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2회
127일차
결혼.
남녀가 서로를 의지하고 평생의 반려로 함께 지지하고 살아가겠다는 신성한 의식.
그리고 그 의식에는 당연히 예복이 필요하다. 세계 그 어떤 문화를 가진 곳을 찾아보더라도 '신부의 결혼식 예복'은 평범한 옷과는 다른 특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코스프레가 만든 <웨딩 드레스>는 이 세계의 예복과는 다르다.
라스푸틴의 현대 감수성이 듬뿍 들어간 하얀 순백의 웨딩드레스는 여성으로 하여금 한 번은 꼭 입어보고 싶은 이국적인 환상을 심어줌과 동시에, 남성에게는 본래의 목적에 맞게 '꼴리게' 만드는 복장이었다.
- 엘프 여왕의 정식 복장이니라!
루나는 그걸 입고 사방을 돌아다녔다. 라스베가스에서 라스푸틴의 던전을 넘어, 포털을 지나 그레모리 던전에서 알로켄 던전에 이르기까지 숱한 이들에게 자신의 웨딩 드레스를 과시했다.
- 그거...결혼식 예복 아니야?
여자들 특유의 감이라는 것이 있다. 그레모리를 비롯한 여러 여인들은 드레스 특유의 특징, 순결하고 고결함을 상징하는 듯한 하얀 색에 본능적으로 깨우치고 말았다.
척 보기에도 코스프레가 한 땀 한 땀 장인 정신을 발휘하여 만들었을 것만 같은 하얀 드레스는 결코 평상복이나 제복같은 복장이 아니라는 걸. 하얀 면사포와 흰 장갑, 그리고 치마 아래에 시스루로 비치는 하얀 가터벨트와 스타킹은 분명 '결전의 날'을 위해 만들어진 의복이었다.
그리고 여기 한 명, 라스푸틴을 제외하고 유일하게 <웨딩 드레스>의 실체를 아는 자가 코스프레의 작업실을 습격했다.
쾅!
"코스트 윰 프레----!!"
샤이탄은 머리 끝까지 시뻘게진 얼굴로 작업실 문을 열었다. 막 따뜻한 차를 한 잔 들이키고 눈을 붙이려고 했던 코스프레는 예상치 못한 존재의 습격에 기겁했다.
"샤이탄 님...? 여긴 어쩐 일로?"
"루나가 입은 거 봤습니다!"
콰득. 샤이탄은 코스프레의 멱살을 잡아 들어올렸다. 겉보기에는 젊은 이가 노인을 상대로 패륜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모습이었지만, 종족의 특징을 생각하면 둘의 나이는-
"큭, 커헉, 노, 놓아주세요...!"
"어떻게 그런 걸 만들 수 있습니까?! 그것도 루나만!"
샤이탄은 울 것만 같은 얼굴로 코스프레를 앞뒤로 흔들었다. 야밤에 습격을 당한 코스프레로서는 황당하기 그지 없었으나, 샤이탄의 절박함이 조금은 이해가 갔다.
"오, 오해입니다!"
"뭐가 오해란 말이죠...?"
부서진 문 너머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렸다. 코스프레는 샤이탄 너머 하나 둘 들어오는 존재들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어, 륜 님? 거기에 그레모리 님에다가 라임 님까지...?"
"샤이탄에게 다 들었음. 설명 바람."
"안 그러면 아저씨가 그렇게 좋아하는 그린엘프로 만들어 버릴지도 몰라요~"
뒤따라온 세 여자는 코스프레의 주변을 포위하며 그를 압박했다. 코스프레는 테이블 아래에 장착된 긴급 신고 장치를 떠올렸으나, 그 장치로 그린엘프 경찰을 불러봐야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흠, 흠, 뭔가 재밌는 이야기가 들려서 왔더니...."
"나, 나는 그냥 따라온 것 뿐이라고.... ...근데 그런 장비는 어떻게 만들었어?"
