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454화 (454/800)

455회

106일차

아스타로트는 눈을 떴다.

눈을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꺼풀을 들어올리고 눈을 좌우로 돌려도 짙은 어둠만 보였다.

움찔.

몸을 움직이려고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지는 대자로 뻗어져 구속되어있었다. 손목과 발목을 움직여보려고해도 손발목에 채워진 가죽같은 구속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러면 가능하다는 말씀이십니까?"

엘프로 변한 귀 덕분에 인간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잘 들렸다. 자신을 구한 남자-안다이할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듯 했다.

"예. 여왕님께서 직접 정화하실 겁니다."

가증스러운 엘프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스타로트는 장로로 추정되는 엘프가 개수작을 부리는 걸 직감했다.

"읍...?!"

입이 움직이지 않는다. 입 위에 무언가 씌워진 것마냥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입 아래로 온 정신을 집중한 아스타로트는 자신의 안면에 마스크마냥 무언가가 찰싹 붙어있는 것을 그제서야 느꼈다.

"던전에서 마족에게 범해진 다크엘프들에 대해서는 정화가 필요합니다. 그냥 하는 거라면 모를까...범해지는 걸로 '마기'가 주입된 이상, 그에 상응하는 조치가 필요하죠."

그런게 있을 리가 없다. 아스타로트는 엘프 장로-니프엘라가 인간을 상대로 거짓을 말하는 것에 기가 찼다.

"그 마기를 정화하기 위해서 이들을 숲에 데려갈 겁니다. 하지만 이들은 스스로 숲을 나간 몸. 그리고 저희는 이미 마왕군과 한 배를 타기로 한 자들. ...한 번 길을 정한 이상, 다시 태어나지 않고서야 함께 할 수 없죠."

"정화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저희도 잘은 모릅니다. 피부가 다시 하얗게 될 수도 있는 것이고, 머리칼도 원래의 색으로 돌아갈 수 있죠. 확실한 건 귀가 새로 다시 돋아날 지도 모른다는 것. 그 뿐입니다."

"귀...."

아스타로트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 아무리 자신이 뜯어먹었다고 한들, 귀가 망가진 엘프는 너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자신은 일부러 귀를 정상적으로 보이게 만들었고, 그걸 위해 몇이나 되는 엘프들을 스스로의 몸에 합성을 거듭했다. 조금이라도 예뻐보이려고 했던 것이 니프엘라에게 들킬 줄이야.

'도망쳐야 해.'

엘프를 몸에 합성했지만 마족으로서의, 던전 주인으로서의 힘이 사라진 건 아니다. 던전으로 돌아가면 다시 시스템의 권능을 사용할 수 있을 것이며, 마력을 끌어올리면 구속도 풀고 도망칠 수 있다.

그렇게, 몸 안의 마력을 움직이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순간.

콰득!

뱃속에 바늘 수 십이 찌르는 것만 같은 충격이 전해졌다. 아스타로트는 순식간에 의식이 날아갈 뻔 했다. 하지만 간신히 의식을 다잡을 수 있었다.

'음충!'

자신조차도 사용하지 않는 쓸모없는 벌레들. 설마 그걸 엘프가 사용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리고 그 괴물이 자신의 몸 속에 기생충마냥 들어와있다는 것에 전신이 부들부들 떨렸다. 음충이 자리잡은 위치에 진심으로 공포에 떨렸다.

직장을 통해 들어온 음충은 자궁의 뒷벽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아스타로트가 마력을 사용하려고 하는 순간, 음충은 장벽을 씹어먹고 자궁을 깨물어버릴 것이다.

'거긴 안 돼!'

신체 내부의 내장이니 당연히 중요하지만, 여자 던전 주인에게 있어서 자궁은 심장보다도 더욱 소중한 곳이었다. 자궁이 망가지면 씨를 받아도 스스로 알을 낳을 수도 없다. 엘프의 귀가 다시 돋아나게 한 것처럼 수많은 여성들을 셀프 합성해야만 했다.

불행 중 다행으로 마나만 사용하려고 하지 않으면 음충은 잠잠했다. 그건 곧 엘프의 힘만으로 도망쳐야 한다는 의미였다.

"......."

