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9
꿈틀, 꿈틀.
그레모리 던전의 소환 시설에는 붉은 피막의 코쿤이 생겨났다. 나는 수도 없이 빠르게 꿈틀거리는 코쿤의 피막 너머에서 날개로 몸을 감싸고 있는 나신의 여인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혹시나 발라크로 태어날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건 무조건 상위 개체가 하위 개체를 포식하는 과정이니까요."
샤이탄은 내 옆에 서서 내 불안한 가정을 원천봉쇄했다.
'머리색이랑 날개색이 지금 왔다갔다 하는데.'
날개의 색깔은 그레모리의 붉은색과 발라크의 검은색이 교차하듯 반짝거리고 있었다.
아무리봐도 그레모리와 발라크가 육체의 주도권을 두고 싸우고 있는 듯한 모습이었지만, 샤이탄이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그레모리 또한 리스크가 없다며 들어갔으니 믿을 수밖에.
"잘 되어야 할텐데."
"환생결정을 사용한 합성입니다. 조건이 까다롭기는 해도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까다로운 만큼 효과는 확실하니까요."
〈포식환생〉.
주체가 되는 존재가 객체의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이능의 마법. 그레모리가 내게 그레모리로서의 이름을 잠시 반납하고 발라크와 합성을 하게된다면, 그 결과는 단 하나 뿐이라고 했다.
"그레모리가 던전 주인 〈발라크〉, 타천사로 다시 태어난다."
그를 위한 조건은 상당히 까다로웠다.
1. 환생의 주체가 되는 그레모리의 성장이 끝에 다다라있어야했다.
Lv.75/75, ★★★★.
☆없이 진화는 끝에 다다라있었고, 레벨은 서브 던전을 두 번 돌아서 얻은 모든 중급 마석을 녹여 그레모리에게 먹인 덕분에 75레벨을 찍을 수 있었다.
'그 많던 마석이 그레모리 몸속에 다 들어가더라.'
몇번이나 마석을 넣고 싸고 마석을 넣고 싸는지 잘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
한창 마석을 통해 레벨링을 하던 그레모리는 마치 임산부가 된 것마냥 배가 부풀어있었고, 75레벨이 되는 순간 원래의 몸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문제의 조건.
2. 환생결정.
그레모리도 하나밖에 없었고, 나조차도 하나밖에 얻지 못했던 아주 희소한 물건. 그 보석이 있어야만이 성장의 한계를 뛰어넘는 환생이든 객체를 포식하여 그 종족으로 다시 태어나는 환생이든 가능했다.
"마녀라는 종족의 고유 특징은 잃어버릴 지 몰라도,본인이 쌓아온 힘이나 경험은 온전히 전해질 겁니다. 기존의 발라크는 그레모리의 일부가 될 것이구요."
"안드라스처럼 말이지?"
"비슷합니다."
★ 하피가 ★★★★★ 안드라스로 합성하여 다시 태어나던 때.
그 때는 ★★★★★으로 확정 소환이 가능한 알이 있었고, 안드라스나 하피처럼 같은 종의 마물이 ★의 개수만큼 합쳐져야했고, 합성 이후의 레벨도 몹시 낮았다.
"그 때 알이 환생결정 역할을 한 건가?"
"그 때 저는 없었지만, 지금과 유사할 겁니다. 다른게 있다면 안드라스의 경우가 약한 이들이 하나로 뭉쳐서 강해지는 거라면, 지금은 강자인 그레모리가 일방적으로 발라크의 존재를 빼앗는 셈이 되는 거죠."
약육강식.
약한 발라크는 강자인 그레모리에게 모든 힘을 빼앗기게 될 것이다.
"흐흐. 그레모리가 이렇게 된다 이거지?"
나는 손가락으로 샤이탄의 인장을 살짝 쓸었다. 샤이탄은 은은하게 웃으며 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넣으실 거면 직접 넣으셔도 됩니다."
"응? 아니, 그 정도는 아니고. 아까 충분히 했잖냐."
"해도 해도 좋은 걸요. 주인님도 그래서 그레모리의 질을 처녀 시절로 되돌리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발라크 몸이 되겠지만."
