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7화 〉1부
90퍼센트쯤 확신하고 있던 것이 단숨에 팩트로 돌변했지만 그것 때문에 딱히 배신감을 느낀다거나 화가 난다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화가 날 이유가 없었으니까.
이미 '아지훔세'가 세나의 부캐라는 걸 확신하고 있는 상태였는데 왜 화가 나고 왜 배신감이 든단 말인가.
현실은 그런데 상황상 화를 내야만 했다.
"하···"
한숨하고 헛웃음 그 중간쯔음에 서 있는 것을 입밖으로 내밀었던 건 그래서였다.
물론, 손을 들어올려 얼굴을 쓸어올리는 척 하며 그곳을 적당히 가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어디서 연기라도 좀 배웠다면 굳이 얼굴을 가릴 필요까지는 없었겠지만 그렇지가 않으니까.
되도 않는 연기를 해보려다가 걸리느니 차라리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편이 훨씬 나을 것 같아서 그리했던 것인데 놀라울 정도로 효과가 좋았다.
"유, 유한아···?"
그게 아니고서야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세나'가 저토록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낼 이유가 없으니까.
내가 얼굴을 손으로 가려놓고 보여주질 않으니 다른 이도 아니고 가족이라 굳게 믿었던 사람한테 뒤통수를 씨게 얻어맞은 여파로 눈물이라도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라도 했던 것일까.
대체 언제 뻗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덜덜 떨리는 손이 조심스레 옷깃을 붙잡아왔다.
"···놔."
"자, 잠깐 내 말 좀···"
"놓으라고."
이 몸으로 낼 수 있는 것들 중에서 가장 싸늘한 것을 골라 그리 말했더니만 내 옷깃이 무슨 생명줄이라도 되는 것마냥 간절하게 부여잡고 있던 세나의 손이 스르륵 떨어져나갔다.
그 뒤로 내려앉은 건 무겁기 그지없는 침묵이었다.
나조차도 그게 어깨를 짓누르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세나에게는 어떨까 싶어서 얼굴을 덮는데 쓰고 있던 손가락 사이로 슬쩍 확인해봤더니만 세나가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한채 내 앞에 털썩 주저앉아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일단 집에 가서 이야기해."
"그···!"
"아니면 여기서 할까? 응? 정말 그러길 바래?"
세나로 하여금 보란듯이 입술을 꾹 깨물고 있다가 몸을 홱 돌리는 척 했더니 세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솔직히, 나,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서 어떻게하면 좋을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물론, 거짓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야 이미 정해둔 상태였으니까.
허나 그 사실을 곧이 곧대로 밝힐 수는 없는 노릇이었기에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세나를 상대로 일부러 지친 듯한 목소리를 내주었다.
"집에 가는 동안··· 생각 좀 해볼테니까. 집에 가서, 집에 가서 이야기 해."
그리고는 그대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니 뒷쪽에서부터 제법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어떻게 가려고···!"
"그거야 택시를 타든 버스를 타든 내가 알아서 할 일이고. 누나나 잘해."
그리 말하며 계속해서 걸음을 옮기다가 이 정도면 충분히 멀어졌다 싶을 때 그 자리에 우뚝하고 멈춰섰다.
"···괜히 쓸데없는 생각같은 거 하지 말고."
그렇게 세나와 헤어진 뒤,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세나의 휴대폰은 여전히 내가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집으로 돌아와서는?
그대로 내 방이 있는 3층으로 올라가 소파에 털썩 걸터앉았다.
그리고는 세나한테서 압수한 휴대폰을 그 앞에다가 내려놓은 뒤 속으로 열심히 마인드 컨트롤을 시작했다.
'심각한 상황··· 심각한 상황···'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너무 늦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타이밍에 똑똑하고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대체 언제 도착하나 내심 기다리고 있던 상황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바로 답을 하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그렇게 침묵을 지키고 있으니 다시 한 번 문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똑똑ㅡ
안 그래도 조심스럽기 그지없던 것이 더 작고 조심스럽게 변해있었다.
"···들어와."
그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세나에게 방 안으로 들어오는 걸 허락해주었다.
그 말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일까.
나름 작게 말했다고 생각했는데 바로 문이 끼익하는 소리를 내며 열렸다.
