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1회
127일차
# 2302
<알로켄 던전 밖, 입구 근처 황야.>
"슬슬 오겠군."
나는 미리 알로켄 던전의 입구까지 나와 대기했다. 우리 던전을 상대로 그릇된 복수를 행하려는 과부용사를 상대하기 위해, 전신무장을 한 채 직접 황야에 섰다.
라스타킹 이너 아머, 클리어.
바퓰라 가죽으로 엮은 레더 아머, 클리어.
코스프레가 한 땀 한 땀 엮어서 만든 로브, 클리어.
그리고 로도페리가 만든 희대의 역작-흑요석 쌍날도끼, 클리어.
샤이탄이 인도한 꿈속에서 충분히 쉰 덕분에, 나는 갓 깨어나 멀쩡한 정신으로 과부용사를 맞이할 수 있게 되었다. 엡실론 요새부터 던전의 입구까지는 그리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금방 와야 하는데 왜 아직까지 안 오는 거지...?"
모처럼 급하게 나와 미리 준비한 내가 다 무안해지게, 과부용사 미르망은 나타나지 않았다. 시간상 지금쯤 신성력으로 만들어낸 페가수스를 타고 황야게 나타나야 하건만, 그녀는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설마 길을 잃었다거나 딴 짓을 하는 건 아닐테고...."
용사의 힘을 사용하다가 지쳐서 쓰러진 걸까? 그런 것 치고는 복수심에 상당히 눈이 멀어있다고 했다.
"안드라스가 정찰에 성공해야할텐데."
퍼드득, 퍼드득.
내가 생각하기 무섭게, 하늘에서 안드라스가 검은 날개를 펄럭이며 내려앉았다. 그녀의 오른쪽 어깨는 불에 지져진 것마냥 피부가 벌게져있었다. 신성력의 공격에 당한 흔적이었다.
"어떻게 된 거지? 괜찮나?"
"용사에게 당했어. 아직 엡실론 요새에 있어."
"요새에? ...일단 상처를 덮자. 마액을 바르겠다."
나는 슬라임 껍질 사이에 넣어둔 마액을 안드라스의 어깨에 넓게 펴발랐다. 따로 치료 효과가 있는 건 아니지만, 마액 속 마기를 머금은 마나가 피부에 남은 신성력과 부딪혀 중화되었다.
"아윽."
"따가워도 참아라. 보아하니 노리고 쏜 것 같은데...직격을 피한 것 만으로도 다행이다."
"흐흥, 나 죽으면 부활시켜 줄 거야?"
"당연한 소리."
그에이와 MFM 난교 전용이라고 한들, 안드라스가 내 부하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최초의 하피 시절부터 우리 군단의 식량 사정을 책임져준 그녀를 한 번 죽었다고, 최상급 마석을 많이 소모한다고 버릴 수는 없다.
"일단 돌아가라. 상처를 치료해."
"보고는 끝까지 하고 가야지. 과부용사 말이야, 요새를 무덤으로 바꿔놓았어."
"무덤?"
"그레모리 사단이 요새에 버리고 온 시체들 있잖아. 그걸 전부다 한 명씩 묻어주고 있어."
"...어? 걔들 분명...."
"복상사로 보내주고 머리는 없애버린 것들 말이야."
로도페리와 드워프들을 사로잡고 사지타리우스 백작을 죽인 우리는 엡실론 요새에 자리잡은 이들을 어떻게 처리할까에 대하여 깊은 고민을 했다.
이전처럼 과격하게 죽이는 건 너무 잔인하니, 그래도 사로잡은 적을 보내줄 때는 인도적으로 보내주는 게 어떻겠느냐. 그래서 엡실론 요새를 점령한 이후, 포로들을 지하 감옥에서 전부 여신 곁으로 보내버렸다. 라스로 보내버렸다.
"죽은 놈들이 하나같이 전부 뿅가죽은 얼굴이라서 일부러 목을 잘라뒀었는데...."
