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363일차 -------------------------
퍼억! 퍽!
륜이 지팡이를 휘두르며 슬라임들을 타작하고있다. 14레벨에 이른 륜은 이제 스스로도 일반 슬라임들을 때려잡을 정도로 강해졌다.
'쩔도 필요 없지.'
오늘로 슬라임 던전 진입 네 번째.
고작 3번의 클리어, 4번째의 공략 진행이었지만 나는 대략적으로 던전 내 마물들의 레벨 대를 가늠할 수 있었다.
'슬라임들은 5레벨이고 빅슬라임은 딱 15레벨이다.'
그래서 갓 1레벨이었던 슬라임들이나 구울은 5레벨까지는 폭풍같은 성장을 보였지만, 점점 올라갈 수록 성장이 더뎠다.
퍽!
륜이 막 슬라임을 터뜨렸다. 얼굴에 튄 슬라임을 엄지로 닦아낸 륜의 얼굴은 상쾌해 보이기까지 했다.
"륜아."
"네?"
"그거 죽이는 거 어떻냐?"
"음.... 별 감정 없는데요?"
처음 슬라임들을 죽일 때, 륜은 제법 공포에 떨었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눈치였고, 오히려 그걸 왜 묻냐는 얼굴로 내게 되물었다.
"혹시 주인님은 뭔가 안쓰럽다거나 하시나요...?"
"아니. 전혀."
인간을 죽이는 것도 이제는 무덤덤해졌다. 나는 첫 살인에 대한 PTSD를 륜이 앓을까봐 속으로 전전긍긍했다.
'귀찮을 일은 질색이다.'
"륜아. 내가 명령만 내리면 뭐든지 처리할 수 있냐?"
"어.... 주인님 명령이라면 뭐든지 하겠지만...."
륜은 머뭇거리며 대답하기를 꺼려했다.
"괜찮다. 말해봐."
"...그, 엘프나 정령을 죽이라고 하시면 조금...."
"알겠다. 선처하지."
"진짜요? 감사합니다!"
륜은 허리까지 꾸벅 숙이며 방긋 웃었다. 종족 적으로 동족이 아니면 그다지 반감은 없는 듯 했다.
'다크 엘프로 타락하는 조건이 동족 살해인 것도 이유가 있었네.'
하지만 나는 륜을 다크 엘프로 진화시키지 않을 것이다. 륜의 그 혈통을 올바른 방법으로 이끌어나가려면 역시 하이 엘프 루트로 진화를 이끌어나가는게 나아보였다.
퍽!
또다른 슬라임이 나타났다. 이번에는 빅슬라임이었고, 륜은 의욕을 보였다.
"주인님, 이번에도 제가 해볼게요!"
"그래. 한 번 해봐라."
14레벨 1성과 15레벨 2성의 대결.
륜은 쪼르르 달려가 지팡이를 내리쳤다. 하지만 그 속도가 워낙 느려, 빅슬라임은 옆으로 몸을 피하며 바닥에서 튀어올랐다.
"꺄악!"
륜은 빅슬라임의 공격을 피하려다 엉덩방아를 찧었다. 빅슬라임은 륜의 위를 덮쳤고, 륜은 빅슬라임에게 깔려 아둥바둥했다.
사그작, 사그작.
빅슬라임이 륜의 옷을 갉아먹기 시작했다. 나는 바로 달려가 빅슬라임의 안에 손을 집어넣고 덩어리를 한움큼 뜯어냈다.
꾸르륵.
빅슬라임은 륜을 깔아뭉갠 채로 죽었다. 륜의 고개 옆에 떨어진 체액 덩어리에서 하급 마석 하나가 떨어져 나왔고, 륜은 굳은 얼굴로 입술을 파르르 떨었다.
"......죄송해요."
"괜찮다."
륜에게는 아직 전투원으로서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단계는 아니었다. 차근차근 전투의 경험을 익혀나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다만.
"그런데 너는 활이나 정령술 같은 건 안 쓰니?"
"......."
체액을 털어내던 륜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잠깐 인상을 찌푸렸을 정도로 륜은 대답을 꺼려했고, 나는 륜의 골반을 잡고 번쩍 들어올려 내 어깨에 올렸다.
