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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든 세상에서 마음껏 살아간다-231화 (231/271)

〈 231화 〉 230화

* * *

나는 다음날 오전에 루카스를 찾아갔다.

루카스는 항상 바쁜 사람이지만 내가 만나고 싶다는 연락을 보내자 기존의 약속을 뒤로 미루면서까지 만날 시간을 잡아주었다.

덕분에 나는 볼르디아에서 며칠씩 시간낭비를 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루카스의 집무실이 있는 건물까지 그가 제공한 마차를 타고 왔다.

그리고 그의 비서가 나를 응접실로 안내해주었다.

응접실은 화려하다 못해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루카스는 충분히 능력이 있어서 이렇게 사치를 부리는 것이지만 이건 좀 과한 것 같다.

나는 소파에 앉아서 멍하니 창밖을 내다보며 루카스를 기다렸다.

카르멘이 잘 지내고 있는지 궁금했다.

물론 도로테아와 마르코가 정성껏 돌봐주고 있겠지만 자꾸만 마음에 걸린다.

입양을 보내면 홀가분해질 줄 알았는데 왜 이렇게 심란한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다행히 조금 우울한 기분이 들기 전에 루카스가 응접실로 들어왔다.

그의 뒤로는 하녀들이 뚜껑이 덮인 쟁반을 들고 줄지어 서있었다.

“레베카, 오랜만이다.”

“안녕? 루카스. 잘 지냈어?”

“제법 바쁘긴 하지만 만족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지.”

루카스는 나와 악수를 한 뒤에 내 맞은편에 앉았고, 우리 사이에 놓인 탁자 위로 커피잔과 달콤한 간식이 담긴 접시가 올려졌다.

그리고 하녀들 중에서 가장 예쁜 사람이 따끈따끈한 커피를 따라주었다.

내가 그 하녀와 눈을 마주치자, 그녀는 내게 예쁘장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뭐야? 이 친구가 마음에 드는 거야? 애인이 3명이나 있는 사람이 아직도 욕심을 부리면 어떡해?”

“그런 거 아니야. 예쁜 사람에게 눈길이 가는 건 본능이라서 어쩔 수 없다고.”

“하하하! 농담이야, 농담. 자, 나한테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었지?”

“그래.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니지만.”

“나한테 그렇게 시간이 많지 않으니까 얼른 말해봐.”

루카스는 바쁜 척을 하면서도 여유로운 태도로 커피를 마셨다.

전직 영주 아니랄까봐 커피를 마시는데도 우아한 기품이 느껴졌다.

“며칠 전에 몸이 마비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소환스킬이 써지지 않더라고 혹시 그 이유가 뭔지 알아?”

“음... 너 정말 위험한 짓을 하고 다니나보네. 몸 좀 사려.”

루카스는 마치 사고뭉치 자식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아니, 그건 내가 원해서 일어난 일들이 아니라니까!

나도 좀 평화롭게 살고 싶다고.

“알았어. 그러니까 아는 거 있으면 얼른 말해줘.”

“이 세상에서 스킬이라고 불리는 것들은 모두 리디머가 제공하는 기술로 구현된다는 거 저번에 말했었지?”

“응. 기억하고 있어.”

“소환스킬 같은 경우에는 사용자의 확고한 의지가 필요한 스킬이야. 그래서 몸이 마비될 정도로 강한 충격을 받거나 약물 같은 것에 노출되면 아무래도 정신력이 떨어져서 소환스킬을 제대로 쓸 수 없게 되는 거야.”

“혹시 경험담이야?”

“몇 번 정도 당해봤거든.”

“너도 참 살면서 고생이 많았네.”

“그러게 말이다. 다른 질문은 없어?”

루카스는 대화의 화제를 바꾸려고 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경험담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해주고 싶지는 않은 모양이다.

“저번에 내가 처리한 커다란 슬라임에 대해서는 알아낸 게 있어?”

“지진으로 인해서 고대의 유적이 드러났고, 모험가들이 멋대로 그곳을 조사하다가 우연히 침입한 슬라임에게 전멸 당했다는 결론을 내렸어. 그리고 거기에 있던 언데드들은 당시에 살해당한 모험가들의 시체가 자연적으로 변했을 확률이 높아.”

