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화 〉1부
가영이 유한이 보낸 야한 움짤을 트리거 삼아 되살아나기 시작한 기억들에 시달리고 있을 때 세나는 가영과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시달리고 있었다.
전부 그녀와 함께 일하는 편집자들 때문이었다.
"사, 장님. 사장, 님."
"내가 그딴 식으로 부르지 말랬지."
"네엡, 아무튼 그래서 어제 그건 어떻게 됐습니까!?"
"됐습니까!?"
나름대로 길게 이어진 회의를 슬슬 끝내려고 하니 그 기미를 느끼기라도 했는지 브이튜브에 올라가는 영상들 중에서 일상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유아가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던져왔다.
그런 유아보다도 더 얄밉게 느껴지는 건 게임 파트를 담당하고 있는 채희였다.
구박하는 시아버지보다 옆에서 눈치주는 도련님이 더 밉다고 유아가 말을 꺼내기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한 마디를 더 얹는 게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었다.
'이럴까봐 빨리 끝내려고 했던 건데..'
표정을 살짝 찌푸리면서 세나는 어제 둘을 실제로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보나마나 옷장에 처박아둘게 뻔하다는 언니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 그래도 가끔씩은 실제로 만나서 회의를 하는 게 좋지 않겠냐는 핑계까지 대가며 없던 스케쥴을 만들어낸 대가는 꽤 혹독했다.
약속 장소에 도착하기 무섭게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던 둘에게 잔뜩 시달려야만 했으니까.
무슨 피피티까지 만들어와서 정규컨텐츠니 뭐니 하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유한을 정기적으로 방송에 출연시켜야 한다고 아주 그냥 대놓고 시위를 해대는데 그 성화에 못 이겨 그만 약속 하나를 덜컥 해버리고 말았다.
계획대로라고 외치는 듯한 표정으로 히죽히죽 웃는 둘을 보며 뒤늦게 아차하긴 했지만 이미 내뱉은 말을 다시 주워담을 수도 없는 상황.
뒤늦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다가 일단 물어보기는 해보겠다는 말로 둘러대기는 했지만 문제는 그것조차도 하질 못했다는 점이었다.
기대라는 감정이 고봉밥마냥 꾹꾹 눌러담겨 있는 목소리로 던져진 유아의 질문에 답을 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것도 다 그래서였다.
"..아직 안 물어보셨구나?"
그리고 세나와 쭉 같이 일해온 유아는 그런 세나의 침묵 속에 담긴 뜻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흐음.. 이거 참 섭섭하네요."
"..."
"저는 어디까지나 우리 세튜브의 성장을 위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충언을 했던 건데.."
"..."
"알겠다고 말씀하신지 무려 24시간이나 됐는데도 아직 물어보지조차 않으셨다는 건 그런 제 충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셨ㅡ"
"아, 알겠어. 물어보면 될 거 아냐. 물어보면."
일단 말은 그리하긴 했지만 솔직히 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었다.
어제 괜히 망설였던 게 아니니까.
'하자고 하면 할 것 같기는 한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분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간 보여주던 소극적이기 그지없는 태도를 한꺼풀 벗어던진 유한의 모습을 생각하면 아마도 그럴 가능성이 크긴 했다.
유한의 성격상 이제와서 갑자기 태도를 싹 바꿔서 거부하거나 그럴 것 같지는 않았으니까.
그럼에도 선뜻 말을 꺼내지 못했던 것은 혹시라도 거절하면 어쩌나하는 자그마한 불안함과ㅡ
"씨이이.."
유한을 너무 자기 좋을대로 이용하고 있는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문득 들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유한이 출연료를 챙겨달라고 했거나 방송에 출연하는 대신 뭘 사달라고 했다면 그 점이 이토록 신경쓰이진 않았을 것이다.
헌데 유한은 그러질 않았다.
뭔가 대가를 요구하기는 커녕 오히려 자기 용돈까지 털어가며 가지고 싶었지만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선뜻 손을 뻗지 못했던 걸 사서 선물해주기까지 했다.
그래서 더 그 점이 신경쓰였다.
