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5회
112일
진화를 하였다고 하여 인생이 스펙타클하게 바뀌는 것은 아니다.
라임처럼 극단적으로 변하는 케이스도 있기는 하지만, 오크인 나는 크게 변할 껀덕지는 없다. 3성에서 4성으로 진화하면서 생긴 변화는 몸의 문신이 생겼다는 것.
진화는 어디까지나 내가 더욱 더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 줄 뿐. 그리고 나는 그 변화에 쾌재를 불렀다.
“자라났다, 머리머리!”
진화는 위대하다. 솔로몬은 위대하다. 신수조차도 포기했던 머리카락이 진화와 함께 돋아났다.
“크으, 빡빡이 타입이지만 그래도 그게 어디냐.”
모근이 부활하며 자라난 머리칼을 호국요람에서나 볼 법한 굳건한 스타일이었지만, 그래도 민둥산보다는 훨씬 좋았다.
시스템으로 대머리라고 놀렸던 것도 사실은 진화하면 머리가 다시 날 거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리라.
“하, 솔로몬 개꼴리네.”
남자인 건 중요치 않다. 시공간마저 조작하는 신급 존재인데, 본인의 성별 정도는 바꿀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에스투를 먹던가.
“흐흐, 진화하면 이게 국룰이지.”
나는 크게 심호흡하고 소리쳤다.
“시스템!”
<라스푸틴 아스타로트 쿰척쿰 척> ★★★★★
레벨 : 90 / 100
종족 : 오크
나이 : 37세
성별 : 남성
등급 : Rare++
출생 : 포르네우스의 던전.
소속 : 분노의 군단
직업 : 라스토피아의 독재자
“최대 레벨이 100레벨이라….”
200이상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분명 6성이 되어야 하는 게 틀림없다. 5성에서 6성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분명 각성이든 초월이든 뭔가 특별한 계기가 필요할 것이다.
“진화를 하긴 했는데….”
여전히 불친절한 건 어쩔 수 없다. 진화에 따라 나는 내 스스로의 능력이 어떻게 바뀌었는지 자각했지만, 이왕이면 구체적인 사용 방법에 대해서도 알려줬으면 좋았을텐데.
“흐흐, 직접 쓰면서 알아가는 수밖에.”
진화란, 미래의 자신을 현재로 가져오는 것.
따라서 미래의 자신이 사용하는 능력을 지식으로는 알고 있어도 실제로 사용해보지는 못했다. 사용설명서로 완벽하게 숙지하고 있어도, 직접 해보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다.
고오오.
문신이 활성화된다.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문신은 내 전신을 붉게 물들였다.
“문신….”
처음에는 보기 흉측하다고 생각했던 문신들이 이제는 없으면 허전하다. 나는 진화하고 난 뒤, 내 앞에 나타났던 인영을 떠올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치골에 문신은…흐흐흐. 참…이게 5성이 되어야 열리는 기능일 줄이야.”
당장에라도 5성으로 진화하며 깨달은 기능을 사용하고 싶다. 하지만 그걸 사용하기 위해서는 우선 ‘전장’으로 가야한다.
“무기는 놈들 거 빼앗으면 그만.”
던전에는 그 누구도 내 진화를 맞이하지 않았다.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아마 자지로 혼쭐을 냈을 것이다. 괜히 내 진화를 옆에서 기다리지 말고, 현장에서 직접 싸우라고 했으니까.
“......혈류강화.”
나는 전장에 나서기 전, <라스푸틴>으로서 가지게 된 새로운 능력을 확인했다. 전신의 피가 한 곳에 몰린다 싶더니, 죽순 자라나듯 거대해졌다.
“이게 이름값이지.”
라스푸틴을 자처하는 자가 어찌 라스푸틴의 이름에 먹칠을 할 수 있으랴. 나는 손등을 두드려 문신의 힘을 해제했다. 모여있던 피가 다시 전신으로 퍼지며 몸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나를 상대로 거는 버프도 제법 자유롭게 껐다 켤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다시 손등을 두드려 내 전신에 버프를 걸었다.