“결국 누군가 개입해서 벌어진 일은 아니라는 거구나.”

“맞아. 온갖 우연이 연속으로 겹쳐서 일어난 사건인 셈이지.”

“가면쟁이 놈들이 개입한 일이 아니라서 다행이네. 웬만하면 놈들과 엮이고 싶지 않단 말이야. 최근에도 그 놈들 때문에 고생을 좀 했었고.”

“그쪽에서 널 원하고 있으니 계속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지.”

“그냥 지금 당장에라도 전부 다 죽어버리면 좋겠어.”

“나랑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네.”

루카스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하긴 놈들 때문에 아내를 잃은 입장에선 저럴 만도 하지.

그런데도 복수보다 아내의 꿈을 이루는 일에 집중하다니 참 대단해.

마리였다면 하루하루 복수의 칼날만 갈았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레베카, 너 혹시 디베르 가문이 전멸한 사건에 연루되었어?”

루카스는 심히 걱정스러워하는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리가 저지른 짓이 벌써 여기까지 소문이 쫙 퍼졌나보네.

뭐, 루카스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바로 옆 영지에서 벌어진 일 정도는 금방 파악할 수 있겠지.

“네 ‘친구’가 직접 내린 지정의뢰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벌어진 사태야. 나하고 직접적인 연관은 없어. 그런데 그건 왜 물어봐?”

“왠지 모르게 네 눈빛이 우울해보여서 말이야.”

“내가 목숨을 구해준 사람이 복수에 미쳐서 저지른 짓들을 생각하면 영 마음이 편치 않아. 복수대상을 죽이는 건 상관없지만 그 여자는 선을 넘었어. 그래서 결국 자살하도록 방치했었지만 난 아직도 그 여자에 대한 미련 같은 게 남아있단 말이지.”

“네가 그걸 알고 구해준 것도 아니니 죄책감 같은 건 가질 필요 없어. 그렇다고 네 성격에 다시는 남들을 돕지 않기로 결심하지도 못할 테고. 선행과 그로 인한 결과는 별개로 생각하는 게 네 정신건강에 이로울 거야.”

“그것도 경험에서 우러난 조언이야?”

“아니. 아내가 말해줬던 거야. 아내는 나와 달리 선행을 베푸는 걸 좋아했고, 그 결과 나쁜 일이 발생하더라도 그만두지 않았어. 그저 자기가 할 일을 묵묵히 수행할 뿐이었지.”

“대단한 사람이네. 난 며칠이 지나도록 마음속이 답답해 죽겠는데 말이야.”

“나한테는 과분할 정도로 선한 사람이었으니까. 아무튼 넌 주변에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그 사람들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 날의 일은 잊도록 해.”

“노력해볼게.”

나는 루카스의 조언에 따라볼 생각이었지만 과연 그게 쉬운 일일지는 모르겠다.

키아라를 볼 때마다 자동으로 마리가 생각날 것 같단 말이야.

안 그래도 키아라도 나처럼 마리 때문에 기분이 좋지 않기도 하고.

후우, 내가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언제까지고 개인적인 감정에 휘둘리면서 지낼 수는 없어.

“다른 질문은 없어?”

“내 가방이랑 똑같은 것을 가진 사람이 있을까?”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아직까지는 그런 사람을 본 적은 없어서 확답은 못해주겠어. 그런데 그건 왜?”

“누군지는 몰라도 프랑카 기사단 본부에 있는 창고에 있던 물건들을 순식간에 다 털어갔는데, 그 중에는 내가 주문했던 의족이랑 의수들도 있었어.”

“자선사업이라도 할 생각이었어?”

“나랑 인연이 있는 마을에 많이 필요하거든. 그래서 미리 주문제작을 했었는데 그걸 홀랑 다 털어갔지 뭐야.”

“음... 의족과 의수는 내가 구해줄 테니까 필요한 수량을 적어서 내 비서에게 주도록 해.”

“정말? 고마워.”

“친구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지. 그리고 이건 그냥 내가 소문으로 들은 건데, 작년 초부터 자칭 괴도라는 사람이 제국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활동한다더라. 어쩌면 그 사람이 범인일지도 몰라.”

“보통 괴도라면 사전에 경고장 같은 거 보내지 않아?”

