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787일차 -------------------------
안드라스의 던전.
나는 륜과 둘이서 던전에 진입했다. 실제 위치는 비르고 남작령이 아니겠지만, 비르고 남작령의 동굴 입구에 열린 '게이트'를 통해 던전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공격은 이걸로 두 번째네.'
바알의 버려진 옛 던전, 그러니까 지금의 옛 던전에 주인처럼 떡하니 자리잡고 있던 슬라임 드래곤을 잡았던 것이 처음이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나는 안드라스 던전의 입구에 발을 디딤과 동시에, 눈앞에 떠오르는 창에 속으로 웃었다.
<알림> 안드라스의 던전을 발견했습니다!
# 던전 강탈 조건 - 안드라스(★★★★)의 처치, 복종.
<퀘스트> 안드라스 토벌 (000/ ???)
# XX마리 토벌 시 미부화 알 획득 가능
# 9마리 토벌 시 새끼 안드라스 (★☆☆☆☆)
# 18마리 토벌 시 성인 안드라스 (★★☆☆☆)
# 63마리 토벌 시 ?? 안드라스 (★★★☆☆)
# 189마리 토벌 시 ? 안드라스 (★★★★☆)
# 666마리 토벌 시 <안드라스> (★★★★★)
"오호라."
뭔가 상당히 흥미로운 퀘스트가 떴지만 여러모로 짜증을 불러일으키는 임무였다.
'언제 666마리까지 잡으라는 거야?'
한 마리 한 마리 잡는 것도 귀찮아 죽겠는데 666마리라니. 차라리 슬라임 던전 뺑뺑이를 도는게 훨씬 나았다.
"주인님, 왜 그러세요?"
"륜아. 안에 몇 마리나 있을 것 같냐? 한 100마리 있을 것 같냐?"
"음.... 딱 그 정도는 되어보이는데."
"망했네."
666마리는 커녕 189마리도 잡지 못할 것 같다. 밖에서 잡은 안드라스가 고작 10마리도 되지 않는 다는 걸 생각하면, 여러모로 사실상 노려볼 수 있는 건 3성짜리 안드라스의 알이었다.
'그래도 확정부화니까 다행이다.'
던전을 점령하고 그 알을 내 던전에서 부화시킨다면 안드라스라는 종족 전체가 등록되는 형식이리라. 동시에 경험치를 올리기에 최적화되어있는 곳이기도 했다.
"륜아."
"네."
"이 안에는 적밖에 없어. 그럼 어떻게 하면 되겠니."
"음.... 보이는 족족 쏴버릴 까요?"
"그래. 조준하지 말고 그냥 쏴버려. 일단 뭔가 있다 싶으면 무조건 쏴라. 알겠니?"
"네!"
륜을 데리고 다니면서 분명히 느낀 것은, 륜에게는 저격이 어울리지 않았다. 인질이 잡혀있으면 그 인질을 쏠 것 같았고, 결국 나는 극약처방을 내렸다.
난사(亂射).
어차피 조준을 해도 맞추지 못한다면, 조준할 시간에 한 발이라도 더 빨리 쏘는게 훨씬 나았다.
"근데 륜아, 혹시 화살 쏠 때 마나같은 거 닳는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
"네? 그런 건 없어요. 그냥 활 시위를 당기는 것 때문에 팔이 조금 지치는 거? 그 정도예요. 체력만 받쳐주면 얼마든지 쏠 수 있어요."
"그러냐. 알겠다."
나는 우리의 길잡이가 된 안드라스(시체)를 앞에 내던졌다. 입구부터 장난질을 치지 않았을까 걱정이 되었고, 아니나다를까 땅이 훅 꺼지며 안드라스가 아래로 사라졌다.
# 안드라스 처치 ( 001/ ??? )
"아 씨, 밖에 놈들 그냥 살려뒀다가 여기서 잡을 걸."
"주인님...."
륜은 질색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들을 다 여기서 잡았으면 벌써 성인 안드라스를 뽑고도 남았다. 던전을 공략했을 때의 얘기기는 했지만.
푸드드득.
