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506화 (505/800)

506회

123일차트랄을 보낸 나는 즉시 메어리와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여러 가지로 궁금한 것은 많지만, 가장 궁금한 것은 뭐니뭐니해도 트랄이 바로 떠나야만 했던 사안이었다.

“혹시 변경백 소실한 거….”

“네, 맞아요. 에일라 엄마가 6성 환생하는 거랑 분명 연관이 있을 거예요.”

에일라 ‘아리에스’. 피를 통해 이어지는 성검. 1인전승. 그리고 에일라가 환생하는 과정에서 적혀있던 그 이상야릇한 문구.

모든 것을 종합해보면 에일라가 6성, 초월자로서 환생하기에 벌어진 일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어쩌다보니 장인어른 돌아가게 만들어버렸네.”

“제 생각이지만 본인은 딱히 나쁘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그게 운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테니까요.”

“본인이 죽을 운명까지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다? 흠...나는 그런 운명이라면 개척하고 말 것이다.”

“예, 아빤 성검의 용사가 아니니까요.”

던전 주인은 던전을 개척하는 것이 생업이다. 그리고 막힌 곳이 있다면 나는 던전을 뚫듯 길을 뚫어버릴 것이다.

“메어리, 너는 결코 그런 짓을 해서는 안 될 것이다.”

“괜찮아요. 저는 다른 성검의 용사들과 달리, 그저 힘을 이용할 뿐이니까요. 계약 조건만 잘 이행하면 저는 ‘사명’을 따를 필요가 없어요.”

“.......쓰읍.”

처녀성의 성검이 가진 계약조건은 나도 알고 있다. 내가 계약에 관여했기에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처녀성이니까 처녀가 아니게 되면 큰 문제가 발생한다.

“다음 질문. 용사들은 왜 성녀를 꺼려하는 거지?”

“아….”

내 질문에 메어리는 상당히 난처해했다. 한정된 정보를 최대한 알려주려고 하던 전과 달리, 이번은 확실히 대답하기 꺼려하는 듯 보였다.

“성녀 또한 여신의 이야기를 직접 듣고 움직이는 자가 아닌가?”

“지난 번에 지나가는 말로 말씀드린 것 같았지만, 저희는 여신의 지시나 명령을 받는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건 또 그거대로 황당한 일이군."

여신의 명령도 아닌데 트랄이 나의 제안을 거부하고 세상을 떠돌며 용사들을 각성시키려고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트랄 녀석, 성검의 용사들로 하렘을 차리려고 하는 건가?"

"아빠...."

"메어리, 너는 안 된다. 에일라도 안 돼. 다른 9명을 모두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 둘은 안 된다!"

"하지만 다른 성검의 용사를 아빠가 먹으면 그 사람도 챙길 거잖아요?"

"그렇긴 하지. ...앗, 설마!"

알아버렸다. 나는 깨닫고 말았다.

"이건 트랄과의 쟁탈전이로구나!"

"네?"

"누가 더 많은 성검의 용사들을 차지하는가! 트랄과 나의 쟁탈전인 것이야!"

군단장들이 인장을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처럼, 트랄도 나와 성검의 용사를 두고 쟁탈전을 벌이는 것이다.

이제 싸움으로는 서로 죽고 죽이지 않으면 가벼운 대련밖에 할 수 없으니, 다른 방법으로 자웅을 겨루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흐흐흐, 짜식. 천장 무너져서 함정에 당한 거에 제법 자존심이 긁혔나보군."

"아빠, 알고 계시면서 왜 그래요? 트랄 삼촌이 얘기했잖아요. 이게 다 아빠를 위해서라고...."

"그, 그런 말은 하지 말거라. 조금 부끄러우니까."

"아빠를 위해서라면 트랄 삼촌, 목숨도 내놓을 수 있을 걸요?"

"......."