"됐다.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마라."
"...궁금하지 않으세요?"
"그닥. 못 쓰는 거면 어쩔 수 없고, 사정이 있어서 안 쓰는 거여도 괜찮다. 이게 있잖냐."
나는 륜이 떨어뜨린 지팡이를 집어들었다. 내가 슬라홀을 잡으며 부순 지팡이와는 다르게, 제법 단단하여 아직 부서지지 않았다.
"다 때려잡으면 되지."
"...마을의 언니들은 다 궁술이랑 정령술 쓰는데요."
"그럼 네가 선구자가 되면 되겠네. 너도 철퇴 한 번 써볼래? 위에서 내려치면서 으깨버리는 게 아주 손 맛이 일품이란다."
"......그건 좀. 그런데 주인님, 저 괜찮아요. 빅슬라임은 무리더라도, 슬라임은 잡을 수 있어요."
륜은 더 많은 전투를 요구했다. 하지만 이미 슬라임들은 대부분 정리되어 있었고, 뒤따라 오는 라임이 착실히 마석을 모으고 있었다.
"이제는 괜찮다."
더이상 잡아도 전투 경험만 늘어날뿐, 경험치는 늘어나지 않으니까.
륜, Lv. 15.
이제 진화를 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졌다.
<알림> '진화'는 소환 시설에서만 가능합니다.
"......빨리 잡고 가자. 너 하이 엘프 만들려면 여기서 나가야 해."
"주인님, 어제 나갈 수 있는지 테스트 해보신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그랬지."
나는 지팡이를 꼬나쥐고 보스룸의 문을 발로 걷어찼다.
<슬라임 드래곤> ★★★ Lv.35
"그런데 깰 수 있는 걸 뭐하러 그냥 도망치겠냐?"
나는 이번에도 슬라임 드래곤을 향해 지팡이를 풀스윙으로 집어던졌다.
푸--욱!
슬라임 드래곤은 입부터 지팡이에 꿰뚫려 절명했다.
"와...."
일격에 슬라임 드래곤은 슬라임 꼬치가 되었다. 이제 이걸 구워 먹으면 마시멜로우 같은 게 되지 않을까?
"그럼 바로 돌아가자. 여기도 보스룸에서 나가는 게 귀찮-"
<알림> 던전 내에 침입자가 발생하였습니다.
# <촌장과 구조단> ★★★
<요격> 침입자에 대한 요격을 실시합니다.
# 침입자 : 20명
# 요격 보상 : 마물소환권, ?? ???
"달린다. 라임, 바닥에 떨어진 거 줍지 말고 이리로 와!"
륜은 내 팔을 타고 흘러내려왔다. 나는 륜을 내 가슴앞에 꽉 끌어안았고, 라임은 내 등에 착 달라붙었다.
"공동으로 돌아간다!"
나는 서브 던전을 급히 빠져나왔다. 그리고 침입자들에 대한 정보를 살폈다.
'리처드 놈들의 마을 주민들이네.'
20명의 인간.
메이를 통해 알게된 전력은 대부분이 사냥을 통해 살아가는 사냥꾼 들이라는 것.
"륜아, 인간 죽일 수 있냐?"
"인간이요?"
륜은 볼을 긁적이며 난감하게 웃었다.
"보금자리를 침입하는 적이라면...엘프는 동족을 제외하고 모두 화살을 미간에 꽂아버린 답니다."
"......."
륜은 아주 살벌한 말을 웃으면서 했다.
"그럼 얘기가 달라지지. 륜, 네 보금자리는 지금 어디지?"
"여기요."
륜은 내 가슴을 손가락으로 콕 찔렀다.
"...주인님의 옆이요."
"알았다."
나는 요격을 통해 구울들을 공동으로 들어오는 사거리에 집결시켰다. 던전을 방황하던 구울들은 재빨리 사거리로 집결했다.
쿠르륵.
아홉 마리 구울들은 이빨을 딱딱거리며 전의를 불태웠다.
"시간을 벌어라!"
크륵.
하서스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공동으로 달리던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추가 명령을 내렸다.
