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1부
뭐라고 변명하지?
아니, 이거 변명이 가능하기는 한가?
어지간한 상황이었다면 적당히 둘러대고 넘겼을 것이다.
허나 이건 어지간한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암만 짱구를 굴려봐도 둘러댈만한 말이 떠오르질 않았다.
덕분에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있던 것도 잠시, 일단 옷부터 걸쳤다.
어쩌면 세나는 보지도 못했는데 나 혼자서 그럴지도 모른다고 지레짐작하고 불안해하고 있는 걸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훤히 드러내고 있던 것을 옷 안에다가 감춘 뒤 문을 열고 나갔다.
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어쩌면 2층으로 도망가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세나는 그곳에 서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로 살짝 드러난 귀를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문 열리는 소리에 반응한 것일까.
어깨를 움찔하고 떤 세나가 슬그머니 내쪽을 돌아보았다.
"그.. 미, 미안.. 노, 노크 했어야 됐는데.."
"..아냐."
무슨 죽을 죄라도 지은 것마냥 고개를 푹 숙인 채 더듬더듬 말하는데 거기다 대고 뭐라하기도 좀 그래서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당연히 세나의 반응을 확인하기 위함이었다.
'못 본 건가?'
저렇게 미안해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만 짓고 있는 걸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거기서 계속 그러고 있기도 뭐해서 슬그머니 옆으로 비켜서며 세나를 향해 손짓했다.
"그.. 일단 들어와."
"어, 어?!"
"나한테 뭐 할 말 있어서 그렇게 급하게 뛰어온 거 아니었어?"
"그, 그렇긴 한데.."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는 세나를 향해 보란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여기서 계속 이러는 것도 좀 그렇잖아."
그리 말하며 몸을 돌리는 척 하니 마지막 순간에 세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 와중에 내 눈길을 사로잡은 건 어느새 세나의 얼굴 위를 차지하고 있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었다.
방금 그 표정을 뭐라고 표현하면 좋을까.
마치 '나만 이렇게 신경이 쓰이는 건가?'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과 '얜 정말 날 여자라고 생각 안 하는 구나..'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 딱 반씩 섞인 듯한 표정이었다.
그런 표정을 한채 날 따라 방 안으로 들어온 세나를 향해 말했다.
"문은 닫고."
"어, 어.."
별다른 뜻없이 문만 닫으라고 했을 뿐인데 왜 저렇게 몸을 묘하게 움찔대는 걸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 세나의 몸짓은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문을 향해 뻗어나가는 손의 움직임마저도 그러했다.
끼이이익-
기분 탓인지는 몰라도 오늘따라 문 닫히는 소리가 유독 크고 뚜렷했다.
비교적 멀리 떨어져있는 나조차도 그리 느꼈을 정도인데 그것을 직접 닫은 세나에게는 어땠겠는가.
아니나 다를까 문이 완전히 닫히면서 난 타악하는 소리가 방안으로 울려퍼지기 무섭게 세나가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세나가 내쪽으로 돌아서는 타이밍에 맞춰서 침대 끄트머리에 털썩 걸터앉았다.
동시에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이용해 머리에 남은 물기를 터는 척 하니 그런 내 모습을 확인한 세나가 몸을 흠칫했다.
그 반응 보고 확신했다.
세나가 내 몸에 남은 흔적을 보지 못했다는 것을.
엉거주춤하게 서 있는 세나를 향해 마음 편히 질문을 던질 수 있었던 것은 그 덕분이었다.
"그래서 할 말이 뭔데?"
"어, 으, 응?"
"아까 나한테 그랬잖아. 할 말 있어서 올라온 거라고."
"아, 음.."
저렇게 우물쭈물하는 걸 보면 쉽게 꺼낼 수 있는 말은 아닌가 보다.
그래서 일단 앉으라는 뜻으로 턱짓으로 그녀의 뒷편에 자리하고 있는 소파를 가리키니 세나가 소파대신 책상에 딸린 의자를 끌어와 그 위에 앉았다.
"혹시 뭐 무슨 일이라도 생겼어?"
