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1부
그런 식으로 내 앞에서 증발해버렸던 지나지만 도피 기간 자체는 그리 길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날 계속 혼자 내버려둘 수는 없다고 생각한 건지 쭈뼛쭈뼛대면서도 내 앞으로 돌아왔으니까.
내 지적을 받은 순간 느꼈던 당황스러움과 당혹감, 그리고 민망함이 아직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것일까.
무슨 면접이라도 보러온 사람마냥 쭈뼛대는 지나의 얼굴은 여전히 발그레하니 달아올라 있었다.
그 모습이 평소의 지나에게서는 볼 수가 없었던 것이라 참으로 신선하게 느껴졌다.
허나 언제까지고 그러고 있도록 내버려두는 것도 못할 짓이었기에 그때부터 조심스레 지나를 다독이기 시작했다.
운동하다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것 아니겠느냐.
난 하나도 신경 안 쓰니까 너도 신경쓰지 마라.
대충 그런 식으로 계속 토닥토닥 해준 게 좀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지나가 조금씩이나마 기운을 되찾기 시작했고, 2시간으로 잡아놓은 운동시간이 끝나갈 쯔음에는 거의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을 회복해 있었다.
물론,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완전히 평소같지는 않았다.
내게 운동자세같은 걸 시범을 보일 때마다 몸을 흠칫흠칫대는 것이 여전히 아까 있었던 사건을 신경쓰고 있다는 게 고스란히 보였으니까.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으, 응."
"일 열심히 해. 누나."
그 영향인지 몰라도 헤어짐의 시간이 저번과는 다르게 살짝 어색했다.
그렇게 고개를 끄덕끄덕해보이는 지나를 일별한채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그리고는 출입구 옆에 서서 도로변을 눈으로 쭉 훑기 시작했다.
'아직 안 왔나?'
으레 보여야할 것이 보이질 않아서 어쩌면 그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꼬옥하고 옷깃을 잡아당기는 손길이 느껴졌다.
그래서 뒤를 돌아보니 눈으로 들어온 건 수상하기 그지없는 차림새를 하고 있는 여성의 모습이었다.
푹 눌러쓴 후드티에, 까맣게 칠해져 안쪽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커다란 선글라스, 그리고 편의점같은데서 급하게 구매한 것 같은 흰 마스크까지.
'스토커?'
그래, 딱 그 단어가 생각나게 하는 차림새였다.
그럼에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던 건 그녀의 정체를 그걸로 확정지으려던 순간 후드 사이로 사르륵 흘러내린 익숙한 색의 머리칼 때문이었고.
"..세나 누나?"
"으, 응?"
그랬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몰골을 하고 있는 여성의 정체는 다름아닌 세나였다.
그래서 얘는 대체 왜 이런 몰골을 하고 있는 걸까.
"..꼴이 왜 그래?"
정말 순수하게 궁금해서 그리 물었더니 고개를 홱홱 돌려 주변을 한 번 살핀 세나가 더듬더듬대며 어처구니 없는 말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아니, 사람들이 자꾸 뚫어져라 쳐다봐가지고.."
그 말이 귓가로 울려퍼진 순간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너같으면 안 쳐다보게 생겼냐고.
누가봐도 '나 수상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듯한 몰골을 해놓고서는 기껏 한다는 소리가 저런 거란 말인가.
어디서부터 지적하면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애꿏은 미간만 손가락으로 꾹꾹 눌러대고 있던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 저기.. 괜찮으세요?"
낯선 목소리가 끼어들어왔다.
그에 이건 또 뭔가 싶어서 그것이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려보니 생판 처음보는 년이 두 뺨을 발그레하니 물들인 채 요상한 표정을 얼굴 위에 띄워놓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저 표정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려니 떠오르는 말이 하나 있긴 했다.
정의로운 시민.
내게 말을 걸어온 여자는 꼭 자신의 정체는 그거라고 주장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왜 하필 그런 요상하기 짝이 없는 표정인지 알 것도 같아서 자연스레 입밖으로 튀어나가는 목소리가 퉁명스럽게 변했다.
미인이었다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여성의 얼굴은 암만봐도 내 취향은 아니었으니까.
"뭐가요."
"그 혹시 위험한 상황이시면.."
"됐고, 신경쓰지 말고 갈길이나 가시죠. 이 사람 우리 누나거든요?"
더 신경쓰기도 귀찮아서 대충 손을 휘적휘적 해보이고는 여성으로 하여금 보란듯이 세나의 손을 꼭 잡았다.
그렇게 귀찮게 들러붙은 걸 떨쳐내고 난 후에야 꼬옥하고 잡고 있던 것을 놓고 세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는 양손을 이용해 세나의 볼따구를 꾸욱하고 눌러서 고정시킨 뒤 그대로 옆으로 돌렸다. 지나네 센터 건물 외벽이 전부 유리다보니 거울로 쓰기에 그것만한게 또 없었으니까.
"이제 좀 아시겠어요? 사람들이 왜 그렇게 쳐다봤는지?"
