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3화 〉1부
말 그대로 가볍게 툭 던진 질문의 파괴력은 어마어마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가영이 맥을 못췄으니까.
금방이라도 펑하고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덤이었다.
'진짜···'
사람이 이렇게 귀여워도 되는 걸까.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가영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흐뭇한 마음에 얼굴 위로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 내 반응을 확인한 가영이 더 부끄러워한 건 말할 것도 없었다.
"바지 말이에요. 다른 걸로 갈아입고 올까요?"
"그으··· 유한이 네가 편할대로 하면···"
"그럼 그냥 이대로 입고 나갈까요?"
"···"
내 뜻을 존중하겠다는 것처럼 말해놓고서는 거기에는 또 답을 안 하더라.
'귀여워 죽겠네 진짜로···'
뭐, 가영의 뜻이 그런 관계로 일단은 다른 걸로 갈아입기로 했다.
물론, 그냥 갈아입어줄 생각은 없었다.
귀찮음을 감수하는 것이니만큼 뭐라도 받아야하지 않겠는가.
손가락을 세운 다음 가영을 향해 입술을 톡톡 두들겨 보였던 건 다 그걸 위해서였다.
"여기에 키스해주시면은 갈아입을게요."
"···뭐?!"
"아니면 그냥 이대로 가고요."
"정마알···"
자꾸만 자길 부끄럽게 만드는 내가 야속하기라도 했던 걸까.
얄미워 죽겠다는 듯 곱게 눈을 흘기던 가영이 살포시 한숨을 내쉬며 내쪽으로 성큼 다가왔다.
옆머리가 키스하는데 방해라도 될 것 같았나 보다.
어느새 위로 올라온 가영의 손이 살짝 흐트러져있던 머리카락을 귀뒤로 넘기더니ㅡ
"후움···♡"
씻은지 얼마 안 되서 그런지 몰라도 평소보다 몇 배는 더 촉촉하고 부드러운 것 같은 입술이 내 입술 위로 살포시 내려앉았다.
처음부터 적극적으로 나서기에는 뭔가 좀 부끄러웠던 걸까.
내 입술을 부드럽게 누르고 있던 것이 수줍게 벌어지더니 그 사이로 조심스레 빠져나온 것이 내 입술을 톡톡 두들겨댔다.
그게 꼭 이것 좀 열어달라고 노크라도 하는 것만 같아서 요구받은대로 입술을 벌려주었다.
"흐···"
순순한 내 태도에 살짝 흥분한 걸까.
코쪽에서 새어나온 것이 평소랑은 다르게 뜨거웠다.
어느새 입 안으로 쑤욱하고 파고들어온 것도 그랬다.
뜨거우면서도 말캉말캉한 것이 입 안을 정신없이 훑어댔다.
솔직히 말하면 내심 기뻤다.
내가 먼저 해달라고 요구하기는 했지만 이렇게까지 적극적으로 해줄 줄은 몰랐으니까.
그런 식으로 정신없이 입을 맞추다보니 슬슬 호흡이 달렸던 모양이다.
파르르 떨리는 손으로 내 티셔츠를 꼬옥하고 움켜쥐고 있던 가영이 조심스레 몸을 떨어뜨렸다.
살짝 뒤로 물러난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던 것도 잠시, 가영이 내 시선을 피하듯 고개를 살짝 옆으로 돌렸다.
"후으··· 이, 이제 가서 갈아입고 오렴···"
"네."
그와 함께 던져진 요구에 싱긋 웃으며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그대로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입고 있던 것부터 벗어던진 다음 새로운 바지를 꺼내 그걸로 갈아입은 뒤 다시 가영의 곁으로 합류했다.
'이 정도면 괜찮겠지?'
틀림없이 그럴 거라 생각했는데 가영의 반응을 보니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했다.
이번에 입은 것도 영 성에 차질 않는 걸까.
살짝 뚱해보이는 표정과 함께 가영이 도톰한 입술을 귀엽게 오물거렸지만 한 번 더 갈아입고 오라고 하기에는 또 좀 그랬던 모양인지 결국 거기서 그쳤다.
그렇게 가까스로 가영의 허락을 받아낸 다음 그녀의 손을 잡고 호텔방을 빠져나왔다.
"음··· 일단은 밥부터 먹을까요?"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뱃속이 든든하지 않으면 어디를 돌아다니든 먹을 것밖에는 보이지 않을 게 뻔했기에 일단은 끼니부터 해결하기로 했다.
끼니는 호텔 조식으로 때웠다.
밖에 나가서 먹는 것도 생각은 해봤지만 그건 점심 때 그러기로 했고.