그리하여 마침내 다시금 세나를 마주하게된 순간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온 것은 시커멓게 다 죽어가는 얼굴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차를 타고 여기까지 오는 동안 세나가 오만가지 생각을 다 했다는 걸.
그러니까 저렇게 체념한 표정인 거겠지.
"···도망, 안 쳤네?"
그것도 생각해보긴 한 걸까.
어깨를 흠칫하고 떨어대는 걸 보면 적어도 한 번 정도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게 틀림없었다.
"···앉아."
턱짓으로 소파를 가리켰는데 정작 세나가 앉은 곳은 내가 가리킨 곳이 아닌 내 맞은편이었다.
"뭐하는 거야."
내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즉시 무릎부터 꿇어대는 세나의 행동에 무표정한 얼굴을 한채 그리 물었다.
물론, 세나는 답이 없었다.
마치 자신에게는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뭐하는 거냐니까?"
"···미안."
"하···"
고개를 뒤로 젖혔다.
당연히 세나에게서 표정을 숨기기 위함이었다.
그렇게 무릎을 꿇고 앉은 세나를 앞에다가 둔채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지금 내 심정이 어떤지 알아 누나?"
"···"
"아니, 애초에 그게 궁금하기는 해?"
"···미안."
"후···"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쉬다가··· 이를 악문 듯한 음성을 입밖으로 밀어냈다.
"어쩌려고··· 대체 어쩌려고 그랬어?"
"···"
"아니, 내가 진짜로 궁금해서 그래. 평생 안 들킬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랬어?"
쏘아붙일 때마다 세나의 고개가 밑을 향했다.
"고민 중이야."
"···"
"고모나 지나 누나한테도 말해야할지··· 아니, 이걸 말해도 될지 모르겠다."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그냥 흘러들을 수가 없었던 것일까.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세나의 어깨가 격하게 움찔거렸다.
그러더니 세나가 고개를 한층 더 깊게 숙였다.
그 모습이 꼭 그것만큼은 참아달라고 읍소하는 듯 했다.
그런 세나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소리에서 힘을 뺀채로 물었다.
"왜··· 왜 그랬어?"
"···"
역시나 이번에도 세나는 답이 없었다.
그렇겠지.
자신이 그런 짓이나 하면서 흥분하는 변태라는 걸 내게 들키고 싶지 않을테니까.
"응? 왜 그랬냐니까? 입이 있으면 말이라도 좀 해봐."
"···"
"질투나 뭐 그런 것 때문에 그런 건 아닐거 아냐. 아니면 혹시 그만큼 내가 싫었어?"
"아, 아냐···! 그런 건···!"
"그런 게 아니면? 응? 대체 왜 그런 건데."
굳이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거나 그러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이유가 있을 거 아냐 이유가. 뭐라도··· 응?"
오히려 목소리에서 더욱 힘을 뺐다.
그걸 듣는 세나가 내가 배신감에 지쳐가지고 그러는 것처럼 느낄 수 있도록.
그 방식이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무릎 위에 올려져있던 세나의 손이 허옇게 질렸다.
"···혹시 나 말고 다른 사람한테도 똑같은 짓 한 건 아니지?"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얼굴도 똑같은 색으로 변해버렸다.
"···했구나."
그리 말하고는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혹시 누나 미쳤어?"
"···"
"아니 들키기라도 했으면 대체 어떻게 수습하려고 그딴 짓을···"
"···"
"이게 누나만의 문제인 것 같지? 만약에 그게 누나라는 걸 들키기라도 했어봐. 그랬으면 어떻게 됐을 것 같아?"
당연한 말이지만 세나의 방송인생은 그 날로 끝이었을 거다.
거기에ㅡ
"고모 가게에도 영향이 갔겠지. 그리고 지나 누나한테도."
그래, 틀림없이 그랬을 거다.
내심 외면해왔던 부분을 지적당한 탓일까.
안 그래도 힘이 잔뜩 들어가있던 세나의 손이 파르르 경련했다.
"깨달았으면 말이나 해봐. 대체 왜 그랬는데."
"···겠어."
"뭐?"
"모르, 모르겠어."
그리고 그게 세나가 답이랍시고 내놓은 것이었다.
모르겠다라.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지적한 걸 세나라고 해서 모르지 않았던 것일까.
