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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혼자 비만 오크-295화 (295/800)

# 295

부하들을 죽이지 않기 위해 정말 최선을 다했다.

내가 앞에서 직접 싸우며 언제나 우위를 점한 상태에서 싸웠고, 부하들에게는 막타만 먹게 하는 식으로 경험치를 쌓게 했다.

그렇게 나는 부하들이 죽는 상황을 최소화했다. 미친 짓거리를 벌이더라도, 부하들이 죽지 않으면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한계에 봉착했다.

슬라임 드래곤 하나가 길을 중간에 끊어버리며 스스로를 희생했다.

거대 까마귀의 기습을 미처 막지 못한 나를 구하기 위해 라임은 스스로 몸을 던졌다.

할파스나 다른 던전 주인이 본다면 고작 두 명밖에 안 죽었다고 할만한 상황이지만, 아무리 솔로몬의 시스템에 의해 마석이 있으면 부활이 가능하다고 하지만, 그래도 역시 죽지 않는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죽었다. 그리고 나는 그 복수를 해야했다.

"나는 군단장이다. 전사가 아니지. 힘의 차이는 명백히 잘 알고 있다."

할파스의 힘은 절대적. 부하들이 죽든 말든 내버려둔 궁극적인 이유는 본인이 너무나도 강하기 때문일 것이다.

'포르네우스는 커녕 거의 20위 권이라고 해도 되겠는데.'

위압만 보면 그랬다. 본능이 그렇게 외치고 있다. 던전 주인의 등수와 강함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는 건 당장 나부터가 증명하고 있다.

'샥스가 알고 있던 할파스의 강함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아.'

샥스의 정보를 믿고 모든 작전을 짰다. 빨강, 노랑, 파랑 간부도 모두 샥스의 정보 덕분에 쉽게 이길 수 있었지만, 샥스는 할파스의 강함이 어느정도인지 전혀 모르고 있었다.

〈할파스〉. Lv.94. ★★★★★☆.

무려 6성까지 성장이 가능한 존재. 5성의 기준인 90레벨은 훌쩍 뛰어넘은 존재. 아마도 자신의 등위에 만족하며 무언가 다른 꿍꿍이-안드라스를 먹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던게 아닐까.

'20위 급이 63위 던전 공략해서 던전 주인 겁탈하면 그것만큼 굴욕이 또 없겠지.'

할파스는 안드라스를 먹기 위해 나름 등위를 조절하고 있던 걸지도 모른다. 그만큼 할파스는 강했다.

'그래도 이길 수 있다.'

내가 직접 싸우기에는 역량이 부족하다. 상대는 트랄 급의 강자. 내가 트랄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다면, 혹은 비벼볼 수 있었다면 꿈의 세계에서 한 번은 도전했을 것이다.

'나로는 안 돼.'

강해졌지만 아직 한참 부족하다. ★의 차이는 마왕 솔로몬이 객관적으로 내린 힘의 격차를 나타내는 좋은 지표다. 내가 할파스를 직접 상대하는 건 자살 행위.

"나는 이길 수 없다."

우리 군단은 이길 수 있다.

"그래서 너를 이길 수 있는 자를 데려왔다."

레벨 90. ★★★★★. 그 누구보다도 가장 많은 신성력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그녀가 이곳까지 오는데 아무 피해 없이 올라올 수 있도록 길을 잘 닦아놓았다.

"우리에게는 루나가 있다."

다크엘프 여왕 루나. 뒷치기로 당하는 것을 너무나도 좋아해서 그렇게 보이진 않지만, 본인은 겸양을 떨지만 엘프 수호자 중 '최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강자.

"고생했어. 나머지는 나...아니 우리가 알아서 할 게."

내 뒤에 선 루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고개를 살짝 묻었다. 나는 할 일을 다 했고, 이제 나머지는 부하들에게 맡기면 된다.

"잘 부탁한다. 나는...조금 쉬워야 할 것 같아서."

"당연하지. 륜, 그레모리. 부축을 부탁해."

륜과 그레모리는 양옆에서 나를 데리고 벽으로 옮겼다. 나는 벽에 기대며 주저앉았고, 둘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가서 돕거라. 아마 힘이 닿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그래도 견제 정도는 할 수 있겠지."

둘 다 원거리에서 공격을 하기에는 특화된 존재들이다. 더군다나 지금은 새를 '사냥'하기에 딱 좋은 상황.

"너희들이 이기는 것을 여기서 지켜보겠다. ...마나가 떨어지면 여기로 와라."

나는 마석을 집어들었다. 나의 체력은 다했을 지언정, 나의 정력은 아직 굳건했다.

"바로 채워주마."

이번 전투.

나의 마지막 역할은 단 하나.

"...오자마자 바로 넣어줄테니, 마나 떨어졌다 싶으면 언제든 달려와."

마나 주유소. 나는 토템이 되기를 자처했다.

"그렇다고 중간에 박히고 싶어서 바로 오지는 말고. 상황이 이렇지만 진지하게 싸움에 임해라. 이 싸움이 끝나면...."

나는 루나도 들을 수 있게, 크게 소리쳤다.