"응? 아,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즉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걸 보니 거짓말같지는 않았다.
문제가 생긴 것도 아니라면 대체 뭘까.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후우하고 슬쩍 한숨을 내쉰 세나가 '실은..'이라는 말과 함께 설명을 시작했다.
언제 말을 더듬거렸었냐는 듯 중간에 끊기는 일 없이 조곤조곤하게 이어지는 세나의 설명을 귀 기울여 경청했다.
그리고 그녀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으음..'하고 고민하는 척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로서는 세나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래, 하지 뭐."
"괘, 괜찮겠어?"
"뭐가?"
"아니.. 그.."
다시 한 번 우물쭈물하던 것도 잠시, 세나가 살짝 표정을 찡그린채 말을 이었다.
지금은 괜찮아도 그렇게 자주 얼굴을 내비치게 된다면 이유 없이 욕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고.
세상에는 누군가를 아무 이유없이 증오하는 사람이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많다고.
그러니까 그 점을 명심하고 다시 한 번 잘 생각해보라는 투로 내뱉어진 세나의 말에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였다.
"괜찮아. 신경 안 써."
그리 말한 순간 세나의 얼굴 위로 떠오른 건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억지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한 걸까.
딱 보니까 그런 것 같아서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피식하고 웃었다.
그리고는 세나와 똑바로 시선을 맞춘 채 입을 열었다.
"왜? 거짓말하는 것 같아?"
이 정도까지 했으니 이제는 믿어줄 거라 생각했는데 세나의 입술을 뚫고 튀어나온 건 예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이었다.
"..너 요즘 이상해."
살짝 찌푸려진 눈썹과 함께 튀어나온 그 말에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짤막하기 그지없는 한 마디였지만 그렇기에 그 안에 담겨있는 의심이라는 감정이 뚜렷하게 느껴졌으니까.
그랬다.
지금 이 순간 세나는 날 '의심'하고 있었다.
그게 무엇에 대한 의심인지는 아직 확실치 않았지만.. 그걸 그냥 방치해둬선 안 된다는 것 정도는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퉁명스러운 목소리를 냈던 것도 그래서였다.
"뭐가."
"..."
내 말에 세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그냥 이제 남들이 뭐라고 하든 신경 안 쓰기로 했을 뿐이야."
"왜?"
"문득 생각해보니까 억울하더라고. 사실 따지고보면 그동안 내가 잘못한 건 하나도 없잖아?"
그간 지나나 가영을 통해 주워들은 것들을 기반으로 만들어낸 걸 입밖으로 툭 내뱉으니 다른 건 몰라도 그 말만큼은 반박할 수 없었던 것일까.
세나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내가 왜 이렇게까지 남 눈치를 보며 살아야 되나 싶더라."
한숨이라도 쉬는 느낌으로 툭 내뱉은 말에 세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 세나의 눈치를 살피는 척 하며 그녀를 향해 물었다.
"..이상한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던져진 내 질문에 세나가 고개를 붕붕 저었다.
그 모습을 확인하고는 안도한 척 옅은 미소를 얼굴 위로 띄워올리니 그런 내 얼굴을 힐끔거리더니 세나가 이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 그러면 하는 걸로 한다?"
"응."
"아, 그리고 그 출연료는ㅡ"
"잠깐만."
세나의 말을 가로막았다.
그리고는 그녀로 하여금 보란듯이 살짝 인상을 써보였다.
"가족끼리 출연료는 무슨 출연료야."
그러면 틀림없이 저번처럼 깨갱하고 물러날 거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리 세나는 제법 단호하게 나왔다.
"가족이니까 더 확실하게 해야 되는 거야."
"아니, 진짜 필요 없는데.."
물론 거짓말이다.
캐쉬도 통장 잔고도 얼마 없어서 사고 싶은 게 있어도 사질 못하는 처지니까.
"잔말말고 줄 때 받아. 아니면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사달라고 하던가."
돈이 부담스럽다면 물건도 가능하다.
"아, 그러면 혹시.."
"응? 뭐 필요한 거 있냐?"
"..아냐."
