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1부
"아이구, 언제 왔어요? 왔으면 말을 하지···"
미안함으로 물든 목소리에 반응해 뒤를 돌아보니 왕년에 한가락 하셨을 것 같은 분이 그곳에 서 있었다.
물론, 싸움적인 의미가 아니라 외모적인 의미였다.
이왕 늙을 거라면 저렇게 늙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표본이라 할 수 있는 분이 뒷문을 통해 가게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혹시 아는 얼굴일까 싶어 흘깃하고 가영을 향해 시선을 던져보니 아니나 다를까 살짝 놀란 표정을 하고 있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마 몇십 년째 쭉 이 자리에서만 장사를 해온 뭐 그런 케이스라도 되는 걸까.
"미안합니다. 얼른 손만 닦고 주문 받아줄게요."
"아뇨, 그, 굳이 서두르지 않으셔도···"
인자한 느낌으로 빙그레 웃는 주인 아저씨, 아니 주인 할아버지를 향해 그리 말한 뒤 테이블 밑으로 발을 뻗어 가영의 다리를 쿡 찔렀다.
그제서야 정신이 좀 든 것일까.
'허···'하는 느낌으로 주인 할아버지 쪽을 바라보고 있던 가영이 몸을 흠칫하고 떨며 정신을 차리길래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물었다.
"저 분 옛날에 인기 엄청 많으셨죠?"
"으, 응?"
그러자 가영으로부터 돌아온 건 네가 그걸 어찌 아냐고 묻는 듯한 그런 시선이었다.
역시나 그럴 것 같더라니만.
어쩌면 지금도 인기가 꽤 많은 편일지도 몰랐다.
액면가가 있다보니 예전만큼은 아니겠지만 대신 특이 취향을 좋아하는 여자들한테는 직빵일테니까.
그나저나 이쯤되니 자연스레 궁금해지는게 하나 있다면ㅡ
"그, 혹시 옛날에 좋아하셨다거나 그런 건···"
그래 바로 그것의 여부였다.
멀리 갈 필요도 없이 내 고등학생 시절만 생각해봐도 넘치는 호르몬의 영향으로 연상의 눈나가 조금만 호의를 보여줘도 심장이 콩닥콩닥대며 금세 사랑에 빠지곤 했으니까.
가영이라고 해서 그 혈기왕성한 시절을 아무 일도 없이 그냥 지나쳤을 것 같지는 않아서 그리 물었는데 반응이랍시고 돌아온 게 꽤나 격했다.
"뭐···? 아, 아냐!"
"정말요?"
"···응."
틀림없는 진실이니 믿어달라고 호소하는 듯한 표정에 안심한 척 살짝 한숨을 내쉬다가 바로 변화구를 던졌다.
"그럼 지금은요?"
"뭐···?"
내 질문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걸까.
가영이 그건 또 뭔 소리냐는 느낌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길래 손가락을 이용해 친절하게 알려주었다.
손을 씻는데 열중하고 있는 가게 주인 쪽과 날 번갈아 가리키는 식으로 말이다.
둘 중에 누가 더 좋으냐.
그러한 의미가 노골적으로 담겨있는 내 손짓에 가영의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그으···"
본인의 얼굴이 그런 상태라는 걸 가영도 이미 인지하고 있었던 것일까.
앓는 소리를 낸 가영이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듯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애꿏은 손가락을 꼼찔대기 시작했다.
"유한이, 네가···"
그러더니 목소리를 쥐어짜내다시피 해가며 그리 내뱉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였다.
말을 완성시키기에는 아직 마음의 준비라는게 되지 않았던 것일까.
허나 솔직히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아직 내 마음을 받아들여줄 수는 없지만, 나 말고 다른 놈을 이성으로 볼 생각이 없다는 건 확실하게 전해졌으니까.
"정말이죠?"
"···응."
많이 민망하긴 했는지 가영은 쉬이 고개를 들어올리지 못했다.
어느새 얼굴 뿐만이 아니라 목덜미도 새빨갛게 변해있었고.
