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비만 오크-375화 (375/800)

나 혼자 비만 오크 375편

<--  -->

성벽은 박살났다.

적은 언제든지 들어올 수 있고, 우리가 붙잡은 인질은 얼마든지 탈출할 수 있다. 성벽을 다시 만들어도 금방 뚫리게 될 것이며, 우리는 상대보다 조금 좋은 진지에서 적을 마주하고 있는 셈이 되었다.

"라스베가스는 역시 수성을 하기에 좋은 곳이 아니야."

"예상외의 적이 나타났을 뿐입니다."

에일라는 너무나도 강한 변수를 주장했다. 하지만 라스베가스의 본질적인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스톤골렘이 허무하게 무너지기는 했어도 결과적으로 뚫리긴 뚫렸을 거다. 모험가들 중에 마법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니."

"그 인간 도대체 정체가 뭐야? 아니, 애초에 인간 맞아?"

루나는 하늘에서 빛의 창을 떨군 여자에 치를 떨었다.

레비즈 안.

성기사단의 단장이지만 정체를 알 수 없는 힘의 보유자. 나를 업신여기는 듯한 태도와 압도적인 힘, 그리고 세로로 찢어진 눈동자를 생각해보면….

"드래곤이 아닐까요?"

"설마 그럴 리가."

륜이 언급한 '드래곤'의 가능성. 드래곤이라면 능히 메테오 급의 고위 마법을 날릴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던전 주인 중 7위 안에 들어가는 자들 중 일부도 '마룡'이라는 이명을 가지고 있다고 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고작 92레벨 밖에 안 된다고?'

만약 그렇다면 시스템이 에러가 있거나, 시스템을 속일 정도로 레비즈의 마법실력이 뛰어나다는 말이었다. 그러나 레비즈는 레벨 92의 5성급 실력자였다.

"그냥 숨겨놓은 한 방이 있었다고 하지. 만약 드래곤이었다면 그 일격은 충분히 연사로 날리고도 남았을 거다."

"그럼...."

"엄청나게 모았다가 한 방 크게 날린 셈이지. 그래. 상대의 궁극기를 빼게 만들었다고 생각하자."

토벌대가 인질들을 데리고 철수한 지 벌써 수 시간이 지났음에도 아직까지 라스베가스가 멀쩡한 것을 보면, 분명 엄청난 쿨타임이 필요한 기술임이 틀림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차라리 속이 편했다.

"던전에서 허우적 대던 걸 생각해서 그런지 조금 얕봤다. 확실히 전장에서 굴러먹을 짬밥은 된다 이건가. 쳇. 너희가 없었으면 큰일날 뻔 했다."

"죄송합니다. 저희 멋대로 주인님의 병력 배치를…."

"아니다. 이런 위험 상황에서야말로 루나가 나설 때지. 잘 했다. 나도 생각을 바꿔야겠구나."

리스크를 조금 감수하고서라도 동원할 때는 확실하게 동원해야 할 필요가 있는 법. 나는 스스로의 용병술에 반성하며, 한편으로는 우리와 대치하고 있는 토벌대의 진영을 살폈다.

"포로들은 잘 녹아들었을까?"

"다들 베테랑 모험가들입니다. 예전에 같이 모험가로 일했던 이들이 있다고 한들…라스베가스 전투에서 잡혔다도 둘러대면 되겠죠."

이미 모든 준비는 해놓았다. 토벌대는 자신들이 구출한 인질들의 정체조차 모르고 자신들의 본진으로 데리고 갔다.

"그래. 레비즈 년은 몰라도...병사들은 분명 승리에 도취되어있을 것이다."

적어도 성벽을 무너뜨린 것에 만족하고 있을 것이다.

적어도 사람들을 많이 구한 것에 안도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까지 동요가 없는 것으로 보아, 스피카 성의 상황은 전해지지 않은 듯 했다.

"소식이 전해지면 아주 보기 좋겠군. 흐흐. ...오, 왔나."