“부히히.”
웃음이 절로 나온다. 당장에라도 날뛰고 싶어 미쳐버릴 지경이었다. 진화하고 난 뒤의 내 힘을 주체할 수 없다.
위이잉.
포털을 넘는다. 느긋한 발걸음으로 그레모리 던전에 발을 디딘다. 포털로 공간이 열리자마자 코에 짙은 피비린내가 나를 반겼다.
“알로켄 던전이 뚫렸군.”
시스템은 다행히 퍼시발 알로켄이 죽었다고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알로켄 던전에 파견되어 있던 병사들이 인연 소환 리스트에 제법 이름을 올렸다.
“침입자들 평균은...69레벨? 세상에. 미친 거 아닌가?”
사지타리우스 백작가에서 칼을 갈았다는 느낌이 확실히 들었다. 내가 포털에서 앞으로 조금 발걸음을 옮기자, 긴급병상에 모여있던 이들이 나를 반겼다.
“군단장님!!”
대부분 상처가 깊다. 차라리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는 게 어떨까 싶을 정도로 상처가 깊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나의 여자들은 크게 다치지 않은 듯 했다.
“적은 어디에 있지?”
“중앙 광장이요!”
“알겠다.”
위치를 알았으면 그걸로 끝. 나는 전신의 힘을 폭발시키듯 앞으로 달렸다. 중상을 입어 동료의 부축을 받아 후방으로 걸어오는 부하들을 지나쳐 앞으로 달렸다.
과거 우리가 그레모리를 상대로 건곤일척의 승부를 보았던 바로 그곳. 죽음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전장.
공동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발을 디디고 뛰어올랐다.
땅을 디디고 뛰어오른 내 몸은 무려 5m를 넘겠다 싶을 정도로, 미노타우르스조차 뛰어넘겠다 싶을 정도로 가벼웠다.
“저건--!”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피를 흘리는 오크도, 팔이 잘린 모험가도, 갑옷이 망가진 기사도, 공동에 모인 모두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렇다면 무조건 기대에 부응하는 수밖에. 나는 나의 착지지점에 있는 드워프를 향해 발을 겨눴다.
“씨벌!”
드워프는 욕지기를 내뱉으며 방패를 들어올렸다. 상당히 좋은 철로 단련한듯한 방패였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다. 나는 반듯하게 세워진 방패의 정중앙을 한 발로 짓밟았다.
쿠---웅!!
드워프는 방패 째로 짓밟혔다. 방패를 들어올린 것이 무색하게, 땅에 몸이 움푹 찍히며 땅밑으로 찌그러졌다.
우두둑.
드워프는 방패 아래에서 찌그러졌다. 몸이 육편이 되었으나 방패 덕분에 내 몸에는 드워프가 튀지 않았다. 나는 방패를 밟은 그대로 땅에 착지했다. 한쪽 무릎을 땅에 디디고, 주먹을 땅에 박아넣으며 자세를 취했다.
영웅출현.
멋드러진 히어로 랜딩과 함께, 나는 전장에 합류했다. 드워프의 방패를 중심으로 바닥에 크레이터가 생겼고, 주변에 있던 이들이 충격파로 밀려났다.
“들으라, 나의 이름은 <라스푸틴>.”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적진 한 가운데에 떨어졌기에, 나는 우리 군단의 병사들로부터 멀어져 적진에 고립된 위치에 두 발로 섰다. 주변에는 나를 향해 검을 겨눈 기사와 모험가들이 넘쳐났다.
"대충 보이는 군. 너희들의 레벨."
하나같이 3,4성급 강자들이었다. 개중에는 70레벨 후반 대 정도의 모험가도 눈에 띄었다.
“모처럼 만난 기념으로 하나 알려주마. 내가 가장 잘 하는 것은…."
우두둑. 나는 바닥에 떨어진 무기를 주웠다. 한손에는 바스타드 소드를, 그리고 다른 한손에는 가시달린 철퇴를.
"학살."
오크로 태어난 이래, 동정을 떼기 전까지 내가 가장 많이 해왔던 것.
