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94
"...슬슬 어떻게 안 되겠나?"
갤러해드는 인내심의 한계에 봉착했다. 검이야 계속 휘두를 수 있고, 신성력은 아직 거뜬히 남아있으나, 천둥군주가 내던지는 코카트리스에 그만 질리고 만 것이다.
"나를 좀 보시게. 지금 내 꼴을."
갤러해드는 몸을 돌려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외투는 이미 저 멀리 벗어던졌고, 입은 거라고는 하얀 와이셔츠와 물에 젖어 다리에 딱 달라붙은 검은 팬츠 뿐. 그의 몸에서는 왠지 모르게 시큼한 냄새가 풍겼다.
"그만큼 마나를 모았으면 충분한 것 같은데."
"코카트리스들 하나도 남기지 않게 하려고."
샥스는 자신의 머리 위에 모인 거대한 물폭탄을 가리켰다.
"이거 제일 처음 맞은 상대에게 터지는 거란 말야. 파랑이 아저씨, 분명 코카트리스 방패막이로 내세울 거야."
"그래서 모든 코카트리스들이 다 기어나올 때까지 기다리자?"
"못할 것도 없지. 네가 괜찮다면."
"......안 괜찮으니 빨리 처리하도록 하지."
갤러해드는 이유모를 불안감에 최대한 빨리 지하를 정리하고 올라가기를 바랐다. 그건 샥스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지하의 '소탕'.
지하에서 올라오지 못하도록 적을 막는 것을 넘어서, 지하의 모든 마물들을 없애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 애초에 파후우에게 지하의 마물들을 전멸시키는 것을 제안한 장본인이 샥스였다.
배신하여 살 것인가, 절개를 지키고 죽을 것인가.
샥스는 천둥군주와 코카트리스들에게 이지선다의 선택을 제시했고, 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사형집행인은 샥스였다.
끼에에엑!!
코카트리스 하나가 포물선을 그리며 샥스의 물폭탄을 향해 날아왔다. 갤러해드는 자리에서 풀쩍 뛰어올라 코카트리스의 발목을 낚아챈 뒤, 아래를 향해 크게 내리 찍었다.
철푸덕!!
"...정말 짜증나는군."
코카트리스는 모가지가 꺾여 절명했다. 흙바닥이 진흙이 되어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의외인데."
"신사니까."
갤러해드는 자신의 전면에 묻은 흙탕물을 손으로 털어냈다. 아래로 내려찍고, 자신이 흙탕물을 뒤집어 쓴 덕분에 샥스는 조금도 더러워지지 않았다.
"이대로 가다가는 옷을 전부 다 벗겠어. 남은 코카트리스들을 일거에 소탕하겠다."
"가능해?"
"수가 충분히 줄어들었으니까."
갤러해드는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천둥군주는 멀리서 깃털을 날리며 갤러해드를 저격했으나, 갤러해드는 깃털을 몸으로 받아냈다.
푹, 푹푹!
팔뚝, 허벅지, 어깨. 급소는 아니지만 갤러해드는 너무 쉽게 공격을 허용했다. 깃털이 박힌 부분에서 푸른 전류가 튀기며 갤러해드의 몸을 지졌다.
"이런-"
"오크는."
몸이 달궈지는 와중에도 갤러해드는 담담했다. 목소리는 점점 갈라지기 시작했지만, 갤러해드는 무서울 정도로 침착했다.
"상처를 입을 수록 더욱 강해지는 종족이지."
"일부러 상처를 입었다는 거야?! 죽으면 어쩌려고!"
"급소만 안 맞으면 된다. 지금처럼…!"
갤러해드는 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정수리, 심장, 고간을 노린 깃털은 신성력이 깃든 검에 쪼개져 낙엽처럼 바스라졌다.
"이제는 내 차례다."
갤러해드는 호흡을 고르며 발을 앞으로 크게 뻗었다. 전신의 근육이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검을 어깨 너머로 놓았다.
"던지는 거엔 던지는 거로!"
