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10716일차 -------------------------
나의 부하들 중 진화가 가능한 ☆을 보유한 병력들은 그닥 많지 않았다.
하지만 진화가 가능한 놈들은 대부분 3성까지 진화가 가능한 포텐셜을 가진 괴물들이었고, 던전 운영 초기부터 나와 함께한 빅슬라임들이 가장 대표적인 예였다.
레벨링, 그리고 동족 포식.
슬라인이 슬라임 종 이외의 종족을 먹는 것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다면, 빅슬라임에서 이어지는 슬라임 드래곤은 또다시 슬라임과 빅슬라임을 포식하는 것으로 진화가 이루어졌다.
7일.
무려 7일간의 슬라임 서브던전을 세 빅슬라임이 돌고 돈 끝에, 드디어 나는 세 마리의 슬라임 드래곤을 손에 넣었다.
비록 레벨은 35지만, 그 위용 만큼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끄어어엉!
슬라임 드래곤이 포효하며 전방을 향해 기어갔다. 동굴 벽에 딱 달라붙어 뱀처럼 움직이는 속도는 내가 달려가는 속도에 맞먹을 정도였다. 그리고 질주하는 슬라임 드래곤의 위에는 세 명의 전사가 앉아있었다.
에일라.
아더.
그리고 하서스.
"흐아앗!"
에일라는 슬라임 드래곤의 목 위에서 검을 휘두르며 고블린들의 목을 날렸다. 아더도 이가 빠진 메이스를 휘둘러 가고일 석상의 날개를 으깨버렸다. 하서스는 슬라임 드래곤의 위에서 뛰어내려 낙타 괴물을 천장에서 습격했다.
"엄호사격 개시!"
내 지시에 따라, 이제는 부하로 완전히 영입한 사냥꾼들이 활과 석궁을 조준했다. 슬라임 드래곤들과 돌격대가 날뛰고 있는 통로 반대편에서 낙타 괴물들이 달려오고 있었다.
"메어리!"
내가 메어리를 호령하자, 메어리가 바로 전방을 향해 마법으로 만든 불꽃의 화살을 날렸다. 살상력은 없지만 빛을 번쩍이게 하기에는 충분했고, 불화살이 폭발한 걸 본 돌격대는 벽에 달라붙은 슬라임 드래곤을 붙잡았다.
사냥꾼들의 사선에는 오직 적밖에 없었다. 돌격대는 벽에 붙어 사선을 피했고, 나는 지팡이를 뻗으며 호령했다.
"쏴--!!"
내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냥꾼들이 모두 화살을 쏘았다. 하피의 깃털을 꽁지깃으로 하고, 안드라스 서브던전에서 얻은 발톱을 깎아만든 뾰족한 화살촉이 낙타 괴물들을 향해 날아갔다.
푹!
최전방에서 달려오는 낙타 괴물의 허벅지에 발톱 화살이 꽂혔다. 끝을 뾰족하게 갈아만든 덕분에 안드라스의 발톱은 철제 화살보다도 더 날카로운 살상력을 자랑했다. 애초에 마물의 소재를 가공한 화살이었다.
그걸 사냥을 생업으로 살아온 인간들이 일제히 사격을 해대니, 낙타 괴물들은 금방 고꾸라질 수밖에 없었다.
푸푹, 푹!
앞의 괴물이 쓰러지자, 뒤에 있던 낙타 괴물이 시체를 방패삼아 달려오기 시작했다. 화살은 시체에 연이어 박혔고, 옆으로 살짝 스치듯이 보인 낙타 괴물의 등에는 혹이 세 개 달려있었다.
끄어어엉!
낙타 괴물이 노리는 이는 다름아닌 에일라. 슬라임 드래곤이 깜작 놀라며 입을 쩍 벌렸지만, 낙타 괴물은 손톱을 날카롭게 세워 슬라임 드래곤과 에일라를 통째로 찢어발기려 했다.
그리고 그 순간, 어떤 화살보다도 빠른 파공성이 내 어깨 너머에서 스쳐지나갔다.