근력 자체가 모자란 것은 아니다. 들킬까봐 걱정이 되어 그렇지, 가죽을 끊어내기만 하면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그러면 잘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계속 던전을 공략하여, 아직 구하지 못한 엘프 분들을 구해내도록 하겠습니다."

"예. 여신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여신 운운하는 니프엘라의 목소리가 가증스러웠으나, 그 소리를 끝으로 안다이할은 멀어지고 니프엘라는 가까워졌다. 가느다란 손길이 아스타로트의 귀를 만지작거렸다.

"나를 아느냐. 2장로 니프엘라. 엘프 중에는 나와 비슷한 연배의 이가 거의 없지. 그건 즉 우리 엘프들의 얼굴 대부분을 알고 있다는 말이다."

잘난 척 설명하지 않아도 안다. 아스타로트는 반박하고 몸을 일으키고 싶었지만, 아스타로트의 결박은 더욱 단단해졌다.

"소용없어. 화염사자의 가죽을 몇 겹이고 겹쳐서 만든 특제 가죽이다. 죄인 구속용으로 만들어진 거니 끊어낼 수도 없지."

니프엘라의 목소리는 점점 가라앉았다. 귀를 쓰다듬는 손길도 점점 떨리기 시작했다.

"...이 귀에서 아는 이들의 흔적이 느껴지는구나. 내가 아는 이들의 흔적이 남아있어. '한 명'이 아닌, '여러 명'의 흔적이. 나와 함께 수백년, 수십년을 숲에서 살아온 젊은 엘프들의 흔적이 말이다."

들켜버렸다. 아스타로트는 가슴이 철렁내려앉았지만, 평온을 가장하며 고개를 가로저으려했다.

"변명을 하려고는 하지마라. 네 정체가 무엇이든, 던전에서 나온 이상 우리의 적이다. 군단은 적을 가만히 두지 않지."

푸--욱!

무언가가 어깨를 찔렀다. 날카로운 단검같은 것에 아스타로트는 눈앞의 어둠이 전부 하얗게 물들었다.

"...만약 네가 선량한 피해자라면, 언젠가 나를 상대로 이렇게 찔러도 좋다. 하지만 지금은 내 직감을 믿어보고 싶구나. 너는...내가 알고 지내던 이들이 아니야."

푸욱, 푹! 니프엘라는 아스타로트의 어깨 안쪽을 단검으로 헤집었다. 마치 힘을 주지 못하도록, 힘줄을 끊어내는 칼질에 아스타로트는 격렬히 저항했다.

꽈드득, 꽈득!

손목발목이 으스러지는 건 상관없다. 여기서 가만히 당하면 그대로 끝나버린다.

"걱정마라. 힘줄이 다쳐도...라스로 다시 태어나면 돋아날테니. 병주고 약주는 식이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대로 따라다오."

푹, 푸욱. 주변에서도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아스타로트만 있는 게 아닌지, 다른 엘프들의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흑, 흐윽--

앙, 하으응...!

아스타로트 본인이 포획하고 몽마들이 범했던 다크엘프들이 하나 둘 신음을 흘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고통은 통각이 아닌 쾌감에 의한 신음이었다. 아스타로트는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칼에 찔리고 있는데도 어째서 저들은 신음을 흘린단 말인가. 뭔가 잘못되었다.

"군단장님 명령이다. 인간들이 구한 다크엘프들은...도망가지 못하게 힘줄을 끊어놓으라는. 미안하구나, 자매여. 이 모든 것이 너희를 다시 태어나게 하기 위한 것이니, 양해바란다."

푸욱, 푹. 어깨를 짓이겨놓은 니프엘라는 아스타로트의 귀에 낮게 속삭였다.

"정말로 네가 버진 엘프가 맞다면, 말이지...."

푹, 푹푹.

숲속에는 엘프들이 칼에 찔리는 소리만 가득 울려퍼졌다.

* * *

"이야, 활활 잘타네. 더 타라, 더 타!"

나는 아스모딘의 엉덩이를 때리며 우리 군단을 응원했다. 아스모딘의 살결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퍼져나가는 붉은 오라가 군단 전체로 퍼져나갔다.

"준비, 조준, 발사!"