내가 잠시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것.
"샤이탄아. 객관적으로 봤을 때, 그레모리 몸매가 더 좋지 않냐?"
"거의 비슷하지 않습니까?"
"마음씨가 다르잖아. 마음씨가."
나는 날개속에 가려진 발라크의 가슴을 가리켰다. 크게 차이는 나지 않지만, 발라크의 가슴은 원 그레모리보다는 살짝 작은 편이었다.
"환생하면 몸매 보정도 될텐데."
"...저는 이유를 알겠습니다만."
샤이탄은 셔츠 앞섶을 벗어 자신의 한쪽 가슴을 꺼냈다. 서큐버스라고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나만의 흔적으로 물든 연분홍빛 유두가 딱딱하게 솟아나있었다.
"진화든 환생이든 꼭 젊어지기만 하는 것 만은 아닙니다. 륜의 처럼 신체 나이가 올라가는 경우도 있고, 현재 상태가 전성기일수도 있죠. 그레모리는...그런 리스크를 피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요."
"와, 그거 설마?"
"주인님."
샤이탄은 조용히 내 귀에 속삭였다.
"여자를 이이상 부끄럽게 하지 말아주십시오."
나는 그레모리가 리모델링을 하기를 바랐는데, 그레모리는 아예 새집으로 이사를 가버린 택이더라.
60년 역사를 자랑하며 걸레짝이된 집을 버리고, 이제 막 신축으로 들어선 신축 아파트로.
* * *
그레모리의 이름을 거두는 과정에서 나는 한 가지 결단을 내려야했다.
쟁탈전 도중에는 포털이 하나만 열린다. 하나의 던전에 다른 던전의 포털이 열리는 경우는 없다고 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그레모리〉를 잠시 없애기 위해서는 한 가지 작업이 필요했다.
〈경고〉 〈그레모리〉는 현재 〈아미〉와 쟁탈전을 치르고 있습니다. 이름을 거두기 전에 먼저 문제를 해결하십시오.
# 해결방법: 쟁탈전 종료
내가 일방적으로 그레모리의 이름을 거둘 경우, 내 던전에 할파스와 아미라는 두 개의 포털이 동시에 연결되는 형국이 되었다.
'시스템이 예전에 이 문제로 시달렸나보네.'
내가 시스템의 헛점을 많이 이용하기는 하지만, 이용하려고 하는게 있다 싶으면 이렇게 기다렸다는 듯 대처방안을 내놓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대부분 예전에 그런 일들이 있었기에 만들어진 방지책이었다.
하지만 이미 그레모리는 이름을 반납했다.
즉, 그레모리와 아미의 쟁탈전은 끝이났다.
나는 그레모리가 쟁탈전을 승리로 이끈 그 결과를 손에 움켜쥐었다. 그 증거는 지금 내 눈앞에서 슬라임 공구리에 갇힌 이름없는 남자다.
"야. 내가 너를 뭐라고 불러야 되겠느냐?"
나는 내 손에 들린 전(前) 아미의 생사여탈권을 흔들었다. 전 아미는 코를 벌름거리며 간신히 입을 벌렸다.
"이, 이자큘이라고 불러주십, 크으읍...!"
뷰르륵.
전 아미, 이자큘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떨구었다. 슬라임 공구리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지만, 소리가 너무나도 선명하게 들렸다.
"...뭐, 많이 싼다고 죽지는 않게 해놨거든? 무한으로 즐겨라."
"이, 이건 즐기는 게...끄어억."
이자큘은 앓는 소리까지내며 괴로워했다. 시간상 거의 하루는 꼬박 공구리에 들어가있었을테니, 한 시간에 한 번이라고 해도 족히 24번은 넘게 사정했으리라.
"괜찮다. 그렇게 싼다고 안 죽어. 샤이탄이 제법 재미있는 성마법을 걸어뒀거든. 오줌이 사정처럼 나오는 마법이래. 오줌이 말이야, 나오는 양은 사정할 때랑 비슷한데 느낌은 사정할 때랑 똑같다고 하더라?"
하루에 소변을 500ml, 사정할 때의 양을 5ml라고 단순히 계산해도 이자큘은 하루에 100번을 사정하는 셈이었다.
