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464일차 -------------------------
"마을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는 대신, 너희 둘은 풀어달라?"
촌장과 메이는 여러모로 정신나간 제안을 했다. 바닥에 머리를 조아린 둘은 벌벌 떨면서 내게 사정했고, 자신들의 거래 요지를 알렸다.
자신들이 직접 길안내를 하겠다. 그곳에 있는 마을 사람들을 얼마든지 마음껏 해도 좋으니, 자기 둘은 제발 도망치게 눈감아달라.
"륜, 어떻게 생각하느냐?"
"마을을 공격할 필요는 굳이 없을 것 같지만, 마을 사람들을 희생양으로 내세우는 건 마음에 안 들어요."
륜은 내게 안긴 채 솔직하게 대답했다.
영토를 지키기만 하는데 최적화된 엘프 특성상 둥지를 벗어나기는 싫어했지만, 자기 둥지의 동료들을 배반하고 제물로 삼는 두 인간의 행동에는 상당한 혐오감을 내비쳤다.
'심지어 종마 사냥꾼들도 반감을 내비쳤지.'
그래도 어제까지 웃고 떠들며 함께 술을 마셨던 이웃들인만큼, 선처는 부탁하지 못해도 이 손으로 이웃을 죽이게 하지는 말아달라고.
대신 앞으로도 열심히 아랫도리를 놀리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그들은 진정한 종마가 되었다.
'그런데 얘들은 확실히 다르네.'
촌장과 마녀는 다른 선택을 내렸다. 자기 목숨을 중요시하는 걸로도 모자라, 타인의 목숨을 기탄없이 바쳐서 살아남으려 용을 쓰고 있다.
'살려는 의지가 강하긴 한데, 정신적으로 붕괴될 수 있지 않나?'
아직 배는 엄청나게 부풀지는 않았어도, 괴물의 아이-또는 알을 낳고나서도 과연 제정신을 유지하고 살아갈 수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냥 살지도 모르지.'
딸이 죽었다는 걸 알면서도 제 목숨부터 건사하자는 독한 마음을 가진 마녀다.
레벨도 그렇고 여러모로 탐이 나기는 했지만, 이런 독사같은 심보는 부하로 뒀다가는 탈만 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이는 던전의 일원이 되어 살아갈 것이다. 아직 밝히지는 않았지만.
"음.... 여기서 살아나간다고 해도 너희들이 과연 정상적으로 살아나갈 수 있을까?"
나는 둘을 흘기며 말했지만, 그 대상은 메이였다.
"아, 아닙니다!"
그런데 오히려 촌장이 격한 반응을 보였다.
"마, 마물과 행위를 하였다고 해도 아무도 모르면 됩니다! 메이가 제 비밀을 평생 지켜줄 것입니다! 이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겠습니다!"
촌장은 이상하리만큼 격한 반응을 보였다. 나는 왜 그럴까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인간이 마물과 행위를 하는 건 왕국 법으로 금지되어있어요. 사형이래요."
륜이 내 궁금증을 해결해줬다.
"그렇게 장로님들한테 들었어요."
"장로들은 엘프들에게 무슨 교육을 한 거야?"
"저.... 인간들에 비해서는 꽤 오래 살았다고 생각하는 데요."
륜이 애써 무시하고 있던 부분을 지적해왔다. 160살. 인간으로 치면--
'괜찮아. 몸이 충분하니까 문제 없다.'
잡혀가도 륜이 잡혀가지 내가 잡혀갈 나이는 아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지 고작 3년밖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흠흠. 그래서 하피와 통정한 것을 평생 비밀로 하고 살겠다?"
"예, 예! 애초에 저희 마을에 모인 사람들 모두-"
"야!!"
메이가 빽 소리를 지르며 촌장의 말을 끊으려했다. 촌장은 아차 싶어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이미 나는 뭔가 의미심장한 말을 하려는 걸 들어버렸다.
"모두 뭐?"
