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6회
112일
"형제여, 그대의 싸움 방식은 너무나도 위험하네."
언젠가. 모닥불을 피워놓고 그 날의 싸움에 대해 이야기하며, 트랄이 내게 한 말이 있었다.
"씨발, 뭐가?"
그 때는 나보다 강한 존재에 대한 열패감이 내 속을 튀들어 놓은 지라, 트랄에 대해 좋은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물며 내게 전투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충고라기보다 훈수로 들렸다.
"너는 존나 강하지만 나는 아니라고."
자연히 말도 띠껍게 나왔다. 시간이 지나 트랄의 진의를 깨닫고 나서야 나는 그와 마음을 터놓을 수 있게 되었지만, 포르네우스의 괴롭힘에 정신적으로 몰려있던 나는 여러모로 엇나가고 있었다.
"이렇게밖에 못 싸우는데 뭐 어쩌라고? 포르네우스 니-미 나한테 뭐 무기라도 제대로 주냐? 있는 거라고는 이 주먹밖에 없는데."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네, 형제여."
"장난하냐? 너는 좋은 무기 받았다고 지금 나한테 자랑하는 거냐, 씨발?"
"그렇지 않네. 형제여. 언제까지 주먹만으로 싸울 수는 없는 노릇. 고깝게 듣지 말고 형제를 위한 나의 진심을 알아주시게."
트랄이 고개까지 숙이며 내게 조언을 하는 걸 간청했다. 나보다 강한 오크가, 나의 수련법을 빼앗아 나보다도 강해진 오크가 하는 말이 얼마나 대단할까 싶어서 나는 빈정거리며 허락했었다.
"그래, 어디 한 번 말해봐라. 내가 어떻게 싸우면 되겠냐? 얻은 무기는 바로 포르네우스 니-미 가져가시는데. 주먹이랑 발 말고 싸울 수 있는게 뭐가 있냐?"
"적의 무기."
"뭐?"
"형제여. 적의 무기를 빼앗아 쓰는 건 어떤가?"
"......?"
"적을 제압하고 그 무기를 탈취하는 걸세. 그리고 빼앗은 무기를 휘둘러 적을 죽이고 새로운 무기를 가지는 거지. 형제는 인간들의 무기를 사용하는 것에 능숙하지 않은가?"
"......."
"만약 형제가 사용할 무기가 없다면...내가 대신 빼앗아 주겠네. 무기란게 대수인가? 흐흐, 만약 도저히 빼앗을 무기가 없다면...내 무기를 형제에게 주도록 하지."
오크에게 있어 무기란, 반신과도 같은 것.
"나한테 씨발 이렇게까지 해주는 이유가 뭐냐?"
"하나 뿐이지. 우리는 형제기 때문이네, 형제여."
"......."
오크 감수성은 정말이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덕분에 나는 새로운 전투방식을 깨달았다. 이후, 내 근본이라고 할 수 있는 전투 방식.
무기에는 주인이 없다.
* * *
콰득!
투구를 손바닥으로 때린다. 목뼈가 우두둑 소리를 내며 옆으로 꺾였다. 기사의 몸이 뒤로 고꾸라지려고 하는 걸 잡아, 그의 양손을 도끼로 잘랐다.
푸슈우웃.
피분수가 뿜어져 내 전신을 적셨다. 나는 기사의 갑옷을 발로 밀고 피가 뚝뚝 흐르는 손목을 붙잡았다.
"던전에서 대검을 쓰다니...죽고 싶어 환장했군."
"으아악!"
옆에서 다른 기사가 나를 향해 검을 찌르려했다. 나는 대검의 손잡이를 쥔 기사의 건틀릿을 들어 기사에게 집어던졌다.
"크윽?!"
피가 튀며 기사의 시야를 방해한다. 전장에서 인간을 상대로 효과적인 무기가 몇 있기는 하지만, 그 중 가장 인간을 당황스럽게 하는 건 다름아닌 동료의 시체 일부분이다.
"그런식으로 당황하면 쓰나."
나는 앞으로 달려가 기사의 투구를 붙잡았다. 머리가 작은 사람인지, 손아귀의 힘으로도 농구공 잡듯 쉽게 기사의 머리를 붙잡을 수 있었다.
"대검 휘두르면 너무 늦잖아. 그치?"
결과적으로 검날이 적을 베기만 하면 그만. 나는 남은 손을 대검의 손잡이를 누르고, 검날에 기사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푸-욱.
