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화 〉 77화
* * *
내가 호텔로 돌아왔을 때, 나를 가장 먼저 맞이해준 사람은 라우라와 이리스가 아니라 엘레나였다.
문을 열자마자 쪼르르 달려오는 것이 마치 퇴근한 주인님을 맞이하는 강아지 같은 느낌이 든다.
라우라와 이리스는 엘레나에게 나를 마중하는 일을 맡기고 뒤에서 사랑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반겼다.
“어서와! 이거 어때? 잘 어울려?”
엘레나는 여우 귀처럼 생긴 장식물이 달려있는 머리띠를 쓰고서 나에게 과시했다.
장식물은 진짜 여우족의 귀처럼 보일 정도로 잘 만들어져서 원래의 귀만 머리카락으로 가리면 그녀를 모르는 사람들 정도는 그럭저럭 속여 넘길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잘 어울려요.”
“히히히. 이리스가 사줬어. 어차피 신원을 숨길 필요가 있으니까 앞으로는 여우족 행세를 하고 다닐 거야. 아우우!”
“엘레나님, 수인족은 동물처럼 울지 않아요.”
“나도 알아. 그냥 따라 해본 것뿐이야.”
엘레나는 내 지적에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는 말을 연발했고 엘레나는 얼굴이 새빨개지면서 화를 풀었다.
아,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동생이 생긴 것 같아서 너무 좋다.
“이제 그만 만져.”
“아, 뭔가 기분이 좋아서 계속 만지고 말았네요.”
“나도 싫지는 않지만... 그런데 알리시아 언니는 뭐라고 하셨어?”
“막시안의 비밀연구소를 찾지 못해서 곤란한 상황이라고 하세요. 그래서 저에게 협조를 요청하셨어요.”
“내가 위치만 제대로 알았어도 좋았을 텐데.”
엘레나는 막시안의 사악한 계획은 알고 있었지만 아쉽게도 그의 비밀연구소가 어디인지는 몰랐다.
그녀의 말에 따르면 막시안은 언제나 그녀의 눈과 귀를 막고서 자신의 비밀연구소로 데려가 강제로 구경을 시켜줬다고 한다.
엘레나는 그곳에서 정말 끔찍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고 하는데, 묘사를 들어보면 인간과 마족의 혼종의 실패작들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막시안은 언제나 자신의 비밀연구소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자랑스럽게 떠벌렸고, 엘레나는 그게 너무 고통스러웠다고 한다.
나는 미친 오빠 때문에 수많은 학대를 겪은 엘레나가 안쓰러웠고 그런데도 밝은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 엘레나가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엘레나님 탓이 아니에요. 막시안의 계획을 밖으로 알린 것만으로도 충분히 할 일을 했다고 생각해요.”
“넌 항상 내 편을 들어주는 구나?”
“그야 엘레나님을 보호하고 막시안을 막기 위해서 노력하겠다고 약속했으니까요.”
내가 하는 말에 엘레나는 기쁜 듯 환한 표정을 지으면서 내심 수줍은 미소를 보였다.
그녀가 말로 표현하지는 않아도 내게 고마워한다는 것을 잘 알 수 있었다.
나는 어제 라우라와 이리스를 데리고서 이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논의했었다.
라우라는 보통 위험한 일이 아니니 엘레나를 보호하는 일에만 신경 쓰자고 했었고 이리스는 어떻게든 막시안의 음모를 저지해야한다고 주장했었다.
항상 서로 죽이 잘 맞는 라우라와 이리스는 이번에는 신경전을 벌이면서 언성을 높이기도 했었다.
특히 라우라가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 때문에 왜 우리가 목숨을 걸어야하냐는 말을 꺼냈을 때는 정말 분위기가 최악이었다.
라우라 입장에선 맞는 말이지만 이리스 입장에서는 지금까지도 자신을 기억해주고 소중히 여기는 마을사람들을 모두 버리라는 말로 들렸을 테니 말이다.
