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620화 (616/800)

620회

177일차

<왕국군 제 3군단 집결지, 협곡요새 호트로 관문.>

"마왕군이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했습니까."

3왕자, 앤티알은 테이블 중앙에서 왕국 지도를 내려다보며 중얼거렸다. 정교하게 그려진 왕국의 지도 위에는 푸른 말과 붉은 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마탑주, 적의 군세에 대한 파악은 끝났습니까?"

"구체적인 종류는 파악하지 못하였으나, 그 수가 대략 5천입니다."

"고작 5천...풋."

앤티알 왕자는 압도적으로 적은 수에 비웃음이 나왔다. 당장 3군단의 병사 수만 하더라도 1만이 훌쩍 넘을 정도인데, 마왕군이 고작 5천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건 인류가 숫적으로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말이었다.

"저희가 이긴 싸움입니다. 그렇지요, 스승님?"

"왕자. 적은 후작가를 멸망시킨 자들입니다. 숫적 우위는 유리한 점이 될 지 언정, 승리의 요인이 되지는 않아요."

은발 자안의 여기사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앤티알을 나무랐다. 앤티알 바로 옆 자리에 앉은 여기사의 말에 다른 장성들도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적은 우리가 생각하지 못하는 변수를 가지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마냥 무시해서는 안 됩니다. 알겠지요?"

"예, 스승님. 오늘도 하나 배웁니다."

사실상 앤티알이 없다면 지휘관의 자리에 앉아있어야 할 장본인, 조디악 왕국 3군단의 군단장 "오르드 콜드미스"는 맞은 편에 앉은 여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칼나이야 경, 원견의 마법으로 놈들의 정체가 혹시 보이덥니까?"

"어렵더라고요. 정찰용 사역마들이 병력들 근처에만 가도 귀신같이 저격을 당해 죽었어요. 최소한 엘프들을 세뇌했다는 소문은 사실인 것 같아요."

금발청안에 로브를 입은 마법사, "메리지 칼나니야"는 지도를 향해 빛을 비추는 수정구를 톡톡 건드렸다. 그러자 지도 위에 넓은 마법진이 펼쳐졌고, 장성들은 사역마의 마지막 시야를 눈으로 살필 수 있었다.

"까마귀...인간?"

"안드라스라고 하는 마물입니다."

정체를 숨기려고 하는 것인지, 아니면 진짜로 5천 마리의 안드라스를 동원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광경은 5천 명의 마족들이 전부 안드라스의 까마귀 머리를 하고 있다는 것.

"적은 조인족으로 구성된 병력인가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조인이 굳이 자기 깃털을 붙인 로브를 입을 필요는 없지요. 저것들은 전부 가짜입니다."

"예? 하지만 보이는게 안드라스 종 아닙니까?"

"...마력 반응이 조금씩 달라요. 저 머리, 분명 장식이에요. 2왕자께서도 키메라이온을 사냥하시고 그 머리를 자신의 투구로 삼은 것처럼, 저들도 분명 안드라스라는 마물의 머리를 투구로 삼은 거예요."

장면이 다른 장면으로 넘어갔다. 숲속의 나무에 숨은 벌레 사역마는 제법 가까이에서 마왕군의 군세를 두 눈에 담았다. 숲길을 아주 능숙하게 헤쳐나가는 안드라스들의 움직임은 분명히 이상했다.

"조인인데 왜 숲을 헤치면서 걷는 거지?"

"말씀 잘 하셨습니다. 그게 저들이 안드라스가 아니라는 증거입니다."

"아, 저기!"

끈기있게 정찰한 결실이 맺혔다. 안드라스 하나가 손으로 얼굴에 부채질을 하더니, 자신의 부리를 위아래로 잡아 당겼다. 지휘실에 있는 이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엘프!"