"뒤질 것 같으면 알아서 공동으로 도망쳐!"
크르륵.
아무리 쪼렙이라도 애꿎은 부하들을 잃은 수는 없다.
나는 공동으로 달려왔고, 물을 길으러 갔다가 돌아온 하피 셋도 공동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슬라임들은 천장.'
라임이 확실히 일 하나는 기깔나게 해놓은 모양인지, 모퉁이 곳곳마다 배치된 슬라임들은 환풍구 속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며 시시각각 던전의 정보를 미니맵으로 알려주고 있었다.
평균 레벨이 높은 슬라임들은 정찰을.
평균 레벨이 낮은 구울들이 전투를.
어딘가 아이러니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걱정이 전혀 되지 않았다.
<부하진화> [륜]의 진화가 가능합니다.
# 하이 엘프
"륜아, 준비됐니?"
"......네!"
륜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있을 미래를 예상한 듯 했고, 나 또한 마음을 굳게 먹었다.
잠시 뒤.
륜의 몸이 하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 * *
크워어억!
구울들이 긴 팔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위협했다. 2m는 훌쩍 넘는 큰 키로 휘두르는 팔은 조잡한 방패를 일격에 부술 정도로 강했다.
"접근하게 두지 마!"
"여보! 화살!"
"내가 무릎을 쏠게!"
하지만 구조대는 합이 척척 맞아떨어졌다.
오랜 기간동안 화전촌에서 함께 살아가면서 사냥을 생업으로 삼았던 그들은 많은 야생동물을 사냥해왔고, 그 결실이 지금 여기서 빛을 발하고 있었다.
"겁먹지마! 그냥 비쩍 마른 곰일 뿐이야!"
"손톱은 조심해! 독기같은게 있어!"
사냥꾼들은 빠르게 구울들의 습성을 파악했다. 움직임은 빠르지만 공격은 단순했다. 사냥꾼들은 활과 석궁을 쏘며 구울들의 진격을 저지했다.
파바박!
화살이 구울들의 무릎에 박혔다. 무릎에 화살을 세 방 맞은 구울 한쪽 무릎을 꿇고 쓰러졌다.
키에엑....
구울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어깨와 가슴팍에도 화살이 꽂혔고, 구울은 몸을 파르르 떨며 나가떨어졌다.
"촌장님! 빨리 정리하고 여기 좀 도와줘요!"
"젠장, 알았다고!"
촌장은 열심히 칼을 휘두르며 공격을 피해다니고 있었다. 자신도 빨리 도움을, 아니 도망을 치고 싶었지만 피부가 붉은 괴수들은 피부가 돌처럼 단단했다.
캬아아....
특히 왼쪽 팔뚝에 나무 줄기를 묶은 붉은 구울은 제법 상대하기 껄끄러웠다. 조금 더 싸우면 모가지를 전부 날릴 수야 있었지만, 촌장의 목표는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지 여기서 잔챙이를 상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안쪽으로 돌파하겠습니다! 나머지를 맡아주시오!"
"촌장!"
촌장은 벽을 박차고 달려 붉은 구울들을 뛰어넘었다. 붉은 구울들은 깜짝 놀라며 몸을 돌렸으나, 사냥꾼들은 길을 오히려 막아서며 구울들을 활로 위협했다.
"이 놈들, 별 거 아니야! 몰아잡아!"
크르륵.
붉은 구울은 사거리를 쭉 훑었다. 그리고 구울들에게 손짓을 하며 크게 괴성을 지르고는,
캬아아아악!!
갑자기 한쪽으로 도주하기 시작했다.
"......?"
사냥꾼들은 당황했지만, 아주 조심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젠장, 모퉁이가 두 번이나.... 어라?"
그들은 숨을 헉헉거리는 촌장과 다시 합류했다. 촌장은 숨이 차서 그런지 얼굴이 시뻘게져 있었고, 스무 명의 인간은 전열을 가다듬고 공동으로 발걸음을 디뎠다.
"......건방진 인간 놈들이 여기에는 무슨 일일까?"
공동 한 가운데.
차가운 인상의 하이 엘프가 활을 든 채 인간들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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