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1부
인생을 살다보면 가끔씩 그런 사람들이 있다.
평소에는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나 싶을 정도로 한없이 게으른데 이상한 곳에서 굉장히 빠릿빠릿해지는 사람이 말이다.
'고 병장 그 또라이 새끼가 딱 그랬지···'
그리고 내가 볼 때는 세나도 그런 과인듯 했다.
분명 평소에 하는 짓만 보면 방송 외적인 부분은 나무늘보가 치를 떨 정도로 게으르기 짝이 없는데 어쩜 이렇게 내가 방송 킬 때마다 꾸준하게 찾아와서 나쁜 말 도네를 쏴대는지···
'이것도 나름 방송하고 관련이 있는 거라서 부지런한 건가?'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뭐, 덕분에 필요한 자료들은 전부 손에 넣은 상태였다.
그러니 슬슬 이쯤에서 멈출 필요가 있었다.
악질의 탈을 뒤집어 쓴 세나가 날 향해 성희롱 도네를 날려대는 걸 실시간으로 지켜보는 건 나름대로 꼴리긴 했지만 이 이상 방치하게 되면 역효과만 날테니까.
틀림없이 그럴 거다.
지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전부 웃어넘기고 받아주니까 슬슬 넘지 말아야될 선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고 있는 것이 세나의 최근 근황이었으니까.
그걸 넘어버린다면?
내가 무슨 짓을 해도 자괴감에 빠진 세나가 납득하지 못할 거다.
"그러면 다음 방송 때 뵐게요!"
오전 방송을 끝내자마자 세나를 찾아 내려갈 생각부터 했던 것도 사실은 그래서였다.
'문제는 무슨 핑계를 대냐는 건데···'
어찌어찌 세나가 덫을 밟게 만드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그걸 회수하기 위해선 세나의 컴퓨터나 휴대폰 둘 중 하나에는 접근해야만 했다.
그래야 진짜 빼도박도 못하는 상황을 이끌어낼 수가 있을테니까.
허나 그게 과연 쉬울까?
아무리 생각해봐도 쉽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팍팍 풍겼다.
특히나 컴퓨터 쪽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나도 그랬으니까.
원래 세계에서 남이 내 컴퓨터 앞에 앉으려고 하면 기를 쓰고 막곤 하지 않았던가.
그러니 아마 세나도 그렇지 않을까.
고로 아예 몰래 들여다볼게 아니라면 컴퓨터는 일찌감치 포기하는 편이 나을 듯 했다.
그렇다면 남는 건 휴대폰 뿐인데ㅡ
'이쪽은 잘하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쉽지는 않을 거다.
세나가 아무 의심없이 무지성적으로 휴대폰을 내어주게 만드려면 우선 그런 분위기부터 만들어야 할테니까.
바로 내려가지 않고 이토록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있는 것도 다 그걸 위해서였다.
'흐음···'
뭐가 좋을까.
어떤 핑계를 대야 세나가 아무런 의심도, 방비도 없이 휴대폰을 내어주도록 만들 수 있을까.
그리 고민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브우웅웅웅ㅡ
흡사 말벌떼나 낼 법한 맹렬한 진동소리가 방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참으로 공교로운 타이밍에 울려퍼지기 시작한 그 소리에 흠칫했던 것도 잠시, 저 멀리 책상 구석까지 밀려난 휴대폰을 집어들어 눈앞으로 가져왔다.
그렇게 회수한 휴대폰 안에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번호가 찍혀있었다.
그걸 본 순간 직감했다.
지금 내게 전화를 건 상대의 정체를.
'어쩐 일이래?'
원하는대로 가영과 교복데이트를 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으니 그걸로 미련없이 손을 뗀 거 아니었나?
참으로 오랜만에 받는 연락인지라 휴대폰을 손에 쥔채 어리둥절해하던 것도 잠시, 얼른 받으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처럼 허용 출력 이상의 진동을 흩뿌리는 휴대폰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터치했다.
"네, 여보세요?"
-그··· 오, 오랜만이다?
아니나 다를까 휴대폰을 귀에 가져다 대기 무섭게 스피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다름아닌 여신의 것이었다.
"네, 그런데 오늘은 또 어쩐 일로···"
후원 비스무리한 것까지 해가며 적극적으로 가영과의 교복 데이트를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흥미가 팍 식어버린 것처럼 몇 주째 연락이 없던 양반이 어쩐 일로 이렇게 전화를 했나 싶어 슬쩍 말꼬리를 늘어뜨려보니 돌아온 건 침묵이었다.
-그으··· 나도 잘봤다고 연락이라도 한 통 해주고 싶었는데···
그리고 그게 여신이 침묵 끝에 내놓은 말이었다.
아무튼 그래서?
-하필이면 그 타이밍에 감사가 들어와가지고···
"감사요?"
-엉.
감사라.
