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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47화 (247/271)

〈 247화 〉 246화

* * *

나는 정찰드론들이 명령을 수행하는 동안 다시 사건현장으로 돌아왔다.

영주의 저택은 아직도 불타고 있었지만 큰 불은 잡혀가는 분위기였다.

난 엘리자베스가 머물렀던 별채에서 일했던 사람들을 찾아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거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화재로 죽었다는 말뿐이었다.

처음에는 패닉에 빠진 사람들의 과장된 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별채에서 죽은 사람들의 시신을 따로 수습해놓은 현장에서 엄연한 사실임을 알게 되었다.

이래서야 납치가 일어났던 당시의 증언을 들을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붙잡고서 별채나 납치에 대해서 아는 게 없는지 물어보았지만 다들 힘없이 모른다고 말하거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정찰자산들은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하고 있고, 나도 쓸 만한 정보를 알아내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 답답하다.

“하아, 미치겠네. 으윽!”

나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다가 갑자기 욱신거리는 머리를 잡고서 비틀거렸다.

그러자 주변에서 나와 같은 질문을 던지고 있던 내 사랑들이 순식간에 다가와 나를 부축해주었다.

“레베카님, 일단 쉬세요.”

“안 돼. 조금이라도 빨리 엘리자베스를...”

“이러다 레베카께서 쓰러지시면 황녀님을 찾는 일이 더 늦어져요. 그러니 지금은 휴식을 취하시면서 머리를 식힐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키아라는 내게 단호한 눈빛을 보내며 말했다.

나는 처음에는 반발심이 들었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날 걱정해서 하는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엉망이 된 잔디밭 위에 얌전히 앉아서 물을 마셨다.

엘리자베스가 납치된 것만으로도 스트레스가 어마어마했고 그 와중에 그녀의 흔적까지 놓쳐버려서 미칠 노릇이었다.

이 세상에 온 뒤로 단기간에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본 적이 없는 것 같다.

내 사랑들이 없었더라면 머리끝까지 화가 나서 무슨 짓을 했을지 모르겠다.

“그런데 누가 오크까지 동원해서 황녀님을 납치한 걸까요?”

“재창조교단이 분명해. 기술개발을 위해서 엘리자베스를 납치했을 거야.”

나는 당연히 가면쟁이 새끼들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들이니 사람 하나 납치하겠다고 엄청난 부수적 피해를 입히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또한 놈들이 코르셰핑 북부에서 큰 세력을 가지고 있는 오크와 손을 잡는 건 이상할 것도 없다.

“반대로 오크가 자기들 목적을 위해 가면을 쓴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황녀님을 납치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럴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은 아주 낮을 거야. 마인족은 그렇게까지 고도의 작전을 펼칠 지능이... 아니지. 쥐도 새도 모르게 엘리자베스를 별채에서 납치한 것을 보면 절대로 무시하면 안 돼. 키아라, 네 말대로 오크가 주도했을 가능성도 염두에 두는 게 좋겠다.”

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기로 했다.

지금은 최대한 넓은 시야를 가지고 편견 없이 사태를 파악하고 증거를 수집해야 하니까.

내가 잠시 키아라와 대화를 하는 사이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내게 다가왔다.

그들에게서는 적대감이 느껴지지 않았지만 표정에 긴박함이 묻어나왔다.

맨 앞에서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중년의 호랑이족 여성은 다짜고짜 내게 말을 걸었다.

“이보게, 자네는 이번 사태에 대해서 아는 게 있는가?”

“누구시죠?”

“나는 멜리나 타이델 자작일세. 제0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지.”

“전 명예기사 레베카입니다.”

“아, 자네가 그 유명한 명예기사로군. 황녀님의 친구이기도 하고.”

“네, 맞습니다. 엘리자베스... 황녀님께서는 저를 소중히 여기고 계시지요. 그런데 단장님께서 계시는데도 황녀님께서 납치를 당하시다니 좀처럼 이해가 가질 않는군요.”

나는 꽤나 차가운 말투로 말했다.

지금은 멜리나와 반갑게 인사나 주고받을 여유도, 그럴 생각도 없었다.