그렇게 간단하면서도 든든하게 배를 채워준 다음 호텔 밖으로 나왔는데··· 눈으로 들어온 풍경은 내심 예상했던 것하고는 사뭇 달랐다.
어제 우리를 호텔까지 태워다주었던 스탭의 설명에 따르면 관광지로 엄청나게 유명한 동네라길래 여기저기서 찾아온 이들로 득실거리는 풍경을 상상했었는데 말이다.
실제로 확인한 호텔 밖의 풍경은 굉장히 한산했다.
막 돌아다니는 사람이 아예 없고 그런 정도는 아닌데 관광지로 유명한 동네라기보다는 차라리 시골 읍내에 가까운 느낌?
"사람이 별로 없네요···"
"그러게···"
그게 조금은 아쉬웠다.
이렇게 되면 이 외모를 십분 활용해 가영에게 질투를 불러일으킨다는 계획은 써먹기 힘들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뭐···'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편할 것 같았다.
적어도 사람들한테 치이진 않을테니까.
라고 생각했던 때가 나한테도 있었는데 말이다.
'···뭐지 이건? 버근가?'
아까까지만 해도 이게 정말 유명 관광지가 맞나 싶을 정도로 사람이 없지 않았던가?
분명 그랬던 것 같은데··· 그럼 이 복사버그라도 터진 것 같은 풍경은 대체 뭘까.
관광객이 복사가 된다고?!
잠깐 필요할 것 같은 것들 좀 사러 마트 안에 들어가있는 동안 한산했던 거리가 어느새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어찌나 북적거리는지 퇴근시간대의 1호선이 떠오를 정도였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멀미를 유발시키는 그런 풍경이라고 해야할까.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다 어디서 튀어나온 걸까.
심지어 지금 눈에 보이는 게 끝이 아니었다.
호텔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커다란 건물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나와 가뜩이나 붐비는 거리 위로 팍 끼얹어지는데 그 모습이 꼭 초등학생시절 점심시간을 생각나게 했다.
그 왜 점심시간 종 울리면 초딩들이 사방팔방에서 우르르 뛰쳐나오는 모습 있지 않던가.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게 딱 그 정도 수준이었다.
그래서일까.
마트 안을 누비고 다닐 때 받았던 것하고는 차원이 다른 밀도를 가진 시선이 내 얼굴을 향해 쏟아지고 있었다.
이런 게 바로 시선의 폭력이라는 걸까.
한국에 있을 때는 다들 적당히 쳐다보다가 주변의 눈치를 보며 시선을 돌리곤 했는데 여긴 뭐 그런 것도 없었다.
'이러다가 얼굴 뚫리겠는데?'
덕분에 그런 쓸데없는 생각이 숨쉬듯 자연스럽게 머릿속으로 떠오를 정도였다.
그렇게 시선집중을 당하고 있으려니 이내 가영도 내게 쏟아지는 시선들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된 것일까.
그녀가 서 있는 쪽에서 나지막하게 한숨소리가 들려오더니 가영이 내 손을 꼬옥하고 붙잡으면서 내 앞으로 나섰다.
그런 가영의 행동은 나름대로 효과가 있었다.
내쪽으로 집중되어있던 시선들 중에 그래도 절반 정도는 떨어져나갔으니까.
물론, 남은 절반만으로도 엄청난 양이기는 했지만.
"일단··· 호텔로 돌아가는게 좋겠다."
"호텔로요?"
"···응, 이렇게 계속 들고 돌아다닐 수는 없잖니?"
꼭 그것만은 아닌 듯 했지만 일단은 그러자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시선이 몰릴 거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지만 설마 이 정도로까지 시선을 몰릴 줄은 몰랐기에 지금 이 상황이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건 나도 똑같았으니까.
그렇게 가영의 손을 꼭 붙잡은 채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호텔 쪽으로 향하다보니 조금은 생뚱맞게 느껴지는 풍경들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흐음···?'
물총 들고 다니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걸까.
처음에는 그래 뭐 다 큰 성인이라도 물총 좀 들고 다닐 수 있지라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넘겼었는데 이제는 거의 뭐 다섯 명 중에 두세 명 꼴로 그러고 있으니까 그런 식으로 얼렁뚱땅 넘기기도 힘들었다.
"무슨 이벤트··· 같은 거라도 하는 것 같은데요? 물총 들고 다니는 사람이 엄청 많네요."
"그러게···?"
설마 그것 때문에 아침에는 그렇게 사람이 없다가 점심시간에 가까워지자마자 이렇게 사람이 폭증한 걸까.
놀랍게도 그게 정답이었다.
호텔에 도착하자마자 로비로 가서 문의를 해보니까 근처에서 물총 축제가 열릴 예정이라나?