부리 속의 그림자 속에 스친 얼굴은 분명히 엘프의 얼굴이었다. 직접 눈으로 보기 극히 드물다고 평가받는 엘프가 까마귀 투구를 뒤집어 쓰고 호흡을 고르는 모습은 분명 낯설기도 하면서도 의아했다.

검은 까마귀 투구 아래 그림자가 드리워진 엘프의 얼굴에는 붉은 문신 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 빛이 아니었다면 얼굴이 엘프의 안면인지 확인할 수조차 없었다.

"얼굴이 조금 붉은 것 같은데...앗! 봤어요!"

엘프는 곧장 단검을 들어 벌레 사역마를 향해 투척했다. 시야는 반으로 쪼개지며 영상은 끝났고, 메리지는 영상을 거두어들였다.

"보시다시피 일부나마 엘프가 섞여있는 게 확인되었습니다. 다른 곳에서도 사역마들이 엘프 특유의 궁술에 의해 죽은 걸 확인한 이상, 저들 군대 중 엘프가 섞여있는 것은 확실합니다."

"끙...세뇌를 풀 방법은 없어보이나?"

"네. 성기사단에서 들어온 정보에 따르면, 몸속 깊숙한 곳에 세뇌충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걸 꺼내기 위해서는 엘프를 완벽하게 제압하여야합니다."

기적같은 확률이었다.

비르고 영지와 인접한 리브라 영지에서는 영지의 경계에 정찰병들을 쭉 깔아놓아 마왕군의 준동을 면밀히 살폈고, 덕분에 마왕군의 영역에서 기적과도 같이 탈출한 '추기경과 성기사단'을 발견하는데 성공했다.

라그비아 대사제의 배신으로 추기경과 성기사단 모두가 던전에 구속되었으나, 여신의 도움으로 기적적인 탈출을 할 수 있었다고 하더라. 그러면서 성기사단은 세뇌된 엘프를 구하는 방법을 알아내었다.탈출하는 과정에서 절반이나 되는 성기사들이 희생되었지만.

그리고 그들이 목숨을 걸고 알아낸 정보는 리브라 영지에서 조디악 왕국 전체로 퍼지게 되었다. 마왕군은 엘프를 세뇌하여 병사로 부리고 있다. 적이라고 가정하여 죽이기도 다소 애매하고 난감한 상황이었다.

"3왕자 님. 엘프도 엘프지만, 저는 다른 것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무엇입니까, 사스티트 장군?"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 사스티트는 붉은 말이 이동한 거리를 가리켰다. 그리고 영상 속 검은 조인들의 몸 안이 붉게 빛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했다.

"엘프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저들의 진군 속도는 몹시 비정상적입니다."

"예. 사스티트 장군의 말대로 적의 움직임은 너무 빠릅니다. 정확히는 휴식을 취하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 그래요?"

3왕자는 쭈뼛거리며 지도를 유심히 살폈다.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강한 건 좋은 일이었으나,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즉각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인류가 위험에 빠질 실제 상황이었다.

"생명인 이상 휴식이 필요해요. 지금 저희가 계속 여기서 회의를 하다가도 중간중간 쉬어야 하는 것처럼."

메리지 마탑주는 손으로 안경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런데 저 마왕군은 휴식이란 게 없어요. 사람이 달리는 것보다 빠른 속도로 달려오는데, 그게 벌써 후작령을 벗어나기 직전이에요. 저 속도라면 최소 사흘 뒤에는 여기에 도착할 수준이에요."

"허...."

"그, 그러면 도착하는 즉시 야전을 걸죠! 지친 병사들을 상대로 싸우는 건 병법의 기본이라고 하셨잖습니까!"

"3왕자, 적은 지치지 않는 자들입니다. 행군의 피로가 없어요."

"으...."

적에 대한 정체는 완전히 베일에 둘러쌓여 있었다. 5천 명의 병사들 모두가 안드라스라고 생각하니 석연찮은 부분은 한 둘이 아니고, 다른 국가에서 나타나는 마왕군과 비교해도 그들의 이동 속도는 비정상적이었다.