이미 그러했기에 나는 트랄은 순순히 보낼 수 있었다. 트랄이 목숨을 걸고 시간을 벌어줬기에 나는 포르네우스 던전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트랄에게는 다 계획이 있을 거야.'

그런 트랄이 내 옆이 아닌 다른 곳을 돌아다니기로 작정했다. 내 곁에서 나와 함께 싸우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돌아다니며 이런저런 것들을 해결함으로써 나를 도우려고 하는 것이다.

'필히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있다.'

세계에 어떤 비밀이 숨겨져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트랄이 언젠가는 돌아올 거라는 것.

"...아, 이 새끼 왜 싸움을 받아주나 했더니."

내가 혼자서 나를 지킬 수 있는 지 테스트하려고 죽이려고 싸운 것이다. 그리고 나는 트랄의 시험을 멋지게 통과했다. 포르네우스 던전에 있으면서 단 한 번도 상처조차 주지 못했던 내가 트랄을 함정에 빠뜨려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

"짜식, 분명 그렇게 얘기했을 거다. 던전 주인으로서 쌓아온 힘 또한 나의 힘이라고. 던전 주인이 부하들 동원하지 않은 것도 나를 봐준 거라고."

"와...소름. 진짜 그렇게 얘기했었어요. 칸세르가 따지고 들었을 때."

"척하면 척이지. 흐흐."

전사로서 싸운 건 아니지만, 트랄은 전사로서 나를 인정한 것이다.

"역시 트랄이다."

한 번 더 반할 것 같았다.

"여자였으면 아내로 만들었을텐데."

"...아빠 혹시 삼촌을 여자로 합성시키려는 건 아니죠?"

"그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3년동안 서로 못볼꼴 다 본 남자를 상대로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트랄도 똑같이 생각하고 있을 걸?"

형제끼리는 그러는 거 아니다.

* * *

"타우러스, 궁금한 게 있는데."

"무엇인가."

"그대는 남색인가?"

"말도 안 되는 소리. 그건 나에 대한 모욕임과 동시에, 형제에 대한 모욕. 지금 나와 싸우자는 것인가?"

트랄은 진심으로 질색하며 의혹을 일축했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는 트랄이 성질을 부리자, 칸세르는 바로 꼬리를 내렸다.

"미안하다. 하지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사이가 돈독해서 말이지. 오크들은 남자들끼리 결혼하는 풍습이라도 있는 줄 착각할 뻔 했다."

"오크는 그러지 않는다. 그리고 나와 형제는 함께 싸워온 전우이자 단 둘 뿐인 부족의 생존자다. 비록 피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우리는 친형제처럼 자랐다."

"그럼 질문! 누가 형이야?!"

움찔. 제미니의 질문에 트랄은 시선을 피했다. 하지만 요정들은 눈앞을 날아다니며 계속 눈을 맞추려했다.

"형제면 형이랑 아우가 있을 거 아니야~?"

"그치, 그치. 타우러스가 형인가? 아니면 저쪽이 형인가?"

"...크흠. 형제는 형제일 뿐이다. 누가 우위를 점할 수 없지."

"하지만 타우러스, 네가 훨씬 더 강하지 않나? 아까도 그는 너를 평생동안 이기지 못했다고 들었는데."

"......당신을 가르쳐준 스승이라는 자가 저 오크죠?"

성녀의 말에 용사들은 입을 닫았다. 트랄은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최초의 전장에서 그는 나를 살려주었다. 그리고 내게 싸우는 법과 단련하는 법, 그리고 살아남는 법을 가르쳐줬지.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훨씬 더 강해졌지만, 그는 내게 이것을 가르쳐줬다."

톡톡. 트랄은 검지로 관자놀이를 건드렸다.

"헤어지기 전까지 내가 지혜라는 걸 가질 수 있게 해준 현자지."

스르륵. 용사들은 던전을 빠져나왔다. 밤은 제법 깊었고 공기는 차가웠다. 트랄은 이별의 선물로 받은 검은 로브를 새롭게 걸치며 옷을 여몄다.

