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화 〉 귀가
* * *
“헤읏.”
밀물처럼 다시 한 번 덮쳐 오는 쾌감.
내 폐부는 그에 기계적으로 반응해 숨을 내뱉는다.
“…깃해…. 좋… 늘아….”
평소 시력도 좋고 청각도 꽤 예민한 편이었지만, 지금은 모든 소리가 뭉개져서 들린다.
시야가 흐릿하다.
내 위에서 누군가가 열심히 방아를 찧고 있다.
그에 맞추어 내 몸도 조금씩 들썩인다.
내 위에 있던 사람은 나의 몸 구석구석을 만졌다.
그리고 어떤 부분은 빨았고, 핥았다.
그리고 내 입에 자신의 신체를 비벼 댔다.
나는 마치 단세포 생물이라도 된 것처럼, 그저 들어오는 자극을 받아들이고 그에 따른 반응을 뱉었다.
그것에 내 의지는 없었다.
아니, 이 세계에 온 이후 처음부터 내 의지란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비록 이런 세계에 홀로 뚝 떨어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인생을 제대로 살아 나가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첫날부터 내 의지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처음 보는 동기 여자애한테 희롱이나 당하고, 그때 옆에서 괜찮느냐고 말을 걸어 주었던 친절한 여자애는 내가 다른 여자를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몽둥이로 뒤통수를 갈겼다.
조별 과제가 있던 수업에서는 나와 딱 붙어 있어도 페로몬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고 순수하게 웃어 주던 여자애가 있었지만, 알고 보니 그 여자애나 그 언니나 둘 다 싸이코였다.
이젠 정말 믿을 건 편의점 알바 누나뿐이라고 생각했다.
나를 진심으로 걱정해 주었던, 골목에서 내밀었던 손, 사심 없던 포옹.
그리고 따뜻했던 렛잇비 캔커피.
이번에도 나는 아무 의심 없이 알바 누나에게 모든 걸 맡겼다.
그리고 그 결과가.
이거다.
“헤윽.”
“하아…. 후읏, 진짜 내 지루했던 인생 최고의 선물이야. 고마워, 하늘아. 잘 받아 갈게. 아, 여기 렛잇비 한 캔 놨으니 천천히 쉬다가 집에 갈 때 마시고 가렴. 당 보충해야 집에 갈 힘이 날 테니까.”
알바 누나는 큭큭대더니 드디어 일어나 기지개를 켰다.
그리고 정액을 승화제로 정리한 뒤, 나를 그대로 버려 두고 카운터로 갔다.
이후 얼마 뒤, 손님이 들어와 담배를 구매하는 소리가 들렸다.
“감삼다. 안ㄴ히가ㅅ여.”
평소와 다르지 않다.
나만이 이 방에, 이 세상에 덩그러니 남겨져 있다.
서서히 시야가 돌아왔다.
하지만 완전히 돌아오지는 못했다.
반쯤 나가 버린 초점으로, 내 앞에 있는 렛잇비 캔을 집었다.
나는 그 캔을 집은 채 창고 뒤편에 있는 비상구로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의 렛잇비 캔은 차가웠다.
***
“어머, 쟤 봐. 너무 귀엽다.”
“완전 내 스타일인데?”
“근데 뭔가 좀 눈빛이 이상하지 않아?”
“낮술 했나?”
“취한 거랑은 좀 다른 것 같기도 한데….”
“어어? 비틀거린다. 저기요! 괜찮아요?”
누군가 내 팔목을 잡는다.
“그러다가 차도로 가겠어요. 괜찮아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이 여자들도 날 한 번 따먹어 보려고 접근한 게 틀림없다.
보나마나 걱정해 주는 척하면서 날 골목길로 데려가서 강간하려 하겠지.
그게 아니라면 그냥 경찰이 올까 봐 쫄려서 놔주는 겁쟁이들이거나.
“어, 그…. 본인이 괜찮다면 뭐…. 조심히 가세요.”
어차피 나한테 이렇게 가까이 와서 팔목까지 잡은 이상.
“야, 방금 근데 냄새 완전 좋지 않았어?”
“약간 빨려들어갈 것 같다고 해야 하나. 너도 느꼈어?”
