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7화 〉 0부 솔로몬 가라사대 #001
* * *
낯선 공간입니다.
눈을 뜨니 주변은 온통 하얀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정원이었습니다.
그 왜, 꼭 판타지 소설을 보면 나오는 그런 장소 있잖아요.
용사를 소환한다거나 하는 그런 장소.
이곳을 왜 용사를 소환하니 마니 하는 이야기를 했냐면, 제 눈 앞에는 정체불명의 남자가 로브를 뒤집어 쓴 채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 오오...! 강림하셨도다, 나의 용사시여...!"
강림.
용사.
네, 용사 소환 확정.
짐작가는 바가 없는 게 아니라서 이해는 가지만, 솔직히 당황스럽습니다.
보통 용사라는 거, 그 세계관 최강자를 부르는 거 아닌가요?
아니면 '남자'라거나.
"저기...."
"오오, 위대한 성녀시여!"
성녀?
아까는 용사라더니, 이제는 저보고 성녀랍니다.
여자가 용사로 소환되면 성녀라는 걸까요?
"부디 저희를 구원해주시옵소서!"
"...구원을 해달라고 해도."
상대가 어떤 대상인지, 그리고 왜 하필이면 저를 골라서 이곳으로 불렀는지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리고 애초에.
"멋대로 불러놓고 구원해달라고 하면 들어줄 것 같아요?"
"그, 그런!"
남자는 무릎을 꿇으며 주저앉았습니다.
'그래요, 까짓 거 한 번 해보죠!'라면서 소리칠 존재를 찾는 거였으면 번지수를 한참 잘못 찾아도 잘못 찾은 겁니다.
저는 그런 호구가 아니니까요.
"여신님께서 분명 용사라고 점지하신 분인데...어째서?"
"여신?"
아.
"...최근에 사람이랑 이야기를 나눈 건 보험 전화밖에 없는데."
기억을 떠올려보면 최근 수신 내역에 찍힐만한 경우는 갱신계약에 관한 설명을 엄청나게 빠르게 읽던 여자 한 명 뿐입니다.
듣기 귀찮아서 하던 걸 하면서 대충 '네', '네'하면서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게 생각나네요.
이외에는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고, 거의 2주일 동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고 있었죠.
아직도 생생합니다.
다른 건 몰라도 '계약하시겠습니까?'하면서 기뻐하던 목소리로 말하던 건 생생히 기억납니다.
오오, 무섭도다. 이계의 여신.
설마 보험사기로 돈을 빼가는 게 아니라 사람을 이계로 뽑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일단 여신께서 불렀다면, 왜 여신은 여기 없죠?"
"여신님께서는 천사들을 이끌고 현재 마왕님과의 일전에 나섰습니다."
"혹시 천마대전이니 뭐니 하는 그건가요?"
"앗...! 역시 성녀님! 용사답게 잘 알고 계시군요! 그렇습니다! 성녀님께서는 용사로서 저희를 도와주십시오!"
"흠.... 그러니까 마족을 사냥하라?"
"예!"
남자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하지만 저로서는 그의 눈물이 악어의 눈물이나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혹시 마족들, 여자를 잡으면 강간하거나 그러나요? 천사도?"
"어, 음, 용사 님은 지지 않으니까 괜찮습니다!"
"아, 네. 고생하세요."
저는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몸을 돌렸습니다.
이곳이 어딘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신전처럼 보이는 곳 밖으로 나가면 저를 강간할 마족들이 가득하다는 것 하나는 알 것 같네요.
"저는 싸움이랑 거리가 먼 사람이라서요."
"뭐...?"
남자의 표정이 험악해졌습니다.
그도 그럴게, 용사라고 기껏 여신이 부른 존재가 위대한 천마대전을 포기하면 그럴 법도 하죠.
"용사 님...지금...천족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하신 겁니까?"
"천족을 위해 싸우지도 않을 거고, 악마를 위해서도 싸우지 않을 거예요. 저는 제가 돌아갈 방법을 찾을 겁니다."