"......이종간의 금기를 범해 도망친 사람들이 모여 만든 화전촌입니다."
"워후."
화전촌이 아니라 수간촌이었구나. 종마 사냥꾼들이 하피에 아무 거리낌없이 박았던 게 조금은 이해가 갔다.
"넌 누구랑 해봤냐?"
"...서, 서큐버스랑 했습니다."
촌장은 솔직하게 답했고, 메이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메이 너는?"
"......저는 아무랑도 하지 않았어요! 딸 때문에 돌아다니다가 정착한 마을이 이런 곳이었을 뿐이라고요!"
메이는 격한 반응을 보이며 화를 냈다.
"흐흐흐."
나는 내 품에 안아든 륜의 엉덩이를 살살 손으로 문질렀다. 메이는 뜨끔하며 고개를 숙였다.
"그래. 좋다. 그러니까 아무도 모르면 범죄가 아니니까 숨기고 살겠다?"
"예, 예! 저희 둘 먹으시는 것 보다 다른 사람들을 먹는 것이 훨씬 나으실 겁니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예...?"
나는 서브 던전을 클리어하고 돌아온 라임을 불렀다. 라임의 레벨은 어느덧 27을 훌쩍 넘기고 있었다.
"나머지 슬라임들은.... 어이쿠, 얘는 벌써 진화 레벨을 찍었네."
어제 마석으로 소환된 슬라임이 오늘 빅슬라임이 되었다. 아마 우리 던전 최단기간 진화가 아닐까 싶었다.
"마을은 찾으면 그만이다. 네놈들이 길잡이를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지."
그러므로 촌장은 촌/장이 될 것이다. 쓸만한 정보를 내놓지 않으면.
"너희 마을 근처에는 뭔가 도시가 있나?"
"...비, 비르고 남작령의 성이 바로 근처에 있습니다! 걸어서 만 한나절이 꼬박 걸리는 곳입니다!"
"그래? 그거 고맙네."
나는 륜을 잠시 침대에 내려놓고 촌장의 앞에 앉았다.
"그래서 영지군의 규모는? 토벌대를 구축하면 얼마나 많은 병사들이 동원되지? 기사는 몇이나 되는가? 마법사의 수는? 비르고 남작령의 자금은 충분한가? 던전을 공략할 용병대를 고용하는 자금이 얼마나 되지?"
"어, 으, 으어...."
촌장은 대답하지 못했다. 범죄자들이 지방 영주의 눈과 세금을 피해 화전촌을 만들어 모여 살았으니, 그럴싸한 정보를 알 리가 없었다.
"제, 제가 알아요!"
그리고 메이가 잽싸게 기회를 낚아챘다. 메이는 상당히 절박해보였다.
"제가 안내해드릴게요! 제가 다 말씀드릴게요! 그러니까 제발...!"
"제발 뭐?"
"저를 풀어주세요...!"
메이는 진정으로 이 던전에서 도망치고 싶어했다. 종마 사냥꾼들 처럼 부하가 되어 살아남겠다는 선택지는 아예 생각도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곤란한데. 너는 우리 던전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려했건만."
"......!"
메이는 큰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설마하던 내 예상대로, 메이는 그 가능성을 아예 생각하지 않았나보다.
"부, 부하가 될게요! 그...대신 조건이 있어요!!"
"조건?"
"그, 그건...."
말하지 않아도 안다. 촌장이 신경쓰여 말을 하지 못하는 게 분명하다.
"좋다. '그건' 하지 않도록 하지."
"......흑!"
메이는 머리를 바닥에 찧으며 울었다.
<영입> [메이]를 부하로 영입하였습니다.
메이가 부하가 되었다. 나는 고개를 촌장에게 돌렸고, 촌장은 멍하니 입을 벌리다가 내게 연거푸 고개를 조아렸다.
"저, 저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조건 같은 건 필요없습니다!"
"넌 안 돼."
나는 단호하게 촌장의 굴복을 거절했다.
