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6회
150일차
후작성의 기사, 디르도 가르불타는 갑작스러운 불난리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느나 정신이 없었다.
"집에 들어가! 안심하고 기다려! 밀밭의 불은 곧 꺼질 것이다!!"
성 밖에서 검에 타오르는 잿더미에 주민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졌다. 자연적으로 일어난 화재치고는 너무나도 인위적인 불길이었고, 하필이면 밀밭에 불이 붙어서 주민들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어떻게 되는 거야, 이제. 저걸로 이번 겨울 나야하는 거 아니야?"
"창고에 비축분 있잖아. 그보다 어떤 멍청이가 불씨를 저렇게...잡히면 사형이겠구만."
"들었나? 성 내에 있던 기사들이 급히 뛰쳐나가는 거. 그게 사실은 마족들의 짓이래."
"거기, 조용!!"
디르도는 검의 손잡이에 손을 올리며 주민들을 위협했다. 기사가 영지민을 상대로 검을 휘두르겠다고 위협하는 건 최악의 선택이었지만, 디르도에게 그걸 신경쓸 겨를은 없었다.
"얌전히 집에 들어가있어! 어서!"
후작령의 급박한 상황으로 인해 몇 주 전까지만 하더라도 수습 기사였던 그에게, 전쟁 중 당황하는 주민들을 진정시킬만큼의 대처 기술은 없었다. 기사가 되었다는 자부심과 부족한 실력은 지켜야 할 이들에 대한 윽박으로 나타났고, 주민들은 기겁을 하며 집으로 들어갔다.
"젠장, 이 난리에 왜 밖에 나오냐고...!"
디르도는 디르도대로 짜증을 부리며 달렸다. 맞은편 광장에는 어느새 술집에서 나온 사람들이 저마다 맥주조끼를 들고 불난리를 구경하고 있었다.
"지금 뭐하는 거야, 당장 들어가지 못해?!"
"거 미안하오. 딸꾹."
광장 분수에 앉아서 불난리를 구경하는 남자는 얼큰하게 취해있었다. 디르도가 자세히 살펴보니, 모험가 길드의 지부장이었다.
"이보시오! 지금 밖은 난리가 났는데 그렇게 태평하게 있을 거요?!"
"......요즘 세상 좋아졌네, 딸꾹. 평기사 나부랭이가 모험가들을 상대로 지랄을 해대고."
지부장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디르도보다 훨씬 더 큰 몸집의 지부장은 디르도를 내려다보며 맥주잔으로 위협했다.
"이 새끼야, 도시에 불이 났는데 어쩌라고. 선량한 시민이 가서 불 끄러 갈까?"
"이, 이...."
"좆같으면 네가 달려가서 불 끄러 가던가, 딸꾹."
지부장의 말에 디르도는 분노가 부글부글 치밀어올랐다. 어디서 모험가 나부랭이 따위가 위대한 후작가의 기사에게 욕지기를 내뱉는다는 말인가.
"이 개같은-"
순간, 지부장이 눈을 가리며 급히 몸을 돌렸다. 지부장의 주변은 빛이 터진 듯 환하게 밝았고, 디르도는 뒤에서 느껴지는 화끈한 열기에 뒤로 고개를 돌렸다.
"뭣."
소리로 표현할 수 조차 없는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인근에서 하얀 버섯구름이 피어올랐다. 하늘로 치솟은 불기둥의 끝에는 하얀 가루들이 불씨에 타들어가며 흩날렸고, 폭발의 여파로 인해 파괴된 건물의 잔해가 주변을 휩쓸었다.
휘이잉---!!
디르도는 자신의 방향으로 날아오는 불덩이를 발견했다. 천장의 잔해에 붙은 불은 꺼질 기미도 없이 빙그르르 회전하며 2층집의 유리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으, 으아아! 당장 집에서 뛰쳐나와!!"
와장창!
"커헉!"
유리창이 깨지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의 짧은 단말마가 울려퍼졌다. 디르도는 황급히 달려 정문을 부숴 집안으로 뛰어들었다.
"으, 으아...."
2층집 안은 참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침대에 누워있던 남자는 불타는 건물 잔해에 배가 꿰뚫려 입에 피로 거품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남자는 다른 이도 아닌 자신이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칼로 위협했던 이들 중 한 명이었다.
즉사.
폭발의 잔해로 인해, 남자는 죽고말았다. 자신이 집 안으로 들어가라고 하는 바람에 죽고말았다.
"읍, 우웨에엑!!"
디르도는 신물을 토해냈다. 자신 때문에 사람이 죽었다는 충격에 휩싸여 죽었는지 살았는지 확인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남자가 손을 경련하며 자신을 향해 뻗고 있었음에도, 디르도는 이미 남자를 죽었다고 단정하며 도망치고 말았다.
"으, 으으, 으아...!!"
혼란과 공포에 빠진 디르도는 집밖의 상황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이미 사람들은 모두 집밖으로 나와 불길을 피해 대피하고 있었다. 폭발이 일어난 곳은 성 내의 식량 저장고가 분명했다.
"씨발, 망했다...."