기사의 안면이 투구째로 박혔다. 여유가 있다면 반갈죽이니 뭐니 하며 조롱하겠지만, 아직 죽일 적은 너무나도 많다.
"기사들만 있는 건-"
"매직 미사일!"
날카로운 마나의 탄환이 내게로 날아왔다. 일류 투수가 던진 것보다 더 강한 마탄이 나를 향해 날아왔다.
"급소 아닌 곳을 노려야지. 그치?"
키기긱! 나는 마탄을 움켜쥐었다. 정확히 내 얼굴을 노리고 날아왔기에, 나는 빛처럼 마탄을 움켜쥘 수 있었다.
"처음부터 일격에 적을 죽이려고 하는 거, 너무 양심없지 않냐."
"으, 이 괴물!!"
"그래. 일격에 적을 죽이는 건 괴물의 특권이지."
나는 앞으로 달렸다. 마탄을 날린 마법사의 앞에는 제법 좋은 장비를 한 모험가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선두에 선 우락부락한 모험가는 단단한 중갑과 방패로 나를 막아섰다.
"넌 못 지나간다!"
"죽이고 지나가지."
중갑보병을 죽이는 방법은 무수히 많지만, 시간이 없으니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사용하기로 했다. 나는 내가 죽인 기사의 검을 두손으로 움켜쥐었다.
"다음 생에 태어나면 꼭 기억해라. 무릎."
모험가는 방패로 전신을 가리려고 했지만, 방패는 상반신을 가릴 뿐 하반신은 가리지 못했다. 나는 놈의 무릎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카--앙!
관절부에 엮어놓은 사슬갑옷 덕분에 검은 무릎을 베지 못했다. 검보다 갑옷이 단단해서 검날이 반으로 동강났다.
"크윽!"
하지만 검을 휘두른 충격만큼은 전해진다. 관절부위를 정확히 타격했기에, 놈의 자세가 한쪽으로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목."
나는 부서진 검의 손잡이를 역수로 잡아 위로 번쩍 들어올렸다. 놈은 자세가 무너진 와중에 방패를 들어올리려고 했지만, 그보다 내가 검을 찌르는 게 더 빨랐다.
푹!
방패에 의해 부서진 칼날이 놈의 목에 박혔다. 뒤로 뿜어지는 피분수에 모험가들이 놈의 이름을 외치며 분노를 터뜨렸다.
"꼬우면 전신방패를 들고왔어야지."
나는 놈에게서 방패를 빼앗았다. 강철로 된 방패를 거꾸로 들어 전방으로 내질렀다.
카앙!
내 심장을 향해 찌른 창날이 방패의 안쪽을 찔렀다. 마나가 깃든 창이 방패를 꿰뚫었으나 내 심장에는 닿지 않았다.
"방패 뚫었어? 그럼 가져가라."
나는 방패를 놓았다. 순간 창이 아래로 축 쳐졌고, 나는 나무로 된 창대를 수도로 내리쳤다.
"마나를 실은 무기는 말이야, 약간이지만 마나가 남아있지."
나는 옆으로 뛰었다. 모험가는 창을 급히 회수하며 내 공격을 막으려했다. 내 손에는 그가 실어놓은 마력이 담긴 창날이 들려있었다.
"되돌려주마."
나는 발을 앞으로 내딛으며 전방을 향해 창날을 집어던졌다. 레비즈를 상대로 몇 번이고 눈으로 보았던 투창의 기술이 내 손에서 발현되었다.
푸---욱!
창날이 이마에 박혔다. 미간에 꽂힌 창날은 날에 서린 마력 덕분에 너무나도 쉽게 미간을 꿰뚫었다.
"어, 어...?"
창을 든 모험가는 당황했다. 잔뜩 겁을 먹고 창날을 쳐내려고 했지만, 창날은 그를 향해 날아가지 않았다.
"마법사들은 말이야, 항상 앞에서 누군가가 지켜줄 거라고 생각하지."
풀썩. 내게 마탄을 날렸던 마법사가 뒤로 고꾸라졌다. 모험가는 그제서야 내가 자신이 아닌 뒤의 마법사를 노렸다는 걸 깨달았다.
"이 개새끼가!"
"유언 한 번 참 싸구려구나."
나는 놈을 향해 엄지로 목을 그었다. 위협적인 창날이 망가져 무기를 잃은 모험가는 마족의 손쉬운 먹이일 뿐.