만약 라우라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걸 금방 인정하지 않았더라면 그녀와 이리스의 관계는 단숨에 바닥을 찍었을지도 모른다.
나는 고민 끝에 엘레나만 보호하는 선택지 대신 이리스를 소중히 여기는 마을사람들과 이 도시를 살아가는 무고한 사람들을 위해서 위험한 모험을 하기로 결심했다.
물론 내 개인적인 복수심이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고 단언할 수 있다.
이리스를 괴롭혔고 나와 베로니카 언니를 죽이려고 들었던 막시안에게 대가를 치르게 하고 싶었다.
라우라는 마지못해서 내 결정을 받아들였고 이리스는 내 결정에 탄복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서 나를 돕겠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결론을 내렸을 때처럼 엘레나는 나를 기습적으로 포옹했다.
“고마워.”
“엘라나님도 항상 고맙다는 말을 해주시는 군요.”
“부모님께 배운 거야. 도움을 받으면 꼭 감사하는 태도를 보여야한다고 하셨어.”
“그렇군요.”
나는 엘레나가 부모님을 입에 담자 말을 길게 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아직 부모님이 어딘가에 감금되어 있다고 믿지만 난 그럴 가능성이 아주 낮다고 생각한다.
막시안이 작위를 물려받은 이상, 더 이상 놈에게 부모님은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래도 엘레나를 위해서라도 그녀의 부모님이 꼭 살아있었으면 한다.
“레베카, 조사하는 일말이야. 나도 같이 가면 안 돼?”
“안 돼요.”
“그치만 분장을 하면...”
“그냥 지나가는 사람들은 몰라도 막시안과 그 부하들이 못 알아볼까요?”
엘레나는 내가 진지하게 하는 말에 결국 입을 꾹 다물고 말았다.
이번에는 삐치지 않았지만 그래도 속상해하는 건 분명했다.
그래도 억지로 가겠다고 우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만약 그랬더라면 지금 어떻게든 말리고 일을 하러 가더라도 계속 걱정될 것 같다.
엘레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귀족아가씨라도 눈치는 빨랐고 그게 마음에 들었다.
“미안, 내가 너무 철없는 생각을 했어.”
“엘레나님은 막시안이 저지르려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크니까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거잖아요.”
“하지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네 말을 잘 들어야겠지.”
“나중에 이번 일이 잘 마무리되면 남작이 되셔서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구제해주세요. 그게 엘레나님이 할 일이라고 생각해요.”
“응! 그땐 정말 잘할게. 어쨌든 가족이 저지른 죄니까 내가 끝까지 책임을 질 거야.”
나는 기특한 말을 하는 엘레나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주었다.
사실 감히 평민이 귀족의 머리를 쓰다듬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나는 자꾸만 엘레나의 머리에 손이 갔고 엘레나도 기꺼이 내게 머리를 내밀었다.
나중에 알리시아 앞에서 무심코 엘레나의 머리를 쓰다듬는 사태가 벌어지면 어쩌나 싶긴 하지만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겠다.
“레베카님, 조사는 언제부터 진행하실 건가요?”
“지금 바로 너랑 같이 나갈 거니까 준비를 하도록 해.”
“네, 레베카님.”
나는 라우라에게 동행을 명령했고, 그녀는 신속하게 외출할 준비를 했다.
잠옷에서 적합한 옷으로 갈아입고 마법방어구를 착용하고 총기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러는 사이에 이리스가 나에게 가까이 다가와서 못내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레베카님, 저는 같이 가지 않나요?”
“너는 엘레나님을 곁에서 지켜드려야지.”
“그래도 상대가 막시안이라서 레베카님이 걱정이에요.”
“괜찮아. 비밀연구소의 위치만 찾는 일이니까 위험하지 않아.”
나는 온갖 걱정은 다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리스에게 진한 키스로 위로해주었다.
익숙한 애정표현에 불과했지만 아직 엘레나에게는 자극적인 장면이었는지 그녀는 붉게 물든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도망쳤다.
