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분에 살짝 물에 젖어있는 갈색의 머리칼이 거칠게 흔들리며 그 사이에 몸을 숨기고 있던 앙증맞은 크기의 귀가 눈앞으로 드러났다.
색이야 말할 것도 없이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말 그대로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세나의 반응을 티나지 않게 눈에 담으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세나의 반응을 보니 굳이 이런 행동을 벌인 보람이 있었으니까.
'은근히 이런 거에 약하다니까···'
할 거 다 한 건 물론이거니와 꽤나 하드한 플레이까지 다 해놓고 고작 이런 걸로 저런다는게 좀 웃기긴 했지만··· 생각해보면 또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나와의 관계는 시작이 좀 그랬으니까.
물론, 그 스토커년의 습격사건을 계기로 그동안의 행위를 뉘우치는 사죄의 순애섹스와 함께 매콤함 뿐이던 관계에 조금씩 달콤함이 섞이긴 했지만 그래도 아직까지는 매운맛이 더 익숙할 거다.
그만큼 달달하고 풋풋한 맛은 아직은 좀 낯설 것이고.
'참···'
고작 간접키스 좀 한 걸 가지고 저러는 걸 보면 마음이 아예 없지는 않은 것 같은데 말이다.
가영이나 지나하고는 다르게 적극적으로 나서려고 하지 않는 이유가 대체 뭘까.
설마 자기한테는 승산이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속으로 추측을 이어나가고 있는 동안에도 튜브에다가 바람을 불어넣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되먹은 놈인지는 몰라도 들썩거림조차 없더라.
'설마 구멍이 막혀있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바람을 불어넣을 때마다 뭔가 좀 들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걸 보면 그럴 리는 없겠지만.
'아니면 구멍이 뚫려서 거기로 바람이 샌다던지···'
아무래도 창고 안에 처박혀있던 걸 꺼내온 거다보니까 그 가능성도 배제할 수가 없어서 손으로 튜브 표면을 더듬거리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헹···! 것봐 안 된다니까?"
부끄러워서 날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할 때는 언제고 그새 또 멘탈을 회복했는지 바로 옆에서 기고만장해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왜 기고만장해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네. 이거 튜브에 구멍 뚫린 거 아니야?"
"야, 내가 설마 그것도 확인 안했을까."
하긴 바보같은 짓을 자주할 뿐이지 진짜 바보는 아니니까.
그렇다는 건 지금처럼 입으로는 힘들 거라는 뜻이겠지.
"창고에 펌프같은 건 없었어?"
"펌프?"
"그 왜 바람 불어넣는 거 있잖아."
"어, 음···"
아니나 다를까 역시 따로 안 찾아보고 튜브만 달랑 집어온 게 틀림없었다.
그게 아니고서야 펌프를 찾는 내 질문에 저렇게 눈을 데록데록 굴리며 시선을 피할 이유가 없으니까.
"안 찾아봤지?"
"아니, 그··· 창고 안이 너무 복잡해가지고··· 괜히 어지럽히면 나중에 정리하기도 힘들고···"
"안 찾아봤다는 소리네?"
"···그렇··· 죠?"
무려 존댓말까지 동원해서 어색하기 그지없는 고갯짓을 선보이는 세나를 보며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방송 중이라면 몰라도 방송 중이 아닌 세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믿으면 안 된다는 걸.
역시나라고 해야할까.
아까와는 다른 의미로 민망해하는 세나를 데리고 창고 안을 좀 뒤져보니까 바로 나오더라.
심지어 위치도 튜브가 있는 곳 바로 아래였고.
"뭐야, 괜히 헛고생만 하고 있었네."
"···"
성능이야 뭐··· 짱짱하더라.
내가 아는 것과는 다르게 발로 밟는 식이었는데 미술시간에 쓰는 물통처럼 생겨먹은 걸 발로 몇 번 밟아주니까 입으로 할 때는 약간의 미동조차 보이지 않던 놈이 언제 그랬냐는 듯 쑥쑥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이야··· 성능 확실하네."
그 탁월한 성능에 감탄을 표하니 안 그래도 쭈그리 모드였던 세나가 더욱 쭈구리가 되었다.
"이런 게 바로 아래에 있었는데 이런 걸 냅두고 입으로 불어넣는다고 별 쑈를 다하고 있었으니···"
"···아, 내가 들어갔을 때는 안 보였다고!"
