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8회
420일차
드워프 왕국에 특별한 혈통은 존재하지 않는다.
애초에 왕가라는 개념도 없다.
드워프 왕국은 그저 드워프들이 인간 왕국들을 상대로 드워프 '무리'라고 경시를 받는 것에 대한 자존심의 일환이었고, 왕가는 쉽게 혈통이 바뀌기 일쑤였다.
가장 뛰어난 장인이 드워프 왕국의 국왕 자리를 차지한다.
가장 술이 센 드워프가 드워프 왕국의 국왕 자리를 차지한다.
가장 힘이 센 드워프가 드워프 왕국의 국왕 자리를 차지한다.
기술력, 술, 무력.
세 가지 요소가 삼위일체를 이루며 강한 존재가 바로 드워프 왕국의 국왕이다.
그리고 현재 드워프 국왕은 평균 수명 200년 전후의 드워프 중에서 무려 60년 가까이 국왕 자리를 지켜온 존재다.
이름하야, 오우야지콘 플렉스.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름은 거짓이며, 오우야지콘이라는 이름이야말로 그의 진정한 이름이다.
딸인 로도페리 필리아와 성이 다른 이유는 로도페리가 어머니의 성을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정확히는 로도페리가 부친의 성을 이어받기를 거부했다.
두 부녀 사이의 관계는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지극히 권위적이고 가부장적인 플렉스 국왕의 행동에 로도페리는 거부감을 느끼고 왕국을 빠져나와 인간들의 영토에서 활동했다.
그리고 로도페리는 마왕군에 납치되었다.
항간에 들리는 소문에 따르면 마왕군에 투항하여 마왕군 군단장의 갑옷을 만드는 노예가 되었다고 하더라.
살아있는 건 기쁜 일이지만, 마족 따위를 위해 기술을 팔아 살아남는 건 드워프로서 치욕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치욕을 받더라도 살아있는 것이 중요했다.
"......로도페리여."
플렉스 국왕은 거대한 전쟁망치를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네가 내 지시만 들었어도…!"
플렉스 국왕은 로도페리가 납치되었던 때를 생각하며 이를 갈았다.
그는 로도페리의 자존심을 위해 제법 장래가 유망한 장로들을 파견해 던전을 공략하도록 만들었고, 결국 로도페리는 던전 공략에 실패했다.
장로들과 함께 던전에 파묻힌 것이다. 덕분에 플렉스 국왕의 입지는 엄청나게 낮아졌다.
-딸은 다시 낳으면 되는 거 아닌가?
드워프들은 실종된 로도페리에 대해 딱히 생각이 없어보였다. 대신 그들은 천쪼가리 주제에 강철갑옷보다 더 단단한 물건에 심취해있었다.
던전에서 나오는 수많은 물건들에 매료되었고, 마왕군을 상대로 하는 전면전에 시큰둥한 반응이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런 의욕없는 모습도 끝이다.
쿵, 쿵, 쿵!
드워프들의 눈에는 호기심과 욕망이 가득했다.
그들은 각자 철퇴나 도끼, 몽둥이 등 각양각색의 둔기를 움켜쥔 채, 플렉스 국왕의 명령에 따라 황야 너머에 주둔중인 마왕군을 향해 진격하려고 대기중이었다.
"옛 조디악 왕국을 점령한 분노의 군단에 신문물이 그렇게 많이 있다더군."
조디악 왕국에서 도망친 이들의 증언은 드워프 왕국에도 이어졌다.
그리고 그들은 포로들의 족쇄를 채워놓은 수갑이나 구속구에서 정교한 드워프들의 손길을 발견해냈다.
그리고 분개했다.
-우리 드워프들의 기술을 고작 정조대 만드는데 쓰다니! 용서할 수 없다!
드워프들은 자신들이 쇠를 다루는 극한의 능력이 고작 정조대로 구현되고 있다는 것에 분통을 터뜨렸다.
그리고 마왕군에 잡혀 굴욕적이나마 목숨을 유지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무기를 들어올렸다.
마왕군에 잡혀 목숨을 구걸하며 정조대나 만들었다고 놀리려면 우선 사람들부터 구해야하지 않겠는가!
"드워프들이여, 모두 듣거라."
플렉스 국왕은 신성력이 가득 느껴지는 로브를 갑옷 위에 걸치며 목소리를 낮췄다.그의 중후한 목소리가 황야 전체로 퍼져나가며 드워프들의 사기를 끌어올렸다.
"마왕군을 쓰러뜨리고, 드워프들의 자존심을 되찾는다."
"우오오오!!"
뜨거운 함성이 황야의 모래바람을 밀어냈다. 드워프들의 눈에는 높게 솟아난 목책이 보였다.
"가자! 저 요새를 점령하여 우리의 교두보로 삼는 것이다!"
"우오오오!"
드워프들은 일제히 무기를 들고 목책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아아!"
그들의 선두에는 플렉스 국왕이 직접 무기를 들고 달리고 있었다.
"내가 바로 드워프들의 수장, 강철 산맥의 왕이다---!!"
드워프 국왕의 몸이 서서히 은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아 씨, 마킹이야? 좆됐네."
목책 밖으로 뛰쳐나가는 대규모 구울 부대는 보내며 나는 서전이 밀렸음을 직감했다.
"로도페리야, 네 아빠 저거 뭐냐."
"뭐긴 뭐야. 신성력이지."
"오우!"
갑자기 구미가 당기기 시작했다.
"저게 다 신성력이라고?"