“그렇긴 하지만 필요하다면 말없이 털어가도 이상할 것 없지.”

“만약에 그 자식이 범인이면 끝장을 내버릴 거야.”

“죽이려고?”

“그럴 수도 있고, 그것보다 더한 꼴로 만들어줄 수도 있지. 다른 것도 아니고 힘든 사람들에게 필요한 물건을 털어간 건 용서할 수 없어.”

“만약에 내가 그 괴도에 대한 정보를 더 알아낸다면 너한테 가르쳐줄게. 이런,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미안하지만 다음 스케줄 때문에 먼저 가봐야겠어.”

“바쁜 와중에 나랑 대화를 해줘서 고마워.”

“앞으로도 도움이 필요한 일이 생기면 언제든지 날 만나러와.”

“그래. 다음에 또 보자.”

나는 먼저 나가는 루카스를 배웅한 뒤에 그의 비서에게 의족과 의수의 수량이 적힌 쪽지를 건네준 뒤에 건물 밖으로 나왔다.

루카스와 이야기를 하고 나니 뭔가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고, 덕분에 당면한 문제 하나를 해결할 수 있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분명 지금도 아쿨타리 부족 사람들은 힘들게 살고 있을 텐데, 얼른 그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도움을 주고 싶다.

루카스의 능력이라면 금방 필요한 수량을 맞춰줄 수 있을 테니 마음 놓고 다음 목적지인 코르셰핑으로 갈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다른 곳으로 새지 않고 곧장 특수상점으로 향했다.

내 사랑들과 키아라는 마침 보호구역이 아니라 특수상점 안에서 날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그녀들과 함께 곧장 사테르디아로 워프했다.

사테르디아는 이제 도시 전체가 장례식분위기였다.

곳곳에 검은 깃발이 내걸렸고, 상복을 입은 사람들이 길거리에 많이 보였다.

광장에는 추모공간이 마련되었고, 사람들은 그곳에 하얀 꽃을 헌화하면서 디베르 가문 사람들의 넋을 기렸다.

나는 사테르디아에서 벌어지는 일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다.

디베르 가문이 마리의 가족에게 저질렀던 일을 생각하면 그들이 이런 식으로 추모를 받을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모르고 함께 살해당한 어린 아이들을 생각하면 어느 정도는 용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 치트가방 안에 보관 중인 실험체로 희생된 아이들의 장례를 치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제는 지금 바로 사제들에게 장례를 위탁하면 시신의 상태 때문에 큰 혼란이 빚어질 게 분명하니 새턴에게 가서 도움을 청해야겠다.

방침을 정한 나는 일행을 데리고서 곧장 대신전으로 향했다.

대신전은 죽은 영주와 부인의 시신이 안치되어 있어서 밀려드는 추모객들 때문에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복잡했다.

그런데 완전히 융합되어 뒤섞인 사람들의 시신을 어떻게 분리한 걸까?

알고 보면 저 관 안에는 아무 것도 들어있지 않을 수도 있겠다.

나는 지나가는 사제를 붙잡고 새턴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고 말했다.

그러자 사제는 바쁜 와중에도 흔쾌히 나를 새턴에게 안내해주었다.

새턴은 저번처럼 별채에 있지 않고 대신전의 지하에 있었다.

나는 내 사랑들과 키아라를 복도에 대기시키고 새턴이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갔다.

하얀색 하키 가면 같은 것을 쓴 새턴은 짙은 색의 앞치마를 둘렀고, 장화를 신었다.

게다가 두꺼운 장갑을 낀 양 손으로 흉흉하기 짝이 없는 전기톱을 들고서 뭔가를 열심히 자르고 있었다.

그녀가 자르고 있는 것은 하나로 융합된 디베르 가문 사람들이었다.

“안녕, 새턴.”

“어머! 안녕하세요, 레베카님. 일에 집중하느라 오신 줄도 몰랐어요.”

새턴은 피 묻은 가면을 벗으며 나를 반겨주었다.

온 몸에 피칠갑을 하고서 환하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고 있으니 좀 섬뜩하기도 했다.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융합된 사람들을 분리하고 있어요. 이대로는 너무 커서 화장을 할 수 없거든요.”