동굴의 반대편에서 날개가 퍼덕거리 소리가 들렸다. 나는 아주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손등을 쓸었다. 혹시 언제 뭐가 튀어나와도 대비를 할 수 있도록.
퍼드득.
그리고 어둠 속에서 동그란 빛이 두 개 떠오른 순간, 내 옆에서 파공성이 울렸다.
새--액!!
"키엑!"
안드라스는 단말마와 함께 뒤로 넘어졌다. 활을 막 쏜 륜은 짧은 호흡을 하며 전방을 주시했다. 아직 눈동자는 많았다.
"륜아."
"네."
"저것들 다 근접이다."
"접근 못하도록 할게요."
새액-!
륜의 두 번째 화살이 어둠속으로 날아갔다. 무언가 꿰뚫리는 소리가 난 뒤, 다시 안드라스 하나가 고꾸라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스스스!
어둠속에서 붉은 안광들이 터져나왔다. 저벅저벅 걸어오는 새대가리 괴물들은 전부 나체의 상태로 우리를 향해 주먹을 불끈 쥐고 있었다. 나는 슬쩍 눈을 흘겨 카운트를 확인했다.
# 안드라스 처치 ( 003/ ??? )
정말로 다행히 륜이 잡은 것들 또한 카운트에 들어갔다. 굳이 일일이 륜이 무장해제를 시키고 내가 잡을 필요도 없었다. 이 싸움은 애초에 개인과 개인의 전투가 아닌, 던전과 던전끼리 벌이는 약탈 공성전이었다.
공성, 나.
수성, 안드라스.
"언젠가는 우리 던전도 이렇게 다른 곳으로 통하는 게이트가 열리겠지?"
"그 때도 이렇게 쏘면 되겠죠?"
파바바박!
륜은 시위를 쉬지 않고 당겼다. 손가락이 벌게지는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화살을 쏘았고, 그 덕분에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붉은 눈동자들은 하나 둘 라이트가 꺼지고 있었다.
동시에 킬카운트가 올라갔다. 나는 활을 든 륜의 손목을 잡고 살짝 내렸다.
"쉬어라. 숨을 골랐다가 다음에 마저 쏴."
"주인님, 저 좀만 더...."
"아서라."
륜은 의욕이 넘쳤지만 손가락이 부어있었다. 여기서 더 쏘게 했다가는 손가락에 피멍이 들지도 몰랐다.
"그리고 이제는 안 돼. 벌써 가까이 왔잖냐."
"동족의 원한을 받아라스!"
안드라스 하나가 주먹을 움켜쥐고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여성형 안드라스라서 뛰어올 때마다 몸이 흔들리는게 영 보기 껄끄러웠지만, 그게 '적'인 이상 가만히 내버려 둘 이유는 없었다.
"륜아. 그걸 다오."
"네!"
륜은 내가 미리 륜에게 맡겨놓은 '특별한 물건'을 건넸다. 예전에 주력으로 사용하던 가시달린 철퇴만큼의 무게는 아니지만, 그래도 적당히 무게감이 있는게 썩 나쁘지는 않았다.
"륜아. 안드라스들을 구워먹으면 맛있을까?"
"...밑은 사람같아서 좀 그렇지 않겠어요?"
"그렇지? 그럼 위에만 구워볼까?"
"그건 더 이상할 것 같은데요."
안드라스들을 직접 잡아먹는 건 포기. 하지만 나의 원대한 식사 계획은 그에 굴하지 않았다. 나는 손에 든 물건을 빙그르르 돌리며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그럼 알을 깨서 구워먹으면?"
"그럼 어떻게 되는데요?"
"이상한 소리 하지 말라스!"
안드라스가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서 손톱을 세웠다. 금방이라도 나와 륜을 할퀴려고 하는 듯 했고, 나는 물건을 든 팔을 살짝 뒤로 넘겼다.
"안드라스 프라이가 되는 거지!"
부---웅!!
나는 무쇠로된 프라이팬을 휘둘렀다. 프라이팬이라고도 부르기 뭣한, 그냥 넓은 철주걱이라고 불러도 무방할 물건이었다. 무덤을 만든 마을의 부엌에서 발견한 삽과 더불어, 당분간 나의 애장품으로 활용될 녀석이었다.
