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주짓수
* * *
생각지도 못한 난관에 부딪혔다.
그야 내가 조금이라도 차분히 앉아서 생각할 시간이 있었다면 이 정도쯤은 어렵지 않게 예상했을 것이다.
이 세계에선 TV를 틀어도 여자 스포츠 경기가 메인이지, 남자 스포츠가 인기를 끄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그나마 남자 배구?
피겨 스케이트?
하지만 그 두 종목마저도 여자의 피지컬이 압도적이었기에 주류는 여자 쪽이었다.
당연히 스포츠를 배우려는 사람들도 여자들이 대부분이고.
‘맙소사….’
도장에 들어가자마자 머리를 묶고 서로 가볍게 스파링을 하는 여자들이 눈에 들어오자, 나는 이마를 탁 칠 수밖에 없었다.
“코치님, 뒤에 누구예요?”
관원 하나가 살짝 상기된 얼굴로 누나에게 물었다.
“어, 내 동생.”
“헐!”
“미친, 개귀여워!”
“와! 남동생! 아시는구나!”
“넌 뭐라는 거야?”
관원들 사이에서 의미 없는 감탄사들이 오갔다.
“오늘부터 여기서 배우는 거예요?”
“그래. 오래 배울지는 해봐야 알겠지만, 일단은 자기 몸 하나는 건사할 줄 알게 만들어주고 싶어서.”
나는 여기저기서 쳐다보는 눈빛에 일단은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잘 부탁드립니다.”
“와…. 잘 부탁해요.”
윤서 누나는 나를 관장실로 데려갔다.
“자, 일단 관장님한테 인사드리고. 도복 받고 갈아입자.”
“으, 응.”
넓은 도장 한쪽에 관장실이라고 쓰여 있는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관장님…도 여자분이신가? 그렇겠지?’
뭔가 관장님이 여자라고 하니까 내 머릿속에서는 이미지가 잘 그려지지 않았다.
똑, 똑, 똑.
“들어와.”
들린 목소리는 카리스마 있어 보이는 여자의 목소리였다.
누나를 따라 들어가자 검은 도복을 입고 있는 탄탄한 체격의 여자가 서류를 정리하고 있었다.
“어, 강 코치. 어서 와. 옆엔 저번에 말했던 남동생인가?”
머리는 책상 밑까지 늘어뜨려져 있을 정도로 장발이었고, 건강하고 매끈한 구릿빛 피부를 가지고 있었다.
‘관장님이라기에는 엄청나게 젊어 보이는데…?’
얼굴에 주름살 하나 없을 정도로 탱탱한 피부, 그리고 진한 이목구비.
그리고 도복 사이로 비치는 가슴….
‘어우야.’
나는 재빨리 시선을 주변으로 돌렸다.
한쪽 벽에는 커다란 책장 같은 게 있었는데, 책 대신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훈장 같은 게 쭈르륵 배치되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운데에 있는 문구를 보고 나는 내 눈을 의심했다.
‘올림픽 은메달리스트라고?’
이렇게 대단한 사람이 우리 누나 일하는 도장의 관장님이라고…?
세상 참 좁구나.
나는 나도 모르게 올림픽 메달리스트 앞에서 자세를 고쳐 섰다.
“네. 오늘부터 운동 시키려구요.”
“그래, 우리 강 코치 동생이면 내가 특별히 잘 좀 봐줘야겠네.”
“그래 주시면 감사하죠.”
“잘 부탁드립니다!”
나는 꾸벅 인사를 하고 도복을 받아서 나왔다.
여러 가지 색깔 중 파란색 도복을 골라 갈아입고, 초심자의 상징인 하얀 띠를 착용했다.
“와아…. 귀여워….”
“나도 저런 동생 있었으면….”
“내 동생은 진짜 보기만 해도 업어치기 하고 싶은데.”
“나도 저런 동생 있으면 진짜 잘해 줄 자신 있다.”
여기저기서 속닥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누나와 함께 가볍게 준비 운동을 한 뒤, 나는 주짓수를 하기 위한 가장 기초적인 동작들을 배웠다.
“자, 일단 내가 시범을 보여줄 테니까 따라해 봐.”
“응.”
“이 동작들은 애니멀 드릴이라고 하는 건데….”
윤서 누나는 익숙한 몸동작으로 여러 자세를 보여주었다.
“직접 한번 해 볼래?”
나는 방금 누나가 보여줬던 동작을 어설프게나마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뭔가 혼자 방바닥에 엎드려서 몸을 배배 꼬고 있으니 민망한 기분도 들었지만, 뭐든 처음에는 이런 기초부터 제대로 숙달하고 넘어가야 하는 법.
“새우 빼기 하는 것 좀 봐.”
“꼬물거리는 거 너무 귀여워….”
…근데 생각 이상으로 민망하긴 하다.
다행히 날 보던 관원들이 각자 연습으로 돌아간 뒤에는 조금 더 내 동작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거 생각보다 힘드네….’
시범을 볼 때는 쉬워 보였는데, 막상 따라해 보려고 하니 금방 지쳤다.
“자, 그 다음은….”
“강 코치! 유도 레슨 안 가나?”
진도를 쭉쭉 빼려는 누나 뒤에서 관장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 벌써 시간이?”
윤서 누나는 시계를 보더니 입을 떡 벌렸다.
“하늘아, 나 유도 레슨 좀 갔다 올 테니까 연습하고 있어. 바로 위층이니까 이따가 데리러 올게.”
“어, 응!”
윤서 누나는 도복을 고쳐 입으며 일어섰다.
