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녀역전 세계의 여대에 입학한 남자로 살아가는 법-16화 (16/79)

〈 16화 〉 배구부

* * *

“어, 응. 아, 안녕.”

내가 생각해도 쭈구리 같은 대답이었다.

성유진의 키나 덩치가 다른 여자애들보다 큰 게 아닌데도, 아니 오히려 작은 편인데도 얘만 보면 왠지 모르게 쫄게 된다.

이 세계에 온 뒤 처음으로 날 희롱한 녀석이라 그런 건지, 얘만 보면 PTSD가 오는 것 같다.

날 만지던 부드러우면서 진득한 손길과 간질간질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

‘왠지 모르게 거스르기 힘든 패왕섹의 패기 같은 게 있단 말이지….’

더 생각하다가는 아랫도리가 반응해버릴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고개를 가볍게 흔들고 심호흡을 했다.

“4조, 성유진 맞지? 같이 잘 해보자.”

내가 이름을 부르자 성유진은 다시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래. 잘 해보자.”

마지막 ‘해보자’에 약간의 악센트가 들어간 것 같다는 느낌은 착각이겠지?

“네가 하늘이구나. 안녕!”

그때 옆쪽에서 발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이예진. 잘 부탁해.”

서글서글한 인상에 경계심을 무장해제시키는 선한 웃음.

일단 조에 정상인 한 명이 들어온 것 같아 조금은 안심이 되었다.

“다른 한 명은….”

“여기.”

목소리의 주인은 조금 특이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는 여자애였다.

굳이 분류를 하자면 조금 긴 샤기컷 같은 느낌이었는데, 앞머리가 한쪽으로 치우쳐져서 한쪽 눈을 거의 가리다시피 하고 있었다.

“문정연이야.”

목소리 톤도 그렇고 눈빛도 그렇고, 세상사에 별 관심이 없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문정연이 입을 다물자 잠깐 어색한 공기가 흘렀고, 이예진은 분위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하늘이가 자유 전공이니까, 그… 성유진? 유진이도 자유전공인 거야? 둘이 아는 사이 같은데.”

내가 자유 전공인 건 어떻게 알았지?

다른 과까지 소문이 퍼졌나…?

그럼 더 부담스러운데.

“응. 자유전공. 하늘이랑은 꽤 친한 사이지. 그치?”

“어?”

성유진이 갑자기 친한 사이라면서 옆으로 슬쩍 붙자 나는 당황해서 말꼬리를 올렸다.

내 시원찮은 반응에 성유진이 날 슬쩍 올려다봤다. 나는 성유진의 눈빛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어, 응. 그치. 개강 날도 같은 강의… 들었고.”

“오오, 그렇구나. 나랑 정연이는 같은 경제학과야. 신환회 때 옆자리에 앉았었는데, 이렇게 또 강의에서 같은 조가 됐네?”

이예진은 붙임성 좋은 미소로 문정연을 보며 말했다.

“…뭐 그러네.”

하지만 문정연은 이예진에게 별로 관심이 없는 듯 고개를 반대쪽으로 살짝 돌렸다.

다행히 이예진은 별로 신경쓰지 않는 듯했다.

“자유전공은 2학년 때 전공 결정한다며? 경제학과 좋은 선배들 되게 많으니까 이쪽으로 와. 나도 잘 해줄게.”

“어, 응. 아직 정한 건 아니지만 경제학과 쪽으로 생각은 하고 있어.”

“정말? 잘됐….”

“빨리 단톡이나 파고 쫑내자. 다른 조도 다 끝나 가는 거 같은데.”

이예진의 말을 끊고 문정연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모처럼 같은 조가 됐는데….”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단톡으로 해. 난 급한 일이 있어서.”

“왜, 뭐가 그렇게 급한데?”

이예진도 이번에는 살짝 티날 듯 말 듯 뿔난 목소리로 물었다.

‘벌써 분위기가 좋지 않구만….’

인간이 4명이나 모이면 그중에 반드시 마찰은 일어나기 마련.

벌써부터 분쟁의 씨앗이 발아하기 시작한 것 같았다.

뭐가 그리 급하냐며 노려보는 이예진과, 별 표정 변화 없이 그녀를 마주보는 문정연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

그리고 그 모든 것은 문정연의 한 마디로 일축되었다.

“화장실.”

“아.”

* * *

다행히 사태는 커지지 않았고, 우리는 연락처를 교환하고 단톡방을 판 뒤 헤어졌다.

“그럼 또 봐.”

성유진도 일이 있는지 가볍게 인사하고 자리를 떴다.