"머리는 다 불태웠다고 해도, 몸통은 남겨뒀잖아. 뿅가죽은 구울 부대를 쓰기에는 오만의 사단 면이 서질 않는다면서."
구울은 공포의 대명사다. 하지만 그 구울들이, 좀비들이 모두 아헤가오 더블피스를 하는 얼굴로 사람들을 덮치는 건 어떤 느낌일까. 성기도 없는 구울들이 인간을 덮쳐 먹으려는게 분명 성적으로 잡아먹는 것처럼 비춰지리라.
"그걸 전부 땅에 한 명씩 묻고 있더라. 나보다도 손목 얇은 애가 신성력으로 삽을 만들어서."
"......음, 기다려주도록 하지."
단순히 복수심에 눈이 먼 것 같지는 않다. 만약 우리 군단 전체에 복수를 하겠다며 복수심에 눈이 멀었다면, 시체고 나발이고 바로 우리 던전을 향해 달려왔을 것이다.
그런데 시체들을 일일이 하나씩 묻어주고 있다?
'착한 것 같은데?'
신성력을 사용하는 여성 적을 최근에 본 경험이 성녀라서 그런지 몰라도 나도 모르게 고깝게 바라보고 있었나보다.
"심성이 그리 나쁘지는 않은 것 같군."
"그래서 어떻게 할 거야? 죽이려고?"
"마음도 착하고 가슴도 착하다고 했지? 아아, 그녀는 분명 좋은 어머니가 될 것이다. 크흐흐."
"...어떤 생각 하는지 표정으로 다 드러나네. 읏."
안드라스는 어깨를 붙잡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마액 덕분에 그녀의 피부는 더이상 괴사하지 않았다.
"쉬어라. 상처입은 피부는 요양하면 회복될 것이다."
"알았어. 하아...조심해."
안드라스는 비틀거리며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이미 원본 안드라스가 낳았던 양보다 더 많은 알을 낳아 우리 군단의 식량사정을 책임지느라, 안드라스-Lv.57-는 레벨이 그다지 높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스친 것 만으로 저렇게 상처를 입는다고?'
그레모리에 이어 안드라스까지. 신성력에 크게 저항력이 없는 이들이 상처입은 모습에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이러다 잘못하다가는 복수귀 용사에게 우리 던전이 쓸리는-
"아니, 그럴 리가 없지."
마왕군에게 마을이 쑥대밭이 된 복수귀 용사가 마왕을 물리치고 복수에 성공하는 클리셰는 어디까지나 마왕군이 먼저 조용한 마을을 건드렸을 때나 일어날 일이다.
"남편 뒤진 게 어디 우리 잘못인가? 우리 던전에 멋대로 침입해서 광석 털려고 했던 놈 잘못이지."
이번 처럼 인간들이 먼저 던전을 털러와서 혼쭐이 난 뒤, 거기서 살해당한 이의 가족이 복수하겠다고 성검을 든 경우는 여신조차도 봐주지 않을 것이다.
"주거침입, 재물손괴. 복상사로 보내준 것 만으로도 감사해야 하거늘...."
남의 집에 들어와 집주인을 죽이고 재산을 훔쳐가려고 한 자다. 때려죽일 걸 참고 쾌락 속에서 죽게 해준 것 만으로도 우리는 분노를 삭혔다.
"그래. 모르니까 그런 거겠지."
백작 부인이라고 했으니, 자세한 내막에 대해서는 알 수도 있고 모를 수 있다. 인간 귀족적으로 생각하면 백작이 건 싸움은 일종의 영지전이고, 백작은 영지전에 패배하여 죽었다는 것을.
"몰라서 하는 실수는 용서할 수 있다."