콰득! 멀리서 날아온 단검이 모험가의 가슴을 꿰뚫었다. 단검처럼 보이는, 강철같은 검은 깃털에 나는 뒤로 엄지를 들어올렸다.
"잘했다."
"혼자서 너무 날뛰는 거 아니야?"
전신이 피에 젖은 하르파스가 내 근처로 달려오며 깃털을 흩뿌렸다. 덕분에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네가 마지막인가?"
"그래. ...다른 병사들, 다 후방으로 물렸어."
남아있던 병사들은 나와 함께 싸웠으나, 그들은 거의 한계까지 몰려있었다. 그래서 내가 시간을 버는 틈을 타, 나를 끝까지 보좌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태우고 후방으로 물러났다. 한계까지 싸우다 죽기 직전에 퇴각했다.
결국 남은 것은 나. 그리고 하르파스.
"혼자 날뛰는 게 아니라 활약이 두드러지는 거지."
"군단장이라고 자부할만 하네. ...후후, 진짜 다시 한 번 반할 정도로 강해. 내 아빠 죽인 남자 다운 걸."
"...아직도 마족 감수성은 잘 이해하지 못하겠다니까."
할파스를 죽인 것에 반하다니. 헛웃음이 절로 나왔지만 여유를 챙길 시간은 없다. 아직 적은 많이 남아있고, 전장은 그레모리 던전.
알로켄 던전까지 탈환하려면 아직 한참 죽이고 또 죽여야했다.
"하르파스, 피곤하면 잠시 후방으로 들어가라. 며칠 싸운 것 같은데."
"주인 이렇게 혼자 싸우게 내버려두라는 거야?"
"아니지. 다르다. 이건...."
콰득. 나는 내 정면으로 달려온 기사의 팔을 붙잡았다. 붕붕 돌아가던 모닝스타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고, 나는 모닝스타를 잡고 놈의 얼굴에 때려박았다.
"너희들이 지금까지 버텨줬으니 내가 이렇게 쌩쌩하게 날뛸 수 있는 것이다."
"...그래, 슬슬 한계였거든."
하르파스는 처연한 미소를 지으며 날개를 펼쳐 전장을 이탈했다. 하르파스를 비롯한 병력들이 모두 뒤로 물러서며 거리를 벌렸다.
"인간들이여, 너희에게 희소식을 하나 알려주마. 나는 오만의 군단장이다. 즉, 내가 죽으면 이 던전 전체가 무너진다는 얘기지."
내 말에 토벌대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나를 향해 겨눈 무기를 내려놓지 않았다. 그 누구도 도망치지 않았다.
"나를 죽여라. 그러면 너희의 승리다."
"건방진 오크 새끼가!"
"건방? 아니, 오만이다."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는 것. 혼자서 모두를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에 가득차있던 할파스는 우리 군단에 의해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남긴 오만을 이어받았다.
"나는 감히 너희 모두를 때려죽일 수 있노라, 그런 자신감에 가득차있다. 그래. 너희가 도망치지 않으면 전부다 죽을 것이다."
도발은 성공적이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까딱거리며, 모험가들 스스로 나를 향해 달려들게 시선을 끌었다.
"그래. 오만이지. ...죽었을 때의 얘기지만."
자기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다는 것은 곧 그로 인해 화를 입었을 때의 일.
모두를 죽일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으로 인해 자신이 죽는다면 오만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그건 오만이 아니다.
자기 능력에 대한 확신.
자신에 대한 명확한 인식.
오만도 자만도 아닌, 자신감.
"이곳에 있는 그 누구도, 나를 죽일 수 없을 것이다."
승리에 대한 확신. 나는 오만하여 홀로 적들의 앞에 선 것이 아니다.
후방으로 피신한 군단의 병사들이 회복할 시간을 벌기 위해.
이미 죽은 우리 군단의 병사들이 부활할 시간을 벌기 위해.
나의 진화를 믿고 기다렸을 우리 군단 모두의 믿음과 신뢰에 보답하기 위해, 나는 이 자리에 섰다.
"증명해보거라. 내가 오만하다는 것을. 만약 그렇지 않다면...오만한 것은 너희가 될테니. 나를 죽일 수 있다고 믿었기에, 너희는 죽을 것이다."
오만의 군단장은 자신이 오만하기 때문에 오만의 이명을 가진 것이 아니다. 상대의 오만함을 엄벌하고 단죄하기 위해, 오만이라는 이름을 가진 것이다.