"크으. 복상사 할 염려없이 무한 사정이라니. 좋겠구나."
"제, 제발 용서해주십시오...!"
"죽여달라고는 안 하네. 죽기는 싫은가봐."
"......."
이자큘은 고개를 풀썩 떨궜다. 사정지옥에 빠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살아있는 건 죽고 싶지 않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자큘. 전 아미여. 내 부하가 되어라. 그러면 살려주도록 하지."
"저, 정말이십니까?!"
"군단장은 거짓말은 안 해."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이자큘에게 손을 내밀었다.
"우리 군단의 일원이 되겠느냐?"
"예, 예! 되겠습니다! 하겠습니다! 그러니 제발...!"
〈굴복〉 전 아미, 마족 이자큘을 부하로 영입하였습니다.
나는 눈앞에 떠오르는 문구를 보며 절로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사정지옥에서 빼준다는 것만으로도 이자큘은 감격한 얼굴이었다.
"그럼 나의 부하에게 묻겠다. 할파스 군단의 세력은 전부 어떻게 되느냐?"
"네! 할파스 세력은 할파스, 샥스, 푸르카스, 그리고 제가 있습니다!"
"음...."
방금의 답으로 끝났다.
"이자큘. 네 역할은 정해졌다."
"예, 무엇이든 말씀하십시오!"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후방교란이지. 전선에 온 정신을 집중하게 하지 못하고,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격해서 피해를 입히는 거다. 아, 물론 내가 즐겨쓰기는 하지만 당하는 건 정말 좆같아서 말이야."
"......."
내 말에 이자큘의 표정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래. 네가 저지른 건 우리 던전의 급소라고 할 수 있는 곳을 찌른 것이다. 너 때문에 이 던전에 사는 비전투원들이 피난 준비를 하느라 엄청 개고생을 했다."
"저, 저는 그저 시키는 대로 했을 뿐입니다!"
"그래! 시키는 대로. 그러니까 지금도 시키는 대로 해야겠지?"
짝짝.
나는 박수를 쳤다. 이자큘은 자신의 뒤에서 느껴진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누구...공주님?!"
그곳에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슬라임 속에 갇힌 샥스가 서있었다. 샥스는 의식을 잃은 듯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보시다시피 저것 또한 우리 던전의 포로가 되었지. 자, 시키는 대로 한다고 했지? 그러면 내가 네게 첫 번째 명령을 내리겠다."
나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돌멩이 하나를 이자큘의 입에 물렸다.
"그걸로 저것을 맞춰라. 그러면 나는 저것을 죽이겠다. 인질은 한 명으로 충분하거든?"
"...그, 그건."
"그래."
나는 샥스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붉은 손자국이 가득한 목은 내가 조금만 힘을 줘도 망가질 것처럼 연약했다.
"네 손으로 이걸 죽이는 거다. 그걸로 우리 던전의 일원이 되었음을 증명하라."
"퉤!"
이자큘은 가차없이 돌멩이를 뱉었다. 바닥에 파묻힌 입에서 샥스의 얼굴까지 1.5m는 족히 차이가 날텐데도, 이자큘은 샥스의 목젖을 정확히 돌멩이로 맞췄다. 돌멩이는 샥스의 목을 스치고 날아갔고, 샥스의 목에는 작은 실혈이 생겼다.
"...증명 한 번 존나 빠르게 잘 하네."
"보십시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군단의 주인이시여!"
"어. 충성을 다해. 그럼 두번째 명령이다."
짝, 짝!
박수를 두 번 끊어치니 샥스를 휘감았던 슬라임-라임이 샥스로부터 떨어져나왔다.
"어...?"
펭귄 옷과 달리 검은셔츠에 검은치마, 검은 스타킹까지 온통 검은색으로 통일된 단정한 옷차림의 샥스는 조용히 눈을 뜨며 붉어진 자신의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
샥스는 반쯤 감긴 눈으로 한참동안 이자큘을 내려다보다가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나는 서로를 가리키며 검지를 들어올렸다.
"인질은 하나로 충분하거든? 지금부터 서로 죽여라."
"자, 잠시만요! 이건 불공평...."