"어디 원하는 대로 나를 '사용'할 수 있게 해주마! 한 명당 하루씩!"

군단의 우두머리에게 가장 중요한 역할이 있다면, 부하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고 의욕을 북돋아주는 것.

"...일단 너희 둘은 지켜보거라. 루나가 어떤 식으로 싸우는지."

나 또한 루나를 보며 배울 것이다.

5성의 싸움을.

* * *

한 명은 거대괴수를 사냥하는 베테랑 사냥꾼.

한 명은 쉬지않고 달려드는 말벌을 쫓아내는 거인.

체구의 차이로 인해 서로의 입장은 다르지만 두 명의 강자, 루나와 할파스는 분명히 대등하게 싸우고 있었다.

타다닥!

루나가 땅을 달려 할파스의 몸으로 파고든다. 할파스는 다리를 들어올려 루나를 짓밟는다. 루나는 몸을 빙그르르 돌려 피한 뒤, 깃털을 잡고 높이 뛰어오른다.

파바박!

보이지 않는 바람 화살이 깃털 사이로 파고들었다. 잔털이 워낙 단단하여 가죽을 전부 꿰뚫지는 못했으나, 살갗이 벌겋게 익을 정도로 화살은 날카로웠다.

그러나 루나는 혀를 차며 활을 들어올렸다. 너무 쉽게 공격을 허용했다 싶더니, 아니나 다를까 함정이었다.

끼아아악!!

할파스는 날개를 펼쳐 루나를 쳐날렸다. 깃털의 끝은 가시처럼 날카로웠다. 활과 가드를 들어오려 급소는 피했으나, 몸을 웅크리며 막은 팔과 다리의 옷에 구멍이 숭숭 뚫렸다.

파지직.

구멍 내부에는 갈색의 피부와 함께 은빛이 흐르고 있었다. 신성력을 피부처럼 몸에 두른 루나는 피해를 최소화했고, 바닥에 발을 디디자마자 활대의 끝을 양손으로 잡았다.

채---앵!!

루나의 활이 할파스가 휘두른 날개를 튕겨냈다.

콰득!

할파스의 날개가 루나가 레이피어처럼 찌른 활대를 붙잡았다.

파지직!

두 무기가 부딪힌 교차점에서 신성력과 마기가 튀어 폭발했다. 자욱한 흙먼지가 일었고, 둘은 동시에 무기를 회수했다.

호각.

서로가 서로의 공격을 읽고, 공격을 맞받아치며 자신의 공격을 이어나간다.

활을 사용하지만 활대를 검처럼 휘두르는 루나와 새의 모습이지만 날개를 검처럼 활용하는 할파스의 대결은 마치 검사들이 서로 칼을 겨루는 모습같았다.

카앙, 카앙---!!

신성력이 담긴 활대와 마기가 담긴 깃털이 맞부딪혔다. 공격은 한 번 씩 상쇄되고, 둘은 동시에 각자의 무기를 회수해 재차 공격을 이어나갔다.

루나가 대놓고 앞에서 활시위를 당겼다. 빛처럼 날아가는 은색 화살은 할파스의 정수리를 노렸다.

할파스는 그걸 부리를 벌려 깨물어부쉈다. 부리에 가득한 마기는 신성력의 화살을 박살내버렸고, 할파스는 두 날개를 뒤로 젖혔다.

푹, 푸욱!!

날개는 루나가 있던 바닥에 박혔다. 어찌나 날카로운지, 흑요석으로 된 바닥에 움푹 찍힐 정도였다.

"고작 그 정도로!"

자리를 박차고 뛰어오른 루나는 공중제비를 돌며 화살을 난사했다. 노리는 것은 오른쪽 날개. 포물선을 그리며 위로 떠오른 화살은 비처럼 할파스의 날개 위로 퍼부어졌다.

캬아아아악!!

할파스의 오른쪽 날개에 은빛 화살이 박혔다. 화살은 꽂히자마자 사방으로 신성한 기운을 내뿜기 시작했고, 그 모습은 마치 독이 퍼져나가는 듯 했다. 마족에게 신성력은 독이나 마찬가지니, 별반 다를게 없었다.

"흥!"

할파스는 오른쪽 날개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왼쪽 날개를 겨드랑이에 받쳤다. 기묘한 자세에 루나가 인상을 쓰는 사이, 할파스는 공중에 뜬 루나를 향해 공격을 이어나갔다.

"사출!"

할파스는 자신의 오른쪽 날개의 깃털을 왼쪽 날개로 모두 잘라버렸다. 한순간에 뼈만 남고 잘려진 깃털은 신성력에 찔린 것들을 제외하고, 나머지 모든 깃털이 의지를 가진 칼날처럼 빠르게 전방으로 쏘아졌다.

"칫!"

루나는 활대를 붙잡고 온힘을 다해 사방으로 휘둘렀다. 자신을 향해 360도로 몰아치는 깃털의 폭풍은 루나의 옷을 덮쳤다. 안드라스 사로 만들어진 전투복이건만, 할파스의 검은 깃털은 잘 벼려진 칼날처럼 루나의 옷을 베어버렸다.

"하아앗!"