군단병들은 모두 준비한 슬라임 점액에 구멍을 만들었다. 칼로 찌르거나 손톱으로 살짝 찢어 입구를 만든 뒤, 투포환을 던지듯 집어던졌다. 바닥에서 불기둥을 뿜어내는 플레어 판테라를 제외한 모든 군단병들이 점액구슬을 던졌다.

화륵, 화륵.

살짝 열린 입구에서 새어나온 기름이 불기둥을 지나며 불이 붙었다. 우리가 즉석에서 만들어낸 화염구는 우리의 포진 정중앙에 놓인 러스트릴리스의 전신을 때렸다.

신체적으로 원거리 공격이 불가능하다면 도구를 이용하면 그만. 그리고 기존에 있던 것들을 활용하여 더욱 더 강력한 공격도 가능했다.

"힘이 아직 남은 이들은 이렇게 던져라!"

나는 륜으로부터 화염구를 하나 받아 직구로 집어던졌다. 오크의 강화된 근력으로 쏘아진 화염구는 불기둥을 스치며 불이 붙어 러스트릴리스에게 박혔다.

"스트라이크!!"

콰--악. 아직 떨어지지 않은 껍질에는 합성된 몽마들의 얼굴이 남아있었다. 나는 그들의 안면에 정확히 화염구를 직구를 때렸다.

"할 수 있겠냐?!"

"""우오오오!!"""

오크들이 모두 마운드에 오른 투수마냥 발을 앞으로 디디며 화염구를 던졌다. 무회전으로 날아가는 화염구들은 안면을 때리기도 하고, 이미 벗겨진 껍질의 살점을 두드리기도 했다.

얼굴을 맞추면 대박이고, 못 맞춰도 상관없다. 설령 터무니없는 볼로 바닥에 튕기게 된다 하더라도, 기름이 터져나와 불이 주변으로 퍼졌다.

"크흐흐, 그냥 기름도 아니지."

단순히 기름만 채워넣은 것도 있지만, 모든 점액 구슬에 기름을 섞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 무게도 실어줄 겸, 기름이 안에서 찰랑거리지 않도록 할 겸 마액도 섞었다.

마액도 당연히 불에 탄다. 기름섞인 마액은 러스트릴리스의 몸에 끈적하게 늘러붙었다. 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궤적을 따라 불씨가 스치며 그대로 불이 붙었다.

"밤꽃나무타는 냄새가 장난아니구만."

키에에엑!

러스트릴리스의 전신 안면이 괴성을 지르며 발광했다. 이미 불길은 겉잡을 수 없을 만큼 사방에 퍼졌고, 우리의 전신에 땀이 흐를 정도로 던전 안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리고 러스트릴리스는 불기둥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러스트릴리스는 몸이 불타면서도 뿌리를 들어올려 힘겹게 움직이고 있지만, 불기둥은 빠져나오지 못했다.

"어딜 도망치려고? 찾아가는 서비스 모르냐?"

슬라미아들이 땅속을 헤엄치며 미리 굴을 파놓는다.

플레어 판테라들은 러스트릴리스가 이동하는 경로에 미리 대기하고 있다가 불기둥을 뿜어낸다.

불기둥 밖의 우리 군단병들은 화염구를 집어던지거나 가능한 원거리 공격으로 딜을 퍼붓는다.

그리고 나는 아스모딘을 들어 체력이 충분할 때는 불기둥 안에서 러스트릴리스와 숨바꼭질을 하고, 숨이 차올라 더이상 피할 수 없겠다 싶으면 불기둥 밖으로 빠져나온다.

러스트릴리스가 나를 쫓아 몸을 움직여도 바닥의 불기둥도 쫓아온다. 불을 뿜어내는 플레어 판테라들도 지칠 법 했지만, 처음에 화려하게 뿜어낸 이후로는 아주 효율적으로 불을 지르고 다녔다.

"아아, 이것이야말로 이동식 불가마인 것이다."

화염구 속 기름이, 러스트릴리스의 뜯겨진 나무껍질이 불을 더욱 확산시켰다. 이제 이 화마는 여기 있는 그 누구도 겉잡을 수 없다. 마법에 의한 것이 아닌, 자연에 의한 불꽃이니까.