"뭔데. 비싸도 상관없으니까 일단 말해봐."
"아니라니까."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것도 잠시, 누가봐도 의도적인 행동임을 알 수 있도록 노골적으로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컨텐츠 이름이 뭐라고?"
"노, 노예 12일.."
"노예 12일? 노예 12년 패러디한거야?"
"그, 그런가 보지.."
"뭐야, 누나가 지은 거 아니었어?"
"미, 미쳤냐?!"
저토록 펄쩍 뛰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같이 일하는 편집자 중 한 명이 밀어붙인 건가 보다.
하긴, 은근히 자존심이 센 게 세나니까.
지나 앞에만 서면 쭈구리가 되서 그렇지 기본적으로 그랬다.
"그러면 아까 누나가 설명했던대로 막 누나 부려먹고 그러면 되는 거야?"
"그, 그렇긴 한데.."
"흐음.."
그게 정말 재밌을까?
솔직히 좀 의문이긴 했지만 나보다 브이튜브 돌아가는 생리를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낸 의견이라니 뭐.. 그런갑다 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해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척을 했다.
"음.. 뭐 시키지."
"이, 이상한 거 시키면 뒤진다.."
"어허, 노예가 어딜!"
"지금 촬영중 아니거든?"
그러니까 적당히 까부라고 으름장이라도 놓는 것처럼 앙증맞게 말아쥔 손을 홱 치켜드는 세나의 행동에 일부러 과장된 몸짓을 해보였다.
"와, 노예가 감히 주인을 패려고 하네."
"아니, 내가 언제 패려고 했다고.."
"그러면 그 손은 뭔데?"
턱짓으로 홱 올라가있는 세나의 손을 가리키니 그녀가 움찔하며 손을 밑으로 내렸다.
"..그래서 뭐 시킬 건데."
"음, 글쎄.."
아직 못 정했다는 뜻으로 말끝을 살짝 흐리다가 이내 좋은 생각이라도 난 것처럼 세나를 향해 입꼬리를 비뚜름하게 말아올렸다.
"무, 뭘 봐."
"안 쳐다봤는데?"
"방금 쳐다봤잖아."
"그랬나? 그럼 그랬나 보지 뭐."
그리 말하고는 세나로 하여금 보란듯이 싱글벙글 웃어보였다.
뭔가 꿍꿍이 속이라도 있는 것 같은 내 표정이 상당히 신경쓰였던 걸까.
샐쭉한 표정을 한채 날 찌릿하고 노려보던 세나가 다시 한 번 물어왔다.
"그래서 뭐 시킬 거냐니까?"
"알아서 뭐하려고."
"아니, 뭐 시킬지 알고 있어야 미리 준비도 하고 그럴 거 아냐."
촬영 준비를 핑계로 미리 대비를 해보시겠다?
어딜 어림도 없지.
촬영 핑계를 대면 알려줄거라 생각한 모양인데 그런 얄팍하기 그지없는 수법에 넘어가줄 생각따위 추호도 없었다.
"그냥 촬영준비나 잘 해놔. 따로 준비할 필요 없는 걸로 시킬테니까."
"아니, 그러니까 그게 대체 뭔ㅡ"
답답해 죽겠다는 투로 이어지던 세나의 말은 채 끝을 맺지 못했다.
침대에서 슬그머니 몸을 일으킨 내가 그녀의 귀에 대고 속삭인 한 마디 때문이었다.
"미리 알고 있으면 재미가 없잖아."
그 순간 세나가 몸을 흠칫하고 떨었던 건 해석하기에 따라 의미심장하게 들리기 충분한 내용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순식간에 가까워진 거리 때문이었을까.
둘 중에 어느 쪽이 진실인지는 모르겠지만 할 말은 전부 끝났기에 살짝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세나를 의자에서 일으켜 그대로 방 밖으로 쫓아냈다.
"야, 자, 잠.."
그렇게 세나의 몸을 온몸을 이용해 꾹꾹 떠밀어 밖으로 쫓아낸 뒤 그대로 문을 걸어잠궜다.