"암요, 그러시겠죠."
민망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과할 정도로 발끈하는 세나를 상대로 고개를 끄덕끄덕해주니까 씨이하고 주전자 끓을 때나 날법한 소리가 세나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왔다.
"아무튼 이건 내가 밟고 있을테니까 저리가서 준비운동이라도 좀 하세요."
그래놓고서는 또 내 말에는 고분고분하더라.
그런 식으로 세나를 살짝 떨어진 곳으로 쫓아낸 다음 펌프를 상대로 열심히 꾹꾹이질을 하고 있으려니까 튜브가 순식간에 빵빵하게 변했다.
그렇게 완성한 것을 손에 들고 세나 쪽으로 돌아서니?
대체 뭘 그렇게 유심히 바라보고 있는 건지는 몰라도 수영장을 앞에 둔채 쪼그리고 앉아있는 세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뭐해? 누나?"
수영장 안에서 뭐가 꿈틀꿈틀대고 있기라도 한 걸까.
살짝이지만 겁에 질려보이는 표정이라 어쩌면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는데 대답이랍시고 돌아온 건 그야말로 생각치도 못했던 말이었다.
"아니, 그··· 이거 좀··· 깊어보이지 않냐?"
"응?"
"거, 겁난다거나 그런 건 절대 아니고···! 위, 위험할 수도 있잖아···"
아니, 그토록 수영장 수영장 노래를 불러댈 때는 언제고 준비운동에다가 거의 자기 몸만한 튜브까지 준비를 끝내놓고서는 여기서 쫄보짓을 한다고?
진심으로?
'뭐··· 확실히 아까보다 깊어보이기는 하는데···'
보이는 게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까지 그럴 리는 없었다.
수영장이 살아있는 것도 아닐진데 그럴 리가 있나.
그러니 이건 어디까지나 착시효과 때문일 거다.
"역시··· 물을 좀 빼는 게 좋겠지?"
그런데 기껏 한다는 말이 저런 식이니까 헛웃음이 안 나올래야 안 나올 수가 없더라.
그래서ㅡ
"누나."
"···응?"
"헛소리 하지마 임마."
마침 또 뒤에서 밀기 딱 좋게 수영장 끄트머리에 쪼그려앉아있는 세나의 몸을 발로 꾸욱하고 떠밀어주었다.
그렇게 내게 등떠밀린 순간 세나가 내쪽을 돌아보며 보여준 표정은 정말로ㅡ
'아, 햇반 마렵네.'
밥 한공기 쯤은 뚝딱 비울 수 있을 정도로 맛깔났다.
'아니···'
누가보면 내가 등에다가 몰래 칼빵이라도 놓은 줄 알겠네 진짜로.
딱 그런 표정이었다.
물에 떨어지는 순간 세나가 날 향해서 지어보였던 건 말이다.
말로 표현해보자면 '브루투스 너마저···?!'라고 경악하는 듯한 표정이라고 해야할까.
"어풉···?!"
그런 표정과 함께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키며 그대로 수영장 안으로 풍덩 빠져버린 세나가 이내 요란하게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그게 어이가 없었다.
착시현상 때문에 원래보다 깊어보인다고 해봐야 뒷마당 수영장일 뿐인데 허우적대는 꼴만 보면 거의 뭐 마리아나 해구 한 가운데에 퐁당 빠진 듯한 그런 느낌이었으니까.
"어풉···! 발이···! 어푸풉···! 발이, 안 닿아···!"
"진짜··· 가지가지 하는 구나 누나···"
"아니, 어풉!, 진짜, 안 닿는다고오···!"
그럴 리가 없을텐데?
그래도 혹시 또 모르는 일이었기에 곧바로 수영장 안으로 뛰어들었다.
어쩌면 갑자기 물에 빠지는 바람에 당황해서 몸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혹은 다리에 쥐라도 났다던지.
아무튼 그렇게 수영장 안으로 풍덩 뛰어들었는데ㅡ
"아, 씨···"
뛰어들자마자 깨달았다.
정말 물에 빠지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하게 허우적대는 모습은 다 연기였다는 걸.
그럴 수밖에 없는 게··· 거의 들어가자마자 바로 바닥에 발이 닿더라.