혹시나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건 아닌지 걱정했는데 일단은 마음을 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지, 방심하지 말자. 저번에도 강의실에서는 가만히 있다가 1층 공용화장실에서 그런 짓을 당했었잖아.’

한쪽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한쪽 귀에는 혀를 집어넣었던 그 감각이 떠올랐다.

정액이 물로 쉽게 지워져서 다행이지, 그 자리에서 그렇게나 싸 버렸으니….

‘일단 나도 자리를 떠야지, 이거 시선이 너무 집중되잖아.’

나를 둘러싸고 있던 4조 조원들이 사라지자 다른 경제학과 학생들의 시선이 내 쪽으로 알게 모르게 쏠리는 게 느껴졌다.

개중에는 빠르게 이쪽으로 와서 내 연락처를 받아가려는 애들도 있었다.

“네가 하늘이구나! 너무 귀엽다. 혹시 번호 좀 알려줄 수 있어?”

“야, 첫날부터 찝쩍대냐?”

“용기 있는 자가 얻는 거 모르냐?”

“자유전공학과지? 2학년 때 어느 과로 갈 거야?”

“어, 음, 그게…. 잠시만요!”

저번처럼 도망가고 싶었지만 어느새 이미 학생들에게 둘러싸인 상태.

나보다 키도 크고 힘도 센 여자들 무리를 뚫고 나갈 자신은 없었기에….

“여기 이 번호예요. 여기로 연락 주시면 돼요. 그럼 전 이만…!”

결국 메모지에 내 번호를 적어서 내려놓고 사람들이 몰려든 틈을 헤쳐 나왔다.

“후우…. 일났네.”

이렇게 내 번호를 뿌려버리게 될 줄이야.

뭐, 이렇게 너도나도 몰려들지만 사실 그중에서 실제로 연락하는 사람은 또 얼마 안 되겠지.

새학기다 보니 몇몇이 모여서 같은 일을 하면 소속감 때문에라도 같이 기웃거리기 마련이다.

“어쨌든 탈출은 한 거 같고.”

나도 모르게 긴장을 해서 그런지 문득 소변이 마려워졌다.

‘공용화장실이 1층이긴 하지만….’

저번처럼 성유진이 먼저 와 있을 수도 있다.

애초에 다음 강의 시간 되지도 않았는데 먼저 가버린 게 수상하지 않은가?

‘이번엔 안 당한다.’

어차피 이 건물에만 화장실이 있는 것도 아니고, 소변이 엄청 급한 것도 아니니까 천천히 캠퍼스를 둘러보면서 공용 화장실이 있을 만한 건물을 찾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상쾌한 바람이 코끝을 간질였다.

강의는 1교시였지만 첫 시간이라 OT만 하고 끝났고, 다음 강의까지는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고등학교 때 수업→쉬는 시간 10분→수업→쉬는 시간 10분을 반복하던 숨 막히는 일상과는 확연히 대비되는 모습!

“하아, 이게 캠퍼스 라이프지.”

이 시간에 이런 탁 트인 공간에서 시원한 공기를 들이쉴 수 있다니.

아침에 일찍 나온 건 좀 피곤했지만, 막상 일찍 나오고 이 시간에 자유가 되니 마치 자연을 누비는 한 마리 나비라도 된 기분이 들었다.

“그럼 건물 좀 둘러보러 다녀 볼까.”

한국여대에 입학을 하긴 했지만 아직 이 넓은 캠퍼스를 다 둘러보기엔 너무 시간이 부족했다.

내가 듣는 강의가 없는 미대, 법대 건물이라든가, 한국여대의 명물이라고 불리는 체육관도 구경해 보고 싶었다.

“이쪽으로 한번 가 볼까.”

시간도 많으니 그냥 무작정 걷다 보면 뭐라도 나오겠지.

“어, 저기 봐 봐. 남자다.”

“남미새냐? 어디?”

“저기. 되게 귀여운데?”

“어디 직원분인가?”

“그 이번에 전산오류 전형으로 1학년에 남자 들어왔다던데, 걔 아냐?”

“헐, 학생이라고? 어쩐지 어려 보이더라.”

길 가는 동안 이런저런 소리도 들렸지만 다행히 직접 와서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와, 진짜 크긴 크네.”

한국여대의 명물, 복합 체육관.

‘근데 원래 세계에서 사진으로 봤었던 것보다 훨씬 으리으리해 보이는데…?’

세계가 바뀌면서 체육관이 더 커졌다?

이건 무슨 경우지?

‘설마….’

세계가 변하기 전에도 한국여대는 배구부, 테니스부로 유명했고 체대 규모가 큰 편이었다.

근데 그게 남녀가 바뀌었다고 하면….