15살이면 이제 알 건 다 아는 나이일 텐데, 엘레나는 정말 순수한 것 같다.
나중에 엘레나도 누군가와 사귀는 날이 오면... 왜 내가 산탄총을 들고 나가야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거지?
알고 지낸지가 고작 하루가 지났을 뿐인데 벌써부터 호들갑을 떠는 내 스스로가 참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레베카님도 옷 갈아입으셔야지요.”
“아, 내 정신 좀 봐.”
나는 잠시 엉뚱한 생각을 하다가 라우라에게 지적을 받자마자 서둘러 불편한 드레스를 벗어던졌다.
알리시아가 드레스를 선물로 주긴 했지만 앞으로 이걸 입을 일이 얼마나 있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하고 나는 편하고 활동하기 좋은 스타일의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마법방어구를 비롯해서 필요한 물건들을 모두 챙겼다.
“난 역시 이런 옷이 좋다니까. 이리스, 힘든 일을 떠맡기는 같아서 미안하지만 그래도 잘 부탁할게.”
“네, 맡겨만 주세요. 엘레나 아가씨를 돌보는 일은 익숙하니까요.”
“만약에 적의 공격을 받거나 위급한 일이 생기면 곧장 특수상점으로 도망쳐서 베로니카 언니의 저택으로 가도록 해.”
“이미 탈출로를 확보해뒀으니 걱정 마세요.”
“응. 그럼 다녀올게.”
나와 라우라는 이리스와 한 번씩 포옹했다.
그리고 나는 다시 내 앞에 나타나서 양손을 뻗는 엘레나도 안아준 뒤에 객실의 문을 닫고 나왔다.
라우라는 호텔 밖으로 나오자마자 손을 뻗어서 내 손도 아니고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뭔가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라우라, 혹시 지금 엘레나 때문에 질투하니?”
내 질문에 라우라는 대답은 하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녀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사람에게 질투심을 느끼는 지금 상황이 부끄러워서인지 볼이 발갛게 물들었다.
나는 그저 어린 동생을 대하듯이 엘레나를 귀여워해줬을 뿐인데 라우라는 그게 부러웠던 모양이다.
“레베카님, 제가 좀 한심하지요?”
“아니, 그냥 사랑스러워.”
“놀리지 마세요.”
“그런 거 아니야. 오히려 네가 질투를 잘 참아줘서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나는 라우라의 뜨거운 볼을 쓰다듬으면서 씩 웃었다.
그러자 라우라는 내 품에 기대서는 내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었다.
“레베카님은 왜 항상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친절하신 건가요? 가끔은 저를 대하는 태도랑 차이가 없는 것 같아서 싫어요. 이리스에게는 당연한 일이지만 다른 사람들한테는...”
“내가 타고난 성격이 그래서 그래. 웬만하면 남에게 나쁜 소리하기 싫고 웃으면서 지내고 싶거든. 쓸데없이 동정심이 많고 마음이 약한 탓이겠지.”
“전 아직도 레베카님이 엘레나님 때문에 목숨을 거는 게 싫어요. 아무리 충분한 대가를 받았다고 우기셔도 결국 정의감 때문에 움직이는 거잖아요.”
“라우라, 넌 항상 내 속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구나. 맞아, 돈은 핑계에 불과해. 난 베로니카 언니를 죽이려고 했던 막시안을 용서할 수 없고, 이리스와 엘레나를 비롯해서 막시안 때문에 고통 받은 수많은 사람들의 눈물을 외면할 수 없어.”
“레베카님은 용사님이 아니에요. 분명히 저한테는 고향에서 살 때와는 다르게 마음대로 살아가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그런데 왜 굳이 위험하고 힘든 일에 앞장서시려는 거예요?”
“명분이 뭐든 간에 어떻게든 막시안을 막고 싶다는 게 지금 내가 가장 하고 싶은 일이야. 난 이미 네 말처럼 마음대로 살아가고 있어.”
나는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궤변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았다.