갤러해드의 검이 신성력으로 가득차올랐다. 뒤에 있던 샥스가 신성력의 빛에 순간 마나가 흔들릴 정도였다.
"아프-"
"군단을 위하여---!!"
갤러해드는 앞으로 팔을 뻗었다. 신성력이 가득 담겨 폭발할 것만 같은 검을 앞으로 내던졌다.
붕--- 붕--- 붕-----!!
직선에 가깝게 날아간 철검에 천둥군주는 기겁을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슬아슬하게 스친 마나 실드는 검이 닿기도 전에 잘려나갔다.
퍼--억!
"어째써…?"
그리고 천둥군주가 피한 철검은 바로 뒤에 있던 갈매기 부관의 정수리에 박혔다. 코카트리스들은 자신이 죽을 뻔 했다는 사실에 경악스러운 눈으로 천둥군주를 바라봤다.
"크흐흐! 피했다, 머저리야!"
하지만 천둥군주는 오히려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것을 비웃었다. 갤러해드는 검을 잃었고, 천둥군주는 마나를 일부나마 회복할 수 있었다.
"이제 네게 무기는 없다! 위에서 원군이 내려올테니, 얌전히 죽을 준비를 해라!"
"내가 하고 싶은 소리군. ...아아, 그래."
갤러해드는 옷깃을 여미며 손목을 두드렸다.
"군단장님께선 말씀하셨지. 폭탄은 자고로 시간차로 터져야 한다고."
"폭...뭐?"
"빵."
갤러해드가 가볍게 손뼉을 쳤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끼에에에엑!!
코카트리스들이 고통스러운 괴성을 질렀다. 그들의 몸에는 철검의 파편이 날카로운 가시처럼 박혀있었고, 파편에는 미약한 신성력이 깃들어 있었다.
"전멸...이라고?"
가장 가까이에 있던 코카트리스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고, 가장 멀리 있던 코카트리스는 신체 한 편에 칼날 조각이 박혀 몸이 썩어들어가고 있었다.
"검이 폭발한다고 하니, 그 이름하야 〈폭검〉이라 할 수 있지."
"뭐야, 진짜 재수없어. 밥맛이야."
"...군단장님의 말씀이다."
"조금 재수없네. 흠흠."
샥스가 한 팔을 앞으로 뻗었다. 천둥군주는 폭검에 터져나간 코카트리스의 모습에 절규했다.
"샥스---!! 이것이 정녕 보이지 않느냐!! 신성력에 피부가 문드러진 이 끔찍한 모습이 보이지 않느냔 말이다! 이 마족의 배신자 놈들! 신성력을 쓰는 놈들과 손을 잡다니, 이 무슨 미친 짓이냐!!"
"흥, 뭐래. ...여신이 진작에 불경하다고 했으면 오크를 성기사로 태어나게 하지도 않았겠지."
샥스는 천둥군주에게 이죽거리며, 가녀린 손가락으로 삿대질을 했다.
"군단을 위하여."
집채만한 물폭탄이 천둥군주를 향해 굴러가기 시작했다. 천둥군주는 기겁하며 코카트리들의 시체를 발로 치우고 섬 위로 올라갔다.
"이, 이 배은망덕한 년! 할파스 님께서 태어나게 해주시고 그 모습으로 자라게 한 걸 감사히 여겨도 모자랄 판에!!"
"감사는 하지. 덕분에 아주 행복한 걸 알게 되었거든."
샥스는 짜증어린 얼굴로 천둥군주에게 손을 흔들었다.
"라스를 위하여. 안녕, 파랑이 아저씨."
"네, 네 이 년----!!"
샥스가 굴린 물폭탄은 천둥군주를 보호막과 섬 통째로 집어삼켰다. 천둥군주가 안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물폭탄 안을 빠져나오지 못했다.
"저것은...?"
"새장이야."
샥스는 펭귄 후드를 뒤집어 쓰며 이죽거렸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해서 익사하게 될...새장."
천둥군주의 보호막은 서서히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 * *
쿵!