푸-욱!
낙타 괴물의 심장을 정확히 꿰뚫은 바람 화살은 괴물의 뒤에 도망치던 고블린의 머리까지 꿰뚫었다. 한 번에 두 마리를 저격하고 아군까지 구한 명사수, 륜은 고개를 치켜들며 제 실력을 과시했다.
"......."
그리고 에일라는 소매 끝에 구멍이 생긴 것에 침을 꼴깍 삼켰다. 륜의 저격은 분명 정확했지만, 조금만 더 옆으로 빗겨나갔으면 에일라의 손목이 먼저 꿰뚫릴 뻔 했다. 나는 륜에게 바로 시선이 돌아갔고, 륜은 정면을 향해 시위를 다시 당기며 얼굴을 붉혔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안다. 설마 네가 그러겠냐."
나는 륜을 위로하고 에일라에게 고개를 한 번 끄덕인 뒤 전황을 살폈다. 통로에는 고블린과 가고일들의 시체가 즐비했고, 낙타 괴물은 최전방에서 화살비를 맞은 놈을 제외하면 모두 도망친 듯 했다.
그레모리의 부하들은 일시 퇴각했다. 공격의 선택권은 이쪽에게 있다.
"그럼 지금부터 어떻게 싸운다...."
예로부터 전해져오는 전략과 전술을 활용할 때. 나는 슬라임들에게 적의 사체를 먹어치우게 한 뒤, 그레모리의 던전 통로에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륜, 정찰다녀와. 그 촉수 괴물의 방은 절대로 가지 말고. 알았지?"
"네!"
륜은 사냥꾼들을 이끌고 통로 너머로 나섰다. 나는 초전 이후 병사들이 다친 곳이 있는지 확인했고, 슬라임 드래곤들의 피부가 조금 긁힌 것을 제외하면 딱히 달라진 곳은 없었다.
"흐흐, 그러면 정찰은 정찰대로 진행하고, 우리는 우리대로 계획을 실행해볼까?"
꾸르륵.
가장 후방에 있던 라임이 제 팔뚝에 채워진 완장을 손바닥으로 두드리며 자랑스럽게 웃었다. 정말 오랜만에 라임은 슬라임들과 함께 던전에 굴을 파게 되었다. 남의 던전이지만, 이제 곧 내 던전이 될 곳.
"라임아. 시작해라."
꾸르륵.
륜이 정찰을 다녀오는 사이, 라임은 세 마리의 슬라임 드래곤을 이끌고 포털 근처에서부터 굴을 파기 시작했다.
* * *
"후, 멍청한 녀석. 내가 그런 것도 모를까봐?"
그레모리는 던전 내부에 펼쳐진 마나의 흐름이 뒤틀리는 것을 금방 캐치했다. 한 번은 몰라도 두 번, 세 번은 당하지 않는다. 상대의 주요 전략이 땅굴을 파는 것이라면 그에 맞춰 대응책을 마련하는 건 던전 주인으로서 당연할 일이었다.
'그리고 그 놈, 역시 못 써먹겠어.'
머리가 돌아가는 놈이라면 분명 상대가 한 번 당한 전략에 대처를 하리라 생각하기 마련이건만, 이 미련한 돼지는 한 번 효과를 봤으니 다시 또 똑같은 효과를 얻을 것이라 착각한 모양이다.
이미 그레모리는 포털쪽에서부터 새로운 굴이 파지기 시작하는 것을 캐치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처를 명령하려고 한 순간.
[공략은 잘 진행되고 있나, 그레모리?]
수정구에서 검은 까마귀의 환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레모리는 자신의 추악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아 여유를 가장하며 웃었다.
"무슨 일이지, 할파스?"
[닷새가 지났는데도 공략소식이 없길래 궁금해서 연락했다. 안드라스가 그렇게까지 강한 적은 아닐텐데?]
"흥. 불만있어? 불만있으면 직접 안드라스 던전에 포털 열어서 먹으러 가시던가. 저주를 걸어서 마킹까지 해놓고 나중에 키워 먹으려는 생각 누가 모를 줄 알아?"