검은 조인과 붉은 드워프도 합류했다. 코스프레는 더이상 버티다가는 자신이 진정으로 암컷이 될 것 같은 상황에 결국 체념했다. 지금은 남자니까 군단장의 마음에 공감하며 의류를 만들어내지만, 여자가 되면 군단장의 뜻에 공감할 수 없는 상태로 이상한 옷을 만들 게 분명했다.
"알겠습니다. ...이건 군단장님께 비밀입니다."
샤이탄은 코스프레의 멱살을 놓았다. 그는 차를 홀짝이며 집무실 벽에 선 채, 쓴웃음을 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결혼식 예복이라는 건 말입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무슨 개소리야?"
"남녀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대사라고 할 수 있는 의식인데, 지금의 결혼식은 그냥 조금 좋은 원단을 입고 혼례를 치르는 정도가 다입니다. 귀족들이나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지, 평민들은 그냥 조금 고급스러운 실크옷을 입게 되고, 그걸 나중에는 일상복으로 활용하지요."
코스프레의 딴 소리가 시작되었지만 그 누구도 쉽사리 그의 말을 막을 수 없었다.
"그래서 만들었습니다. 흰색 팬티, 스타킹, 가터벨트. 군단 내에서 상대적으로 가치가 떨어지는 하피실로 만든 옷들을 어떻게 하면 널리 퍼뜨릴 수 있을까. 바로 이것입니다."
코스프레가 손뼉을 치기 무섭게, 반대편 창고에 있던 그린엘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냈다. 어깨를 드러내고 큰 가슴을 강조하면서도, 어딘가 정숙하고 고결하며 순결한 이미지를 주는 의복에 여인들은 감탄사를 참지 못했다.
"새로운 결혼식 예복. 귀족 평민 가릴 것 없이, 금화 한 닢만 지불하면 누구나 입을 수 있는 옷. 여러분은 결혼을 하지 않아서 모르겠지만...결혼이라는 것은 정말 중대사입니다. 결혼식 한 번을 망치면 평생동안 바가지를 긁히게 되죠."
"그건 설마...."
"예. 그 분께서는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결혼식을 생각하고 계셨습니다. 크흠.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여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멎쩍게 웃었다.
"흐흥, 귀여운 자식.... 앞에서는 아닌 척 하면서 뒤로는 이런 응큼한 짓을 벌이려고 하고 말이야."
"어, 어쩔 수 없네요! 이런 거라면 어쩔 수 없죠."
이 자리에 있는 이들만 하더라도 여섯이 넘고, 이 자리에 없는 이들만 해도 몇이 되고, 심지어 앞으로 더 늘어날 가능성도 있지만, 막상 꿈에서나 생각하던 것을 라스푸틴이 어느정도 생각하고 있다는 것에 쑥쓰러워진 것이다.
"루나는 그럼 바보같은 짓을 했네? 나중에 보여줄 걸 지금 먼저 보여줘버린 거잖아."
"......후후후, 그렇군요. 지금 당장은 앞서나간 것처럼 보여도, 나중에 할 때는 땅을 치고 후회할 겁니다. 왜 내가 그 때 미리 입은 걸 보여줬을까 하고."
혼자서 부정출발을 한 이에 대한 성토 여론이 조성된 가운데, 코스프레는 손뼉을 쳐서 이목을 집중시켰다. 그에 그린엘프들이 하나 둘 치마를 걷어올리기 시작했다.
"후후후, 남자를 지옥으로 빠뜨리게 하는 옷이랍니다~"
"보시다시피."
"어우야."
"세상에나...."
웨딩 드레스 아래, 하얀 팬티와 스타킹, 가터벨트는 조화를 이루며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분명 속옷을 보이는 음란한 행위이건만, 여인들은 그게 성스럽다고 생각하며 침을 삼켰다.
"군단장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웨딩 드레스라는 옷은 바니걸보다, 오피스룩보다, 라텍스 타이즈보다 가장 음란한 옷이라고."
"어째서...? 결혼식 복장이라며?"
"군단장께서 말씀하시길...아뇨, 이것만큼은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말할 수 없습니다."