엘리자베스의 직속 기사단이라는 주제에 대체 뭘 한 거야?

나는 멜리나의 면전에서 쌍욕이 나올 것 같아서 최대한 감정을 죽이려고 노력했다.

“수치스럽게도 우리 기사단에서 배신자들이 나왔다네. 현재 우리 기사단의 주력은 카르디아에 주둔하고 있기 때문에 소수의 병력만 황녀님의 호위를 담당했었지. 그런데 하필이면 그 자들을 주축으로 배신자들이...”

“그건 하필이면이라며 넘어갈 일이 아니라 그런 식으로 음모가 꾸며지고 있는 걸 사전에 파악하지 못한 기사단의 잘못 아닙니까? 단장님은 이번 일에 전적으로 책임을 지셔야할 겁니다.”

나는 멜리나에게 손가락질까지 해가면서 그녀를 비난했다.

그러자 내 사랑들은 너무 놀란 나머지 헉하는 소리를 내면서 입을 가렸고, 멜리나를 호위하는 기사들은 분노를 드러냈다.

점잖은 사람은 무례하다며 언성을 높였고 성격이 좀 있는 사람은 정신이 나갔냐면서 무력을 행사하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들이 전혀 무섭지 않았고 오히려 짜증만 났다.

이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지 못하고 제대로 수습도 하지 못하고 있는 주제에 자존심만 내세우고 있으니 말이다.

“다들 진정해라. 명예기사는 참으로 옳은 말을 했다. 우린 부끄러운 줄을 알아야 해.”

멜리나가 침착하게 하는 말에 기사들은 모두 애써 흥분을 가라앉히며 그녀에게 복종했다.

역적이 튀어나온 기사단치고는 아주 통솔이 잘 되는 것 같다.

“자네가 지적한 것처럼 우리는 용서받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질렀다네. 하지만 그렇다고 손을 놓고 있을 수는 없어. 내가 자네에게 말을 건 이유는 우리가 모르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라네. 황녀님을 구해드릴 수 있도록 부디 협조를 해주게.”

멜리나는 고개까지 숙여가면서 내게 간곡히 부탁을 했다.

나는 처음엔 당장 꺼지라고 말하려다가 내 사랑들이 텔레파시로 제발 이성적으로 생각하라는 말을 쏟아내자 감정을 죽이기로 했다.

지금 제0기사단의 협조요청을 발로 차버리면 엘리자베스를 구할 확률이 더 낮아질지도 모른다.

또한 아직 배신자들이 남아있을 지 모르니 기회가 닿는다면 그것들을 색출해서 정보를 캐낼 수도 있겠지.

“알겠습니다. 저도 소중한 친구를 구하고 싶으니 협조해드리지요. 그리고 방금 전에는 무례한 태도를 보여 정말 죄송합니다. 친구가 납치당해서 정신이 나간 모양입니다.”

“충분히 이해하고 있으니 괜찮네.”

멜리나는 다행히도 내 감정 섞인 비난을 기분 나쁘게 받아들이지 않은 것 같다.

작위를 가진 귀족에게 대놓고 삿대질을 했는데도 별 문제 없이 넘어가서 다행이다.

“자세한 이야기는 장소를 옮겨서 하도록 하세나.”

“네, 단장님.”

나는 내 사랑들과 함께 멜리나를 따라서 저택부지에서 빠져나와 인근의 널찍한 공터로 향했다.

그곳에는 이 세상에서 볼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커다란 비행선이 한 대 정박해있었다.

비행선은 나무로 만들어진 기다란 원통처럼 생겼고, 곳곳에 동그랗고 작은 창문이 달려있었다.

또한 선체에는 다양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돛들이 달려있었고, 선미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서 추진기관 4기가 장착되어 있었다.

분석스킬을 비행선에 써보니 구체적인 제원이 나타났다.

비행선은 선체의 길이가 70미터에 달하고 높이는 15미터, 최대속도는 50km가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선원과 전투원을 포함하여 최대 200명의 인원이 탑승할 수 있고, 각종 화물을 50톤까지 싣고 이륙할 수 있다.

“제0기사단은 비행선을 타고 다닙니까?”

