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4회
142일차
인간은 경제활동을 중심으로 하나의 사회로 발전했다.
후작령 또한 마냥 자급자족 할 수는 없기에, 외지의 상단을 상당히 조심스럽게 받아들였다. 발병자가 거의 오천에 육박하는 전염병을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자연히 색수병의 존재는 외지인들에게도 알려졌다.
"그거 참 흥미로운 말이군요. 이 지역 토착병입니까? 흐허허, 그럼 저도 한 번 걸리고 싶으하아아악?!"
외지인들도 어김없이 색수병에 걸렸다. 모두가 걸린 것은 아니었지만, 덕분에 색수병은 지역을 불문하고 걸리는 병이라는 것이 밝혀졌다.
"그럼 색수병은 후작성 밖에서는 안 걸리는 거야?"
"모르지. 여기 있던 사람이 외부로 옮기면 걸릴 수도 있고."
색수병이 만약 사람을 죽이는 병이었다면, 후작성은 이미 공포와 불안에 빠진 사람들로 대혼란이 발생했을 것이다.
"색수병은 병이 아니라 여신의 은총이다!"
"여신께서 걸리라고 만든 열병이니까 신성력이 통하지 않는 거지!"
"가진 새끼들이 뭘 안 다고!!"
하지만 이 엽기적이면서도 상냥한 전염병은 인간의 성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동시에 성기능도 강화해주는 희대의 부작용을 보였다. 누군가들을 중심으로 퍼지는 '여신의 은총' 설 또한 탄력을 받기 시작했다.
그리고.
"후작님, 부디 저희를 받아들여주십시오!"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에서 왔다고 하는 한 상단이 후작성에 들어와 정착을 희망했다.
* * *
<레굴루스 성 응접실.>
"만나서 반갑다. 나는 이므신할 후작 대리. 그래, 멀리서 왔다지."
"네. 라스토이 상단의 주인, 아나르라고 합니다."
"라스토이? 처음 듣는 듣도 보도 못한 상단의 이름인데...?"
"제 어머님이 만드신 상단입니다. 역사가 그리 오래 되지는 않았습니다."
이므신할은 잠시 침묵했다.
"그래,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에서 이곳까지 멀리도 왔군. 굳이 이곳에 정착하고자 하는 이유가 뭔가?"
"백작령이 망했기 때문입니다. 백작은 시체로 발견되었고, 백작 부인은 실종되었습니다. 그나마 저희는 빨리 탈출했기에 화를 피할 수 있었지만...."
"화?"
"예. 마물들이 습격을 했습니다. 그들은 백작성을 무참히 파괴하고, 학살하고, 약탈했습니다. 저도 제 사랑하는 이를.... 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나르의 손가락에는 낡은 반지 하나가 반짝거렸다. 네번째 손가락에 끼운 반지가 상처가 깊게 나있는 것으로 보아, 그녀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조금은 짐작이 갈 정도였다.
"...그래서 그대와 함께 온 이들이 모두 백작성에서 도망친 이들이라는 거군."
"예. 염치불구하오나, 거두어주시길 바랍니다."
살기 위해 후작령으로 도망친 이들이다. 이므신할은 새로이 들어온 영지민들에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이 되었다.
"지금 후작령에는 역병이 돌고 있다. 그래도 괜찮나?"
"그, 기사분들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성욕이 폭발하는 병이라고...."
"그렇다. 발병하는 경우 원치 않는 남자와 하게 될 수도 있다. 그래도 괜찮나?"
"그런 거라면 괜찮습니다. 여신께서 인도해주신 곳이 이곳이니까요. 만약 여기서 병에 걸린다면, 그 또한 여신의 뜻이겠죠."
담담한 아나르의 태도에 이므신할은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 아나르를 대표로 하는 상단-을 빙자한 난민 일행은 정식으로 영지의 주민이 되었다.
"내가 그대들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대들이 스스로 팔 물건들이 있다고 하기에 들인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팔고자 하는 건가?"
"이겁니다."