'그냥 억지로라도 쥐어줘야 하나..'
오죽하면 그런 생각마저 들 정도로.
그래서 선뜻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인데 몇 안 되는 부하 직원이라는 년은 그런 자신의 속도 모르고 저렇게 독촉이나 해대고 있으니ㅡ
"에휴.."
답답함에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러다보니 문득 화가 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노예 12일이라니.
컨텐츠 명이 뭐 그따구란 말인가.
그래서 따졌는데ㅡ
"사장님."
"..뭐."
"지금 당장 인터넷 켜서 세튜브 접속해보세요."
반박이랍시고 돌아온 목소리가 제법 단호했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정신 차리고 보니 어느새 모니터 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채널의 모습이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키셨어요?"
"..켰는데 뭐."
"그러면 어제 올라간 영상 보이시죠? 조회수 좀 확인해보시겠어요?"
그에 얼마나 나왔길래 저러나 싶어 제목 옆에 찍힌 숫자를 확인해보니 저번에 이어 올라간지 얼마 안 된 영상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높은 조회수가 그곳에 떡하니 자리하고 있었다.
"뭐.. 잘나오긴 했네."
이 정도면 잘 나온 수준이 아니라 엄청나게 잘 나온 수준이었지만 왠지 모르게 순순히 인정하기가 싫었다.
"사장님."
"..뭐."
"사장님께서 늘 말씀하셨죠. 인방은 흐름이라고."
그렇게 말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ㅡ
"물이 이렇게 미친듯이 들어오고 있는데 노 저어야겠어요? 안 저어야겠어요?"
"..안 그래도 회의 끝난 다음에 물어볼 생각이었어."
"역시 믿고 있었습니다."
"제엔장 믿고 있었다구!"
그렇게 아무런 소득도 없이 결국 회의가 끝나버렸지만 세나는 두 편집자들에게 했던 말과는 다르게 회의가 끝났음에도 컴퓨터 앞을 떠나지 못했다.
유한에게 말을 꺼내기 난감한 것도 난감한 것이었지만, 문득 영상에 달린 댓글들이 궁금해졌기 때문이었다.
해서 세나는 복잡하기 그지없는 머릿속이나 정리할겸 마우스 휠을 드르륵내려 하루동안 달린 댓글들을 하나씩 확인하기 시작했다.
[OMG he's so lovely❤]
ㄴ러블리는 씨벌 너 불릿맞고 싶냐
ㄴ아니 왜 저번보다 코쟁이 년들이 더 늘어난 것 같누 ㅋㅋ
ㄴwhat?
ㄴ이거나 드셔 ㅗ
ㄴfuck you
[아이템도 띄워주고 입을 옷도 골라주는 주인님이 있다?]
ㄴ이왜진?
ㄴ아 ㅋㅋ 나도 노예 잘할 수 있는데
ㄴㄹㅇ 아이템 안 띄워줘도 되니까 나도 노예시켜조..
ㄴ헤으응.. 난 옷같은 것도 필요없서..
[아니 근데 이게 말이 됨?]
ㄴ당연히 말이 되죠~
ㄴ근데 솔직히 말 안 되긴 함 ㅋㅋㅋ
ㄴ저 운으로 차라리 복권을 샀다면 어땠을까..
ㄴ나중에 둘이 즉석복권 사서 긁는 거 방송해도 웃길 듯 ㅋㅋ
[ㅅㅂ 이제 게임도 사람 와꾸가지고 차별하나]
ㄴ선생님께서는 왜 이렇게 화가 나 계신 거죠?
ㄴ근데 솔직히 저 정도면 차별할만 하제 ㅋㅋ
ㄴ킹파고 님도 보는 눈은 있으시다 이거야~
[아니 근데 세나랑 동생 분이랑 케미 뭔데 ㅋㅋ]
ㄴ둘이 천상 남매라서 투닥거리는거 보고만 있어도 개웃김 ㅋㅋ
ㄴ나도 동생 있었으면 좋겠다 ㅠ
ㄴ22
[죄송한데 혹시 동생 분이랑 합방 가능할까요. 제발요 불쌍한 년 하나 살리신다 치고..]