새로운 인생을 즐기면서 마음껏 살아가고 싶다는 사람이 복수심 때문에 사서 고생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라우라가 날 걱정하는 게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난 무조건 막시안을 죽여야지만 직성이 풀릴 것 같다.
그 미친 새끼 때문에 나와 베로니카 언니가 죽을 뻔 했었는데 내가 이걸 그냥 넘어가면 진짜 한심하고 호구 같은 년이지.
나는 내 마음이 가는대로 막시안을 죽이고야 말거다.
난 복수심에 주먹을 불끈 쥐었고 라우라는 손을 뻗어서 내 주먹을 꼭 감싸주었다.
“레베카님의 생각은 잘 알겠어요. 그러니 저도 더 이상 불평하지 않고 레베카님의 뜻에 적극적으로 따를게요.”
“고마워. 나도 네가 실망하거나 슬퍼하는 일이 없도록 최대한 조심할게.”
“제가 곁에서 철저하게 지켜드릴 테니까 걱정 마세요.”
라우라는 언제나처럼 내 결심을 떠보려고 반대하는 태도를 보이다가 내가 확신에 찬 결정을 내리자 바로 충성스러운 태도로 돌변했다.
이건 내가 예전부터 라우라에게 주문하고 있는 일이니 기분 나쁘게 받아들일 이유가 없었다.
초인이 아닌 이상에야 주변에 예스맨만 있으면 파멸로 가는 지름길에 발을 디디는 건 시간문제라는 게 내 생각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늘 힘든 역할을 맡기고 있는 것이다.
분명 라우라의 마음도 편하지 않을 테니 오늘 일이 끝나면 몸으로 위로를 해줘야할 것 같다.
음... 그러면 따로 방을 잡는 게 좋겠지? 엘레나가 있는데서 대놓고 섹스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럼 어디부터 가보실 건가요?”
“잠깐만 기다려봐.”
나는 일찌감치 지도창에 업로드한 주소들 중에서 여기서 가장 가까운 곳으로 경로를 설정했다.
난 처음에는 하나 빼고 전부 리제르카와 관계가 없는 주소인줄 알았지만 베로니카 언니 덕분에 전부 리제르카의 성벽 안에 존재하는 주소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부동산증서에 나오는 주소는 이리스가 살던 집을 제외하면 총 6개이고 그 중 하나는 가장 경비가 삼엄한 막시안의 별장이다.
분위기만 보자면 분명 별장 지하에 비밀연구소가 있을 것 같지만 그 분위기 자체가 눈속임일 수도 있으니 일단 다른 곳을 모두 다 둘러봐야할 것 같다.
‘만약에 별장을 포함해서 전부 비밀연구소와 관련이 없는 곳이라면 제대로 삽질을 하는 거겠지만 분명 이 중에서 비밀연구소로 연결된 곳이 있을 거야.’
나는 알리시아가 나눴던 말처럼 막시안이 리제르카 어딘가에 비밀연구소를 차려놓고 직접 관리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만약 도시 밖에 비밀연구소나 연구소로 향하는 통로의 입구가 있다면 막시안이 도시 밖으로 자주 나가는 모습이 포착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알리시아와 엘레나의 말에 따르면 막시안은 거의 평생을 도시 밖으로 나간 적이 없는 사람이라고 한다.
따라서 만에 하나 이 주소들 중에 비밀연구소가 없다 하더라도 리제르카 어딘가에 비밀연구소가 존재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알리시아는 내게 부동산증서의 주소지를 조사해달라고 말하면서도 다른 의심 가는 지역은 본인이 자체적으로 조사를 해보겠다고 했었다.
“왠지 막시안의 별장에 비밀연구소가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지만 혹시 모르니 다른 곳들을 먼저 살펴보자. 길은 내가 안내할게.”
나는 굳이 라우라의 손을 잡고서 그녀와 나란히 걸었다.
데이트를 하는 것도 아니고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에 노출될 수도 있는 일을 하러가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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