감히 내가 섹스보다도 더 잘 할 수 있다고 자부하는 것.
"적을 죽이는 것이다."
나는 가장 앞에 있는 인간을 향해 철퇴를 집어던졌다.
***
<알로켄 던전, 사지타리우스 토벌군 진지.>
"모든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공주님. 이제 남은 건 적 던전의 중앙을 점령하기만 하면 됩니다."
"꽤 고생했네. 닷새간 수고했어."
초췌한 몰골의 로도페리는 간이 의자에 앉아 힘겹게 웃었다.
토벌대가 알로켄 던전으로 들어오는 것을 시작으로 전투가 이루어지고 있는 현재까지, 그녀는 하루에 1~2시간 쪽잠을 자며 던전 공략에 전력을 다했다.
"허탈하네. 설마 던전 뒤에 던전이 있을 줄이야...."
"그래도 덕분에 저희가 던전을 차지하지 않았습니까."
사지타리우스 백작은 주변을 가리키며 웃었다. 황야처럼 넓게 펼쳐진 알로켄 던전은 기사단과 모험가들이 힘을 모아 완벽한 임시 요새를 구축했다.
모험가들이 정령술로 토벽을 쌓아올리고, 기사들이 나무를 직접 베어와 울타리를 보강하고, 드워프들이 망치를 두드려 가시철조망을 만들었다.
요새는 던전 안에 설치된 것이 정말 안타까울 정도로 굳건했다.
"그래. 이 던전...이제 우리 거지."
로도페리는 피처럼 붉어진 머리칼을 쓸어올리며 웃었다. 힘든 건 힘든 거지만, 던전을 정복했다는 것이 그녀에게는 너무나도 기뻤다.
"그리도 좋으십니까?"
"여기서 나는 철 말이야, 정말 사랑에 빠질 것 같아. 마석도 그렇고."
로도페리는 요새 안쪽에서 한창 공사가 이루어지고 있는 곳을 가리켰다. 마족과의 전투로 중상을 입은 드워프들은 너도나도 신이 난 채 바닥을 삽으로 파헤치고 있었다.
"정말...여기 지하에서 나오는 철광석 얻으려고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그러게 말입니다."
던전은 인류에게 있어 기회의 땅이다. 백작령에 열린 알로켄 던전은 드워프들이 군침을 흘릴 정도로 질좋은 철광석이 노다지처럼 파묻힌 거대 광산이었다.
"멍청한 마족 놈들. 자기네 발 밑에 뭐가 있는 지도 모르고...."
로도페리가 쏟아부은 전재산의 몇 배, 아니 몇 십배는 더 불려줄 철광석이 매장되어 있다.
"아으. 내가 팔만 정상이었어도."
"조심하십시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습니다."
붉은 타천사-그레모리의 분신 자폭만 아니었다면, 로도페리도 당장 팔을 걷어 삽질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흐흐, 꼴좋다. 그 년 분명 지금쯤 미치고 팔짝 뛰겠지? 자기네 던전까지 점령당한다면 말이야."
"예. 모험가 분들 덕분에 저희가 훨씬 강합니다."
"우리 장비들 덕분이 아닌가? 뭐, 이제는 아무래도 좋지만."
백작가의 기사단.
B~A급으로만 구성한 모험가.
그리고 그들에게 전부다 씌워놓은 드워프제 무구.
알로켄 던전의 적들은 다소 쉽게 퇴각한 감이 없잖아 있지만, 토벌대는 고작 닷새만에 적진의 깊숙한 곳까지 침투했다. 남은 것은 승전보를 기다리는 것 뿐.
"흐아아, 이제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다."
"...글쎄요. 아직 '그'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누구? 그 돼지 오크?"
로도페리는 손을 흔들며 테이블에 얼굴을 묻었다.
"고작 한 명 늘어났다고 뭐가 달라지겠어?"
"그 말씀을 하니까 더 불안해지는데요."
"하하하, 걱정마. 조금 강하긴 한데...어차피 마족이잖아?"