그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당장이라도 그녀에게 닿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다.
가영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테이블 위에다가 손을 올려놓았던 건 그래서였다.
민망하고 부끄러운 와중에도 내 몸짓에 담겨있는 뜻을 알아차릴 정신만큼은 남아있었던 것일까.
지나 몰래 빌려입은 교복 치마를 꼬옥하고 움켜쥐고 있던 손 중에 하나를 떼어낸 가영이 그것을 이용해 내 손을 붙잡아왔다.
차마 대놓고 손을 잡기는 좀 그랬는지 검지손가락을 조심스레 감싸쥐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는 참을 수가 없어서 손가락을 꼭 움켜쥔채 우물쭈물대는 가영의 손을 내 손으로 포개듯 감싸쥐었다.
그리고는 만족스레 웃으니 가영이 애꿏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싱크대 앞에 서서 꼼꼼하게 손을 닦고 있던 가게 주인이 우리 곁으로 다가온 건 그 직후였다.
"자, 뭘로 드릴까요?"
그와 함께 던져진 그 질문에 가영의 손을 감싸고 있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다.
당연히 네가 주문하라는 의미였다.
난 가영이 주문한 거라면 정말 아무 거나 상관없어서 그리했던 것인데 가영의 생각은 좀 달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내 의견을 듣지도 않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걸까.
메뉴판이 있는 쪽하고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길래 가영이 내쪽을 돌아보는 타이밍에 맞춰 그녀와 눈을 맞추며 빙그레 웃어보였다.
"선배가 추천하는대로 먹어볼게요."
이왕 추억의 분식집까지 왔으니 메뉴까지 추억에 맞춰줘야 하지 않겠는가.
그래서 그리 말했더니만 그런 내 뜻이 가영에게도 무사히 전달되었는지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가게 벽에 걸린 메뉴판 쪽에 시선을 고정해버린 가영을 대신해 입을 연 건 가게 주인이었다.
"응? 학생들 우리 가게에 와본 적 있어요? 그러고보니까 이쪽 학생은 얼굴이 묘하게 익숙한 것 같기도 한데···"
아까 전부터 가영을 쳐다보며 자꾸 고개를 갸웃거리길래 대체 왜 그러나 했더니만 그래서 그랬던 모양이다.
아무튼 그런 주인의 발언에 메뉴판 쪽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던 가영이 어깨를 움찔하고 떨며 당혹스러워하는 반응을 내비췄다.
물론, 당황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가영이 서하고에 다녔던 기간을 다 합쳐봐야 채 1년도 되지 않을텐데 설마 여태껏 가영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학생 혹시···"
"···네?"
"어머니나 아버지가 서하고 출신이신가?"
그래도 설마 자신의 머릿속에 어렴풋이나마 남아있는 가영과 지금 눈앞에 있는 교복 차림의 가영이 동일인일 거라고는 생각치 못하고 있는 듯 했지만.
'하긴 그게 당연한가···'
아무튼 생각치도 못하게 상황이 이렇게되니 가영의 대처가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다.
과연 가영은 이 난감하기 그지없는 상황을 어떻게 벗어날까.
라는 생각을 하기 무섭게 가영이 결정을 내렸다.
가영의 선택은 선의의 거짓말이었다.
"아, 네···"
"그렇지? 허어, 어쩐지 얼굴이 익숙하더라니···"
"으음···"
"그, 혹시 메뉴 고르기가 힘들면 내가 적당히 골라줘도 될까요? 서하고 학생들이 먹는 방식이 있거든."
"그, 그럼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얼른 해줄테니까 앉아있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 앞 분식집하면 생각나는 초록색 접시가 테이블 위로 하나둘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근처 학생들만의 먹는 방식이 있다길래 솔직히 적당히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음식이 나올 때마다 가영의 얼굴이 그리움에 잠기는 걸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듯 했다.
그나저나 비닐 장갑은 대체 왜 가져다 준 걸까.
내게는 뜬금없게만 느껴지는 그 물건을 손에 든채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으려니 그런 내 모습이 귀엽기라도 했는지 피식 웃은 가영이 자신의 몫으로 나온 것을 손에다가 꼈다.