“그렇다네. 비행선에 대해서는 황녀님께서 말씀해 주셨는가?”

“어... 네, 저번에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비행선이 뭔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세상에서 그걸 발명한 사람이 말해주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비행선에 대해서 알고 있으면 뭔가 의심을 받을 것 같아서다.

“이 ‘클라우디아’로 말할 것 같으면 황녀님께서 시제품으로 만드신 것을 우리 기사단이 시험적으로 운용하는 중이라네. 덕분에 제국 곳곳을 말이나 배를 타는 것보다 훨씬 빨리 이동할 수 있다네.”

“엘리... 황녀님의 위치만 파악하면 바로 구출해드리러 갈 수 있겠군요.”

“그런 셈이지. 일단 비행선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세나.”

우리는 멜리나를 따라서 비행선을 탑승했고, 그녀가 사용하고 있다는 선장실로 향했다.

비행선의 내부는 잠수함이 연상될 정도로 좁고 복잡했다.

듣자하니 엘리자베스가 일단 하늘에 날려보자는 생각으로 만든 거라서 승선한 사람의 편의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런데 비행선을 만들 수 있을 정도라면 기차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나중에 엘리자베스를 구출하고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 한 번 건의를 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

“여기가 바로 선장실이라네. 들어오게나.”

멜리나는 선장실을 문을 열어주었다.

문이 작아서 우리는 다들 고개나 허리를 숙여야할 정도였지만 키가 작은 에리카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에리카는 그게 뭔가 억울하게 느껴졌는지 구석에서 약간 삐친 듯한 표정을 지으며 볼을 부풀렸다.

나는 그런 에리카가 너무 귀여워서 멜리나가 보든 말든 그녀의 머리를 정성스럽게 쓰다듬어주고 이마에 뽀뽀를 해주었다.

“흠흠. 자네 일행이 내 딸처럼 귀여운 건 잘 알겠으니 일단 여기에 앉게나.”

“죄송합니다. 저도 모르게 그만...”

나는 머쓱해하면서 멜리나의 맞은편에 앉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귀여운 모습만 보면 정신을 차릴 수가 없단 말이지.

“자네가 이번 사건이 오크와 관련되었다는 말을 했다지?”

“네, 별채 주변에서 오크의 발자국을 발견했고, 놈들이 황녀님을 납치한 정황도 확인했습니다. 그리고 저택 배후에 있는 숲에서 저택을 방화한 사람들과 합류한 흔적도 찾아냈습니다. 즉, 이번 사건은 오크와 제0기사단의 배신자들이 함께 저지른 짓입니다.”

“우리 측에서 별채 주변을 조사했을 때는 제대로 남은 발자국이 없었는데 자네는 그걸 어떻게 알아냈는가?”

멜리나는 본인의 예상 이상으로 내가 구체적으로 말하자 약간의 당혹감을 드러냈다.

단순한 목격자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알고보니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이라면 놀랄 법도 하지.

“저에게는 미세한 흔적도 찾아내서 추적하는 기술이 있습니다. 그 기술을 통해서 납치범들이 배를 타고 수로를 빠져나가 강을 건넌 뒤에 거기서 익룡과 와이번을 타고 어디론가 날아갔다는 사실까지 알아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황녀님께서 계신 방향도...”

“유감스럽게도 비행을 하는 목표를 추적할 방법은 제게 없습니다.”

나는 딱 잘라서 말하며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않았다.

너무 큰 기대감을 주면 내가 짊어질 부담감이 커지기 때문에 굳이 잘난 척을 하면서 하지도 못할 일까지 할 수 있다고 으스댈 필요가 없다.

“그렇군. 이번 사건에 오크가 연루되었다는 사실을 알아낸 것만으로도 큰 성과인데 구체적인 납치루트까지 알아내다니 자네는 정말 대단한 사람일세.”

“과찬이십니다.”

“혹시 다른 정보는 얻어낸 것이 없는가?”

“제가 가진 정보자산을 총동원한 상태이지만 아직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디 작은 단서라도 하나 얻을 수 있기를 기도하겠네. 그리고 납치를 주도한 오크들은 아마도 코르셰핑 북부지역을 지배하고 있는 ‘콜탄구트라’라는 카간이 이끄는 부족연맹 소속일 가능성이 높아 보이네만 그에 대해서 아는 건 있는가?”