"레오 후작령에 잠시 들렸다가도록 하지. 짐을 꾸리고 바로 이동하도록 하겠다. 겸사겸사 선물받은 것도 확인하고."

"잠깐만요. 당신, 일부러 모른척 하는 거죠?"

성녀가 트랄의 앞을 막아섰다. 졸지에 성녀 혼자서 용사들의 앞길을 막아선 셈이 되었다.

"성검의 용사 비르고, 분명 남작성에서 만났던 그 여자애에요. 스타킹을 팔고, 당신에게 로브를 건네줬던 그 여자애. 그리고 당신이 입고 있던 로브랑 거의 비슷하죠. 아니, 그것보다 훨씬 더 좋아보이네요."

"그래서?"

"모르겠어요? 당신의 형제라고 부르는 자가 비르고 남작성을 점령한 거예요. 성검도 어쩌면 탈취한 걸지도 모르고!"

남작성에 있던 상인이 성검 비르고를 들고 던전에서 나타났다. 정황만으로도 충분히 의심할 수 있다.

"인류의 적이라고요!"

당시 '메어리'라고 이름을 밝혔던 여자는 이전부터 던전의 일원이라는 것을. 그리고 메어리가 아버지라고 부르는 라스푸틴이라고 하는 자가 인류의 적이라는 것을.

"흠. 그래서?"

"그래서가 아니에요! 성검의 용사라면 응당 마족과 싸워야죠!"

"그래서 싸웠지 않나. 크으. 형제는 강하더군."

"지금 장난...당신들은요?!"

성녀가 화살을 다른 용사들에게 돌렸다. 하지만 제미니는 웃기만 하며 성녀의 말을 무시했고, 칸세르는 귀찮은 듯 고개를 가로저으며 혀만 찰 뿐이었다.

"마족보다 더 큰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그걸 다스리는 게 우리들의 역할이야."

"그러니까 그 위험이 뭐냐고요!"

"말 할 수 없는 비밀이라는 거지. 타우러스, 얘 그냥 놔두고 가면 안 돼?"

"안 된다. 성녀는 무조건 데려가야 해. 만약 여기서 버티고 있는다면...이렇게 하는 수밖에. 제미니, 잠깐 옆으로."

제미니가 어깨에서 벗어나자마자 트랄은 빛처럼 성녀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성녀의 허리를 안아들어, 어깨에 둘러멨다. 거친 손길이 성녀의 엉덩이를 꽉 붙들었다.

"꺄, 꺄아아악! 지금 뭐하는 거야?!"

"음? 미안하군. 처음 해보는 거라 잘못 잡았다."

트랄은 손의 위치를 바꿔 성녀의 옆구리를 붙잡았다. 졸지에 몸 곳곳에 손길이 닿은 성녀는 몸을 아둥바둥거렸지만, 트랄의 힘에는 저항하지 못했다.

"변태! 신고할 거야!!"

"언젠가 형제가 그러더군. 말 안 듣는 어린애는 이게 최고라면서."

찰-싹! 트랄의 손이 성녀의 엉덩이를 때렸다. 성녀는 너무나도 충격적인 고통에 할 말을 잃고 말았다.

"다, 당신...?"

"가지. 세상이 더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빨리 리브라를 찾으러 가야한다. ...그런데 성녀여, 생각보다 살집이 있군."

"여신이시여--! 아오, 젠장! 왜 이럴 때는...!"

성녀를 짐짝처럼 둘레멘 트랄의 손등이 아주 옅게 빛나고 있었다.

* * *

<그 시각, 사지타리우스 백작가.>

"......하아."

여인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지금까지 열심히 일을 해왔지만, 그도 이제 어느덧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파드드득.