문맥상 땡큐라는 의미는 당연히 아닐 것이고.
아마 감독하고 검사한다는 의미의 감사겠지.
"신도 그런 걸 받습니까?"
결국 내가 의문인 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내가 아는 여신은 나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일을 아무렇지도 않게 해내는 양반인데 그런 존재를 상대로 감사라니.
-신이면 뭐 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줄 아냐?
아니었나?
이미 충분히 마음대로 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은데?
날 이곳으로 납치하거나 가영과 교복 데이트를 하는 걸 보고 싶다고 후원한 장본인의 말이다보니 믿어주고 싶어도 믿음이 가질 않더라.
-아무튼 그··· 우리도 나름 규칙이라는 게 있고 법이라는 게 있거든?
"설마 그럼 연락이 없었던 게···"
-뭐어··· 벌 좀 받는다고 연락수단을 압수당했거든.
아무래도 상대가 여신쯤 되는 존재다보니 벌도 틀림없이 엄청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외로 그리 심각한 분위기는 아니었나 보다.
-심각하지 않기는 무슨··· 네가 통신수단 압수당한채 참회동에 한 천 년쯤 갇혀있어 봤어?
"천년이요?"
그러면 나이가 대체ㅡ
-아, 아무튼 그래서 말인데··· 요즘 상점 잘 안 쓰더라?
이야기가 왜 또 그쪽으로 흐르는 걸까.
"네, 뭐···"
일단 여신의 말대로 최근 들어 상점을 이용하지 않은 건 사실이었기에 고분고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왜? 상품이 별로야? 그럴 리는 없을텐데···
"아뇨, 그게 아니라··· 이왕 쓸 거면 돈 좀 모아서 큰 거 하나로 지르려고요."
상점에서 판매하는 물건의 실용성이야 이미 증명된지 오래다.
문제는 가격이었다.
한 번 쓰면 사라지는 것도 하나당 몇십에서 몇 백만 캐쉬까지 하다보니 이왕 돈을 쓸 거라면 아싸리 최대한 모아가지고 일전에 구매한 운동화나 아대처럼 반영구적인 걸 사는 게 훨씬 효율적일 것같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질 않았으니까.
그래서 최대한 모아보려고 마음 속으로 존버를 부르짖고 있던 참이었다고 여신을 상대로 설명하니 '아···'하고 탄식 비스무리한 대답이 돌아왔다.
-하긴 그렇겠네··· 이건··· 용이니까···
"네?"
-아냐, 못 들은 걸로 해.
대체 뭘 못 들은 걸로 하라는 건지.
-못 들은 걸로 하라니까? 이러다가 나 또 참회동 끌려가면 네가 책임질거야?
뭐, 그렇다길래 일단 입을 닫고 있었다.
닫고 있었더니ㅡ
-결국 가격이 문제라는 거네?
사실상 중얼거림에 가까운 말이 돌아왔다.
"뭐, 가격도 가격인데 몇몇 물품은 굳이 그만한 돈을 주고 사야하나 싶을 정도로 쓸모가 없어보이는 것도 몇 개 있긴 하죠."
-흐음··· 무슨 뜻인지 알겠어. 일단 접수.
그 말이 스피커를 통해 귓속으로 흘러들어온 순간이었을 것이다.
따악하고 손가락을 튕기는 소리가 경쾌하면서도 또렷하게 울려퍼졌다.
-그, 상점 한 번 열어봐.
"지금요?"
-엉.
퍽 단호한 목소리로 그리 말하길래 시키는대로 순순히 상점을 불러내봤다. 불러내봤더니ㅡ
"오?"
보자마자 깨닫게 되었다.
뭔가 좀 바뀌었다는 걸.
일단 인터페이스부터가 그랬다.
마지막으로 불러냈을 때만 하더라도 편의성따위 개나 주라는 것처럼 간소하기 짝이 없는 모양새를 하고 있었는데 지금은 뭔가 좀 본격적인 모습을 하고 있었으니까.
개중에서 제일 마음에 드는 건 역시 '검색'기능이 생겼다는 것이었다.
심지어는 음성인식도 되더라.
전까지만 해도 음성인식은 커녕 검색기능조차 없어서 사려고 마음 먹었던 걸 찾으려면 스크롤을 내려가며 하나하나 확인했어야 된다는 점을 떠올리면 그야말로 가슴이 웅장해지는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여신은 잔뜩 웅장해진 가슴에다가 웅장함을 한스푼 더 끼얹었다.
-그리고 이제 할부도 된다.
"할··· 부요?"
-어, 360개월까지는 무이자니까 참고하고.
역시 신이다보니까 시간 개념이 다를 수밖에는 없는 걸까.
3개월 무이자는 들어봤어도 360개월 무이자는 대체···
"그런데 할부 긁어놓고 안 내면 어쩌시려고요?"
-괜찮아. 자동이체거든.