그녀가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더욱 더 깊게 숙였다.
"아니··· 뭐, 계기같은 거라도 있을 거 아냐."
"그냥···"
"그냥?"
"구, 궁금해서···"
"궁금해? 뭐가?"
"악플같은 거 다는 사람들 생각이··· 궁금해서···"
"그래서?"
"하, 한 번 시험삼아서 해봤는데···"
"시험삼아서 해봤으면 그걸로 끝내야지 그걸 왜··· 왜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건데."
하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가 설마설마하는 목소리로 덧붙였다.
"아니면 혹시 뭐 짜릿하기라도 했어? 정체 숨기고 몰래 그런 짓 하니까 두근두근하고 그랬어?"
세나로서는 정곡이라도 찔린 기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일까.
내 말에 반응해 퍼뜩하고 고개를 치켜들었던 세나가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비밀이라도 들킨 것처럼 얼굴을 새빨갛게 물들였다.
"하··· 진짜야? 진짜 그랬다고?"
물론, 내가 그리 말하기 무섭게 다시 고개를 푹 숙여버리긴 했지만.
"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감탄사를 입밖으로 내뱉었다.
물론, 진정한 의미에서의 감탄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차라리 하도 어이가 없어서 할 말을 잃어버리고만 사람의 반응에 가까웠다.
그렇게 어이없다는 반응을 온몸으로 내보이던 것도 잠시, 뒤늦게 어떤 사실을 깨닫기라도 한 것처럼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홱 치켜들었다.
"그러면 혹시 나한테 그럴 때도···"
"···"
"그랬구나. 하···"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그대로 땅속으로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누나 변태야?"
"···"
어색하고도 무거운 침묵이 우리 둘 사이로 내려앉았다.
그걸 만끽하다가ㅡ
"···일단 고모나 지나 누나한테는 비밀로 할게."
어쩔 수 없다는 투로 그리 내뱉었다.
그런 내 목소리에서 무언가 희망같은 거라도 느낀 것일까.
세나의 목이 순간 움찔하고 떨렸다.
마치 고개를 치켜들려다가 억지로 멈추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짓거리 당장 그만둬."
"···"
"왜 대답이 없어? 설마 계속하려고?"
"아, 아니!"
"그럼 그만둘거지?"
"으, 응!"
여부가 있겠냐는 듯 세나가 미친듯이 고개를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다시 고개를 푹 숙이는 게 내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 그러는 듯 했다.
"근데 있잖아 누나."
"···응."
"지금 내 솔직한 심정을 말해줄까?"
"···"
"누나 말, 못 믿겠어."
"···그으."
"하나도 못 믿겠다고."
당연한 말이지만 여기서 세나가 할 말이 있을 리 없었다.
설령 있다고 해도 들어줄 생각따위 없지만.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관리해줄게."
내 말의 의미를 알 수가 없었던 걸까.
세나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모처럼 연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피식하고 웃으며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테이블 옆을 돌아 무릎을 꿇고 앉아있는 세나의 앞에 자리했다.
슬며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그렇게 세나의 귀가 입 바로 앞까지 들이밀어진 순간 그대로 입을 열어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결국 누나가 그런 짓을 하는 것도 다 성욕 때문에 그런 거잖아? 그치?"
"···"
"그러니까 앞으로는 내가 관리해주겠다고."
일부러 느릿하게 내뱉은 속삭임에 세나의 눈동자가 거칠게 흔들렸다.
어디선가 꿀꺽하고 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굉장히 가까운 곳에서 들려온 것 같기도 하고, 엄청나게 먼 곳에서 들려온 것 같기도 한 그 소리가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 거기에 대고 아예 쐐기를 박아주었다.
"ㅡ스스로 주체가 안 되서 쓸데없이 그런 변태짓이나 하게 만드는 누나 성욕 말이야."
"···"
"왜? 설마 싫어?"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세나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그랬다.
그래서ㅡ
"아니지? 좋지?"
지금 이 순간 세나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는 것뿐이었다.
바로 지금처럼.
어딘가 멍해보이는 얼굴.
"···으, 응."
그런 얼굴을 한채 세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갈색의 머리칼이 제 주인의 움직임에 맞추어 위아래로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