‘여기는 신체 능력 뛰어난 남자들이 모인 남학교나 다름없는 셈이잖아…?’

그러니 자연스럽게 전국 대회 같은 곳에서도 상을 많이 타 왔을 것이고, 발전을 거듭해 이 정도의 체육관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 것이다.

‘진짜 어마어마하네.’

체육관 안에서도 또 길이 나뉘어져 있어, 처음 오는 사람이면 길을 잃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바로 나예요.’

일단 앞에 보이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안에서는 한창 뭔가가 진행 중이었다.

텅!

삐익­

“나이스! 다인 선배!”

“오케이, 이대로 가자!”

“토스 좋았다! 블로킹 조금만 더 신경써 줘!”

“네!”

‘배구잖아?’

안쪽에서는 배구 시합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양쪽이 비슷한 유니폼을 입고 있는 걸 봐서는 서로 연습하는 것 같긴 한데….

‘경기 내용은 완전 살벌하네.’

여자라고는 믿겨지지 않을 만큼 엄청난 피지컬, 그리고 운동 수행 능력!

물론 원래 세계의 여자 배구 선수들도 다 키 크고 능력 좋은 선수들이지만, 지금 보는 건 그것과는 움직임의 차원이 달랐다.

어떻게 보면 고작 대학 운동 동아리일 뿐인데, 내가 보기에는 거의 준프로급 수준의 경기를 펼치고 있었다.

‘와….’

실력도 실력이고, 시합하고 있는 선수들 모두 탄탄한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옷을 입고 있다 보니 본능적으로 눈이 떨어지질 않았다.

신축성 좋은 짧은 반바지에, 복근이 드러나는 스포츠 탱크탑 상의.

‘어우…. 너무 빤히 바라보지 말자.’

자꾸 끓어오르려 하는 이 본능을 주체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삐익­

“나이스! 역시 다인 선배!”

“좋아, 좋아!”

‘어? 다인 선배? 그러고 보니 어디서 들어본 적이…?’

나는 낯익은 이름에 다인 선배라고 불린 사람이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아!’

­박다인이라고 한다.

­너 내 남자친구 해라.

그때 그 사람!

개강날에 공용화장실의 위치를 알려줬던 그 태닝 숏컷 선배였다.

‘그때는 그냥 키 큰 선배인가 보다 했는데 옷을 저렇게 입으니 완전…. 아니 이런 생각 하지 말자.’

다인 선배 쪽을 바라보고 있자 다인 선배도 시선을 느꼈는지 이쪽을 바라보았고, 곧 눈이 마주쳤다.

‘헉. 눈 마주쳤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는데, 다인 선배는 간단히 손을 흔들며 윙크 한 번 날린 후 아무렇지도 않게 다음 세트를 준비하러 움직였다.

“자, 화이팅! 이거 마지막 세트로 만들자!”

“화이팅!”

“아자!”

‘좀 더 보려고 했지만…. 아는 사람을 마주쳤으니….’

최대한 귀찮은 상황은 피하고 싶었기에, 나는 경기가 한창 진행될 때를 틈타 조용히 반대쪽 문으로 빠져나왔다.

“휴우…. 화장실이나 찾아봐야지.”

아까 좀 덜 마렵던 소변이 지금은 꽤 마려워졌다.

“이쪽인가?”

세계가 바뀌었지만 내가 길치라는 사실은 아무래도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몇 번의 갈림길을 지나고, 내가 잘못 들어왔나 싶을 즈음.

마침 화장실을 의미하는 T 간판이 보였다.

“여기가 화장실… 맞나?”

간판을 따라 들어갔는데 화장실이 아니라 어떤 라커룸 같은 공간이 나왔다.

아무래도 잘못 들어왔나 싶어 돌아가려는 순간, 저 안쪽에 진짜 화장실이 보였다.

‘휴. 다행이다.’

공용 화장실처럼 서서 이용할 수 있는 소변기는 없었지만, 그러면 뭐 어떤가. 화장실 갈 적 마음이란 게 다 이런 법.

급한 소변을 천천히 해결하고 만족스런 기분으로 화장실을 나서니 세상의 근심 걱정이 사라진 것 같았다.

그리고 내가 다시 라커룸을 지나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야, 아까 페이크 진짜 좋았다.”

“사실 그거 토스 잘못 올라간 건데 현지가 페이크로 승화시킨 거였어요.”

“암튼 결과만 좋으면 됐지!”

“다인 선배가 이번에 진짜 큰 거 여러 방 해냈지.”

“서비스 에이스 연속으로 두 번 딴 게 진짜 컸어.”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어?’

다인 선배?

잠깐만.

그럼 여기는….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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