“나 진짜 순간 심장 쿵쾅쿵쾅 뛰더라.”
“뭔가 색기? 그런게 넘친다고 해야 하나.”
거 봐라.
조금만 더 오래 머물렀으면 그대로 나한테 키스라도 박았을 걸.
어차피 여자들은 다 똑같다.
그저 나한테서 나오는 페로몬에 취하면 이성이고 뭐고 집어던진 채 나를 힘으로 제압하고 물고 빨고 섹스하려 한다.
내가 거기에 대항할 수 있는 수단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칼이라도 들고 다녀야 할까?
아니면 전기충격기?
호신용 스프레이?
모르겠다.
그것도 한두 명일 때 얘기지, 모든 여자가 다 똑같다면, 내 생활 반경에 있는 여자들마저 다 똑같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집…. 집….’
집.
“집….”
나는 걸었다.
‘그래, 집에 들어가자.’
그리고.
나오지 말자.
방에 틀어박혀서, 이 저주받은 페로몬을 누구에게도 맡게 하지 말자.
그러면 나도 안식을 취할 수 있겠지.
누나들도 안 볼 거야.
그냥….
지금은 혼자 있고 싶어.
“어, 뭐야. 전에 걔잖아?”
어디서 들어 본 듯한 목소리와 함께 내 몸이 어디론가 끌려 간다.
“오랜만인데!”
“그때 그 맛을 잊을 수가 없더라고.”
“어때, 한 판 뜰까?”
“근데 얘 눈이 좀 이상한데?”
“몰라, 일단 지난번보다 더 좋은 냄새 난다. 데려와 봐!”
어깨에 문신을 한 구릿빛 피부의 여자가 날 들고 구석진 곳으로 옮긴다.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양아치 3인방에게 다시 한 번 강간당한다.
“얘 전에는 반응 개 좋더니 지금은 그냥 목각인형 됐네.”
“근데 자지는 여전히 개 쩔어.”
“그럼 됐지 뭐.”
“난 이게 좀 더 꼴리는 거 같기도 하고.”
찔걱, 찔걱.
“헤읏.”
기계적으로 숨을 내뱉고.
절정한다.
숨을 크게 들이쉰다.
그리고, 그걸 반복한다.
한참 동안 날 따먹던 세 명의 여자가 만족스럽게 일을 마친 뒤 날 버려 두고 가고.
나는 주섬주섬 일어나서 바지를 올린다.
그리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집….”
터벅, 터벅.
툭.
어느새 내 이마가 문에 툭, 하고 부딪혔다.
집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몸이 기억하는 도어락 비밀번호를 천천히 눌렀다.
꾹, 꾹, 꾹, 꾹.
띠리링 소리와 함께 문을 열었다.
그리고.
“하늘이? 하늘이 왔니?”
민서 누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다.
“왜 이렇게 늦었…. 하늘아? 하늘아!”
나는 대답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 신발을 벗고 방으로 올라갔다.
“하늘아…?”
민서 누나의 걱정스런 목소리가 내 발자취를 따라왔지만, 끝내 나를 잡지는 않았다.
침대에 몸을 던졌다.
멍했다.
하지만 편했다.
아무도 없는 이 공간.
나만의 공간.
다른 사람들과 완전히 단절된 침대에 몸을 파묻고 있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되었다.
똑, 똑, 똑.
그렇게 죽은 듯이 이불 속에 파묻힌 지 얼마나 되었을까.
누나가 문을 두드렸다.
애초에 잠글 정신도 없었기 때문에, 문은 열려 있었다.
“하늘아.”
민서 누나가 조심히 뭔가를 들고 들어왔다.
“…….”
닭죽 냄새가 코 사이로 스며들어 왔다.
꼬르륵.
생각해 보니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 먹은 이후로 아무것도 안 먹었다.
아니, 그전부터였나?
마지막으로 제대로 된 식사를 한 게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꼬르르륵.
다시 한 번 요동치는 배에, 나는 움찔했다.
누나는 이전에 한 번 그랬던 것처럼, 작은 탁상의 다리를 펴서 침대에 올려 놓고 닭죽을 내 앞에 가져다 놓았다.