"돌아갈 방법은...!"
"악마를 전부 다 죽이고 천마대전에서 승리하면 저를 지구로 보내준다고 하겠죠. 안 속아요. 여신들이 통수 치는 게 하루이틀이지. 갓세계물도 요즘은 그렇게 사람을 안 부른답니다."
저는 가차없이 몸을 돌렸습니다.
뒤에서 쫓아오든 말든, 신전 뒤쪽에 있는 출구로 걸었습니다.
"기, 기다려"
남자가 저를 쫓아오려던 그 순간.
"크하하, 찾았다!!"
천장에서 폭음과 함께, 구멍이 뻥 뚫리며 정체불명의 형체가 나타났습니다.
"여기있었구나, 모브리엘!"
"큭, 아스모데우스! 네가 어떻게 여길?!"
"다 이 년이 불었다!"
아스모데우스, 라고 불린 거대한 근육질의 악마는 뭔가를 바닥에 내동댕이쳤습니다.
쿵!
바닥에 떨어진 건 날개가 검게 물든 천사였습니다.
전형적인 아름다운 미형의 천사였으나, 그녀는 마치 강간이라도 당한 것 같았습니다.
"...혹시 당신이 이렇게 만들었나요?"
"크하하! 눈썰미가 좋군! 그렇다! 나 지옥의 대악마, 색욕의 아스모데우스가 범했다! 상급천사도 내 자지에 걸리면 아무것도 아니지!"
아스모데우스는 아랫도리에 아무 것도 입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흉악하고 더러운, 제 몸에 들어오면 족히 명치까지 뚫릴 법한 거근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봐야했습니다.
"으."
분노가 치밀어오릅니다.
왜 오자마자 이런 걸 봐야하는 걸까요?
보통 이세계에 떨어지면 최소한의 준비 시간이라도 주는 거 아니었습니까?
어떻게 된 거냐, 좆세계물!
"하."
이렇게 말해도 하소연할 곳은 없습니다.
"용사님! 저, 저 자를 물리쳐주십시오! 그리고...우리 천족을 구원해주시는 겁니다!"
"크하하! 용사를 여자로 소환한 너희의 실책이다! 다른 마왕들이 오기 전에 내가 먼저와서 찾은 게 다행이로군! 너는 내가 맛있게 따먹어"
서걱.
가볍게 일격.
"휴."
다행입니다.
여신이 직접 선정한 용사인만큼, 아무래도 제 힘은 그대로인 모양입니다.
쿵.
"어...라?"
반응이 느립니다.
아스모데우스는 자신의 자지가 잘렸다는 것조차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지옥의 일곱 마왕보다는 적어도 제가 더 강하다.
그렇게 제 힘을 정리할 수 있겠네요.
나름 저쪽 세상에서도 '세계관 최강자'의 자리에 올랐던 만큼, 이쪽 세계로 넘어와서도 딱히 힘이 너프되거나 그런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저를 이길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습니다."
저는 '마력'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제 힘을 본 두 천사와 악마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집혔습니다.
"아, 아아...어째서...?"
천사, 모브리엘은 절망을.
"크, 크흐, 크하하하하!!"
악마, 아스모데우스는 환호성을.
"이 병신같은 천족들! 용사를 소환한 게 아니라 이계의 마왕을 소환했구나! 마법이라니! 마력이라니! 이 아스모데우스조차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숨긴 마력이라니!"
"마력...이라고 할 수 있기는 하겠네요. 이 힘은 부정한 자들로부터 모은 힘이니까요."
악마의 힘을 마력이라고 한다면,
악(?)의 힘을 마력이라고 한다면,
한 때, 저쪽 세상 모든 악의 힘을 모은 저로서는 이쪽 세상에서 마왕이라고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겁니다.
"크으으...."
자지가 잘린 아스모데우스의 몸에서 서서히 연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습니다.