그런 개념을 모르고 단지 마왕군이라서 무조건 없애야 한다고, 죽은 남편의 복수를 해야한다고 생각한다면 가르쳐줘야한다. 그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죽은 남편을 잃은 것에 대한 분노는 우리에게 향할 것이 아니라, 죽은 남편이 던전의 광맥을 노리게 만든 자에게 향해야 하는 것을.
"드워프 국왕."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에 알로켄 던전에 매장된 광맥의 존재를 알려, 던전을 털게 바람을 넣은 이에게 향해야만이 정당한 분노다.
'실은 로도페리가 바람을 넣은 거지만.'
로도페리에 대한 체벌은 이미 내가 다 내려놓았으니, 과부용사는 로도페리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오히려 드워프들을 파견한 드워프 국왕을 향해 성검을 들어올려야한다.
"로도페리를 도우라고 드워프들을 파견한 것 자체가 우리 던전을 털겠다는 것."
그러므로 드워프 국왕에게는 책임이 있다. 딸 간수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히려 우리 던전을 공략하라고 병력을 지원한 것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한다.
"흐흐. 말로 잘 타일러야지. 드워프 국왕을 성검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말이야...."
그를 위해서는 먼저 과부용사의 분노를 잠재울 필요가 있다. 즉, 과부용사를 힘으로 제압할 필요가 있다. 나는 그걸 위해 던전에서 나와 황야에 섰다.
"얘, 나 왔어."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으로 나온 기분은 어떠냐."
"별반 다를 건 없지. 에일라 대신 라스베가스에서 죽치고 앉아있느라 계속 하얀 상태였는 걸."
"흐흐, 그래도 이렇게 전투는 처음-"
나는 고개를 돌렸고, 말문이 막혔다. 루나가 입고 온 전투용 복장은 내 상상을 초월하는 복장이었다.
"너...도대체...무슨...?"
"라스베가스에 있으면서 코스프레랑 이야기를 할 일이 많았지. 이야, 그 인간도 상변태기는 하지만 너도 개변태더라? 나한테 이런 옷을 입힐 생각을 하고."
"어, 어째서...!"
나는 좌절했다.
"이건 '그 날'까지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해뒀건만...!"
"흐흥, 코스프레 말이 틀리지는 않았네. 보자마자 바로 발기할 거라더니. 발기가 아니라 여기서 엎드리게 해서 박겠는걸?"
나는 루나를 차마 쳐다볼 수 없었다. 루나는 나를 상대로 가장 효과적인 동시에, 가장 나를 공포와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옷을 입고 나왔다.
* * *
저벅, 저벅.
미르망은 배를 움켜잡으며 황야를 걸었다. 이미 밤은 늦었고, 달과 별만이 반짝이는 하늘은 너무나도 어둡고 황량했다.
"하하, 하."
미르망은 외로움에 눈물이 나왔다. 시린 옆구리를 따뜻하게 데워주던 남자는 이미 싸늘한 주검이 되어 무덤에 묻혔다.
- 이 싸움이 끝나고 나면, 다시 한 번 더 사랑한다고 말할게.
던전을 정벌하고 돌아오겠노라, 그리고 태어날 아이가 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랄 수 있게 하겠노라 호언장담한 그의 얼굴이 떠올랐다. 로도페리라는 드워프 공주와 함께 떠나던 그의 인자하면서도 애틋한 얼굴이 다시금 미르망의 눈앞을 가렸다.
"윽, 흑, 흐끅."
하지만 곧 미르망의 눈앞에는 그리도 잊고싶었던 장면이 다시금 떠올랐다. 어두운 집무실 한 가운데, 사방에 뿌려진 하얗고 뿌연 액체 사이에 발가벗겨진 시체는 도저히 잊을래야 잊을 수 없었다.
"당신...!"
남자는 몽마들에게 정기가 빨려 죽은 이들마냥 혀를 내밀고 눈이 뒤집혀 있었다. 심장은 뛰지 않았고 사후경직으로 몸은 딱딱하게 굳어있었으며, 하필이면 그곳이 부풀어올라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복수...꼭 해줄게요...!"