ㄴ아니 여기서 이러지 말고 방송이나 켜!!
ㄴ으딜 치트키를 쓸려고! 으림도 없지
ㄴ얘 큡 또 망함?
ㄴㅇㅇ 진짜 조지게 안 뜨더라 ㅋㅋ
[I want to know his outstagram address XD]
ㄴ아 ㅋㅋ 그런 거 없다고 ㅋㅋ
ㄴ알면 나도 좀 알려주셈;;
다행히도 저번처럼 한국인대 외국인으로 나뉘어서 치고 박고 싸우는 분위기는 일단 아니었다.
아직 그런 기미가 좀 남아있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몇몇 악질들만 그러는 것일 뿐 이 정도면 다음 영상이 올라갈 때쯤이면 알아서 사그라들어 있겠지.
살짝 의외였던 건 댓글들 사이사이에 몇 번 들어본 적 있는 이름들이 끼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유한과 혹시 합방이 가능하겠냐고 묻고 있었고.
물론, 못본 척 하고 넘어갔다.
자신도 그거 때문에 안절부절 못 하고 있는 상황인데 남을 도와줄 의리따위 없었으니까.
그렇게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확인하던 것도 잠시, 세나의 표정이 살짝 찌푸려졌다.
[ㅆㅂ 내 동생 놈은 나만보면 인상쓰기 바쁜데 개부럽누;;]
ㄴㄹㅇ 내 동생이 저랬으면 맨날 업고 다녔다
ㄴ아니 ㅋㅋ 솔직히 저런 남동생이 세상에 어딨냐고
ㄴ솔직히 내가 세나였으면 동생이고 뭐고 잘 때마다 개따먹었다 ㅇㅈ?
ㄴ?
ㄴ빠꾸없네 ㅋㅋㅋ 미친 년인가
ㄴ저거 누가 찍어서 채널 주인장한테 보내셈 ㄱㄱ
ㄴ엔티티님..! 한 년 더 올라갑니다..!
'이런 게 왜 이렇게 추천을 많이 받았나 했더니만..'
답글들 사이로 숨으면 못 보고 지나칠 거라고 생각한 걸까.
법의 처벌따윈 무섭지 않다는 듯 자신과 유한을 한데 묶어 되도 않는 망상을 지껄여대고 있는 댓글의 모습에 세나가 이를 부득하고 갈며 그 댓글을 캡쳐한뒤 그것을 단 이의 아이디를 복사해 따로 저장했다.
그것도 잠시 세나가 잔뜩 찡그리고 있던 표정을 풀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녀가 걱정했던 게 바로 이런 것이었으니까.
방해되니까 방송 중에 들어오지 말라는 엄포까지 내려가며 유한의 얼굴이 방송에 나갈 일 자체가 없도록 했던 것도 사실 그래서였다.
내심 걱정했던 것이 현실이 되어 다가온 탓일까.
안 그래도 복잡했던 머릿속이 더욱 헝클어지는 느낌이었다.
'그래도 말한 게 있으니까 물어보긴 해야하는데..'
방송인이라면 으레 가지고 있을 수밖에 없는 방송에 대한 욕심.
그리고 유한이 자신으로 인해 어떤 식으로든 피해를 입을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 두 가지 것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며 번민하던 것도 잠시, 머리를 벅벅 긁어 헝클어뜨린 세나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생각해도 고민하면 고민할수록 답이 없을 것 같아 차라리 그냥 빨리 물어보고 깔끔하게 치워버리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
대신 이번에는 전과는 다르게 정말 세세하게 설명할 거다.
만약 수락하게 되면 후에 어떤 일이 벌어지게 될지 자그마한 가능성조차도 빼놓지 않고 전부 설명할 거다.
그리 되면 유한이 전과는 다르게 난색을 표하며 고개를 가로저을지도 모르지만..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거지.'
섭섭함은 느낄지언정 그런 유한의 선택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허나 반대로 그 모든 설명을 들었음에도 유한이 이번에도 출연을 승낙한다면?