"주인, 정찰 다녀왔어."

적진 상공을 훑고 온 안드라스가 우리 앞에 착지했다. 다른 하피들은 계속 요격당하여, 안드라스가 사실상 유일한 정찰병이었다.

"적들은 인간 포로들을 철저하게 관리하고 있어. 무슨 병에 걸린 새끼를 따로 격리하는 것 같아. 진지까지 옆에 따로 마련해뒀어."

"일단은 마물에 범해져서 부정을 탄 자들이나 그럴 법도 하지."

실제로는 어떻든 그들은 일단 마물들에게 범해진 자들이다. 더군다나 마물에게 씨받이가 된 것도 모자라 아이까지 가졌다면, 인질들은 교단에 의해 화형될 운명이었다. 적어도 직접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으리라.

"흐흐, 그렇다면 우리 승리다. 아주 수월하게 승리할 수 있겠어."

만약 레비즈가 눈치를 챘다면, 아마 레비즈는 인간 모험가들을 가차없이 죽여버렸을 것이다. 하지만 그저 격리 수용만 하고 있다면 우리가 이길 확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올라간다.

"인간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무엇일까? 당연히 죽음이겠지? 흐흐. 레비즈가 아무리 강하다고 한들...군중의 공포를 이겨낼 수는 없을 터."

나는 희망이라는 미끼로 서전에서 레비즈를 크게 먹였다.

"강한 자일수록 더욱 모르는 법이지. 감기에도 픽픽 쓰러지는 약자의 설움을."

레비즈는 살아남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의 적은 토벌대 그 자체지, 레비즈 한 명이 아니다.

"적의 대장을 처치할 수 없다면, 그 부하들을 모조리 처리하는 수밖에."

나는 적진에 죽음의 공포를 뿌렸다.

"자, 통제 자체를 불가능하게 만들어 주지."

나는, 적진에, 역병을, 퍼뜨렸다.

* * *

모험가, 로트 리르콘은 구출한 포로들을 관리하는 임무를 맡았다. 말이 관리지, 그들은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로 아무 말 없이 들판에 누워있었다.

"......쯧."

하나같이 멍하니 있는 게 삶의 의욕을 잃은 것만 같았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보려고 한들, 그들의 운명은 마녀로 몰려 화형당하는 것 밖에 남지 않았다.

"불쌍한 사람들."

"뭐가 불쌍하다는 거요?"

함께 관리-겸 감시를 맡은 모험가가 물었다.

"자기들도 원해서 마물들에게 범해진 것도 아닐텐데, 마물의 아이를 가졌다고 무턱대고 화형시키는 게 안타깝다는 말이오."

로트는 진심으로 그들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아이를 가졌는지 아닌지 확인하려면 교단의 높으신 분이 오셔서 판단하실테니, 그 때까지 살아도 산 몸이 아닐테고. 면죄부를 살 돈은 있겠소? 잡혀있는 사이 재산은 다 몰수되었을텐데."

"그거야 그렇지만...높으신 분이라 하면 기사단장 님이 있지 않소?"

"형씨. 잘 모르시는 구만."

로트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신교단에는 이단심문관이라는 자들이 존재하오. 추기경 아래에 있는 그들은 마녀를 화형시키는 정화 의식을 주관하는 자들이지. 정확히는 금기를 범한 자들을 태우는 게 그들의 일이지. 가령 어린 아이를 겁간한다거나, 친딸을 겁간한다거나."

"...세상에 그런 천인공노할 짓을 저지르는 자가 있단 말이오?"

"짐승만도 못한 인간은 어디나 존재하는 법이라오. 아무튼...성기사단의 단장님도 저들을 함부로 죽일 수는 없소."

결국 마녀재판을 하려면 저들을 모두 살려 이단심문관이 올 때 까지 한 곳에 모아둬야 한다는 말이었다. 행여나 한 명이라도 도망치면 큰 혼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런데 댁은 어찌 그렇게 잘 알고 있소?"