아나르는 보자기를 꺼내 이므신할의 앞에 풀어헤쳤다. 그곳에는 예쁘게 잘 세공된 보석과 장신구들이 즐비하게 늘어져있었다.
"...음?"
그 중, 이므신할은 눈에 띄는 물건을 하나 발견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형태, 분명 꿈에서 봤던 물건이었다.
"이건 무엇인가?"
"그건...저희 어머니께서 만드신, 애널 플래그라고 하는 겁니다. 착용은 보시다시피...."
아나르는 애널 플래그의 작은 고리를 자신의 귀에 걸었다. 상당히 커보이기는 하지만, 귀걸이는 귀걸이였다.
"이건?"
"애널 비즈라고 하는 겁니다. 이런 식으로 착용합니다."
아나르는 애널 비즈를 자신의 손목에 팔찌처럼 착용했다. 구슬 하나하나가 워낙 커서 조금 불편해보이기도 했지만, 아나르가 워낙 자연스럽게 착용하느라 이므신할은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음...."
"왜 그러십니까?"
"아니, 꼭 뭔가 다른 곳에 쓰일 것만 같은...."
"네? 다른 곳이요...?"
고개를 갸웃 거리는 아나르의 표정에 이므신할은 눈을 질끈 감았다. 요즘들어 색수병 때문에 자신의 머리에 음란마귀라도 들어간 걸까. 눈앞에 펼쳐진 것들을 보면 볼수록 온갖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이건?"
"저온초입니다. 비교적 낮은 온도에서 쉽게 녹는 양초로, 촛농이 피부에 닿아도 화상을 입지 않습니다."
"......크흠. 확실히 그건 좋군."
이므신할은 팔꿈치를 긁적거리며, 도장이 찍힌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그곳에는 [영업 허가증]이라는 문구가 큼지막하게 박혀있었다.
"좋네. 후작령의 주민이 된 걸 환영하네. 부디 번창하기를 바라지."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후작님. 이건 제 작은 성의입니다."
아나르는 보자기를 통째로 앞으로 밀었다. 이므신할은 고개만 가볍게 끄덕이며 하인에게 손짓을 했고, 하인은 보자기를 테이블에서 치웠다.
"그래. 자본금도 있고 팔 물건도 있고...그런데 나중에는 어떻게 할 건가?"
"저희가 만든 제품의 대부분은 마물을 통해 얻었습니다. 마침 비르고 남작령에 던전이 있다고 하니, 이곳의 모험가 분들이 인근 마물을 사냥해 얻는 소재를 가공하고자 합니다. 저희 상단에 소속된 모험가 분들도 있구요."
"호오. 모험가가?"
"예. <골드헤어> 네토랄, <브레이커> 르아다, <친절한 아저씨> 히프노시스까지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
최전선에서는 전혀 듣지 못한 이름이지만, 저리도 자랑스럽게 얘기하고 있으니 분명 이름난 전사들이리라. 이므신할은 떨떠름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라스토이 상단을 맞이했다.
"후작가는 그대들을 환영하네."
"예. 저도 영광입니다, 후작님."
라스토이 상단은 후작가에 자리잡는데 성공했다.
* * *
"섹스 토이들이 보급되는 순간, 바로 로터 분출쇼를 촬영하도록 하지."
"좋은 계획입니다. 분출쇼는 아스모딘으로 하는 건 어떻습니까?"
"왜? 성녀로 덧씌워지지만 인간들 꿈에서 로터 분출은 부끄럽냐?"
"......아스모딘으로 하시죠."
로터 해수분출쇼는 아스모딘을 꿈속으로 초대하기로 결정되었다. 나는 샤이탄과 꿈속에서 찍은 영상들을 잘 갈무리하여 서큐버스들의 꿈 네트워크에 업로드했다.
"과외선생, 아카데미 제복, 수녀, 거기에 메이드. 최대한 중세 감수성에 맞춰서 선택을 한다고 하지만, 역시 마냥 현실에 동떨어지면 그건 또 감이 떨어지는 법이지."
아무리 문화 폭격이라고 해도 차근차근 접근해야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걸 위해 남작령에 했던 것과 똑같은 작전을 한 번 더 펼쳤다.