네 남편 쩔더라. 천사의 날개를 단 마족은 미르망을 조롱하며 폭사했다. 그 자가 그레모리라는 존재이며, 분신을 만들어내는 자라는 건 이미 죽은 남편의 서신을 통해 몇 번이고 전해들었다.
"당신 대신에...그 년의 보지에 성검을 쑤셔버리겠어요...!"
미르망의 눈에 분노가 다시 차오르기 시작했다.
"그레모리...그레모리...!"
어떻게 엡실론 요새의 이들에게 들키지 않고 백작성 집무실에 백작의 시체를 내려놓았는 지는 알 수 없었으나, 시체를 놔둔 것도 백작을 시체로 만들어버린 것도 모두 그레모리가 저지른 짓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복수, 복수할 거야...!"
미르망의 눈에 서서히 핏발이 서기 시작했다. 손등에 빛나는 은색의 성흔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엡실론 요새의 이들을 모두 묻고 황야를 걸어온 끝에, 미르망은 드디어 던전의 입구로 들어가는 평야에 도착했다.
"......."
누군가 있다. 마치 미르망을 마중나오기라도 한 듯, 검은 로브의 오크는 거대한 양날도끼를 땅에 박은 채 가만히 서있었다.
"만나서 반갑다, 성검의 용사여."
로도페리의 도끼였고, 미르망은 직감했다. 저자가 흑막이다. 그레모리보다 더 강하다는 건 피부로 느낄 수 있었고, 성검의 용사로서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는 라스푸틴. 그레모리의 주인이다."
"......그레모리 내놔. 아니, 필요없어. 다 죽여버릴테니까."
미르망이 손을 하늘로 뻗었다. 그녀의 손등에서 뻗어나온 신성력의 빛은 미르망의 팔 위에 새로운 형태로 내려앉았다.
"...석궁?"
"그레모리의 주인이라고 했지? 죽어버려."
미르망은 손을 전방으로 뻗었다. 시위에 은빛의 신성력이 볼트처럼 맺히자마자 직선으로 쏘아졌다.
"흥!"
오크는 양날도끼를 들어 은빛 볼트를 쳐냈다. 신성력의 힘에 당할 법도 하건만, 오크의 전신에서 피어오르는 붉은 아지랑이는 신성력을 상쇄시키는 듯 했다.
"강하군. 하지만 용사여. 복수를 위해서 왔다면, 왜 우리의 복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거지?"
"무슨...소리야?"
"사지타리우스 백작을 비롯한 인간들은 우리 군단의 병사들을 죽였다. 집에 돌아가면 여우같은 마누라가 있던 녀석도, 토끼같은 자식이 기다리고 있던 녀석도 모두 죽었어! 인간들의 손에 처참하게 죽었다!"
"그래서 죽였다는 거야?!"
"당연하지!"
미르망은 말문이 막혔다. 오크는 너무나도 당당해보였고, 그게 미르망의 분노를 더욱 일으켰다.
"마족 따위랑 대화를...!"
"못 봐주겠네. 저게 성검의 용사? 그냥 무기에 휘둘리는 미친 년이잖아."
또각, 또각. 오크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 달빛에 비친 금발의 엘프는 오크와 팔짱을 끼며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우리 둘이서 싸우면 이기겠다, 자지야. 그치?"
"아, 아아, 아아아...!"
미르망은 금발 엘프를 위아래로 훑었다. 반투명한 베일을 머리에 두르고, 어깨와 가슴을 훤히 드러낸 하얀 드레스에, 드레스 끝자락은 레이스가 치렁치렁 달려있고, 스쳐지나간 발치에는 하얀 구두를 신고 있었다.
"쟤 혼자서 우리를 어떻게 이기겠어?"
"아아아아아아악!!!"
마치 결혼식의 예복과도 같은 모습에, 미르망은 하늘을 향해 은빛 화살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