그리고 부드러운 손으로 내 등을 받쳐 일으켜 주었다.
“하늘아, 속 안 좋으면 누나가 죽 먹여 줄게.”
정말 부드러운 손길이었지만.
나는 그 누나의 손길마저도 본능적으로 몸을 흔들어 떨쳐 내고 말았다.
“…하늘아.”
그 반응에 누나가 조용히 내 이름을 불렀다.
다만, 나를 탓하거나 질책하는 투가 아니었다.
진심으로 걱정하는 목소리.
“일단 이것부터 먹자, 응?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우리 하늘이 내가 옆에서 기운 차릴 수 있게 해 줄 테니까, 일단 이것부터 먹어 볼래?”
민서 누나가 숟가락으로 닭죽을 떠서 내 입 앞에 가져다 댔다.
평소보다도 훨씬 조심스러운 숟가락의 속도.
나는, 입을 벌려 닭죽을 한 입 먹었다.
“…….”
닭죽은 맛있었다.
“옳지. 아, 해 봐.”
나는 잠자코 닭죽을 받아 먹었다.
내 동작이 심히 느렸음에도, 민서 누나는 지치지 않고 내 곁에 붙어서 한 입씩 닭죽을 먹여 주었다.
마침내 닭죽을 다 먹고.
나는 나도 모르게 내가 빈 닭죽 그릇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줄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하늘아, 혼자 씻고 잘 수 있겠어?”
고개를 끄덕였다.
누나가 나가고, 나는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욕실로 들어갔다.
솨아아아아
‘샴푸… 멀어….’
몇 걸음 움직여서 선반에 있는 걸 꺼내기만 하면 되었지만, 왜 이렇게 멀어 보이는지.
따뜻한 물에 푹 젖은 내가 그대로 5분쯤 가만히 있었을까.
드륵
민서 누나가 걱정스런 얼굴로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럴 줄 알았어. 이리 와. 누나가 씻겨 줄게.”
누나의 모습을 본 나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번엔 누나가 내 몸을 원하고 있는 걸까.
이전에도 그랬었잖아.
역시 아까 죽을 먹여 준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날 안심시키려고….
“어서 앉으렴.”
하지만 그런 생각이 무색하게도, 누나는 정말 정성스레 내 몸을 닦아 주었다.
“…시원해.”
“그치? 너 어렸을 때 내가 요렇게 머리 감아 준 거 기억나? 그때 엄청 꺄르르거리면서 좋아했는데.”
“…기억 안 나.”
거품을 전부 헹굴 때쯤, 윤서 누나가 늦게 귀가한 듯 땀에 젖은 도복을 벗어 던지며 욕실로 들어왔다.
“어, 뭐야! 언니 또 하늘이 데리고!”
“쉿. 아냐.”
하지만 곧 윤서 누나도 내 상태가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는지 민서 누나와 심각하게 눈빛을 주고받았다.
“뭐야, 하늘이 이렇게 만든 거 어떤 새끼야? 하늘아. 진짜 말만 해. 내가 가서 그냥 콱….”
“일단 지금은 하늘이 안정부터 시킬 거니까 저쪽에서 조용히 씻고 들어가.”
“…알았어.”
윤서 누나도 내가 걱정되는지 연신 내 쪽을 힐끔거렸다.
“자, 다 됐다.”
내 머리까지 완벽하게 말려 준 민서 누나는 나를 안아 방에 데려다 주었다.
“잠들 때까지 있어 줄게.”
침대 안에서, 누나는 말없이 나를 꼬옥 안아 주었다.
“…….”
툭.
“아.”
나도 모르게 나를 안아 주는 누나를 밀어 버렸다.
“…….”
하지만 누나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 한참 뒤에 조용히 말했다.
“힘들었지.”
누나는 내가 밀어낸 것 이상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괜찮아질 때까지 편히 쉬렴.”
나는 눈을 감았다.
내가 밀어낸 탓에 아주 조금 떨어져 있는 누나의 온기.
“…….”
사락, 사락.
나는 누나의 품으로 다가가 얼굴을 묻었다.
“착해, 하늘이.”
누나는 윗옷 가슴께를 적시는 눈물을 그대로 품은 채, 내 등을 두드려 주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