찰카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는지 세나가 당장 열라며 문을 쿵쿵 두들겨댔지만 열어주는 대신 키득키득 웃었다.
그리고는 문 너머에 서 있는 그녀를 향해 말했다.
"아, 맞다. 오늘 데리러 올 때 알지?"
"데리러 올 때 뭐."
"옷 말이야. 옷."
설마 직접 골라주기까지 했는데 또 후드티나 입고 올 거냐는 의미가 담겨있는 내 말에 세나가 그대로 침묵했다.
"기대해도 되는 거지?"
그 말만으로도 충분했다.
쫓겨나기까지 했음에도 문 앞을 떠나지 않고 당장 문을 열라며 난동을 피워대던 이를 그 앞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데에는 말이다.
부끄럽기라도 했던 것일까.
"내, 내가 뭘 입든 니가 뭔 상관인데."
세나가 당황했을 때 주로 내곤 했던 퉁명스러운 목소리가 문 너머에서부터 들려오더니 이내 쿵쿵하고 누군가 계단을 내려가는 소리가 그 뒤로 따라붙었다.
그리고 퉁명스레 말한 것과는 다르게 세나는 그런 내 기대에 부응했다.
운동을 끝마치고서 체육관을 빠져나온 순간, 맨날 입고 다니던 후드티에 트레이닝복 대신 저번에 세희의 가게에서 구매한 것들을 몸에 걸치고 있는 세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직은 날씨가 좀 쌀쌀한 편이다보니 치마를 입기에는 좀 부담스러웠던 것일까.
치마가 아니라 바지인게 살짝 아쉽기는 했지만, 그래도 후줄근하기 그지없었던 트레이닝복 바지에 비하면 선녀였다.
그리고 하면 되는 타입답게 제대로 옷을 갖춰입은 세나의 모습은 평소보다 훨씬 예뻤다.
덕분에 그녀의 모습이 시야 속으로 파고들어온 순간 심장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근두근하고 호들갑을 떨어대기 시작했다.
대미는 뭐니뭐니해도 코트 안에다가 받쳐입은 몸에 쫙 달라붙는 스타일의 베이지 색 니트였다.
그것이 세나의 몸에 찰싹 달라붙은 채 잘록한 허리와 그에 대비되는 풍만한 가슴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는데..
"오올.."
그 라인이 너무나도 아름다워서 감탄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었다.
난 어디까지나 그래서 감탄했던 것인데 세나에게는 놀리는 것처럼 느껴졌던 모양이다.
"시끄럽고 빨리 걷기나 해."
그리 말하며 몸을 팩 돌린 세나가 길가에 주차해놓은 자신의 차를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아 왜. 좀만 더 보여주지."
"됐어. 또 놀리기만 할 거면서."
"놀리긴 누가 놀렸다고 그래."
"바, 방금.."
"방금? 그거야 예쁘니까 감탄한 거지."
목소리에서 웃음기를 쫙 뺀 상태로 말을 하니 내게 따라잡힐 생각따위는 없다는 듯 세 발자국 정도 앞서 걸어가던 세나가 걸음을 옮기다말고 잠시 멈칫했다.
"그것 봐. 잘 입고 다니니까 얼마나 예뻐."
"..시끄럽고 집에 가게 얼른 타기나 해."
"네엡."
그렇게 묘하게 기분이 좋아보이는 세나의 차를 얻어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운전하는 동안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세나의 입이 열린 것도 바로 그때였다.
"그래서 대체 뭘 시킬 건데?"
"아, 그거?"
마치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던져진 그 질문에 싱긋하고 웃었다.
"안마."
"뭐?"
"지나 누나가 너무 빡세게 굴려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운동 끝날 때마다 삭신이 쑤시더라고."
그러니까 노예답게 안마나 좀 해봐라.
히죽히죽 웃으며 그리 말하고는 먼저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여전히 현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세나 쪽을 돌아보며ㅡ
"그럼 나 씻고 온다?"
툭 내뱉은 뒤 그대로 내 방으로 향했다.
뒤에서 그런 날 바라보고 있을 세나의 표정을 상상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