시체매는 쓰러졌다. 검은 깃털 전체가 핏빛으로 물들 정도로, 시체매는 엄청난 피를 바닥에 흩뿌렸다.
"하아, 하아, 하아."
"이긴...건가?"
륜과 그레모리는 숨을 헐떡이며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온몸에 자잘한 상처가 가득했고, 심지어 그레모리는 날개 한쪽에 붉은 피가 튀어있었다. 그건 시체매의 것이 아닌 그레모리의 어깨에서 튄 피였다.
"......신성력을 사용하는 엘프와 타천사라. 여한은 없군."
시체매는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설령 내가 죽더라도 이런 싸움이라면...."
"말이 기네요. 죽이죠."
"그래. 그게 낫겠다."
륜과 그레모리는 함께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시체매의 붉은 눈동자를 좌우로 노린 둘의 공격에 시체매는 눈동자가 꿰뚫렸다.
"강적이었어요...."
"신성력 아니었으면 어디 팔 하나는 잘렸을 것 같은데."
강자와의 전투 경험이 부족한 둘이 전투의 베테랑인 붉은 시체매를 이길 수 있었던 배경은 단연 신성력이었다.
"두 명이서 잡는 것까지는 괜찮은데...."
"역시 보좌가 필요하겠어. ...그쪽이 낫겠지?"
"물론이죠. 마침 가능하기도 한...."
풀썩!
어디선가 쓰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륜과 그레모리는 황급히 계단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주인님!!"
둘은 쓰러진 파후우에게 달려갔다. 라임과 함께 전장에 섰던 파후우는 전신에 피칠갑을 한 채 멍하니 아래만 바라보고 있었다.
"이, 이건...?"
"......죽음은 모든 이에게 공평하지."
파후우는 담담한 목소리로 붉은 점액 덩어리를 품에 안고 있었다. 형체가 허물어지고 있는 슬라임의 모습에 륜과 그레모리는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라임...!"
"어리석은 녀석. 그걸 몸으로 막으면 어쩌냐."
파후우는 허탈한 미소로 라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미 얼굴이 반쯤 무너져내린 라임은 슬며시 웃으며 파후우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그래. 바퓰라 던전에서 나온 중급 마석, 싹다 긁어모아서 부활시켜주마. 그리고 그 다음에는 너도 4성을 만들어주마."
꾸르륵.
"...알았다. 꼭 이기마. 푹 쉬어라."
파후우가 라임의 이마에 입술을 맞췄다. 그러자 라임의 몸은 점성을 잃고 물처럼 계단 아래로 후두둑 떨어지고 말았다.
"주, 주인님...?"
"이건 도대체?"
"...별 거 아니다. 나를 지키려다가 슬라홀의 핵에 부리가 꿰뚫렸을 뿐."
계단에 주저앉은 파후우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쥐었다. 붉은 시체매보다도 더 몸에 피칠갑을 한 그는 이상하리만치 담담했다.
"아래의 마물들은-"
"힉."
둘은 계단에 한가득 쌓여있는 거대 까마귀와 가고일의 시체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족히 백은 훌쩍 넘는 3성 마물들은 하나같이 모가지가 비틀리거나 뜯겨져나가있었다.
"붉은 시체매는 잡았느냐?"
"주, 주인님. 괜찮으세요?"
"붉은 시체매는 잡았느냐고 물었다."
"...예, 잡았어요. 죽였어요."
"잘했다. 둘 다. ...내가 손이 이래서 격려는 못해주겠구나."
파후우는 허탈하게 웃으며 두 손을 들어올렸다. 륜과 그레모리는 당장이라도 회복 마법을 걸어주고 싶었으나, 그들의 마나에는 신성력이 담겨있어 마법도 사용할 수 없었다.
"작전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지상 1층에 요새를 깔았고, 지상 2층의 수호자도 공략했지. 지하 1층에서 올라오는 놈들이 없는 걸로 봐서는 아마도 샥스와 갤러해드가 성공했을 터."
파후우는 손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관절이 아직 제대로 움직이는지 테스트하는 듯한 모습에 륜은 소름이 돋았다.