코스프레는 선을 그었다. 여인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지만, 코스프레는 물러서지 않았다.
"종족과 주종을 뛰어넘어, 사내 와 사내로서 한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착각일까.
창문에 비친 은색 달빛은 코스프레를 지키듯 반짝이고 있었다.
* * *
<그 시각, 알로켄 던전 입구 황야.>
"우오오옷?!"
하늘에서 별이 떨어진다. 유성우와도 같은 별빛은 신성력의 탄환이었다.
"아하하!"
"웃지마, 멍청아!"
"오빠, 달려어어어!!"
"그건 또 어디서 들은 말이야?!"
나는 루나를 안아들고 황야를 달려야 했다. 루나는 내게 공주님처럼 안긴 채 깔깔거리며 웃기만 했다.
"쟤 좀 봐! 지금 빡쳐서 눈 돌아간거!"
"야! 용사도 사람이야!"
"죽어라, 이 더러운 년놈들!!"
복수심에 눈 먼 용사는 이제 질투심에 미쳐버리고 말았다.
"내 남편은 죽여놓고 지들끼리는 하하호호 하며 웃다니, 용서할 수 없어!!"
검은 로브와 하얀 웨딩 드레스. 누가봐도 결혼식을 위한 예복같은 복장에 미르망의 눈은 완벽하게 뒤집히고 말았다.
"이 개같은 놈들! 앞에서는 조숙한 척 하겠지! 하지만 밤이 되면 침대 위에서 뒹굴며 질펀하게 임신섹스 할 거라고 외치는 음란한 변태같으니!"
"뭐래! 자기도 남편이랑 그랬으면서!"
"내 남편은 너희들이 죽였어!!"
"어쩌라고! 나는 내 남편 여기 있는데?! 꺄하하!"
루나는 미르망을 도발했다! 효과는 성공적이다 못 해, 미르망을 머리 끝까지 화가 나게 만드는 역효과를 일으켰다.
"여신이시여!!"
미르망이 외치는 여신은 질투의 여신이라도 되는지, 검은 하늘은 더욱 많은 별빛으로 물들었다. 루나를 안고 달리는 나로서는 절로 한숨이 나오는 양이었다.
"저거 다 떨어지면 황야가 남아나지를 않겠는데?"
"어머, 그러면 어쩌니...? 설마 나보고 싸우라는 건 아니지?"
루나는 내 볼에 키스를 하며 베시시 웃었다.
"나 이거 결혼식 때까지 간직하고 싶은데?"
"누, 누가 결혼한다고 얘기나 했나?!"
"흐흥, 하지만 자지는 솔직한 걸? 아니면 이렇게 얘기해줄까? 나, 네 자식을 낳고 싶어."
"끄으응!"
루나는 적을 향한 도발만 하지 않았다. 나를 상대로도 도발을 일삼았고,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나를 화나게 만들었다.
"생각해봐. 낮에는 만인의 축복을 받던 엘프 여왕이, 밤이 되면 오크의 자지 아래에 깔려 앙앙 거리는 거야.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 드레스를 걷어올리고, 가터벨트는 그대로 두고 팬티만 아래로 내린 채 뒤에서 자지를 찌르는...꺄흥!"
"우오오?!"
파바바박! 은빛 화살이 내 귓불을 스쳤다. 화끈한 감각에 고개를 들어올리니, 영혼이 나간듯한 미르망이 우리를 향해 석궁을 겨누고 있었다.
"하, 하하, 하하.... 내 남편은 죽여놓고 지들끼리 꽁냥거리시겠다...?"
"어머, 꼬와? 그런데 어쩌지?"
쪽. 루나는 내 목덜미에 키스하고는 미르망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너는 남편을 잃었을 지 몰라도, 나는 남편을 가질 건데? 아항, 그렇구나! 남편을 잃어서 분노하는 게 아니라 밤에 자신을 안아줄 자지를 잃어서 슬픈 거구나?"
"개소리하지마!"