"들어와, 이 씨발롬들아."
"죽어라!!"
역시, 도발의 최고는 쌍욕이다. 나는 손등을 가볍게 두드리며, 나를 향해 건틀릿을 내리즈는 놈의 얼굴에 정권을 찔러넣었다.
* * *
"하르파스, 미쳤어? 걔를 혼자 내버려두고 오면 어떻게 해?!"
"하하. 옆에 있다가는 휘말려서 죽을 뻔 했는데...?"
그레모리는 급히 하르파스의 상처에 응급처치를 했다. 닷새간 누적된 전투의 피로로 인해 그녀는 제법 많은 상처를 입었다.
"안되겠어. 나라도 도우러 가야겠어."
"마나도 다 떨어진 년이 무슨...분신 쓸 수 있어? 안 되잖아."
"몰라, 젠장. 죽을 것 같으면 몸 하나 새로 구해서 갈아타지 뭐."
그레모리는 너덜거리는 날개를 펼치며 통로를 달렸다. 로도페리를 상대로 분신 자폭을 하고 난 이후, 몸에 남은 마나가 다 떨어져 직접 던전을 달려야했다.
"하아, 하아."
그레모리는 시스템을 이용해 던전의 상황을 살폈다. 저레벨 병사들은 모두 하나같이 인연소환 리스트에 올라갔고, 고등급 고레벨의 병사들은 죽기 직전에 본진으로 이송되었다.
라스베가스에 배치된 엘프, 안드라스들을 제외한 전병력이 죽거나 다쳤다. 시간을 벌기 위함이라고 한들, 진화했다고 한들 혼자서는 너무나도 위험했다.
"무책임한 새끼...그러다 뒤지면 어쩌려고!"
그레모리는 달렸다. 마나가 고갈되어 스스로의 다리로 달려야 했다. 마나로 체력을 보강하던 그녀는 숨을 헐떡이며 통로를 달렸다.
"허억, 허억, 허억."
진한 피비린내가 코를 찌른다. 강력한 죽음의 기운이 전방에서 느껴진다. 그레모리는 침을 꿀꺽 삼키며 공동의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읍."
중앙에 거대한 시체의 언덕이 쌓여있었다. 기사와 모험가들이 뒤섞인 시체의 언덕 위에, 붉은 문신을 반짝이는 오크가 정상에 서있었다.
".......오, 그레모리 왔냐."
오크는 언덕을 내려와 그레모리를 향해 두 팔을 펼쳤다. 주변에 펼쳐놓은 살육의 현장을 마치 자랑이라도 하듯, 오크는 활짝 웃었다.
"너...이게 무슨."
"아, 오해마라. 아직 다 안죽었어. 안 죽은 놈들만 지금 저기다 쌓아둔 거니까."
"뭐?"
"내가 죽여봐야 소용도 없고. 그냥 죽이기도 아쉽고."
오크는 바닥에 쓰러진 기사의 시체를 들어올렸다. 얼굴이 함몰된 기사는 시체처럼 보였지만, 죽어가고 있을 뿐 아직 죽지는 않았다.
"딱 목숨만 붙여뒀지. 나 진화하는 동안 애들 개고생했는데, 당연히 레벨 좀 올려야하지 않겠어?"
"하, 하하하."
그레모리는 허탈함에 다리가 풀렸다. 눈앞에 보이는 시체의 수만 하더라도 족히 백을 훌쩍 넘을 정도였다.
"진짜...강해졌네."
"흐흐. 5성값 하는 거지. ...그런데 그레모리야. 큰일났다."
오크는 심각해진 얼굴로 그레모리에게 다가왔다. 그레모리는 순간 그가 다쳤나 가슴이 철렁내려앉았지만-
"싹다 죽이고 나니까 섹스하고 싶어졌다. 나 쥬지가 아파. 진화하고 나서부터 존나게 떡치고 싶어서 미치겠더라."
"...아이, 씨발 이 미친 새끼."
강해졌어도 근본이 달라지지는 않구나.
"왜 이렇게 빨리 다 때려죽이나 싶더니...."
"맞아. 빨리 섹스하고 싶어서 그랬다. 흐흐흐."
그레모리는 허탈하게 웃으며.
"잘 됐네. 그럼 5성 아다 내가 가져간다?"
자신보다 훨씬 강한 강자, 주인을 위해 다리를 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