퍼-억!
"크에엑!"
후두부를 측면으로 얻어맞은 안드라스는 붉은 눈을 부르르 떨며 바닥에 고꾸라졌다.
킬카운트 하나 추가. 나는 프라이팬에 피와 함께 묻은 깃털을 때내며 안드라스를 발로 굴렸다.
"으, 젠장."
"왜 그러세요? 혹시 벌써 망가졌어요?"
"아니. 적당히 힘조절하려고 했는데."
75레벨이 2성짜리들을 잡아서 얼마나 오르겠는가. 나는 안드라스들을 상대로 쩔을 하려고 했지만, 아쉽게도 안드라스는 풀스윙 한 방에 죽어버렸다.
"륜아. 내가 조금만 더 연습하고 바로 넘겨주마. 그럼 그거 바로 앞에다가 화살 쏘는 거다. 알겠지?"
"네! 아, 슬라임 드래곤한테 하던 것 처럼 하면 되나요?! 막타 맞죠?"
륜은 활 시위를 바닥을 향해 놓으며 당기는 시늉을 했다. 나는 또다시 달려오는 안드라스의 배를 걷어찬 뒤, 프라이팬으로 안드라스의 대가리를 내리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지금은...."
또다시 킬카운트 추가. 레벨이 높아서 강한 건 여러모로 좋았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영 불편했다.
'나중에 륜에게 버프 주는 방법을 찾아봐야겠다.'
주술사가 자버프만 주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아직은 망가지지 않은 프라이팬을 빙그르르 돌렸다. 광택없는 무쇠 프라이팬이 핏물로 번들거렸다.
"1성이랑 2성이랑 구분하려니까 영 어렵네...."
퍽, 퍽퍽!
하필이면 날개의 유무밖에 차이가 나지 않으니, 앞에서 보는 것만으로는 1성과 2성 안드라스를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천장으로 높이 뛰어오른 안드라스의 고간을 향해 프라이팬을 휘둘렀고, 바닥에 그대로 메쳤다.
"주인님! 저 알아냈어요!"
륜은 내 허리 바로 옆에서 화살을 쏘아 안드라스를 사살했다. 륜이 만들어낸 바람 구멍은 부리를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날개 달린 애들은 부리가 조금 더 날카롭게 생겻어요!"
"얘들은 부리가 젖살인가? 나참."
륜은 능숙하게 구분하지만 나는 거기서 거기인 것 같았다. 애초에 내가 조류도 아니고, 하피와 하피 엔젤 처럼 확연한 차이가 나지도 않았다. 나는 동시에 달려오는 안드라스 두 마리를 향해 프라이팬을 사선으로 휘둘러 위협했다.
"끼엑?!"
안드라스들은 놀라 뒤로 물러섰지만, 그 틈에 륜이 화살을 날렸다. 가까이 있던 안드라스의 무릎에 바람 구멍이 생겼고, 안드라스는 바로 무릎을 꿇었다.
"어흑!"
카앙.
나는 프라이팬을 휘둘러 안드라스의 부리를 때렸다. 안드라스의 부리는 고개와 함께 옆으로 꺾였고, 우두둑 소리를 내며 내 발치에 쓰러졌다.
"이, 이 괴물들 같으니라스!"
마지막 남은 안드라스가 공포에 떨다가 황급히 몸을 돌렸다. 나는 본능적으로 프라이팬을 투척하려고 했지만, 도망치는 안드라스의 등 뒤에 달린 날개에 프라이팬을 집어넣었다.
"륜!"
"네!"
이미 많은 안드라스들을 사냥한 륜은 자신감 넘치는 얼굴로 활 시위를 당겼고,
새애애액!!
화살은 직선으로 된 통로를 곧게 날아가, 안드라스의 날개를 꿰뚫었다.
"아흐흑!"
안드라스는 비명을 지르며 넘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바닥을 구르며 사라졌다.
"어...."
막 두 번째 사격을 하려던 륜은 멍하니 입을 열었다. 나는 륜의 어깨를 토닥여 사격을 멈추게 했다.
"이 정도면 충분해. 그래도 이번에는 맞췄잖냐."
"등 한 복판을 노렸는데...."