"...어쩌다보니 귀동냥으로 들은 것이오. 가족 중에 마물에게 당한 이가 있어서."

"미안하오."

잠시 대화는 소강상태에 이르렀다. 하지만 옆에 있던 남자는 금방 또 입을 열었다.

"그보다 그 말은 참인가? 마물에게 범해진 여인을 건드리면 마족이 된다는 말."

"...그럴 리가 있나."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던데, 마물의 씨를 잉태한 여자와는 절대로 그 짓을 하지 말라고 하더군. 그들과 하기라도 하면 여자의 뱃속으로 잡아먹힌다고 말이야."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헛소리 할 거면 가서 식사나 받아오시오."

슬슬 시간이 점심에 이르렀다. 토벌대는 휴식을 취해야했고, 입도 무려 100명 가까이 늘어나고 말았다. 구출한 인질들의 상태는 매우 좋지 않아보였다.

"아무리 싸울 때 싸우더라도 밥은 먹고 싸워야지."

잠시 후, 식사가 도착했다. 스프가 든 나무통을 힘겹게 가져온 배식당번 중 일부가 자신들이 어디로 가야하는 지 깨닫고 나무통을 내려놓았다.

"자, 잠깐만요! 저희가 저들에게 직접 배식하라는 말입니까?!"

"예. 힘든 일을 겪은 분들입니다. 그분들을 위해 유동식을-"

"사제님! 이건 아니죠! 이번에 당번에 걸려서 하는 건데 왜 하필 여기에! 사제님께서 옆에서 정화해주실 건 아니잖습니까!"

"이, 이보세요. 듣는 귀가 많습니다...!"

...구출된 포로들에게는 제대로 된 식사가 지급될 리 만무했다. 그들에게 올바른 식사를 제공해야할 이들은 포로들의 근처에도 가고 싶어 하지 않았다.

"괘, 괜히 접촉했다가 저도 부정을 타면 어떻게 합니까?! 저 면죄부 살 돈도 없습니다!"

"젠장! 장난쳐?!"

근처에서 육포를 뜯던 사내가 일어나 달려들었다.

"저 사람들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고! 네 어머니가 저기서 저러고 있어도 너는 그럴 거냐?!"

"어머니는 내가 이래도 충분히 이해하실 거다, 이 새끼야!!"

"뭐 이 새끼야?!"

토벌대 사이에 격한 분쟁이 시작되었다. 사제들이 열심히 분쟁을 중재하고, 모험가와 징집병 사이에서 서로 욕설을 주고받는 가운데.

"......흐흐."

인질로 잡혀온 여인들은 배를 붙잡으며, 하나같이 씩 웃음을 참고 있었다.

"......쯧쯧, 미칠 법도 하지."

로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 * *

"단장님. 병사들의 상태가 심상치 않습니다."

"나도 심상치 않다."

"농담이 아닙니다. 잘못하다가는 폭동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내가 폭발하기 일보직전이다. ...후우, 진정하기 어렵군. 쳇."

막사 아래, 자신의 침대 위에 가림막을 친 레비즈는 이를 갈며 사제에게 지시를 내렸다.

"또 뭐가 문제지? 병사들에게 지급되는 식량을 줄인 것도 아닐텐데. 포로들에게는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식사가 지급된 거다. 어떤 미친 놈들이 그걸 가지고 따지던가? 마물에게 범해진 여자들은 먹을 가치도 없다고?"

"아, 아닙니다. 당번으로 배식을 하기로 한 모험가 중 일부가 포로들에게 배식하기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옆에서 숨만 쉬어도 마기가 옮을 거라며…."

"개같은 소리군."

레비즈는 이죽거리며 시트를 손톱으로 긁었다. 까드득거리는 소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마기가 옮는 거라면 당장 포로들부터 마족이 되었을 거다. 멍청한 것들."