[알면 좀 도와주지? 내가 일부러 네게 우리 던전의 에이스를 보냈건만."
"도로 가져갔으면 좋겠는데."
그레모리로서는 여러모로 기분은 좋았지만, 던전 주인에게도 촉수를 들이미는 괴물은 계륵같은 존재였다. 정작 그를 보낸 할파스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이해할 수 없군. 이래서 자궁으로 알을 낳는 놈들은 모른다니까. 총배설강이 얼마나 좋은-]
쨍그랑!
그레모리는 수정구를 벽에 집어던졌다. 수정구가 산산조각남과 동시에 검은 까마귀의 환영이 사라졌다.
"저 새끼...내가 언젠가 우리 낙타들한테 돌려버릴 거야."
이쪽의 상황도 모르면서 고작 닷새가 조금 넘었다고 재촉하는 꼴이라니. 정말 같잖기 그지 없었지만, 그래도 그레모리는 할파스 덕분에 던전 주인으로 이 자리까지 올 수 있었다.
언젠가 힘을 길러 칼을 들이밀겠지만, 지금 당장은 눈앞의 위기부터 이겨낼 때.
"아으, 중요할 때 연락해서 뭐하는 지 모르겠잖아."
그레모리는 다시 던전의 전체에 흐르는 마나를 스캔했다. 제법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덕분에 적의 땅굴이 어디로 통하는지 훤히 알 수 있었다. 포탈에서부터 시작된 땅굴은 또다시-
"......?"
잘못 느꼈나? 그레모리는 마나를 모아 다시 던전을 스캔했다. 자신의 기감이 틀릴 리가 없건만, 도저히 지금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뭐야...?"
통로는 만들어지고 있었다. 슬라임 드래곤 세 마리는 서로의 머리를 나선형으로 비틀며 지하에 새로운 길을 뚫기 시작했다. 그레모리는 괜히 그 움직임에 기시감을 느껴 전신의 털이 쭈뼛 섰다.
"도대체 언제?"
할파스와의 연락은 불과 몇 분이 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벌써부터 저만큼 통로를 뚫었다고? 그레모리는 믿을 수 없었다.
"다, 당장 쫓아! 추격해!"
그레모리는 황급히 병력들을 보냈다. 이미 파후우가 뚫어놓은 지하 통로 곳곳에 배치해놓은 수비 병력들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병력들이 슬라임 드래곤이 뚫기 시작했던 포털의 근처를 향해 달려갔다. 그레모리는 시간을 계산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6시간?
파후우의 비웃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그레모리가 알을 낳고 제 힘을 되찾는 시기보다 파후우가 땅꿀을 파고 도착하는 시간이 훨씬 빠를 것 같았다.
쿠구구구구구!
파후우는 포털에서부터 그레모리의 심처까지 도달하는 길을 깊숙히 파고들었다. 자신이 이전에 만들어 놓은 통로보다도 깊숙히.
"미친 거 아냐?!"
지하 1층을 만들어 그레모리의 심처를 급습한 파후우는 이제 지상 2층 높이에서 땅굴을 파기 시작했다.
* * *
콰드드득!
슬라임 드래곤의 몸이 꿈틀거리며 완만한 비탈길을 만들어냈다. 라임의 지시하에 맹렬히 돌아가는 슬라임 드래곤의 머리는 어지간한 터널 굴착기보다 속도가 빨랐다.
"륜아, 그런 말을 아니? 살다 보면 전술에 한 번은 당할 수 있단다."
나는 처음 그레모리의 심처에 벽을 뚫었을 때, 벽에 개미굴을 파서 심처까지 진격했다. 분신만 아니었으면 그레모리는 바로 내게 꿰뚫렸을 것이며, 이 전쟁은 끝이 났을 것이다.
콰득, 쿠드드득!
슬라임 드래곤의 머리가 우로 크게 비틀렸다. 위치를 읽은 라임의 지시에 따라 우리는 그레모리 던전의 천장 위를 빠른 걸음 속도로 나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같은 전술에 두 번 당하면 그건 바보야. 멍청이지."