"속았죠?"
아니나 다를까 듣기만해도 뒷목이 뻐근해지는 목소리가 자연스레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그래···'
그런 식으로 나온다 이거지?
그럼 어쩔 수 없지.
고대서부터 내려오는 함무라비 법전에 의거하여 연기에는 연기로 되갚아주는 수밖에.
물론, 참고 넘어간다는 선택지도 존재하긴 했지만 그건 세나가 얄밉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낸 시점에서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버린지 오래였다.
'자, 그러면···'
일단 화난 척부터 해보실까.
마음 속으로 결정을 내리기 무섭게 눈썹 쪽에다가 힘을 빡 주면서 짜증을 듬뿍 담아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 방금 갈아입었는데···"
"그러니까 누가 밀래? 다 니 업보죠?"
물론, 내가 한숨을 내쉬든 말든 세나는 예의 그 깐죽거림을 이어나갔지만.
어차피 한숨가지고는 택도 없을 거라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세나를 속여먹기 위한 연기를 이어나갔다.
"아니, 난 혹시 쥐라도 났나 싶어서···"
한탄하는 느낌으로 중얼거리다가 그대로 세나의 반대방향으로 몸을 홱 돌렸다.
말을 끝맺지 않은 게 포인트라면 포인트였다.
그리고는 그대로 수영장을 빠져나가려는 것처럼 바깥과 연결되어있는 계단을 향해 움직이니 미묘한 침묵이 나와 세나 사이로 내려앉았다.
"···뭐야, 설마 화났냐?"
뒷쪽에서부터 뭔가가 촤악하고 물살을 가르며 움직이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그 직후였다.
당연한 말이지만 그런 세나의 물음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래야 세나가 말한대로 화난 것처럼 보일테니까.
"아님 설마 삐졌냐?"
말 그대로 순식간에 내 뒤까지 근접한 세나가 이내 내 주변을 알짱거렸다.
그럼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침묵으로 일관하니 알짱거리는 몸짓에 조금씩 초조함이 깃들기 시작했고.
"아, 뭐야··· 그냥 장난친 거 가지고 왜 그러는데."
"···장난칠게 따로 있지 왜 그런 걸로 장난을 치는데."
"옷 젖은 거 때문에 그래? 미안."
"내가 지금 고작 그런 것 때문에 이러는 것 같아?"
"어···"
뭔가 성별이 뒤바뀐 것같은 느낌이었지만 뭐··· 다른 이도 아니고 세나한테 속았다는 치욕을 되갚아줄 수만 있다면 남는 장사겠지.
"응? 고작 그거 때문에 이러는 것 같냐고."
"그··· 미, 미안···"
"됐고. 아까 전부터 수영장 수영장 노래 부르던데 여기가 그렇게 좋으면 계속 여기 있어. 난 들어가서 좀 쉴라니까."
"야아···"
이대로 날 그냥 보낼 수는 없다 생각한 걸까.
퍽 다급하게 뻗어온 손 하나가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챘다.
그리고는 자기 쪽으로 홱 하고 돌리는데··· 일단은 저항하지 않고 거기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세나 쪽으로 돌아서자마자 고개를 푹 숙이니까ㅡ
"미안, 진짜 미안, 응? 내가 잘못했으니까···"
세나가 허둥지둥하는 느낌으로 날 향해 슬금슬금 다가왔다.
덕분에 일어난 것들이 가슴팍에 와서 철썩철썩 부딪히는 걸 느끼면서 속으로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가까이 와주면 좋을텐데.
"···진심이야?"
"응···? 아, 응."
"그래?"
"응, 그러니까 화 풀···"
그리고 마침내 세나가 내 사정권 안으로 진입했을때, 그녀의 어깨를 꽉 움켜쥐며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잘못했으면 벌을 받아야겠지?"
"···에?"
그리고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는 세나를 상대로 안다리를 걸면서 움켜쥐고 있던 어깨를 아래로 꾹 눌러주었다.
그런 식으로 친절하게 물 속 세상을 구경시켜주니까 아주 그냥 좋아 죽으려고 하더라.
물 속 세상이 그리도 마음에 들었던 걸까.
순식간에 물귀신으로 전직한 세나가 날 물 밑으로 초대하려고 했지만 수영장 벽을 잡고 버텼다.
'어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