“이런 일은 보통 아랫사람들을 시키지 않아? 추기경에겐 전혀 안 어울리는 일이잖아.”

“이걸 보고서 멀쩡히 버티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직접 할 수밖에요. 그래도 이게 마지막으로 해체하는 융합체의 시체에요.”

“고생이 많네. 내가 도와줄 건 없니?”

“이런 하찮은 일로 레베카님의 손을 더럽힐 수는 없어요. 신경 쓰지 마시고 저한테 전부 맡겨주세요.”

“알았어. 어디 보자... 이걸로 씻으면 피비린내가 싹 지워져. 나중에 쓰도록 해.”

나는 치트가방에서 바디샴푸를 하나 꺼내서 깨끗한 탁상 위에 올려두었다.

지금까지 특수상점에서 구매했던 것들 중에서 가장 비싸고 좋은 물건이다.

내게서 선물을 받은 새턴은 뛸 듯이 기뻐했다.

“감사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레베카님께서 제게 선물을 주셔서 정말 감동적이에요!”

“고작 이런 걸로 뭘...”

“아니에요! 레베카님께서 주시는 물건에 고작이라는 말은 전혀 어울리지 않아요. 대체 무엇으로 보답을 해드려야 할지 모르겠어요.”

“원래 너한테 이 아이들의 장례를 부탁하기 위해서 왔어. 가능할까?”

나는 치트가방에서 실험체 아이들의 시신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서 새턴에게 내부를 보여주었다.

새턴은 끔찍한 몰골을 보고도 어떠한 감정의 변화도 보이질 않았다.

하긴 저 크고 흉측한 융합체를 혼자서 해체하고 있을 정도로 담력이 강하니 이 정도는 아무렇지도 않겠지.

“하수구에서 발견했다는 그 호문쿨루스 실험체들이군요. 설마 이것들을 전부 수습해서 보관하고 계셨을 줄은 몰랐어요.”

“그냥 거기다 버리고 올 수는 없었어. 나름 쓸 곳도 있었지만 그럴 틈도 없이 마리에게 당해버렸고. 어쨌든 사테르디아를 떠나기 전에 장례를 치러주고 싶었어.”

“저한테 맡겨주세요. 당장은 디베르 가문의 장례식 때문에 힘들겠지만 제가 책임지고 일을 마무리해드릴게요.”

“바쁜 와중에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아, 아니에요. 저희 자매는 누구든 언제든지 레베카님을 위해서 헌신적으로 봉사할 수 있는 사람들인 걸요.”

“어떤 부탁이든 들어주는 거야?”

“그 분의 방침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라면 뭐든지 가능하답니다.”

새턴이 적극적인 태도로 하는 말에 나는 온갖 음흉한 생각을 품었다가 황급히 철회했다.

아무리 그래도 세레나와 같은 얼굴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런 짓을 할 수는 없다.

그랬다간 분명히 세레나가 나를 혼내기 위해서 무시무시한 화신을 보낼지도 모른다.

“만약 성관계를 요구하셔도 저희 자매는 성심성의껏 최선을 다해서 모든 플레이를...”

“아, 아니야! 그건 안 돼! 흠흠. 아무튼 너희랑 그런 짓은 못하겠어.”

“후훗, 농담이에요. 정말로 그런 짓을 했다가는 저희 자매 누구도 무사치 못할 테니까요. 그러니 안심해주세요.”

“다행이다. 방금 네 눈빛이 너무 진심으로 보여서 무서웠다고.”

“저희 자매가 연기를 좀 잘하는 편이거든요. 그런데 정말 다른 부탁은 없으신가요?”

“음... 딱히 없어. 바쁜데 너무 오래 붙잡고 있어서 미안해.”

“아니에요. 레베카님 성분을 완전히 충전해서 기운이 넘치는 걸요.”

“그래, 그래. 그럼 다음에 또 보자.”

“안전한 여행길이 되도록 언제나 기도하겠습니다.”

나는 다시 전기톱에 시동을 거는 새턴을 뒤로 하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내 사랑들과 키아라를 데리고서 지상으로 올라왔다.

이제 해야 할 일을 마무리 지었으니 마음 편히 사테르디아를 떠날 수 있을 것 같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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