이를 걷어찼고, 괜히 지나가던 고양이에게 불똥이 튀었다.

고양이는 펄쩍 뛰더니 부리나케 도망갔고 그 고양이와 함께 놀고 있던 아이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엘레아노르에게로 향했다.

그러자 엘레아노르는 딴청을 피우며 빠른 걸음으로 범행현장에서 벗어났다.

우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에 도착했고, 문지기는 나를 향해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문을 열어주었다.

나 같은 경우엔 사전에 약속이 없어도 무조건 문을 열어주라는 언니 부부의 지침 덕분에 언제든지 저택에 출입할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여러 사람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베로니카 언니가 있는 방으로 향했다.

아니, 그러려고 했지만 집사로부터 미리 소식을 전해들은 언니가 복도로 나와서 나를 환영해주었다.

그런데 방금 전까지 내 옆에 있던 엘레아노르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나 참, 결국 도망쳐버린 거야?

나는 당장 엘레아노르를 찾아가려고 했지만 베로니카 언니가 나를 포옹해주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다.

“레베카! 내 귀여운 동생.”

“반가워, 언니. 나 없는 동안 잘 지냈어?”

“덕분에 잘 지냈지. 그동안 바빠서 못했던 취미생활도 하고, 우리 아들이랑 마음껏 같이 놀고, 남편이랑도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어.”

“다행이네.”

“넌 어땠니?”

베로니카 언니가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왠지 언니 앞에 있으니 마음이 약해지고 무작정 의존하고 싶은 기분이 든다.

“꽤나 바빴어. 신경 쓸 일이 많았거든. 아직 문제가 해결된 건 아니지만 곧 그럴 가능성이 높아서 숨 좀 돌릴 겸 언니를 찾아왔어.”

“그렇구나. 어쩐지 저번에 봤을 때보다 조금 마른 것 같더라. 얼굴도 피곤해보이고.”

“걱정 끼쳐서 미안해.”

“아니야. 오히려 네가 힘들 때 곁에 있어줄 수가 없어서 미안하지. 그런데 너 방금 누군가랑 같이 있지 않았니?”

베로니카 언니는 내 뒤로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언니는 엘레아노르의 얼굴을 제대로 보질 못해서 그녀가 저택에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언니를 자리에 두고 잽싸게 뛰어가서 복도 뒤에 숨어있는 엘레아노르의 목덜미를 잡고서 끌고나왔다.

“이제 와서 도망치는 게 어디 있어? 빨리 이리와!”

“싫어! 나 아직 마음에 준비가 되질 않았다고!”

“그 놈의 마음의 준비를 한 지가 10년은 넘었잖아!”

나는 발버둥을 치면서 애써 저항하는 엘레아노르를 막무가내로 베로니카 언니 앞으로 데려갔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힘이 셌던가?

사람 하나를 제압해서 데려오는데 왜 별로 힘들지가 않지?

그 의문은 나중에 해소하기로 하고 일단은 엘레아노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붙잡아야지.

“레베카, 그 사람은 누군데 그렇게 험하게 다루니? 새로 사귄 친구... 엘레아노르?”

베로니카 언니는 나를 말리려다가 엘레아노르와 눈을 마주치고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굳어버렸다.

그러고는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안녕, 베로니카? 오늘 참 날씨가 좋다. 그렇지?”

“너 정말 엘레아노르야? 내 친구 엘레아노르가 확실해?”

베로니카 언니는 후들거리는 손을 엘레아노르의 어깨에 올리며 목소리를 떨었다.

그러자 엘레아노르는 고개를 끄덕이며 베로니카 언니를 포옹했다.

“맞아. 네 친구 엘레아노르야.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

“이 바보야! 이렇게라도 살아있으면 당장에라도 나한테 돌아왔어야지! 왜 이렇게 늦었어? 대체 왜!”

베로니카 언니는 엘레아노르에게 매달리듯이 안겨서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나는 언니가 이렇게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인지라 마음이 너무 아팠다.

오죽하면 나까지 눈가에 눈물이 다 고였을까.

“내가 이성을 되찾은 건 비교적 최근의 일이야. 그 전까지는 좀비와 다를 게 없었거든. 아무튼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난 죽은 지 오래된 사람이고, 너는 가정을 꾸리고서 행복하게 살고 있어서 그냥 그대로 두는 게 좋다고 생각했어.”

“왜 그걸 네 멋대로 판단해? 나는 항상 네가 보고 싶어서 힘들었단 말이야.”

“널 바로 찾아가지 못해서 미안하고, 네 꿈을 짓밟아서 미안해. 네가 겪은 슬픔과 고통은 다 내가 가면쟁이인 탓이야.”

“오늘은 그런 복잡한 말은 하지 마. 우리가 재회한 것만 생각하자. 응?”

“알았어. 하여간 어리광부리는 건 예전이랑 똑같구나. 엄마가 되어서 그런 성격은 버렸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엘레아노르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베로니카 언니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그러고는 과감하게 언니의 볼에 뽀뽀를 해주었다.

베로니카 언니는 엘레아노르의 우정을 빙자한 애정표현에 눈물을 뚝 그치고 웃어보였다.

“나도 그런 줄 알았는데 널 다시 만나니까 예전 모습이 그대로 나와 버리네. 동생이 보고 있는데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그런 행동을 보여 버렸어.”

“언니, 난 언니의 그런 모습도 좋아하니까 괜찮아.”

“역시 내 동생은 착하다니깐.”

베로니카 언니는 내 볼을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덕분에 방금 전까지 내 가슴 속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던 질투심이 가라앉았다.

“갑작스럽지만 환영회를 열어야겠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과 같이 술도 마시고. 후훗. 너희들 자고 가도 괜찮지?”

“물론이지. 난 애인들한테 허락받고 왔어. 엘레아노르는... 뭐, 문제없을 거야.”

“다행이다. 그럼 난 가서 준비를 할 테니까 네가 늘 쓰던 방에서 기다려줘.”

“알았어. 가자, 엘레아노르.”

나는 한결 마음이 편해 보이는 엘레아노르를 데리고서 익숙한 방으로 향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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