기사 서임을 받은 영지를 내팽겨치고 도망친다? 그건 준귀족의 작위를 버리고 그냥 평민, 아니 죄수에 준하는 수준으로 전락한다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그런 걸 감수하고서라도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디르도는 혼란에 빠져있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누군가에게 지시를 받던 사람이 스스로 판단하고 움직여야 하는 자리에서 감당할 수 없는 일을 겪게되니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렸다. 디르도는 차라리 누군가 방법이라도 알려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스읍, 스읍.
혼란에 빠진 의식과 달리 몸은 본능에 따라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디르도가 정신을 차린 순간은 코로 드나드는 숨에 까슬까슬한 잿더미가 들어와, 목이 텁해지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커헙, 푸흡! 뭐, 뭐야...?!"
목이 따갑다. 재를 한 입 크게 들이마신 것 같아 괴로웠다. 아직도 불기둥은 산발적으로 치솟아오르기 시작했고, 디르도는 간신히 몸을 일으키는데 성공했다.
두근, 두근.
"......씨발?"
갑자기 이게 왠 날벼락일까. 디르도는 아래에서 점차 달아오르는 듯한 감각에 소름이 돋았다. 왜 하필이면 지금 '색수병'이 '또' 발생한다는 말인가.
"크, 크흐, 흐어억!!"
디르도는 비명을 지르며 바로 앞의 집으로 달렸다. 집안에는 부엌 탁자 아래에 숨어 오들오들 떨고 있는 여인이 있었다.
"기, 기사님?!"
"크아아악!!"
디르도는 여인을 덮쳤다. 불난리에 타오르는 잔해가 유리창을 때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디르도의 눈에는 자신이 손으로 찢어버린 여인의 속살밖에 보이지 않았다.
"아아악! 안 돼! 그만둬요!"
여인은 비명을 지르며 저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불씨가 집 문앞에 떨어져 집이 불타오르든 말든, 디르도는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당장이라도 해결하고자 하는 성욕에 미쳐버렸다.
"싫어어!!"
화르륵. 여인의 비명은 불꽃 속에 사그라들어 조용히 파묻혀버렸다.
* * *
"이야, 아주 활활 타오르는 구만."
식량도 잘 탄다. 집도 잘 탄다. 심지어 성욕도 활활 타오른다.
"밀밭으로 지하수를 빼낸 건 결과론적으로 패착이니라."
밀밭과 함께 난민들을 살리는 판단을 내릴 때 까지는 지하수로의 수문을 개방하는게 완벽한 판단이었으나, 내가 그 판단을 망가뜨렸다. 지하수로의 물이 빠져나간 뒤 비어버린 물로 인해 큰 낭패를 겪게끔, 나는 성내의 주요 시설 중 하나인 식량창고를 터뜨려버렸다.
"당장 우물 물을 길어다가 뿌릴 수도 없고, 그렇다고 마법사들을 동원하자니 쓸만한 마법사들은 이미 전선에 나와있지. 불을 끌 수 있는 소방수가 없는데 어떻게 할테냐."
중세 시대에 불이 나면 누가 소방수 역할을 할까. 당연히 마법사다. 하르파스처럼 몸 안에서 강물을 토해내는 것같은 마법을 가진 존재가 있다면, 소방차가 따로 필요없을 것이다.
"그치만 주인, 그 놈들 다 밖으로 빼냈잖아?"
"그래. 그러니까 빈집털이라는 것이다. 적을 취약하게 만든 뒤에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야말로 전술의 기본."
나는 고개를 돌려, 멍하니 아래를 바라보는 마족 여인에게 불기둥을 가리켰다.
"뭐가 그렇게 놀랍지?"
"...어, 어떻게 저런 상위마법을 사용한 거야? 무슨 수로?"
"과학의 힘이다. 자세한 설명은 할 필요없지만, 상황만 갖춰지면 마법의 힘이 아니더라도 누구나 저런 화력은 낼 수 있지."
시설만 만들어두면 어린 아이가 성냥불만 집어던져도 폭발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었다.
"오히려 묻고싶군. 이 정도 불기둥이면 몇 성급 마법사의 공격이냐?"
"성? ...별 다섯개급?"
"과연. 네 정체를 알았다. 너는 무슨 던전의 주인이지?"
"......와, 이 새끼 봐라. 은근슬쩍 내 정체를 캐냈어?"
"그러는 너야말로 은근슬쩍 자기 정체를 어필하려고 하는 거 아니냐."
시스템에 따른 대화를 받아칠 수 있는 건 시스템을 알고 있는 자 뿐. 라임과 나조차 가늠할 수 없는 강자가 시스템을 알고 있다면 던전 주인일 가능성이 높았다.
'에스투같은 초월자는 아니니까 마음껏 깝쳐야지.'
초월자의 앞에서는 자연히 좆이 고개를 숙인다. 발기하기 이전에 몸이 상대의 수준을 파악하고 본능적으로 세워도 될 상대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것이다. 아주 야아아아악간의 승산이라도 있다 싶으면, 나의 라스푸틴은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나의 판단은 좆으로 할 때가 제일 정확하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여인을 향해, 라스푸틴은 당당히 자기주장을 하고 있었다. 내가 너보다 결코 꿇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세워서 박음직한 존재라고 판단이 선 순간, 이미 이 마족 여자는 내게 순순히 다리를 벌릴 지 아니면 강제로 벌려질 지 두 가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이름을 밝혀라, 던전 주인이여."