그레모리의 분신에게 농락당한 이후, 나는 곧장 그레모리의 분신을 인질로 삼고 포털까지 탈출했다. 라임 홀로 지하 통로를 파서 개미굴까지 도망쳤고, 촉수 괴물의 방까지 구멍을 뚫어 개미굴로 다시 도망치는데 성공했다.
"그런데 이게 역설이거든. 같은 전략이 계속 통한다는 얘기는 상대가 그만큼 어리석다는 얘기기도 하지만, 그게 상대에게 가장 효과적인 전술이라는 거야. 한 번 당한 거에 또 당할 만큼."
그리고 나는 그 방심을 찔렀다.
"설마 또 하겠어? 한 번하고 말겠지. 두 번은 하겠어? 아닐 거야. 흐흐흐, 아주 사람이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드는 거지."
"하지만 정말로 이게 효과가 있을까요? 그레모리도 바보가 아닌 이상 대처를 했을텐데."
"대처를 한다면 더 문제지. 어떻게 대처하겠어? 지들이 우리가 판 땅굴을 메우거나 막으려고 한다거나, 아니면 저렇게 우리가 판 길을 추격해 온다거나."
키에에엑!!
우리가 지나온 통로에 고블린들이 황급히 달려오기 시작했다. 고블린들은 흉포해진 모습으로 우리에게 독침을 겨누며 위협했다. 우리는 스스로 막다른 길을 만들었고, 독안에 든 쥐 신세가 되었다.
"어이쿠. 그런데 더 강한 적을 보내셨어야지. 륜!"
내 호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륜이 통로 반대편으로 화살을 쐈다. 낙타 괴물들이 아무리 많더라도 그 좁은 구멍으로 들어오기에는 여러모로 역부족이었다.
슬라임 드래곤의 너비 만큼의 통로. 나는 낮은 포복으로 슬라임 드래곤이 만든 비탈길을 기어 우리가 만든 임시 2층 통로 위로 전진했었다.
"그래서 륜아. 똑같은 전략에 세 번을 당하면 어떻게 되는 줄 아니?"
나는 발로 바닥을 가리켰다. 올라오는 입구는 좁은 반면, 2층 통로는 내가 허리를 쫙 펴고 손을 좌우로 벌릴만큼 넓었다.
"한 전술을 세 번 당하면 전설이 된단다."
갈 때 한 번. 벽으로.
올 때 한 번. 지하로.
그리고 다시 갈 때 한 번. 천장으로.
"오늘 한 번 레전드 땅굴작전 만들어 보자꾸나."
"그런데 주인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륜은 통로 반대편으로 넘어오는 고블린들의 미간에 바람구멍을 만들며 질문했다.
"그레모리가 이미 알았을텐데 어떻게 해요?"
"알아도 상관없어. 애초에 알아차리는 걸 전제로 한 작전이니까. 알아도 소용없지."
못 알아차리면 제일 좋고, 설령 알아차리더라도 그대로 작전을 강행해도 큰 문제가 없었다. 천장땅굴 작전을 수행하는 1군의 핵심은 그레모리를 당황시키고 착각하게 만드는 것.
"애초에 전면전을 위한 작전인 걸."
이번 땅굴의 종착점은 그레모리의 심처가 아니었다.
"우리는 망치가 되는 거야."
라임이 신호를 보냈다. 나는 손가락 등을 쓸며 문신을 활성화했다. 신체에 활력이 돌기 시작했고, 싸움을 시작할 준비를 마쳤다.
"라임아!"
꾸르륵!
슬라임 드래곤들의 머리가 아래를 향했다. 나는 전방을 향해 달려 슬라임 드래곤들이 만든 구멍 사이로 점프했다.
"우워어어어!!"
넓은 공동.
적의 주 전력이 집중 배치되어있는 통로 위에서 나는 낙타 괴물들의 뒤로 뛰어내렸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통로 반대편에 있던 우리 던전의 부하들이 정면으로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