루나는 기합과 함께 활을 아래로 내리쳤다. 루나를 중심으로 폭풍이 휘몰아치기 시작했고, 깃털은 모두 힘을 잃고 하늘로 높이 치솟았다. 루나는 깃털폭풍을 빠져나와 바닥에 착지했다.

"후우, 역시 조금 힘드네."

루나는 몸 군데군데 생긴 자상에 인상을 찌푸렸다. 상처는 그리 깊지 않았으나 상처가 생긴 것 자체가 불쾌했다.

"이렇게 피를 본 건 거의 100년 만인 걸."

"나 또한 마찬가지다, 엘프 여왕이여. 페닉스 놈을 제외하면 여기까지 나를 몰아붙인 적은 네가 처음이다."

"그럼 그냥 곱게 죽어주지 않겠어?"

"역으로 제안하지. 그대같은 강자가 저런 약한 놈을 따르는 건 이해가 가지 않는다. 저자를 죽이고 그대가 안드라스가 되어라. 그리고 원래의 안드라스는 내게 넘겨라. 동맹이다."

할파스의 말에 루나는 잠시 침묵했다.

"그래, 할파스와 동맹을 맺을게."

"그런가. 그렇다면 어서-"

"대신 죽는 건 너야. 약속했거든."

루나는 자신의 활을 양옆으로 붙잡았다. 자전거 손잡이를 잡은 듯한 자세로 손목을 비트니, 활대가 비틀리며 좌우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스릉.

활대의 안에서 날카롭게 휘어진 검이, 도(刀)가 튀어나왔다.

"너를 죽이고 샥스를 할파스로 만들기로 했어."

"...과연, 내 딸이면서 나를 배신한 건가. 어쩐지 너무 쉽게 공략당한다 싶었다."

할파스가 한쪽 날개로 자신의 반신을 가렸다. 그러자 할파스의 거대한 몸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점점 몸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처럼 강자를 만나 예우를 해주려 했건만, 유감스럽군. 너는 죽인다. 저기 뒤에 있는 놈들도 다 죽이고, 샥스와 안드라스를 데려다 침대에 묶어둘 것이다."

"...딸이라며? 안드라스는 네 이복여동생으로 들었는데?"

"나는 마족이다."

"...마족은 가족끼리 해도 괜찮다 이거야?"

"내게 칼을 들이민 순간부터 가족은 아니지. 안심해라. 너의 강함은 인정할만 하나, 너는 내 취향이 아니다. 우리 군단의 고블린들은 좋아할 지 몰라도."

"시건방지네."

루나는 양손에 든 검에 신성력을 불어넣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은발이 더욱 찰랑거리기 시작했다.

"죽고 싶어서 환장을 했구나?"

"내 앞에서 그런 말은 한 자는 모두 죽었지."

"그럼 내가 첫번째가 될 거야."

"그 말을 했던 자가 벌써 24명이다. 네가 이제 25명째가 되겠구나."

쿵!

몸집이 3m에 가깝게 줄어든 할파스는 발을 크게 굴렀다. 영락없는 새의 모습에서 날개달린 거인이 된 할파스는 검은 비둘기의 머리로 부리를 딱딱 부딪혔다.

"이 모습으로 변하게 한 것도 네가 3번째다."

우두둑!

오른쪽 어깨에서 잘려나간 날개가 돋아났다. 깃털은 하나같이 날카로운 가시와도 같았고, 양손에는 몸집이 줄어들기 전의 깃털을 각각 움켜쥐고 있었다.

"이 무기를 들게 한 것도 네가 2번째다."

키기긱.

깃털의 뼈대는 강철처럼 단단해졌고, 안의 잔털은 톱날처럼 날을 세웠다. 할파스는 마치 톱날을 둔기처럼 만들어놓은 자신의 깃털을 붕붕 휘두르며 사납게 웃었다.

"죽어본 적 있나? 내가 네 첫번째 죽음이 될 것이니라."

"...분위기 잡으면서 더럽게 시간 질질 끄네."

루나는 짜증을 내며 발을 어깨너비만큼 벌렸다.

"나도 어디가서 싸움 좀 한다는 소리는 듣거든? 서로 겨루는 것도 좋아하고. 그런데 너같은 놈이랑 싸우는 건 사양이야."

루나는 검을 자신의 하복부 앞에 십자모양으로 교차시켰다.

"그냥 한 번에 끝내자. 빨리 끝내고...쟤한테 박혀야 하거든."

"뭐-"

"내가 뭐하러 쟤를 따르겠어! 침대에서 졌으니까 따르는 거지! 이게 바로 그 증거야!"

우우웅---!!

루나의 웃옷 아래에서 은빛의 문장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하복부에 떠오른 문장은 꼭 군단의 인장을 닮아있었다.

"인장...이라고?!"

"아니, 성흔이야! 여신의 이름으로!"

군단간의 쟁탈전에서는 결코 들을 수 없을, 여신에 대한 기도가 울려퍼졌다.

"여신이시여, 자신의 딸을 강제로 겁탈하려는 저 악독한 자에게 신벌을 내리소서----!!"

성흔의 빛이 루나의 칼에 빠르게 스며들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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