로도페리는 주먹을 앞으로 내지르며 씩 웃었다.
"신성력 박히면 꼼짝도 못할 걸?"
* * *
주먹을 내지른다. 사제복을 입은 모험가는 당황해 메이스를 들어올리지만, 붉은 문신이 반짝이는 주먹은 강철보다 단단하다.
우지끈!
나는 메이스를 주먹으로 때렸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앞으로 주먹을 더 내질러, 사제의 얼굴에 메이스가 박히도록 뻗었다.
소리조차 낼 틈 없이 사제의 얼굴이 메이스 모양으로 일그러졌다. 나는 주먹을 펼쳐 메이스를 잡아당겼다.
"이건 그렇게 쓰는 게 아니지."
나는 메이스를 위로 던져 손잡이를 붙잡았다. 사제의 땀이 흥건하게 젖은 손잡이는 몹시 미끄러웠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살짝 놓아, 메이스 끝을 짧게 잡았다.
"후두려 패는 걸로 공격을 막으면 어쩌냐. 방패는 장식이냐?"
퍼---억.
나는 메이스를 옆으로 살짝 눕혀 사제의 머리를 찍었다. 두개골이 함몰되는 듯한 감각과 함께 피가 크게 튀었다. 혈향이 내 코를 간질였고, 피 냄새에 나는 더욱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뭘 그렇게 보고 있나. 마족을 죽이기 위해 던전에 온 것 아닌가?"
나를 향해 무기를 든 이들은 하나같이 무기를 겨눈채 다가오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눈빛에는 공포와 경악, 그리고 혼란이 가득했다.
"아, 이거?"
나는 주인이 죽었음에도 아직 신성력이 가득한 메이스를 가리켰다. 손잡이도 신성력으로 반짝이고 있었지만, 내 손바닥은 전혀 불타지 않았다.
"별 거 아니다. 솔직히 5성 찍었는데 이 정도 신성력은 내성이 있어야지."
5성 오크 성기사인 갤러해드는 스스로 신성력을 쓸 줄 안다. 내가 신성력을 쓰지는 못하더라도, 이제는 남의 신성력에도 그리 아프지 않을만큼 내성이 생겼다.
"그럼 누구부터 여신 곁으로 갈래?"
"이, 이 놈! 마족 주제에 여신님을 입에 담지 마라!"
기사 하나가 검을 치켜들며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는 놈이 달려드는 것에 맞춰 몸을 비틀었다.
콰득!
"당황스럽지?"
기사의 검은 내 가슴을 찔렀다. 하지만 찌르기는 커녕 피부에 스치듯 미끄러져 내 쪽으로 몸이 쏠렸다.
"남자였으면 죽빵인데, 여자니까 봐준다."
퍼-억.
나는 말아쥔 주먹을 기사의 명치에 꽂아넣었다. 투구 아래 얼굴이 어떻게 되었는 지는 모르지만, 턱 아래쪽으로 붉은 피가 흘러내렸다.
"죽이지는 않아, 죽이지는."
나는 여기사의 몸을 잡고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숱한 이들을 죽여본 나이기에, 죽지 않을 정도까지 패는 방법 또한 잘 알고 있다.
"어차피 네놈들을 죽여봐야 경험치도 안 오를테고...."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90레벨, 나는 너무 강해지는 바람에 고작 60레벨 언저리의 놈들을 상대로는 경험치가 0.001%도 오르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약하다, 약해. 어디 그래서야 나를 죽일 수 있겠느냐?"
"우, 우오오오!!"
토벌대가 다함께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나 한 명을 상대로 달려드는 그들을 향해, 나는 반갑게 두 팔을 벌려 맞이했다.
"그래, 오너라."
과거, 포르네우스 던전의 노예 오크 시절.
숱한 적을 상대로 혼자서 처절하게 싸우던 때와는 달리, 지금 나는 혼자가 아니다.
"나는 군단이다."
내 등 뒤로 달려온 오크 병사들과 함께, 나는 달려드는 기사를 향해 주먹을 때려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