그때는 어떤 식으로든 그에 대한 대가를 줄 생각이다. 여태껏 건네주지 못했던 것들까지 전부 합쳐서.
유한이라면 저번에도 그러했듯 가족끼리 무슨 출연료냐며 거절할 가능성이 크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받지 않는다면 억지로라도 쥐어주면 되니까.
'등록금같은 거라도 몰래 내주면..'
되지 않을까.
즉흥적으로 떠올린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럭저럭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며 세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누구 말처럼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이왕 결심이 선 김에 지금 물어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으니까.
여기서 더 끌어봐야 또 하릴없이 고민이나 하고 앉아있을게 뻔하니 말이다.
틀림없이 그럴 거라며 내심 고개를 끄덕거린 세나는 스튜디오로 사용하는 방을 빠져나와 3층으로 이어지는 계단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는 몇 개 안 되는 계단을 올라 문 앞에 도착해 굳게 닫혀있는 그것을 벌컥 열어젖혔다.
그렇게 문을 몸으로 떠밀다시피 해가며 유한의 방으로 들어선 순간 그런 세나의 눈으로 들어온 것은ㅡ
"누, 누나?"
막 방 안으로 들어선 자신을 발견하고는 잔뜩 당황한 표정을 한채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자신의 몸을 손으로 황급히 가리는 유한의 모습이었다.
허나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없듯 유한의 다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은 손에 의해 가려지기에는 그 크기가 너무 거대했다.
덕분에 유한의 다리 사이에 매달려있던 것이 당황해서 몸을 움찔대기 시작한 그의 움직임에 맞추어 요리조리 흔들렸다.
꼭 새하얀 가죽을 가진 구렁이가 꿈틀대는 듯한 그 모습에 반사적으로 그곳에 시선을 두고 있던 세나의 얼굴이 그대로 폭발했다.
"미, 미안!"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세나가 황급히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간 그때 그런 그녀만큼이나 당황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유한이었다.
'어우 시발 깜짝이야..'
쿵하고 문닫히는 소리가 울려퍼지기 무섭게 나는 당황으로 벌렁거리는 가슴을 부여잡은채 헛웃음을 흘렸다.
그도 그럴 것이 연기같은게 아니라 진짜로 몰랐으니까.
세나가 방으로 들이닥치리라는 사실을 말이다.
즉, 방금 그건 어디까지나 사고였다.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벌어진 사고 말이다.
그렇기에 세나가 혹시 내게서 뭔가를 보지는 않았을지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
'못 봤겠지?'
라고 생각하고 넘어가고 싶어도 내 몸에서, 정확히는 다리 사이에 매달려있는 것에서 눈을 떼지 못하던 세나의 모습이 떠올라 불안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시발 수성이라며..!'
수성이라고 떡하니 적혀있어서 믿고 썼건만 설마 그 누가 알았겠는가.
손은 물론 거칠거칠한 타월로 빡빡 문지르기까지 했음에도 완전히 지워지지 않을 정도로 독한 녀석이었다는 걸.
물론, 흔적이라고 해봐야 무슨 글씨인지조차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흐릿한 정도라 가까이서 보지 않으면 티조차 안 나는 수준이긴 했다.
문제는 바로 조금 전까지 세나가 서 있었던 곳과 지금 내가 서 있는 곳 사이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아니, 이 정도면 충분히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하물며 세나는 다른 곳도 아닌 내 그곳을 뚫어져라 쳐다보지 않았던가.
뭐, 세나 입장에서는 뭐 저렇게 큰게 달려있나 싶어서 자연스레 그쪽으로 눈이 간 것일테지만..
하필이면 제일 흔적이 또렷하게 남은 곳이 바로 그곳인지라 더 걱정이 컸다.
아랫배야 거칠거칠한 타월로 빡빡 밀 수 있었지만 차마 소중하기 그지없는 물건에까지 그리 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 탓에 지금 내 물건 위에는 걸과 레라는 글자가 다른 것에 비해 한결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만약 세나가 그 두 글자를 봤다면?
그래서 그토록 뚫어져라 쳐다본 것이었다면?
'좆됐네 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