"저거봐.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 했어. 그치, 자지야?"
"...그런 거라면 어쩔 수 없지."
이 얼마나 음란하기 짝이 없는 과부용사란 말인가. 나는 루나의 도발에 표정을 일그러뜨리는 미르망을 보며 다시금 자지가 솟구쳐올랐다. 안그래도 루나 때문에 달아오른 자지가 더더욱 딱딱해졌다.
"루나. 안되겠다. 싸우자."
"뭐? 싸자가 아니고?"
"싸기 위해서 싸우는 거지."
싸는 대상은 정해져있다. 내 시선이 미르망을 향하자, 루나는 볼을 부풀리며 가슴을 치대기 시작했다.
"뭐야, 코스프레 녀석. 말이 다르잖아. 이거 보여주면 바로 덮칠 거라더니."
"다른 건 몰라도 이것만큼은 끝까지 미뤄둬야지. 허니문 베이비라고 들어는 봤냐? 결혼식 첫날밤에 섹스해서 아이를 가진다는 의미인데...."
"아아악!!"
미르망이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아닌 척 하면서도 우리의 대화를 전부 듣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음, 루나야. 역시 저거 자기 자지가 사라지니까 히스테리 부리는 게 맞는 것 같다."
"이 개같은 마족들! 뭐?! 결혼식 첫날밤에 생긴 아이?! 그래! 그이도 그랬어! 그 사람도 그랬다고!"
휘이잉---
하늘에서 별빛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미르망이 화를 낼수록 더 많은 양의 별빛이 떨어지는 통에, 나는 결국 루나를 바닥에 살포시 내려놓고 도끼를 움켜쥐었다.
"이렇게 별이 많이 떨어지는 건 또 처음이군."
"별이 아니잖아?"
루나는 한 손은 자신의 하복부에, 그리고 다른 손은 하늘을 향해 뻗었다. 그녀의 하복부에서 반짝이는 성흔은 시스루 너머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일부러 루나 전용으로 디자인한 웨딩 드레스라, 성흔이 자리잡은 곳은 일부러 시스루로 디자인해놓았다.
파삿. 성흔의 빛이 시스루 너머로 빠져나와 루나의 손에 크게 맺혔다. 자신의 키와 비슷할 정도의 아름다운 활은 마치 여왕의 상징과도 같았다.
"어머, 자지야. 이거 반투명하게 해놓으니까 성흔도 알아서 빠져나오네? 예전처럼 옷 찢어지는 줄 알았는데."
"성흔도 꼴림 포인트를 아는 거지. 근데 그러라고 아랫배를 뚫어놓은 건 아니긴 한데...흐흐흐."
"그럼 무슨 짓을 하려고 그랬을까~"
루나는 하늘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성검의 폭격과 마찬가지로 은빛으로 빛나는 화살이 유성우를 겨눴다. 나는 루나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귀기어린 미르망의 독기는 괜히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신성력이랑 신성력이랑 부딪히면 누가 이기지?"
"저쪽은 그냥 쌓여있는 신성력이고, 이쪽은 여신의 힘을 직접 받고 있어. 이 경우에는...."
팡-!
루나는 마나로 이루어진 활시위를 놓았다. 은빛의 화살이 하늘로 솟구치는 모습이, 예전에 레비즈가 성창을 꽂았던 것을 연상케했다.
"누가 더 여신에게 사랑받는지, 그 대결이야."
지상에서 쏘아올린 은화살, 하늘에서 떨어지는 별빛의 화살.
"그럼 내가 이기는 게 당연하잖아?"
여신에게 직접 성흔을 받은 이와, 신성력을 저장하고 있을 뿐인 성검 사용자의 싸움. 하늘에는 은빛의 달이 지상을 비추고 있다.
"독수공방하는 미망인, 그리고 앞으로 매일같이 아이를 낳을 예비신부. 여신이 누구를 더 예뻐하시겠어?"
은빛의 궤적이, 별빛을 모두 격추하여 하늘로 솟구쳐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