그리고는 때마침 나온 것을 장갑을 낀 손을 이용해 조물거리기 시작했다.
"이런 식으로 손으로 잘 비벼가지고 주먹밥 만들어 먹는 거야."
"아하···"
이게 바로 셀프 주먹밥인가 뭔가하는 그거구만.
이해했다는 뜻으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가영을 향해 살짝 입을 벌렸다.
설마 이렇게 다짜고짜 먹여달라고 할 줄은 몰랐는지 당혹스러워하던 것도 잠시, 가게 주인이 있는 쪽을 힐끔하고 쳐다본 가영이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한채 그릇 안에 담겨있는 것을 조금 떼어내 동그랗게 뭉쳤다.
그에 맞춰 살짝만 벌리고 있던 입을 좀 더 크게 벌리니 그 사이로 가영이 즉석에서 만든 주먹밥이 쏙 들어왔다.
주먹밥은 맛있었다.
특히나 식감이 일품이었다.
날치알하고 단무지가 동시에 들어가 있어서 씹을 때마다 톡톡 터지면서도 오독오독 씹히는 게 꽤 재밌었으니까.
'그냥 단무지가 아니라 말린 걸 넣은 건가?'
뭐, 그것도 그거지만 가영이 직접 만들어서 먹여주기까지 했다는 게 크게 작용한 듯 했다.
"맛있네요."
"그러니?"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던 것일까.
가영의 얼굴 위로 다행이라고 말하는 듯한 미소가 스물스물 번져나갔다.
뭐, 주먹밥 뿐만 아니라 다른 메뉴도 다 괜찮았다.
처음보는 메뉴도 많았는데 다 먹을만 하더라. 아마 내가 가영과 같은 학교를 다녔다면 매일같이 이곳에 들리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괜찮은 맛이었다.
"자, 그리고 이건 학생들이 보기 좋아서 주는 서비스."
그 말과 함께 삶은 계란이 테이블 위로 등판한 순간 가영의 표정이 확 밝아졌다.
마치 단짝이었던 친구와 정말 오랜만에 만난 듯한 그런 얼굴이라고 해야할까.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서비스랍시고 나온 것들을 국물만 남은 떡볶이 그릇에다가 잽싸게 옮겨담은 가영이 숟가락을 이용해 그것을 무자비하게 으깨기 시작했다.
잘 삶아진 흰자하고 노른자가 빨간 옷으로 갈아입은 모습이 퍽 유혹적이었다.
"자, 한 번 먹어봐."
그것을 내 그릇에다가 적당량 덜어준 가영이 이것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듯 남은 걸 자신의 그릇에다가 옮겨담았다.
그리고는 이렇게 먹는 거라고 시범이라도 보여주듯 숟가락을 이용해 입 안에다가 쏙 집어넣는데···
"으으음···!"
그러면서 몸을 부르르 떨어대는게 내 눈에는 그저 귀여울 따름이었다.
입술 끝에 떡볶이 국물이 살짝 묻어있어서 더 그랬다.
"그리고 이제 마무리로 이걸 딱 들이켜주면ㅡ"
떡볶이의 친구는 역시 칼피스 아니겠는가.
한 잔 가득 따라낸 살구빛 액체를 벌컥벌컥 소리가 나도록 호쾌하게 들이키는 가영의 모습은 정말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그렇게 추억의 콤보를 완성시키고 나서야 본인이 살짝 주책을 떨었다는 걸 깨달았던 것일까.
"읏···"
귀여운 소리를 내면서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길래 지지 않고 더욱 흐뭇한 미소를 지어주었다.
"방금 선배가 보여주신대로 마무리하면 된다 이거죠?"
거 살다보면 사람이 주책도 떨고 그럴 수도 있는 거지 그게 그리도 부끄러웠던 것일까.
어쩔 줄 몰라하는 가영을 상대로 그리 말하고는 방금 그녀가 보여준 걸 그대로 따라해봤다.