평범하기 짝이 없는 단어가 왠지 오싹하게 들렸다.
하필이면 그 말을 한 대상이 여신이다보니까 만약 할부 긁어놓고 못 내겠다고 배를 짼다면 신의 힘을 동원해서라도 강제추심을 해버리겠다는 의지같은 게 느껴졌으니까.
뭐, 기분 탓일수도 있겠지만.
다만 이 와중에 의문인 점이 하나 있다면ㅡ
"갑자기 너무 잘해주시는 거 아니에요?"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무슨 방치형 게임 즐기듯 가끔가다 연락을 툭툭 던져댈 때는 언제고 갑자기 이토록 적극적인 개입이라니.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그리고 잘해주면 감사해야하는 거 아닌가?
"그야 그렇긴 한데··· 안 그러시던 분이 갑자기 이러니까 그렇죠."
-그러면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을까?
"에이··· 줬다 뺏는 건 좀···"
-아, 뭐!
"그러니까 제 말은··· 저번처럼 저한테 뭔가 바라는 게 있으시냐··· 뭐 그런 뜻이죠."
챙겨줘도 이런 소리를 들어야하냐며 씨근덕거릴 때는 언제고 여신은 갑자기 말이 없었다.
마치 정곡이라도 찔린 것 같은 그 반응에 속으로 허허로이 웃고 있으려니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온 건 짤막하기 그지없는 단어 하나였다.
-상점.
"네?"
-상점 좀··· 많이 쓰라고. 그, 할당량··· 채워야 되니까.
알고보니 여신의 사정은 이러했다.
날 다른 세계로 납치하고, 후원에 물건 퍼주기까지 해버린 사실이 상부에 딱 걸려버려서 그녀가 감당해야할 몫에 그만 빵꾸가 나버렸단다.
그래서 그걸 어떻게든 메꿔야하는데 그 방법 중 하나가 내가 상점을 통해 지불하는 캐쉬라는 것.
"아하··· 그러니까 제가 상점에서 캐쉬를 많이 쓰면 많이 쓸수록 여신님한테 도움이 된다 뭐 그런 뜻이네요?"
-···그렇지.
"흐음···"
-그, 그렇다고 그걸 빌미로 날 협박한다거나 그러면···!
"···네?"
-에···?
"아니 제가 뭣하러 그런 짓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미쳤다고 설마 그런 짓을 하겠는가.
그것도 진짜배기 신을 상대로 말이다.
-아, 아님 말고!
"아무튼 그럼 뭐 할인혜택같은 건 혹시 없을까요?"
-할인···?
"네."
어처구니가 없어하는 느낌이 듬뿍 담긴 목소리가 휴대폰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온지 얼마나 지났을까.
-자.
짤막하게 내뱉어진 말과 함께 허공에서 종이 한 장이 팔랑팔랑대며 떨어져내리기 시작했다.
그것을 잽싸게 낚아채서 확인해보니 즉석에서 휘갈겨 써서 만든 듯한 종이쿠폰 한 장이 살짝 구겨진채 손바닥 안에 갖혀있더라.
50%라는 꽤나 파격적인 수치는 덤이었다.
"그, 여신님? 이건···"
흡사 일곱살짜리 여자애가 부모님의 생일을 맞아하야 고사리같은 손으로 만든 듯한 퀄리티를 자랑하는 쿠폰의 모습에 어처구니하고 있으려니까 전화가 그대로 끊어졌다.
그래서 이 쿠폰 진짜 쓸 수는 있는 걸까.
다시 전화를 건다해도 없는 번호라 나올 게 뻔했기에 여신을 상대로 쿠폰의 진위를 확인하는 건 포기하고 상점창을 불러내봤다.
[쿠폰이 적용되었습니다.]
그러자 간략하기 그지없는 문구와 함께 분명 손 안에 쥐어져있던 것이 빛으로 변해 흩어졌다.
[쿠폰의 효과는 다음에 구매하시는 상품 하나에만 1회 적용됩니다.]
그러더니 그런 메시지가 떠오르더라.
'아니, 이게 무슨···'
강제적용이라니.
내심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어느새 눈은 부지런히 여신이 손수 갱신해준 물품 목록을 훑고 있더라.
이게 바로 몸은 솔직하다는 걸까.
'뭐가 좋으려나···'
할부도 가능하다고 했으니 이왕이면 가격대가 좀 나가는 걸 사는 게 좋을 듯 했다.
그렇다고 너무 비싼 걸 사버리면 감당하기 힘들겠지만.
그걸 기준으로 삼아서 열심히 새로 들어온 물건들 위주로 확인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신체는 쓰면 쓸수록 강해정-3억 캐쉬]
한통도 아니고 달랑 알약 하나만 찍어놓은 사진을 물품 사진이라고 떡하니 걸어둔 게 눈으로 들어온 것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