보기 흉해서 잘라버렸는데, 아무래도 제대로 된 약점이었던 모양입니다.
사아아.
아스모데우스의 몸에서 뿌연 연기가 피어오르고, 곧 악마는....
"여자?"
"후후, 이 서큐버스 여왕, 릴리스를 쓰러트릴 줄이야...."
"아까는 아스모데우스라면서요?"
"그건...색욕의 마왕이라는 직함이야! 후우, 강하네. 하지만...."
아스모데우스, 릴리스는 저를 향해 손을 뻗었습니다.
그녀의 손에는 저도 긴장할만큼, 아주 위험한 물건이 들려있었습니다.
"그건...?!"
"최소한, 저주 만큼은...!"
"!!"
릴리스의 손에 들린, 악마의 손이 제게 마수를 뻗쳤습니다.
저는 급히 바닥을 박차고 이탈했지만, '악의 정수'가 깃든 손아귀에 그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하앗!"
기합과 함께, 마력을 방출.
악의의 손아귀는 금방 터져버렸고, 저는 바닥에 무사히 착지했습니다.
"하, 하하!!"
하지만 아스모데우스는 웃을 뿐.
"이제...네가 서큐버스 여왕이야!"
"큭...?!"
머리쪽이 아픕니다.
등허리가 간지럽습니다.
엉덩이뼈 쪽에 열이 납니다.
펄럭!
옷을 찢고, 순식간에 뭔가가 돋아났습니다.
신전에 있는 유리에 비친 제 모습은 아스모데우스와 다를 바가 없는, 영락없는 서큐버스의 모습이었습니다.
"끙...."
'마'를 받아들이기 쉬운 이 몸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공격이었습니다.
특히 저 악의에 가득찬 물건, '자지마라'의 힘이 깃든 물건이라면 더더욱.
"하아. 하필이면 서큐버스라니...."
너무나 황당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은 어쩔 수 없죠.
"하하, 하...! 잘 봐라, 천사! 용사는 타락했다! 이제 너희를 구원할 자는 아무도 없어! 용사는 신성력을"
"신성력이라는 거, 혹시 이거 얘기?"
부와앙.
나는 손에서 신성력으로 추정되는 것을 꺼냈습니다.
대마신, 자지마라에 대항하기 위한 신성한 힘으로, 다행히 이 세계에서도 사용을 할 수 있었습니다.
사용은.
"어, 어떻게...? 용사가 마력에 신성력까지...?"
"...도대체 뭐야?"
모브리엘도, 릴리스도 저를 향해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제가 누구에게 인사를 하고 떠날지는 확실합니다.
"릴리스."
저는 발치부터 서서히 소멸해나가는 그녀를 향해 다가가, 그녀의 턱을 잡고 들어올렸습니다.
"당신의 염원은 천족의 멸망입니까?"
"...여신에 대한 복수."
"그렇다면 그건 제가 들어드리겠습니다. 사기 계약으로 저를 부른 것, 후회하게 만들려고요."
제 말에 릴리스는 활짝 웃었다.
"좋네.... 이계의 마왕님, 부디 여신에게 복수를...."
쪽.
저는 릴리스에게 키스했습니다.
릴리스는 처음에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가, 곧 눈을 감으며 천천히 혀를 섞었습니다.
할짝, 할짝.
릴리스는 황홀한 눈으로 사라졌습니다.
아쉽게도 자지마라의 손은 그녀에게 귀속된 물건이었는지, 릴리스의 소멸과 함께 검은 안개로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너, 너는 뭐냐! 도대체 너는 무엇이란 말이냐!"
"부른 사람이 모르면 어떻게 해요."
어처구니가 없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죠.
"저는...사도닉스=블랙, 마크투."
입에 묻은 릴리스의 루즈를 엄지로 닦으며, 저는 마력을 일으켰습니다.
"지구의 사랑과 평화를 지키는, 마법소녀랍니다."
최강의, 마법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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