“이름을 들어본 것이 전부입니다.”

“그렇군. 콜탄구트라가 이끄는 부족연맹은 일반적인 오크부족들과는 차원이 다르다네. 수도에서는 그들을 여전히 야만적인 존재라고들 인식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강력한 군사국가로 자리매김하고 있다네. 그들이 병력을 어느 정도만 동원해도 코르셰핑 시는 간단히 함락당할 정도로 막강한 군사력도 갖추고 있을 정도라네.”

“마인족 주제에 그 정도로 강합니까?”

“놀랍게도 그들은 화약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네. 단순히 쏠 줄 아는 수준을 넘어서서 자신들의 힘으로 개발과 생산이 가능할 정도일세. 제아무리 중량 마법갑옷이 튼튼해도 놈들의 포탄을 막아낼 수는 없지.”

“일개 기사단이 아니라 제국군이 동원된다면 무너뜨릴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그게 말처럼 쉽지 않다네. 항상 수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는 물량, 어렵지 않게 기사단을 전멸시킬 수 있는 화력, 엄청난 수의 기병대가 가진 기동성은 상부가 무관심으로 일관하고 있는 제국군 북부사령부가 상대하긴 벅찬 적일세. 북부사령부에서 자체적으로 토벌전에 나선 적이 몇 번 있긴 하지만 모두 콜탄구트라가 직접 지휘하는 오크군에게 패퇴하고 말았다네.”

멜리나는 그 어떠한 과장도 섞지 않고 콜탄구트라와 놈이 이끄는 부족연맹에 대해서 말해주었다.

만약 콜탄구트라가 납치를 주도한 놈이라면 엘리자베스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가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킬 정도의 능력이 필요할지도 모르겠다.

한시라도 빨리 촉수군대의 규모를 키울 필요성이 절실하게 느껴졌다.

“설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닐세. 오히려 자네의 수색에 방해가 될 정도로 쓸데없는 정보를 많이 쏟아낸 것은 아닐지 걱정이라네.”

“아닙니다. 인류의 적에 대해서 자세히 알고 있을 필요가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데 단장님께서는 가면쟁이들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자들이 제국 곳곳에서 크고 작은 분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전부라네.”

“저는 놈들과 접촉한 적이 많습니다. 따라서 경험상 이번에도 그자들이 관련되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얼마 전에 황녀님의 연구소에서 일하던 자들 중에서 자네가 가면쟁이라고 부르는 조직에 속한 자들을 색출해낸 적이 있으니 충분히 가능성 있는 이야기라고 본다네. 현재 우리 기사단이 자체적으로 배신자들을 색출하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조만간 단서를 잡아낼 수 있을 지도 모르겠어.”

“만약 제가 배신자들에 대한 정보를 알아낸다면 즉시 보고해드리겠습니다.”

“자네처럼 유능한 인재가 이번 사건을 해결하는데 힘을 보태준다면 분명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을 것이라 믿네. 그리고 아까 나를 대놓고 비난해준 덕분에 제대로 정신을 차릴 수 있었어. 정말 고맙네.”

“아, 아닙니다. 그건 저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는지라...”

“필요하다면 선을 넘을 수 있는 용기가 가상하다고 생각하네. 그 일로 자네에게 불이익이 갈 일은 절대로 없으니 안심하게나. 그리고 만약 또 내가 허튼 짓을 한다면 그때도 지적을 부탁하겠네.”

멜리나는 내게 악수를 청하면서 말했고,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나와 좀 더 대화를 나누고 싶은 눈치였으나 지금은 한가롭게 사적인 수다를 떨고 있을 때가 아니라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건 비행선 출입증이라네. 이걸 보여주면 언제든지 탑승할 수 있으니 잃어버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하게나.”

나는 멜리나가 주는 출입증을 바로 가방에 넣고 내 사랑들과 함께 비행선에서 내렸다.

제0기사단이 내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아군은 하나라도 더 많은 게 좋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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