'과연···'
요리를 잘하면 맛도 잘 안다더니만 가영은 맛잘알이 맞았다.
가영의 방식대로 마무리를 하니까 배부르게 식사를 하고 디저트까지 깔끔하게 먹은 듯한 느낌이었으니까.
살짝 얼얼하던 혀도 언제 그랬냐는 듯 싹 가라앉았고.
"맛있네요."
"그, 그치?"
그렇게 식사는 마무리 지었건만 어째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기기 싫었다.
그도 그럴 것이 뭔가 좀 아쉬웠으니까.
모처럼 가영의 추억 속 장소까지 왔는데 왔다간 흔적이라도 남겨야하지 않겠는가.
'써도 되려나···'
굳이 매직까지 놓아둔 걸 보면 자유롭게 써도 되는 것 같긴 했지만 혹시 몰라 가영이 잠깐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가게 주인을 향해 물었다.
그랬더니 얼마든지 해도 된다고 흔쾌히 허락해주더라.
"그래주면 오히려 나야 좋죠. 벽에 적어둔 게 생각나서라도 나중에 한 번 더 들리지 않겠어요?"
어떻게 한 자리에서 그토록 오랫동안 장사를 하셨나 싶었는데 역시 장사 좀 하실 줄 아는 분이었다.
가게 주인의 허락도 받아냈겠다 더는 머뭇거릴 필요성을 느끼지 못해서 잽싸게 펜부터 챙겼다.
그리고는 화장실을 향해 떠난 가영이 가게로 돌아오자마자 정 없게 계산부터 하려는 그녀를 만류한 뒤 아까부터 눈여겨 봐두었던 곳을 향해 잡아끌었다.
"유, 유한아···?!"
대뜸 매직을 꺼내든 것도 모자라 그것을 곧장 벽을 향해 돌진시키기까지 하니 가영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힐끔하고 가게 주인 쪽을 한 번 쳐다보더니 황급히 내 손을 잡아채길래 싱긋 웃으며 내 팔을 움켜쥔 가영의 손을 툭툭 두들겼다.
"괜찮아요. 허락해주셨거든요."
"그, 함부로 이러면··· 응?"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가려니까··· 뭔가 좀 아쉽더라구요."
그래서 이렇게라도 다녀간 흔적을 남겨두고 싶었다고 말하며 낙서로 빼곡하게 덮인 다른 곳과는 달리 상대적으로 깨끗한 곳에다가 이름을 적어넣었다.
물론, 내 이름이 아니라 가영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영'자 옆에다가 반쪽짜리 하트까지 그려넣은 다음 들고 있던 펜을 가영에게 넘겼다.
"자, 이제 선배 차례에요."
당연한 말이지만 이미 알고 있었다.
가영이 망설일 수밖에 없으리라는 건.
그녀의 손에다가 펜을 손수 쥐어주기까지 했던 것도 그래서였다.
그렇게 넘겨받은 펜이 뭐라도 되는 것마냥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것도 잠시, 입술을 슬쩍 깨문 가영이 내 얼굴과 방금 내가 그녀의 이름을 적어놓은 부분을 정확히 한 번씩 번갈아가며 쳐다보더니ㅡ
찌익··· 찍···
살짝이지만 떨리는 손을 움직여 나머지 절반을 채우기 시작했다.
내 이름 석자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가영이 멈칫한 건 반쪽짜리 하트를 눈앞에 두었을 때였다.
벽에 닿을 듯 말 듯한 위치까지 뻗어나간 펜 끝이 이름을 적어넣을 때보다 좀 더 격한 떨림을 선보였다.
그래서일까.
하트를 완성시키기 위해 뻗어나가는 선은 삐뚤빼뚤하니 위태로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완성된 것또한 어설프기 그지없었다.
꼭 마치 철없는 어린아이가 손이 가는대로 그려놓은 것처럼 어설프기 그지없는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까맣게 빗금칠이 된 그것은 틀림없는 하트였다.
삐뚜르고 어설플지언정 틀림없는 사랑의 표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