"...진화하면 달라지겠지. 그러니까 조금 더 사냥하자."
나는 륜의 귀를 손가락으로 쓸어 슬쩍 륜의 상태를 확인했다.
륜. Lv. 25.
그 잠깐의 전투 사이에 레벨이 제법 올랐다.
"륜아, 너 계속-"
"주, 주인님...."
륜은 얼굴이 시뻘게져서 내 옷자락을 붙잡았다.
"가, 갑자기 귀를 만지시면.... 흐끅!"
"아."
레벨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제일 빠른 곳을 만지다보니 잠깐 방심했다. 륜의 귀는 륜의 몸 중에서 가장 민감한 성감대였고, 륜은 초전 이후의 승리의 여유에 그만.
찌걱.
륜의 허벅지에서 꿀이 흐르기 시작했다. 륜은 두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미안. 내 실수다."
설마 적진 한 가운데에서 이렇게 될 줄이야. 나는 륜을 번쩍 들고 몸을 돌렸다.
"일단 입구로 가자."
"버, 벌써요?"
"그래. 입장제한이 있는 것도 아니고, 잠깐 밖에 나갔다가 오면 돼."
금강산도 식후경. 고작 몇 마리 죽였다고 이러는 지, 나도 서서히 갈증이 나기 시작했다.
"주, 주인님. 그러면 말이에요."
륜은 벽을 손으로 짚으며 나를 막아세우려 했다.
"여, 여기서 하시는 건-아얏!"
짝!
나는 륜의 엉덩이를 때렸다. 덕분에 꿀이 한번 세차게 터져나왔지만, 나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딜 말도 안 되는 소리를. 그러다 너 잘못되면 어쩌려고?"
"히잉...."
륜은 앓는 소리를 냈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잠시 휴식을 위해 던전 밖으로 나가 목을 축였다.
***
안드라스는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자신의 침소에 바글바글하게 모인 자신의 새끼들은 모두 하나같이 미어캣처럼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으으…."
제 배 아파서 낳은 자식들이지만 사랑으로 낳은 자식이 아니었던만큼 안드라스는 멍청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새끼들의 모습에 화가 치밀었다. 빠릿빠릿하게 침입자를 요격하기는 커녕, 일일이 지시를 내려줘야 하는 것에 분통이 터져나왔다.
"당장 가서 막아!"
"어, 어디로 가면 되는 거라스…."
"에이, 이 새대가리들 진짜!"
안드라스가 낳은 그 어떤 새끼들도 머리가 자신처럼 인간의 형태가 아니었다. 자식들을 향한 폭언이었지만, 새끼 안드라스들은 서로를 멀뚱멀뚱 쳐다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모두 새대가리라고 부르셨라스."
"머리만 새니까 새머리라고 부르는게 맞지 않겠냐라스?"
"대가리는 짐승에게 쓰는 표현이라스. 외형은 인간일지몰라도, 생물학적으로는 마물이니까 언어학적 표현은 새대가리가 맞다라스. 마물은 짐승이고 우리는 마물이니까 우리 다 새대가리라스."
"이해하지 못할 말은 하지 마, 이 머저리들아!"
"머저리는 뭐라고 하는 거라스?"
"주인님께서 너희들 머리로 이해하지 못할 말은 하지 말라고 하셔서 말 안 할거라스."
"아이, 진짜! 짜증나! 너네 다 주둥이 다물어!"
안드라스는 성질을 씩씩 내며 새끼들에게 삿대질했다.
"침입자를 죽여! 절대로 이 방이 뚫리도록 내버려 두지 마! 알았어?!"
안드라스는 부하들에게 명령을 내리고 몸을 일으켰다. 새끼들은 단편적으로 주입된 명령에 따라 제각기 생각대로 흩어졌다.
"스으…."
안드라스는 던전의 최심부, 소환 시설에 퍼질러앉았다. 이제 남은 횟수는 딱 3번.
3번만 더 낳으면 자신은 새로운 존재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안드라스는 제발 무사히 낳기를 바라며, 딱 3개 남은 마정석을 들어-
찌걱.
찌걱.
...찌걱.
"하으으…."
안드라스의 산통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