나는 몸이 은빛으로 변하고 거대화되어 거의 오크 전사 수준에 이른 드워프 국왕을 보며 절로 감탄이 나왔다.
"쓰읍."
"야, 우리 아빠 제물로 바칠 생각하지 마라."
"그냥 생각만 했다, 생각만. 내가 설마 장인어른을 제물로 바치겠니?"
"장인어른을 장모님으로 바꿀 생각하고 있잖아."
"그건 그렇지."
나는 로도페리의 말에 괜히 겸연쩍었다.
아무리 드워프 국왕이 아비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한, 로도페리가 적이었던 나를 의지하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한들 혈연은 혈연이다.
드워프 국왕을 암컷으로 만들어 모녀덮밥을 저지르는 거라면 모를까, 로도페리가 보는 앞에서 드워프 국왕을 죽이기에는 다소 양심의 가책이 느껴졌다.
'로도페리의 6성 진화에 딱히 패륜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 <각성진화> 로도페리 필리아 (★★★★★)
# 진화 조건
1) 레벨을 끝까지 올린다 (Lv 94 / 100)
2) 신도 보고 놀랄 걸작을 만든다 ( 1 / 5 )
# 진화 : 지옥 대장간의 풀무 여신 (★★★★★★) ”
레메게톤 2.0.
마신이 승천함에 따라, 지상에 남은 여신을 제외하면 새로이 신의 시대를 열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누구나 6성이 될 수 있는 시대.
레벨과 조건만 갖추면 어떤 존재라도 6성이 될 수 있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이미 6성을 찍은 에일라의 경우에는 다소 억울해 할 수 있겠지만, 애초에 그녀는 레벨을 100레벨 찍기 전에 나에 의해 단번에 6성이 된 케이스였다.
그러므로 나는 순순히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는 시대를 받아들였다.
'그래야 내가 마-신으로서 내 여신들이랑 라스토피아에서 백년해로하지.'
아직 레벨도 한참 남았지만, 로도페리도 6성으로 만들어 나와 함께 신세계를 열어갈 대장장이 여신으로 만든다.
그걸 위해 신도 놀랄 걸작을 만들 도우미들을 모으는게 중요했고, 마침 우리의 앞에는 그에 가장 적절한 존재가 날뛰고 있었다.
"아비라는 자가 아버지 역할 제대로 못했으니, 이제 딸내미 여신으로 만드는데 어머니로서 최선을 다해야겠지? 흐흐."
"......하아, 나는 모르겠다."
로도페리는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죽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지."
"흐흐, 걱정마라. 설마 내가 너를 낳아준 아버지를 포르네우스마냥 대할 것 같으냐? 그냥 호기심만 해결하면 돼."
과연 드워프 국왕은 암캐가 되었을 때, 로도페리의 앞에서 어떤 모습을 할 것인가?
"자신이 물건처럼 여기던 딸과 상하관계가 역전되었을 때, 국왕은 어떻게 생각할 지 의문이로군."
나는 드워프 국왕에 대해 좋게는 말할 수 없었다.
왜냐면 그는 로도페리를 자신이 만든 '걸작' 수준으로 생각하고 있었고, 로도페리를 대하는 게 꼭 잘 만들어낸 무기를 다루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물론 이건 로도페리에게 들은 정보를 바탕으로 하는 이야기라, 실제로는 다를 수 있다.
'어느 쪽이든 결과는 같다.'
드워프 국왕은 드워프 왕국과 함께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제 드워프에게는 '수컷'이라는 개념이 사라지고, 모조리 암컷이 되리라.
"땀내랑 흙내 풀풀 풍기는 수염쟁이들보다는 아래가 곱슬거리는 엘프 비슷한 드워프들이 훨씬 더 낫지. 안 그렇냐?"
"아, 안 곱슬거리거든…!"
"흐흐흐, 농담이다. 농담."
나는 로도페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곳이 로도페리가 수비하는 지역이기는 했지만, 나는 상대가 상대인 만큼 내가 직접 나와서 싸우기로 했다.
"로도페리, 나의 무기를 건네다오."
"여기있어."
로도페리는 내게 그녀가 혼신을 다해 만든 쌍날도끼를 건넸다. 나는 오랜만에 움켜쥐는 할레오-색스에 힘을 불어넣으며 힘을 일으켰다.
"로도페리, 잘 봐라. 나의 새로운 힘을. 마-신의 힘을."
고오오오.
할레오가 사납게 울부짖었다. 그러자 로도페리의 무기가 점차 모습을 달리하기 시작했다.
"어, 어?! 뭐야?! 왜 바뀌는 건데에에!"
로도페리는 자신의 걸작이 변형되는 것에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는 새롭게 변한 할레오 색스를 보며 감탄했다.
"이게 쌍날도끼지."
한손으로 사용하던 토마호크와는 다른, 기나긴 장대에 도끼가 양쪽으로 달린 형태.
검붉은 색으로 빛나는 도끼날에는 나의 문신색으로 반쩍이고 있었다.
꾸우욱.
나는 내 배가 훅 꺼지는 느낌과 함께 할레오를 움켜쥐었다.
"가자. 할레오."
쿵!
나는 '단독'으로 요새의 밖으로 나섰다. 구울 무리를 뚫고 지척까지 다가온 드워프들이 내 등장에 한 걸음 물러섰다.
"마-신의 이름으로, 라스."
쿵-----!!
"드워프들을 모조리 암컷으로 만들 힘을!!"
나는 할레오를 바닥에 내리치며 발부터 굴렀다.
"라-스톰프!"
황야가, 뒤집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