라스토이 상단.
상단주로 메어리가 아닌 새로운 이들을 동원해 조금 걱정되기는 하지만, 그들은 우리 군단의 이념과 사상에 감동하여 우리 군단에 충성 서약을 맺었다. 인간으로서 오크의 씨로 알을 낳고, 정액이 꾸덕꾸덕 묻은 귀두에 무릎꿇고 키스하는 걸로 맹세를 마쳤다.
"사지타리우스 백작령에서 잡은 이들이니 분명 걸릴 일은 없을테지. 흐흐."
"그래도 걱정이 되기는 합니다. 만약에 놈들이 배신이라도 하면 어찌될런지."
"안에 홀리 음충이 들어가있으니, 배반하려고 하는 즉시 안에서 깨물어버릴 것이다. 그리고 샤이탄이여, 너는 인간에 대해 아직도 잘 모르는 구나. 인간이 가장 적극적으로 동기를 부여받을 때가 언제인지 아느냐?"
"글쎄요. 작전을 성공하고 돌아오면 남자는 엘프를, 여자는 오크를 하루동안 노예로 부릴 수 있다는 군단식 포상입니까?"
"70점이다."
노력에 따른 적절한 보상이 있다면 인간은 강한 동기의식을 가지게 된다. 하지만 마음속 깊이 불만을 가지고 있을, 사지타리우스 백작령에서 사로잡은 인간 포로들을 우리 군단에서 완전히 다루려면 단순한 보상으로는 부족하다.
"샤이탄이여, 몰래카메라라는 걸 알고 있느냐?"
"타인의 야시시한 몸을 몰래 촬영하고 관음하는 행태를 말하시는 겁니까?"
"...그것 또한 몰카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다른 의미다."
인간들을 우리 군단에 포섭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무엇일까.
"[나만 당할 수 없지]. 이른바, 내가 겪은 일을 남도 똑같이 당하게 해주겠다는 생각이니라."
"군단에 의해 범해진 쾌락을 다른 이들에게도 겪게 하겠다라.... 과연. 그거라면 통하겠군요."
"그렇지? 상단으로 픽한 인간 애들은 일부러 그런 애들만 골라서 보낸 거거든."
내가 당한 것을 너도 똑같이 겪어봐야한다. 불합리하고 삐뚤어진 복수심이지만, 그들은 그걸 조건으로 우리 군단에 들어와 다시 태어날 기회와 쾌락을 얻었다.
"인간은 인간으로 다스려야 하는 법. 상단의 녀석들도 이미 충분히 알고 있다. 라스토이가 대중에 보급된다면, 그걸 기반으로 해서 서큐버스들이 딥 페이크를 걸어버릴 것을."
장신구나 공예품, 장식품 등으로 판매를 하지만 실상은 섹스 토이들이다. 라스토이 상단에서 물건을 구경한 이들은 큰 관심 없이 지나치게 되겠지만, 꿈을 꾸고 나면 다들 한 두개는 사들고 집에 들어갈 것이다.
"우리는 성인용품을 파는 게 아니야. 생활용품, 장신구를 파는 거다. 단지 사가는 놈들의 머리에 음란마귀가 가득해서 자기들 멋대로 쓰는 것 뿐이지."
"예, 그래서 루시펠의 안에 오이랑 당근, 가지를 쑤셔박았습니까? 덕분에 성녀는 먹을 걸로 자위하는 파렴치한 년이 됐습니다."
"흐흐, 그거 일단은 한 일주일 정도는 업데이트 하지 마라. 라스토이 상단이 대량으로 사재기 하고 난 다음, 꿈을 퍼뜨리고 살짝 비싼 값에 판매해버리는 거다."
소비자들의 구매욕구를 높이는 건 상행위의 기본이다. 매점매석에 독과점까지 해버리면 좋으련만, 그래도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해먹는 것이 중요했다.
"종교. 경제. 문화. 세 방향에서 동시에 공략이 들어가는 만큼, 후작성도 시간이 지나면 틈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 슬슬 때가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래. 놈들은 우리에게 시간을 주지 않을 것이다."