"가자. 륜, 그레모리. 적의 수괴와 인장을 가질 때다."
"주인님, 잠깐이라도 쉬시는 게-"
"휴식은 필요없다. 가는 동안 호흡 좀 고르면 나아져. 괜히 시간을 끌었다가는 기껏 잡은 적의 부하들이 다시 부활할 거다. 바로 앞에 계단이 있지 않느냐."
파후우는 붉은 시체매의 등 뒤에 있는 계단을 가리켰다. 흑요석으로 만든듯한 고풍스러운 외형의 계단은 소용돌이 모양으로 천장을 향하고 있었다.
"질질 끌 필요는 없다. 너희들이 붉은 시체매를 잡는 순간, 이미 이 싸움은 우리의 승리였으니."
파후우는 아주 느긋한 발걸음으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평소보다도 더 무거운 발걸음에 륜과 그레모리는 묵묵히 그 뒤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나는 말이다, 전쟁이 싫다. 톡까놓고 말해서 그냥 너희들과 함께 던전 안에서 365일 매일매일을 즐겁게 살아갔으면 할 뿐이다."
"저희도요."
"마찬가지야."
"...고맙군. 그런데 그렇게 했다가는 모든 걸 빼앗기고 말 거다. 나보다 강한 자가 너희들을 빼앗으려고 하면, 나는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날 거다. 개빡치겠지. 나의 것을 빼앗기니까. 나의 것을 잃게 되니까."
파후우는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흑요석 계단에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죽는 것 조차 싫다. 한 번이라도 죽음을 겪게 하기 싫어서 내가 앞에서 싸우는 거다. 그건 비단 너희들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야. 그런데 저 놈은 뭘 하는 거냐? 가만히 앉아서 부하들이 싸우다 죽는 걸 구경만 하고, 부하들이 다 뒈져도 저렇게 둥지에 가만히 앉아서 잠만 쳐자고 있는 놈은 대체 뭐란 말이냐."
"쫑알쫑알 시끄럽다."
고오오오.
둥지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검은 괴조가 날개를 펼쳤다. 그 크키는 무려 10m를 훌쩍 넘길 정도였다.
"부하 하나가 죽었지. 아니, 둘인가? 슬라임 두 마리가 죽었다고 과몰입해서 찡찡대는 걸 도저히 듣을 수 없어. 그래, 네 놈이 나의 사랑하는 안드라스를 먹어치웠다고 떠들던 그 놈인가?"
붉은 시체매와 거의 비슷한 모습의 검은 괴조는 눈동자까지 검게 물든 채 파후우를 내려다봤다.
"너는 약하다. 하지만 우리 군단의 세 간부를 모두 쓰러뜨린 공적을 높이 사, 안드라스를 바치는 걸로 봐주도록 하지."
"누가 들으면 네가 이긴 줄 알겠어."
"난 한 번도 진 적이 없거든."
"흐흐, 그래? 그럼 오늘 한 번 질 거다. 그리고 영원히 뒈져버릴 거야."
"그런 말은 이기고 나서 하는 것이다, 약한 오크여. 복수에 눈이 멀었구나. 무엇을 믿고 그리 건방지게 구는 것이냐?"
"나의 군단."
파후우는 두 팔을 벌리며 활짝 웃었다.
"내가 복수에 눈이 멀어? 그렇긴 하지. 그런데 어쩌나. 지금 이 꼬라지로 너를 상대할 생각은 없고, 애초에 나는 너랑 싸울 생각도 없었어. 너를 죽일 자는 이미 처음부터 정해져 있거든."
파후우는 뒤를 가리켰다.
"...사냥감이 되어보는 기분이 될 거다. 축하한다, 할파스."
"신성력을 사용하는 자? 고작 넷이서 나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거냐?"
"넷? 어이쿠, 너무 작전대로 걸려들었는데. 미안해서 어쩌나."
파후우는 할파스를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로 목을 그었다.
"아직 한 명 남았다."
또각, 또각.
짙은 초콜릿 향이 할파스의 둥지를 서서히 채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