"엘프형 골렘인가?"

"엘프들을 전부 죽이고 언데드로 부리는 거 아니야?"

"그렇군. 엘프를 안드라스라는 놈들과 합성한 것이오! 그러니 안드라스 안에 엘프가 있는 것이지."

아무 정보가 없으니 다들 아무 소리나 해대기 시작하는 가운데, 정찰용 사역마들이 단서를 잡았다.

"저기...! 정중앙!"

병사들의 한가운데에는 마찬가지로 까마귀 머리의 골렘들이 집 한 채를 아래에서 떠받치고 달리고 있었다. 구불구불한 나무 뿌리가 벽면과 천장이 된 나무집은 아무리 봐도 이상해보였다.

"저건 도대체...?"

"저, 저거!"

나무집 위의 굴뚝같은 곳에는 세계 10대 무기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을 법한 아름답고 날카로운 양날 도끼가 박혀있었다. 오르드와 메리지는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저기서 막대한 힘이 사방으로 방출되고 있는 듯 합니다."

"저게 비정상적인 마왕군의 힘...!"

아무리 봐도 뭔가 있어보인다 싶은 양날도끼의 정체에 고민하던 순간, 양날도끼가 날까지 붉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라스! 라스! 라스!

"...응?"

쿵! 까마귀 골렘들이 한쪽 무릎을 꿇으며 땅에 주저앉았다. 동시에 천천히 요새를 향해 다가오던 붉은 말도 멈췄다. 적도 휴식을 취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였다.

"스승님! 적이 휴식을 취하는 중입니다! 공격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3왕자. 저기까지 가려면 저희도 꼬박 밤을 지새워서 달리거나 날아가야합니다. 그러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하아아아아앙------!!

잘못들었나. 사역마의 귀를 통해 엄청난 신음소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예상치 못한 비명에 작전 회의실 안에 있는 모두가 굳어버렸다.

아항, 하응, 응기잇, 끼요옷, 오고곡, 크허헝!!

온갖 신음소리가 가득 울려퍼지자 메리지는 사역마와의 연결을 끊어버렸다. 장군들은 오르드와 메리지, 그리고 3왕자의 동태를 살피며 서로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어, 으, 으...."

"...적은 정말 대단하군요. 사역마들을 통해 정찰하는 걸 알아채고 이런 방해공작을 벌이다니."

메리지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맞은 편의 오르드도 옅게 웃고 있었으나, 눈썹이 미미하게 떨리는 건 숨길 수 없었다.

"하하, 하. 사람을 아주 민망하게 만들고 말이야.... 괜찮습니까, 3왕자?"

"아, 네, 그, 괜찮습니다."

아직 어린 소년이 듣기에는 너무 적나라한 소리였다. 3군단의 지휘관들은 사역마들을 통한 정찰을 잠시 보류했다.

"크흠, 흠."

왠지 모를 민망함, 자신들을 놀리는 게 아닐까 하는 자격지심, 그리고 주체할 수 없는 혈기로 회의는 잠시 중단되고 말았다.

* * *

아침이 되었다.

질펀하게 하룻밤을 즐긴 우리는 다시 행군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다들 만족한 것 같군."

"그러게요. 하암...."

나는 완벽하게 만족한 여인들의 얼굴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아무리 내가 라스의 화신이라고 한들, 나를 상대로 하는 성교의 스페셜리스트들을 혼자서 모두 상대하기에는 다소 벅찬 감이 있었다.

'꿈에서 상대하지 않았으면 진짜 회군할 뻔 했어.'

나는 샤이탄의 꿈에 모두를 초대했다. 인간의 형태가 아닌 오크의 형태로서 숱한 여인들을 취하며 그들을 절정과 꿈에 빠뜨렸다. 세 번 절정하는 이들은 모두 잠자리에 들었고, 나는 끝까지 버티고 버티던 엘프 여왕과 공주를 기절시킨 것으로 아침을 맞이했다.