토벌대.
안다이할의 기사단을 제압했으나, 아직 우리에게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그러므로 시간을 끌기 위해서는 새로운 수단이 필요했다.
"어그로 끄는데 던전 만큼 좋은 방법이 또 없지."
이이제이.
적의 전력을 줄임과 동시에, 후방을 안정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성공하면 좋으련만."
현재.
우리 던전은 재개장을 위해 한창 리모델링 중이었다.
* * *
<그 시각, 모험가 길드 레오 지부.>
"그 분은 언제 오시려나...."
"누구 얘기하는 거야?"
"아, 그런 분이 있어. 기사님이었는데, 자지가 컸거든."
접수원은 한숨을 내쉬며 테이블에 엎어졌다. 길드의 접수원이 안내데스크에서 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들어오는 손님이 워낙 적어서 여유를 부리기에는 충분했다.
"남작령으로 바로 들어가는 분들은 두문불출이고...모험가 분들은 죄다 토벌대에 참가하려고 하고...."
"대규모 토벌이니까. 보수도 짭짤하고, 대량으로 가는 만큼 자기 목숨도 그만큼 지키기 쉬울 거 아니야?"
"그렇지. 하아, 뭐 새로 일 생기는 거 없나...?"
딸랑딸랑.
종이 울렸다. 접수원들은 자세를 바로하며 접객용 미소를 지었다.
"어서오세요!"
"......흠흠, 혹시 지도를 구할 수 있는가?"
검은 로브로 얼굴을 숨긴 여인은 모험가 길드의 패를 보이며 데스크 앞에 섰다. 그녀는 누가봐도 정체가 의심스러웠다.
"지도는 왜요? 그냥은 드리지 못하는데."
"그, 다른 게 아니고, ...그냥 주면 안 되나?"
"동패를 가지고 계신 분이라고 해도 지도잖아요. 그냥은 드리지 못해요. 왜 그러시죠? 혹시 후작성을 몰래 탈출하려는...."
"아, 아니야! 그런게 아니라...."
접수원은 이 어리숙한 여인의 속내를 직감했다.
"혹시 뭐 좋은 거 발견하셨어요? 혼자서는 위험해요~ 길드에 호위 용병을 구하거나, 아니면 길드에 의뢰를 해주시는 건 어때요? 섭섭찮게 대우해드릴게요. 후후."
뭔가 보물을 발견했거나, 아주 중요한 정보를 손에 넣었다는 것을.
"......외출 허가증을 받고 인근 숲을 돌아다녔는데, 뭔가 이상한 걸 봐서 말이야."
움찔. 접수원은 눈을 빛내며 여인을 추궁했다.
"이상한 거요? 뭔데요?"
"...그, 그냥은 말 못 해!"
"그러면 정보를 파시겠어요? 정보길드만큼은 아니더라도, 모험가 길드에서도 나름 소정의 정보료를 제공한답니다."
"......그, 확실하지는 않은데 괜찮나?"
로브의 여인은 우물쭈물하며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접수원은 약간의 금화가 든 주머니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정보의 가치에 따라서 금화가 될 지, 은화가 될 지는 내용에 달려있어요~"
"아니, 마석으로 하지. 내게는 금화보다 마석이 더 가치가 있으니."
"...흐흠, 뭐, 마법사신가봐요. 네, 마석으로 드릴게요. 그래서 어떤 정보예요?"
"그...."
여인은 손으로 턱 아래를 들어올리며, 지도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그, 연구용 버섯을 채집하러 갔는데, 머리에 뿔달린 여자들이 이쪽으로 사라지는 것을...."
"......!!"
잠시 뒤.
길드에 의해 급히 파견된 모험가들은, 숲속에 생긴 작은 토굴을 발견했다.
"포털...!"
그 토굴의 끝에는 어딘가로 통하는 기이한 마법진이 하나 열려있었다.
"중급마석 존맛."
라임은 정보료로 뜯어낸 중급마석을 크게 베어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