"불에 타서 재가 되어 자연으로 되돌아가거라."

나는 화염구를 움켜쥐었다. 다른 화염구와는 확연히 다른, 혹시나 모를 공성전을 위해 만들어진 축구공만한 점액 구슬이었다.

"내 너희들에게 약속하마. 너희가 죽어라 싸우는 동안 어디 도망쳐서 구석에 박힌 아스타로트를 잡아, 너희가 죽은 목숨만큼 새로운 생명을 낳게 할 것이다. 륜, 인장을."

"네."

륜이 아스모딘을 내 자지에서 뽑아냈다. 이미 몇 번이고 싸지른 덕분에, 아스모딘의 고간에는 끈적한 정액이 흘러내렸다. 륜은 아스모딘을 꼭 붙잡고 뒤로 물러났다.

캬아아----

러스트릴리스가 꽃잎을 활짝 펼치며 뿌리를 사방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누가봐도 최후의 저항같은 느낌이 강했고, 뿌리로 바닥을 두드리며 부리는 난동에 불길이 순간 반쯤 사그라들 정도였다. 꽃잎의 얼굴들이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건지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메어리! 하르파스!"

"준비 끝!"

불기둥의 사이.

천장에서 몰래 대기중이던 메어리가 아래를 향해 성검을 겨눴다. 하르파스는 메어리를 붙잡고 천장에 딱 달라붙듯 날개를 펄럭였다. 성검 비르고의 끝은 꽃잎의 정중앙-내가 아스모딘을 뽑아냈던 암술부를 조준하고 있었다.

사아아---!!

성기방패의 포격이 하늘에서 내리꽂혔다. 흐느적거리던 수술 촉수가 닿자마자 소멸했고, 아스모딘이 뽑혀나간 자리에는 버지니움 실드가 내리꽂혓다. 단순히 신성력의 에너지를 모아 쏘는 저격이 아니라, 성기방패 자체가 꽃잎을 누르듯 내려앉았다.

"아아, 저것이야말로 진정한 보-빔...!"

러스트릴리스의 움직임이 멈췄다. 뿌리로 지탱하던 몸이 무너져내렸다. 역시 간부들의 얼굴이 자리잡고 있는 꽃잎, 그리고 아스모딘이 있던 꽃잎의 정중앙이야말로 놈의 진정한 약점이었다.

"전원, 마지막 투구 준비."

나는 양손으로 붙잡은 화염구를 머리 위로 올렸다. 플레어 판테라들의 불기둥을 선으로 잡은 나는 무릎을 살짝 굽혔고, 군단의 병사들은 모두 저마다 남은 화염구를 모두 집어들었다.

"군단장이 시범을 보이마. 왼손은...거들뿐."

나는 몸을 살짝 띄워, 접었던 팔을 앞으로 내밀었다.

휘이이익-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염구는 불기둥을 지나쳤다. 점액 덩어리가 워낙 커서 불기둥을 그저 스치기만 했지만 괜찮았다. 어차피 안에 들어가기만 하면 그만이니까.

"링 안쪽에만 들어가면 그만이지."

화염구가 버지니움 실드의 끝에 떨어졌다. 초승달같은 음순의 라인을 따라 데굴데굴 굴러가던 화염구는 점점 형체가 흐물흐물해졌다.

"성기방패는 마족을 태우고...마족만 태우지."

사르르. 버지니움 실드를 구르던 화염구의 점액이 사그라들었다. 자연히 안에 들어있던 기름이 깔대기처럼 설치된 버지니움 실드의 아래로 흘러들어갔다.

"속까지 바삭하게 만들어주지. 모두, 던져라."

휘리릭.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화염구가 성기방패의 안으로 굴러떨어졌다. 하피들이 낮은 천장을 날았고, 아래에 매달린 안드라스들이 한 무더기의 화염구를 떨어뜨리고 이탈했다. 나는 러스트릴리스를 향해 두 손을 모아 합장했다.

"파이어 앤드 피스. 레스트 인 피스."

다음 생에는 아스타로트의 안에서 태어나 출산의 고통을 느끼게 해주길.

"라스의 이름으로."

거대한 불기둥이, 러스트릴리스의 꽃잎 안쪽을 폭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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