"고생했다, 샤이탄."

"응당 해야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그보다 피곤하진 않으십니까? 한 번에 두 세 명씩 기본으로 상대하셨는데."

"딱히. 안 그러면 다음 순번까지 애들이 너무 기다리잖냐. 어차피 던전 밖에서 질싸해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거."

"그렇긴 하죠. ...흐암."

샤이탄은 길게 하품을 하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샤이탄은 다른 여인들을 꿈에서 보내버리는데 도움을 준 일등공신이었고, 내가 여인들을 꿈에서 보내버리는 걸 옆에서 지켜보기만 하며 꿈의 연결을 이어나가야만 했다.

'그 덕분에 이렇게 혼자서 자지를 독점하고 있지만.'

모두가 잠들어있다. 나무털 집에 쳐놓은 검은 암막 커튼은 바깥에 해가 산 위로 솟구치고 있음에도 빛 한 점 들어오지 않게 틀어막았다.

"샤이탄, 적들의 사역마들은 아직도 근처를 배회하고 있는 중인가?"

"아뇨. 지금은 모두 제압되었습니다. 안드라스와 하르파스가 공중병력을 이끌고 돌아다니면서 사역마들을 죽이고 있어요. 생각보다 고위급 마법사가 있는 듯 합니다."

던전 밖으로 나왔더니 생각보다 본격적으로 생각해야할 일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보급은 그렇다 치더라도 적이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고 있다는 건 분명 귀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르바스가 훈수하지 않았으면 진짜 몰랐어.'

적과 마찬가지로 중립의 입장에서 우리를 지켜보던 마르바스는 우리 군단을 감시하는 온갖 사역마들의 존재를 밝혔다. 지나가다가 몇몇 잡은 놈들이 있기는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정교하고 대규모로 사역마 감시병들이 우리 근처에 퍼져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기껏 안드라스의 탈을 전부 씌워놓은 것이 의미가 없어지는구나."

서브던전에서 구해 박제한 안드라스의 머리는 좋은 투구였다. 하지만 5천 명 모두에게 탈을 씌울 수는 없었고, 결국 안드라스의 탈처럼 꾸민 가짜 투구를 씌워놓은 경우가 허다했다. 하르파스처럼 후드에 부리를 달아 안드라스 탈인 척 꾸미거나.

"음.... 최대한 빨리 가면 사역마도 의미가 없어지곘지?"

"설마 여기서 더 무리를 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 아니다. 아무리 나라도 100시간 논스톱으로 허리 흔드는 건 무리야."

육체의 피로는 없어도 정신적 피로를 해소할 시간이 필요하다. 꿈속에서조차 나는 나의 여인들을 위해 봉사했으니, 마냥 어제처럼 무작정 달릴 수도 없는 노릇.

그러나 움직여야한다. 휴식은 전쟁 후에 얼마든지 취할 수 있다는 기분으로 지금은 해야할 일을 해야한다.

"에일라가 트랄과 합류했다. 그리고 지금 탐욕의 군단을 상대로 반격의 고삐를 움켜쥐었지."

나의 형제가, 나의 여자가 왕국 반대편에서 열심히 싸우고 있다. 그런데 내가 어찌 가만히 앉아서 누워있을 수만 있으랴. 나만 이렇게 호화로운 의전 차량-골렘이지만-을 타고 가기에는 염치가 없다.

"...그렇지. 마냥 모두가 걸을 필요는 없지."

"또 무슨 생각을 하신 겁니까?"

"아주 효율적인 생각."

동시에, 하루만에 왕도의 앞까지 다다를 수 있는 획기적인 작전.

"모처럼 멀리 이동중인데 카섹스를 안 할 수는 없지."

우리는 하루 휴식을 취하며 카섹스에 필요한 재료를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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