환기를 위해 잠시 열어둔 창문 너머에서 소름돋는 날갯짓 소리가 들렸다. 여인은 숨을 죽인 채 제발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가기만을 기다렸다.

똑똑.

누군가가 유리창을 노크했다. 5층 높이 건물의 외벽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게 누구겠는가. 여인은 창문 너머로 얼핏 보이는 괴조의 날갯짓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으으...!"

삐이이익!!

밖에서 호루라기 소리가 울렸다. 마족을 발견한 경보가 울림과 동시에, 유리창에 노크를 하던 마족이 화들짝 놀라 하늘로 퍼드득 날아갔다.

덜컹-!

"괜찮으십니까, 마님?!"

문을 열고 들어온 여기사는 테이블 밑으로 진작 숨어버린 여인을 향해 달려왔다.

"기, 기사단은요...? 왜 하피 따위가 백작성까지 날아온 거예요...?!"

"죄송합니다! 변명은 아니지만, 며칠동안 계속 2교대로 순찰을 돌고 있으나...."

적은 인원수가 쉬지도 않고 순찰을 돌고 있다.

불안감을 호소하는 주민들을 달래고, 간간히 성 너머에 나타나는 마족들을 쳐죽이고, 영지 내의 분쟁을 해결하는 것 만으로도 기사들은 지금 수명을 갈아넣어 백작성을 지키고 있다.

"흐흑, 흐흐흑...!"

여인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고 흐느꼈다. 기사단의 수가 부족해진 건 당연히 그들이 모두 죽어버렸기 때문이다. 여인의 남편과 마찬가지로.

"......흐끅. 마왕군은 어디까지 왔어요?"

여인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울고 싶지만 울음을 참으며, 백작의 빈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마음을 다잡았다.

"...요새는 함락된 것 같습니다. 이제 일주일이면 성 밖에 도착하게 될 겁니다."

"주민들은요?"

"외람된 말씀이오나, 백작성에서 떠나려고 하는 이들이 슬슬...."

영지민들이 영지를 버리고 도망치려고 한다. 잡히면 어지간한 벌로는 끝나지 않을 걸 알면서도, 목숨을 걸고 다른 영지로 도망치려고 하는 것이다.

"요새에서 돌아온 부상병들이 소문을 퍼뜨린 것 같습니다."

"소문은 소문일 뿐이에요. 소문이라고요...."

어차피 남아있어봐야 마왕군에게 살해당할 것을 알고 있기에, 영지민들은 성을 탈출하려고 하는 것이다.

"어째서 평민들은 배신을 하는 거죠? 우리가, 남편이 얼마나 잘해줬는데! 어떻게 영지를 위해 싸울 생각도 않고 짐을 싸서 도망칠 생각을 하느냔 말이에요!"

여인은 울면서 하소연했으나, 여기사라고 한들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한.

- 힘을 원하는 가.

어디선가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인, 미르망은 소리가 들려온 곳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 힘을 원하는 가.

"......무슨 소리 못 들었어요?"

"마, 마님?"

"생전의 시어머님과 꼭 닮은 목소리가-"

두근.

미르망은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백작의 집무실 한켠에 놓인, 역대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의 초상화가 늘어진 곳 중 유일하게 근엄한 여인이 정장을 입고 서있는 초상화 앞에 멈춰섰다.

"아...."

사지타리우스 백작가 유일의 여인.

몰락하기 직전인 백작가를 혈혈단신의 몸으로 일으켜세웠고, 재혼한 남편과 열 두 자식을 낳아 백작가를 부흥시켰다고 하는 전설적인 과부 백작.

- 힘을 원하는가.

그녀가 자신에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미르망은 홀린듯 과부 백작의 초상화를 들어올렸다.

"마님?! 도, 도대체-"

끼이익.

초상화 뒤에 공간이 있었다. 미르망은 공간 속으로 손을 뻗었다.

잠시 뒤.

어둠을 밝히는 은빛이 백작성 전체를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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