"너는 다른 일을 해줘야 하거든."
나는 라임을 불러 촌장이 듣지 못하게 작게 속삭였다. 라임은 한참동안 나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고, 씩씩거리는 움직임으로 공동을 떠났다.
"쟤 왜 저래?"
"어...."
륜은 난감하게 웃으며 볼을 긁적였다.
"기껏 슬라임한테 50마리 떠먹였더니 왜 또 슬라인 늘리냐고 짜증내던데요."
"......설마 질투하나?"
슬라인 루트는 자기 하나만 있어야 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설마.
'진짜면 하지 말지 뭐.'
조건만 만족시켜놓고 어느 쪽으로 진화시킬 지는 내 선택이다. 나는 촌장을 다시 감옥에 집어넣었고, 바닥에 조아린 메이의 몸을 일으켜세웠다.
"그러면 가자."
"어, 어딜요...?"
"어디긴, 너희 마을이지. 그리고."
나는 촌장이 듣지 못할 작은 목소리로 메이의 귀에 속삭였다.
"네가 말한 '그것'이 무언인지 여기서 얘기할까...?"
"아, 아뇨!"
메이는 자신의 치태를 밝히기를 거부했다.
"륜! 기다리면서 저걸 감시해라. 나는 잠깐 마을을 다녀올테니."
"네. 조심해서 다녀오세요."
륜은 나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가, 로브 끝자락을 잡고 꼼지락거렸다.
"오시자마자 식사 하실 수 있도록 준비해둘게요."
"...오냐."
밖에서 외식하고 오려고 했는데, 빨리 돌아와서 집밥이나 먹는게 좋겠다. 나는 메이를 잡고 공동을, 그리고 던전을 빠져나왔다.
* * *
메이는 부하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솔직히 말해 나는 메이를 믿을 수 없었다. 애초에 신뢰도 주지 않았다.
"저, 저기서 더 꺾으면, 흐윽!"
나는 그저 내 품에 안은 메이의 젖가슴과 허벅지를 꽉 끌어안고 메이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뛰었다. 잡지 않은 한 쪽 가슴이 앞뒤로 출렁거리는 광경은 일품이었지만 계속 보니 질렸다.
"후우, 후우."
나는 공터에 다다라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메이는 걸어서 몇 시간 정도 되는 거리라고 했지만, 전력으로 달리니 1시간 조금 남짓한 거리였다.
"다 왔군."
공터에서 조금 더 앞으로 나아가니 깎아지른 절벽이 나왔고, 그 아래에 작은 화전촌이 있었다. 어린아이들이나 노약자는 일절 없었고, 인기척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아무래도 마을 사람들을 버리는 건 너만 생각한 게 아닌 모양인데?"
"아, 아아...."
메이는 절망감에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기껏 마을 사람들을 제물로 바치며 살겠다고 했는데도 정작 그 사람들이 전부 도망치고 사라져있었다.
"이, 이건...."
메이는 눈동자를 굴리며 변명 거리를 생각해내고 있었다.
사람들이 도망친 것에 안도를 하는게 아니라 제 살 궁리부터 하는 게 메이의 본성을 조금이나마 엿 볼 수 있었다.
"......부, 분명 남작령의 성으로 도망쳤을 거예요. 제가 길을 알아요."
"그건 필요없다."
진짜로 필요없었다. 메이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모두 마을에서 떨어진 숲의 작은 공터에 진을 치고 있었다.
'임시 숙영장?'
마을이 습격당할 것을 대비한 모종의 책략이라면 상당히 준비성이 좋은 자들이다.
'전멸했다 싶으면 도망치려고 하는 거구나.'
마을을 비워둔 건 혹시나 진짜로 던전일 경우, 마을을 약탈하기 위해 마물들이 나오면 바로 마을을 버리고 달아나려고 진을 차린 것이다.