이자큘은 뒷말을 흘리다가 성난 얼굴로 내게 소리쳤다.
"처음부터 나를 죽이려 했구나, 이 개같은 새끼!! 나를 가지고 놀았어!"
"아, 아깝네. 좀 더 가지고 놀 수 있었는데."
나는 등뒤에 숨겨온 망가진 라운드 실드를 꺼내 샥스에게 건넸다. 이자큘은 샥스를 향해 소리치며 침을 뱉었다.
"이 개-"
퍼억.
샥스는 방패의 손잡이 부분으로 이자큘을 눌러버렸다. 그리고는 망가진 윗부분 위로 뛰어올라 힘차게 밝기 시작했다.
콰득, 콰드득!!
떨리던 슬라임 공구리가 핏물이 살살 흐르기 시작했고, 나는 샥스를 라임에게 맡긴 뒤 미리 챙겨온 슬라임 드래곤의 체액을 살살 쏟아냈다.
꾸득, 꾸드득.
"버릴 때 버리더라도 냄새가 어디 나가지 않게 밀봉을 잘 해야지. 샥스.... 새로운 명령이다."
나는 벌써부터 표면이 굳어가기 시작하는 거대한 슬라임 덩어리를 가리켰다.
"안쪽까지 다 굳으면 저기 우리 던전 폭포로 가서 던져버려라."
할파스를 능욕하기 위한 인질이자 새로운 부하.
나는 아미를 버리고 샥스를 택했다.
'인질로서 가치가 더 많으니까.'
결코 여자라서 택한 것은 아니다.
* * *
할파스 군단의 잔존 세력에 대한 문제는 모두 처리했다.
〈굴복〉 항거할 수 없는 힘에 샥스는 모든 것을 포기했습니다. 자포자기한 샥스는 제발 자신의 새로운 보금자리의 주인이 자신의 원래 군단을 압도적으로 이겨 자신이 배반자라고 살해당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 할파스 군단과의 전쟁에서 승리시...?
샥스는 우리 군단의 일원이 되었다. 비록 걸리적거리는게 없잖아 있기는 하지만, 애초에 전력으로서 샥스를 영입한 게 아니니 그닥 문제는 없었다.
"야. 앞에서 가슴 받치고 들고 있어."
"......흐끅."
이자큘을 처리하고 온 샥스는 눈물을 머금고 머리를 루나의 가슴 사이로 파고들었다. 루나는 자신의 가슴을 샥스의 양 어깨에 올린 채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
"좋다. 어깨에 부담도 적고."
"그러고 움직일 수는 있냐?"
"왜 안 돼?"
루나는 마치 내가 륜을 안고 가듯 샥스를 꽉 끌어안았다. 아무래도 샥스 자체에 대해서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보다 그레모리는 언제 다시 태어난다니?"
"1년 뒤."
"엑."
루나는 대번에 인상을 썼다.
"그러면 그 동안 그레모리랑 같이 못 해? 나 걔랑 같이하는 거 제법 재미있었는데."
"켈베로스 놀이? 흐흐, 걱정마라. 내가 설마 1년 동안 이게 익어가기를 기다리겠냐?"
안드라스조차 닷새 걸리는 걸 기다리느라 진이빠졌는데 설마 1년이나 기다리겠는가. 나는 주머니속에서 반짝이는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건 뭐야?"
"아아, 이것은 '마정석'이라고 하는 것이다. 태어나는 시간을 100배까지 줄여주는 아주 멋진 물건이지."
환생결정과 함께 쓸 타이밍을 잡지 못해 창고에 처박아둔 먼지쌓인 물건이 드디어 빛을 발할 때가 왔다.
그레모리 환생까지 1년.
그것이 100배 줄어, 이제는 고작 3.6일.
"흐흐흐, 이것만 사용하면-"
〈경고〉 사용할 수 없습니다.
"?"
"〈마정석〉 정기를 가득 머금은 마석. 교배에서 사용시 출생까지의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다.
# 단축 배율 : 100배."
〈경고〉 마정석은 '파종 시' 사용 가능한 물건입니다.
"......."
"도와줘, 샤이탄-----!!"
좆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