“동생은 첫날부터 너무 무리시키지 말고, 오늘 배운 것만 제대로 연습해도 충분해. 자세는 여기 있는 애들한테 봐 달라고 하면 되고.”
“네, 관장님.”
윤서 누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에게 손을 흔들며 문을 나섰다.
“하늘아, 이따 봐.”
“응, 누나. 연습하고 있을게.”
관장님은 누나가 나가자 관원 한 명을 불러서 내게 붙여 주었다.
“최민지! 지금 시간 되나?”
“그럼요, 관장님.”
“네가 얘 연습하는 것 좀 봐 줘.”
“넵.”
관장님이 돌아가고 최민지라고 불렸던 관원이 내게 인사했다.
“안녕.”
“안녕하세요.”
“이름이 하늘이라고?”
“네. 잘 부탁드립니다.”
“난 최민지. 잘 부탁해.”
최민지가 나를 보며 씨익 웃었다.
‘왠지 인상이 좀 무섭긴 한데….’
얼굴의 생김새만 따지자면 최민지는 꽤 예쁜 편이었다.
다만 인상에서 풍겨 오는 그 느낌이라고 할까?
왠지 학창 시절에 좀 놀았을 것 같은 껄렁껄렁한 분위기가 있었다.
‘옷매무새도 뭔가 불량….’
흐트러진 옷매무새 사이로 가슴의 봉긋한 윗부분이 슥 드러나 있었다.
“흐음~”
단 1초 정도 머물렀던 것 같은데, 내 시선을 눈치챘는지 최민지는 뜻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더니 별안간 상체를 숙이며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일단 배운 것부터 해볼까?”
상체를 숙이자 헐렁한 도복 사이로 핑크색 젖꼭지가 보였다.
‘헉.’
나는 일부러 밑으로 시선이 가지 않도록 안간힘을 썼다.
“네, 넵.”
나는 어서 대답하고 자세를 낮추었다.
어차피 보여줄 동작이 바닥에서 하는 거라 다행이었다.
“음, 거기서는 조금 더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중에 상대방의 기술에서 빠져나올 때 쓰는 동작이라 지금부터 생각을 해두면 좋아.”
최민지는 내 동작을 보고 나름대로 정성스런 피드백을 해 주었다.
“잘 봐.”
그리고 내 옆에서 시범을 보여주는데….
‘아니, 자꾸 가슴이….’
일부러 보려고 하는 게 아닌데도 앞섶이 열려 있으니 자꾸 눈길이 갈 수밖에 없었다.
각도도 왠지 잘 만들어지는 것 같고.
“오케이?”
“네, 넵!”
최민지는 당황해서 대답하는 내 모습을 보며 뭐가 재밌는지 킥킥 웃었다.
“하늘아, 이런 기초 동작만 하니까 재미없지?”
“네?”
“어차피 실전 배우러 온 거라며. 내가 맛보기 좀 보여줄게. 이런 걸 해봐야 사람이 열심히 할 동기부여도 되지. 요즘 복싱 체육관에 가도 사람들 줄넘기만 하다 그만두니까 금방금방 원투 훅 알려주고 한다구.”
최민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게 훅 다가왔다.
“자, 잘 봐.”
바닥에서 동작을 하던 내 옆으로 다가와, 최민지는 내게 어깨동무를 하듯이 바로 팔을 걸었다.
“이 상태에서 이렇게.”
그리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내 위에 올라탔다.
내 허리 쪽을 완전히 깔고 앉은 상태에서, 상체로는 내가 일어나지 못하게 막고 팔로 목을 감싸 안았다.
“이 상태에서 오른손이 여기로 들어가면 초크가 되는 거야. 초크라고 들어봤지?”
“네에….”
훅 풍겨오는 그녀의 체취에 나는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냄새가 왜 이렇게 좋아…?’
아직 땀을 많이 흘리지 않은 상태여서 그런가, 뽀송뽀송한 살냄새와 세탁한 도복의 냄새가 섞여 들어왔다.
“자, 이 상태에서 한번 마음껏 움직여서 탈출해 봐.”
내 목을 감싸안은 상태에서 최민지가 내 귓가에 속삭였다.
“어, 어떻게요…?”
그녀의 말에 일단 몸을 틀면서 몇 가지 시도를 해 보았지만,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사람에게 깔린 상태에서 탈출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이게 실전이었으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윤서 누나가 날 여기에 데려온 건 내 몸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주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지금 상태로 만약 바깥에서 이렇게 제압을 당했다면?
그때도 이렇게 무력하게 가만히 누워 있을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힘이 솟는 것 같았다.
“으읍!”
어차피 상대는 주짓수 경력자다.
지금 내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이 사람이 맘만 먹으면 쉽게 제압이 가능할 테니 잘못해서 다칠까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터.
상대도 그런 상황을 가정하고 한번 실전 느낌을 느끼게 해 주려는 걸 거다.
그럼 마음껏 움직여도 상관없겠지.
그렇게 생각한 나는 몸을 이리저리 비틀며 상대방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아직 기술 같은 건 잘 모르지만, 인터넷 동영상으로 MMA 경기를 가끔 본 적은 있었다.
그들처럼 엎치락뒤치락하려고 노력이라도 해봐야겠지.
“오, 생각보다 힘을 쓸 줄 아는데?”
최민지는 일부러 조금씩 힘을 풀어 가면서 내가 마운트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었다.
‘조금만 더.’
이제는 거의 마구잡이로 껴안은 상태로, 나는 상대의 상체를 잡아 포지션을 바꾸려 했다.
잘 드러나지 않는 틈을 찾아 팔을 집어넣고….
말캉
‘응?’
열정적으로 움직이던 나는 손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감촉에 동작을 멈추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