멀리서 봐서는 잘 보이지 않지만, 제법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 있는게 틀림없다. 마을에는 함정을 파놨을 테고, 사람이 오면 해제하게 될 터.
'사람의 수는 대략 30.'
이전보다 훨씬 수는 많지만 실력은 그닥 좋아보이지 않았다. 저들을 잡음으로써 얻는 이득보다는 잡는 과정까지의 피곤함이 더 귀찮을 것 같았다.
"응?"
무언가가 마을로 들어갔다. 말을 타고 달려온 병사 하나가 마을의 상태를 확인한 뒤, 바로 말의 기수를 돌려 마을을 떠났다.
"남작령의 정찰병이에요...."
메이는 힘없는 목소리로 병사의 정체를 밝혔다.
"틀리지는 않았겠지?"
"무, 물론이죠! 자주 오던 사람이라 잘 알아요."
"어떻게?"
"그, 그건...."
메이가 얼굴을 붉히며 침묵했다. 나는 그제서야 메이가 어떻게 마을에 정착했고, 화전촌이 숲속에서 유지되고 있는지 깨달았다.
"이제 아무도 없으니 병사들이 들이닥치겠어."
나는 메이의 가슴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메이는 내 손길이 아픈지 인상을 찌푸렸지만, 나는 개의치않고 메이를 꽉 붙잡았다.
"돌아간다. 정찰은 나도 끝났어."
나는 메이를 안고 발걸음을 돌렸다. 메이는 마을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고, 나는 천천히 걸어가며 우리의 '조건'에 대해 상의했다.
"그래서 메이. 너도 알다시피 내 던전에서는-"
"뒤로."
메이는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글썽였다.
"뒤, 뒤로는 얼마든지 해도 좋으니까, 앞으로는 제발...!"
"그래?"
나는 바로 메이의 허리를 잡고 비틀었다. 메이는 자신의 엉덩이에 내 성기가 올려지자 팔을 아둥바둥하며 경악했다.
"여, 여기서는...!"
"흐흐, 겁먹기는. 걱정마라. 지금 네 뒤에는 관심 없으니."
나는 메이의 엉덩이를 찰싹 내리치고 메이를 다시 붙잡아 들어올렸다. 메이는 안도와 불안이 섞인 복잡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떨었다.
"그래. 네 뒤에는 관심없어."
"......?"
메이는 내 말 뜻을 이해하려 안간힘을 썼지만 눈치챌 수 없을 것이다. 이미 메이의 아랫배는 아주 살짝이나마 부풀어 올랐다는 것을.
'설마 이렇게 달린다고 문제가 생기지는 않겠지.'
그러니까 조금 더 빨리 달려서 던전 공동으로 돌아가야했다.
<수확>
# 메이 - 2시간 24분 후.
최대한 빨리 달려가 메이를 구속해야했다. 나는 내가 달려온 숲길을 박차고 달렸다.
'약탈은 나중에.'
마을의 위치는 알았으니 언제라도 병력을 끌어모아 덮치기만 하면 될 일이고, 날이 잔뜩 서서 경계하는 사냥꾼들을 아무 대책도 없이 습격하는 건 병신짓이다.
'그러니 조금 더 전력을 강화시켜서 방심할 때를 노린다.'
놓칠 생각은 추호도 없다. 나는 메이를 안고 던전으로 귀환했다.
사락.
"...?"
어디선가 산뜻하고 맛있는 포도향이 났다.
......쮸으읍!
땀에 절은 메이의 가슴은 신포도 맛이었다.
* * *
"......."
수풀 속.
귀가 긴 금발의 여인이 나뭇가지 위에 서있다가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숨까지 수 분 참고 은신을 한 덕분에, 아주 무서운 괴물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인간들의 짓인 줄 알았는데...."
새로운 적이 늘어났다. 엘프, 루나는 흙바닥의 두툼한 발자국을 손으로 움켜쥐었다.
"오크가 여기에...!"
루나는 급히 몸을 날려 숲을 향해 돌아갔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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