'물총 축제라···'
정말 솔직하게 말을 하면 좀 꼴, 아니 끌렸다.
물총 축제라고 하면 상대가 누구든 물총을 막 쏴제껴도 합법이라는 뜻일텐데 그럼 다들 기본적으로 젖은 상태일거라는 소리 아닌가.
이런 이벤트를 그냥 지나치면 남자라 할 수 없겠지.
"···저희도 한 번 가볼까요?"
"으응? 거기를?"
어차피 따로 가기로 한 곳도 없었기에 이왕 이렇게 된 거 거기나 한 번 가보자고 스리슬쩍 제안을 던져봤는데 돌아온 건 떨떠름해하는 반응이었다.
뭔가 좀 내켜하지 않는 것 같은 그런 반응이라고 해야할까.
아무래도 그··· 나이가 나이다보니까 자기랑은 어울리지 않을 것 같기라도 했던 걸까.
처음에는 그런 줄로만 알았는데ㅡ
"그··· 꼭 가보고 싶니?"
"네? 그런 건 아닌데 왠지 재밌을 것 같아서요."
알고 보니까 그게 아니더라.
가영이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였던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까.
"그래도··· 젖을텐데···"
"그거야 당연히···"
너무나도 당연한 걸 걱정하길래 그거야 당연한 일 아니겠냐고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가영이 보여준 몸짓 때문이었다.
정확히는··· 눈짓이라고 해야할까.
그랬다.
물총 축제에 가보는게 어떻겠냐는 내 제안에 가영이 떨떠름한 반응을 내보였던 건 본인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그냥 길가에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주변에 있는 여자들의 시선을 죄다 집어삼켜버리는게 바로 이 몸인데 거기에 촉촉하게 젖어서 야한 모습이 되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나조차도 감히 예상할 수가 없었고, 그러니 가영이 난색을 표하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했다.
그래서ㅡ
"음··· 그래도 이대로 그냥 가는 건 좀 그렇겠죠? 역시 방수되는 거라도 하나 걸치고 가는게···"
"그으··· 선글라스도 쓰는 게 좋지 않겠니?"
"선글라스도요?"
"응··· 눈에 물, 들어갈 수도 있으니까···"
상체에는 방수가 되는 얇은 바람막이를 걸쳐주고,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쓰는 식으로 완전무장을 했다.
그렇게 완전무장을 하고 난 후에야 가영한테서 괜찮겠다라는 대답을 끌어낼 수가 있었고.
그런 식으로 전과는 사뭇 달라진 복장으로 호텔을 빠져나와 문제의 그 물총축제가 열리고 있는 이벤트 장소에 도착하니···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지상에 천국이라 부를 수 있을만한 곳이 존재한다면 지금 바로 내 눈앞에 있는 저기라는 걸.
그만큼··· 남자 입장에서보면 꿈같은 풍경이었다.
다들 아주 그냥 축축하게 젖어서는 속옷이나 수영복같은 것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데··· 심지어는 티셔츠 안에 아무 것도 안 입은 이들도 있더라.
'오우 쉣···'
그것도 모자라 축축하게 젖은 티셔츠가 거치적거리기라도 하는지 그것을 휙휙 벗어던지는 이들도 있는데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저 현장 속으로 몸을 던지고 싶을 정도였다.
"으음···"
"저기서 물총같은 거 빌릴 수 있나봐요."
내심 예상하고 있었던 것보다 더 치열해보이는 축제 현장을 보고 난감해하는 표정을 하고 있던 가영의 손을 잡아끌어 근처에 있는 부스를 향해 이끈 건 그래서였다.
맘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뛰어들고 싶지만 무기도 없이 맨손으로 뛰어들 수는 없었으니까.
상대방이 나한테 막 쏴제끼면 반격할 수단이라도 하나 들고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찾아들어간 부스 안에는 그야말로 온갖 종류의 물총들이 벽에 내걸린채 열심히 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개중에는 '저것도 물총이라고?'라는 의문을 절로 불러일으키는 거대한 것들도 몇 개는 있었고.
"그래도 일단 큰게 좋겠죠? 그래야 오래 싸울 수 있을테니까."
그 중에서 제일 비싼 걸 골라 그걸로 두 개 빌렸다.
잔돈이 남길래 겸사겸사 주머니 안에 쏙 들어갈 정도로 쬐끄만한 것도 하나 빌렸고.
젖어선 안 되는 것들이야 일찌감치 호텔에 놔두고 왔기에 그렇게 무장을 끝마치자마자 바로 치열한 전투가 한창인 축제 현장 속으로 뛰어들 수 있었다.
뛰어들었는데ㅡ
"어풉···?!"
입장하자마자 비겁하게 기방하고 있던 년들한테 당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