쿵! 레비즈는 혀를 차며 침대를 내리쳤다. 신경질적인 소리에 사제는 식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성기사단은 아직 소식이 없는가?"

"...이제 후작령을 통해 본격적으로 소식이 전해졌을 겁니다."

"스피카 성으로 보낸 정찰대원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전력으로 왕복한다고 가정할 경우, 적어도 한 시간 안에는 도착할 것 같습니다."

"...미쳐버리겠군."

부우욱. 천이 무언가 날카로운 것에 긁혀 찢어졌다. 레비즈의 초조함은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아무것도 제대로 전과를 올리지 못했다. 성벽을 망가뜨리고 인질들을 구출했으나, 이곳에서 계속 버텨야 할 지도 모르는 상황이야. 전황은 점점 악화되어가는데 하나같이 죄다 멍청한 것들 뿐이야. 심지어 인간들은 서로 싸워대기만하고…. 차라리 마족 놈들이 더 단합이 잘 되겠군."

"예?"

"그만큼 답답하다는 것이다. 남작이 진작 정보를 제대로 파악했다면 나도 이런 수모를 겪지 않았을 것이다. 적의 전력이 이런 수준인 걸 알았으면 내가 성녀님을 붙잡아 남겼을 것이다!"

레비즈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침대에서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어찌나 크게 몸을 들썩이는 지 막사가 흔들릴 정도였다.

"대관절 무엇이냐? 우리가 엘프의 숲을 침범했다는 것이!"

레비즈를 미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엘프의 존재였다. 사제는 바로 허리를 숙이며 대답해다.

"화, 확인 해봤습니다. 분명 저희는 엘프의 숲을 피해갔습니다."

"그런데 여왕이 그랬다고 하잖아!!"

날카로운 레비즈의 비명에 사제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레비즈의 신경질은 생리통을 겪는 여인보다도 더 날이 서있었다.

"엘프가 마왕군의 편에 서버렸어! 인간들을 향해 활을 들었다고! 그것이 무슨 의미인 지 너는 아느냐?!"

"여, 여신을 따르지 않는 어리석은 자들이 늘었-"

"이 멍청한 놈!"

쾅! 레비즈는 가림막을 걷어 사제를 향해 달려왔다. 로브 아래로 가려진 그녀의 손목은 은빛의 비늘같은 것이 반짝이고 있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세로로 길게 찢어져 있었다.

"중립을 표방한 아인족들이 모두 마왕군의 편을 들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아니면 다른 곳에 숨어있는 엘프들마저도! 그들은 엘프의 선택에 흔들릴 게 뻔하다. 심지어 엘프 여왕의 선택이니…!"

"하, 하지만 저들은 마왕군과 결탁한 어리석은 자들-"

"신성력을 쓰지 않더냐! 엘프가 나보다도 더 짙은 신성력을 사용했어! 심지어 몇 달을 모은 게 아니라, 그 자리에서 즉석으로! 오크가 뒤에 받치고 있는데!"

사제는 침묵했다. 레비즈의 눈에는 얼핏 광기마저 엿보였다.

"분명 이단이 늘어날 것이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엘프의 등장, 그리고 마왕군에서 신성력을 쓰는데도 여신은 그 힘를 거두거나 천벌을 내리지 않았다.

-어째서 여신께서는 인류를 위협하는 마왕군이 신성력을 사용하는데도 그대로 두시는 거지?

-정말로 마왕군과의 싸움은 여신께서 말씀하긴 것이 맞는 건가? 성녀나 추기경이 혹세무민하는 거 아닌가?

-혹시...여신이라는 존재는 없는 것이 아닌가?

"여신 교단 전체가 흔들릴 수 있는 것이다…!"

레비즈는 사제의 멱살을 풀고 초조한 듯 이를 깨물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당장 달려가서 오크와 엘프를 쌍으로 찔러죽여야-"

"큰일났습니다!!"

병사 하나가 막사를 급히 열어젖히며 들어왔다.

========== 작품 후기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