"...그냥 밝히기는 싫은데. 뭔가 리드 당하는 것 같아서 싫어."
"오, 리드하기를 좋아하는 건가? 그렇다면 내 위에 기승위로 올라탈 영광을 주도록 하지."
"...야, 여기서 확 떨어뜨려줘?"
여인은 내 몸을 위아래로 흔들어댔다. 명백히 짜증을 부리는 손길에 나는 조용히 여인이 하고싶은대로 몸을 맡겼다. 당장 여인을 덮치고 싸우기에는 전장이 좋지 않았다.
날개도 없이, 하늘을 자유자재로 나는 마인을 상대로 싸우는 건 어불성설이다. 나는 여인이 나를 이리저리 날리는 게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렸다.
"씨이. 너 진짜 뭐하는 놈이야?"
"나의 이름은 라스푸틴. 언젠가 너를 이겨서 네 안에 씨를 뿌릴 남자지."
"장난치면 진짜 떨어뜨릴 줄 알아."
"장난 아닌데. 마족이든 인간이든 엘프든 미인이면 일단 잡아먹고 보는 게 나란 남자라서 말이야. 나는 미식가기도 하지만, 편식쟁이도 아니거든."
여인은 한참동안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세상이 반전됨과 동시에, 나와 라임을 비롯한 슬라임들은 인간들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전이되었다.
"군단장님?!"
"칼을 들지 마라. 손님이다."
나는 여인을 보자마자 칼을 빼든 오크들을 진정시켰다. 여인은 나와 오크들을 빤히 번갈아보더니 피식 입꼬리를 들어올렸다.
"어떻게 이 몸에서 저런 근빵 오크들이 태어나는 거지?"
"넌 어떻게 그렇게 잘 아는 것이냐."
"그야 그쪽이 내 주특기니까. 후후, 자세히 알 필요는 없고, 대단한 걸. 얘, 나 오크 하나만 분양해주라."
"이런 미친 개소리를 지껄이다니, 용서할 수 없다."
나는 당당히 바지를 벗었다. 팬티째로 내려버리자, 여인은 내 자지를 빤히 쳐다보며 몸이 굳었다.
"내 자식들을 데려가고 싶거든, 직접 씨를 받아가야할 지어니!"
"......아, 나 대충 알겠어. 너 유능한 변태구나. 변태인데 유능한 건가. 어느쪽이든 너같은 놈은 처음이라서 제법 재미있기는 한데, 아직은 아니야."
여인은 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올렸다. 내 바지는 자연스레 다시 원래대로 되돌아갔고, 나는 그녀의 마법 실력에 괜히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희 말이야,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무엇을?"
"인간들을 꿰어내고 후작성에 공작을 벌여서 폭발을 일으킨 건 이해하겠어. 그걸 위해 대규모 오크 병사들을 동원한 건 이해하겠어. 하지만 이제 어떻게 살아돌아갈래? 너희가 만든 요새 앞에는 용사가 있을텐데."
"......."
우리에게도 용사가 있다고 받아치고 싶었지만, 굳이 이야기해주고 싶지 않았다. 설령 언젠가 알게 되더라도 굳이 내가 먼저 쫑알거릴 필요는 없었다.
"걱정마라. 우리는 놈들을 피해 다시 돌아갈 길이 있으니."
"어떻게?"
"...알아서 뭐하게?"
"흐흥, 자꾸 그런식으로 얼버부리려고 해도 소용없거든? 어차피 내가 마음먹고 뒤를 밟으면 저승까지 따라갈 수 있다 이거야."
여인은 상당히 자신감이 넘쳐보였다.
"내가 너희한테 나쁜 짓 하려고 하는 것 같아? 나는 그냥 너희가 무슨 방법으로 후작령을 도모하려고 하는 지 궁금한 것 뿐이야. 저어어얼대 해는 안 될 걸? 내 힘 봤잖아?"
동시에 나에 대한 적의는-특히 라임에 대한 적의는 전혀 없어보였다. 저게 만약 연기라고 한다면, 나는 저 연기에 당해 죽어도 억울하지 않겠다 싶을 정도로 당당한 얼굴이었다.
"......진짜 어떻게 하지."
그냥 데리고 들어가기에는 부담스럽다. 그러므로 나는 여기서 강짜를 부리기로 했다.
"만약 네가 진실로 우리 던전을 '구경'만 하려고 한다면, 순순히 나의 문장을 받아라."
"문장?"
"그래, 문장. 우리 군단에 들어오는 손님이라는 의미지."
나는 라임의 가슴을 쓰다듬었다. 라임의 거유가 꿈틀거리더니, 곧 라임의 몸에서 나의 문장-세 개의 인장이 합쳐진 음문이 떠올랐다.
"나는 군단이다."
"......."
여인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