"아, 아니.."
아니 이걸 어떻게 모를 수가 있지.
"누나 꼴을 봐 뭐가 문젠지 정말 모르겠어?"
"마, 마스크?"
단순히 그것 뿐만은 아니었지만 그것도 정답 중에 하나긴 했기에 일단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 그치만 마스크 끼기 전부터 계속 쳐다봤단 말이야.."
차 안에 있던 선글라스는 물론, 근처 편의점에서 마스크까지 급하게 구매해 쓴 것도 다 그것 때문이시란다.
"..응?"
그에 사람들이 왜 그랬을까하고 고개를 갸웃하던 것도 잠시, 이내 깨달았다.
아.
사람들이 세나를 그토록 뚫어져라 쳐다보도록 만들었을 이유를.
물론, 이번에도 복장이 문제인 건 똑같았다.
정확히는 끌고 다니는 차하고 영 어울리지 않는 복장 때문이었겠지.
그도 그럴 것이 저 몰골 좀 봐라.
차는 그렇게 까리한 걸 끌고다니면서 정작 본인은 후드티에다가 허연 줄 세 개가 쭉쭉 그어져있는 트레이닝 복 바지가 끝이라니.
몰골이 저러니 당연히 사람들이 뚫어져라 쳐다봤겠지.
나같아도 세나가 끌고다니는 차에서 세나같은 복장을 한 사람이 내리면 그럴 것 같은데 말이다.
'설마..'
옷장에 저런 옷들밖에 없는 건 아니겠지.
그러니까 방송할 때 입으면 편한 옷들 말이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그 정도겠냐만은 상대가 세나다보니까 안심할 수가 없었다.
'어휴..'
이번에도 이러고 나올 줄 알았으면 아까 데리러 오라고 문자할때 좀 말끔하게 입고 오라고 따로 덧붙여놓았을텐데.
이건 명백히 내 실수가 맞았다.
세나를 과대평가한 것도 실수는 실수니까.
그렇기에 그녀를 핀잔할 마음도 들지 않았다.
"그래그래, 그렇겠지. 그러니까 내일부터는 후드티하고 트레이닝복말고 좀 깔끔한 걸로 입고 와."
그래서 내일부터라도 잘하라는 뜻으로 그리 말했던 것인데.. 어째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꼭 마치 내 말을 듣고 말문이 막히기라도 한 것처럼.
'아니, 여기서 말문이 막힐 이유가 있나?'
설마 내일도 데리러 오라고 한 것 때문에 저러는 건가.
라고 생각하기 무섭게 세나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참 가관이었다.
"어, 없는데.."
"..뭐?"
뭐라굽쇼?
"어, 없다고.. 후드티 말고.. 입을 거.."
웃기려고 한 말이겠지?
에이, 말이 되나.
버는 돈이 얼만데.
오늘 아침만 해도 게임에 600만원 가까이 꼴아박은 사람이 바로 세나 아니던가.
그런 사람이 입을 옷이 후드티 밖에 없다는 게 말이 되나.
라고 생각했는데 놀랍게도 진실인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진작에 '짜잔! 사실은 개꿀잼 농담이었습니다!'하며 위로 올라왔어야할 세나의 고개가 여지껏 바닥을 향하고 있을 이유가 없으니까.
"아니, 대체 어쩌다가.."
아니지.
그럴 리가 없을텐데.
입을 옷이 정말 후드티 밖에 없다면 세나의 채널에 올라와있던 각종 행사관련 브이로그 영상에 나오는 그 삐까번쩍한 옷들은 대체 뭐란 말인가.
행사용이니만큼 일상생활할 때 입을 만한 것들은 절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드티보다는 차라리 그쪽이 차하고 잘 어울리지 않을까.
해서 물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행사 때마다 입었던 것들은 대체 뭐냐고.
"아, 그거..?"
"응, 그거."
"빌린 거야. 빌린 거."
그러시단다.
아니, 대체 뭐가 좋다고 저렇게 의기양양한 태도인 걸까.
얼굴은 여전히 선글라스와 마스크로 가려져있어서 보이질 않았지만 어깨만큼은 의기양양하게 하늘을 향해 치솟아있는 게 상당히 보기 싫었다.
그런 내 시선을 느낀 것일까.
언제 의기양양하게 치솟아 있었냐는 듯 세나의 어깨가 점점 시무룩한 모양새를 띄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어깨를 축 늘어뜨린 그녀가 주섬주섬 변명이라는 걸 늘어놓기 시작했다.
세나의 변명은 이러했다.
"우, 우리 이사올 때 헌옷같은 거 싹 버렸잖아.."
"..그랬지."
생전 처음 듣는 사실이었지만 일단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세나는 이상한 점을 느끼지 못한 듯 했고.
"그래서 새로 사려고 보니까 생각해보니까 당분간 밖에 나갈 일이 별로 없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일단 방송할 때 입으면 편할 것 같은 옷들로 채우셨단다.
거기에 세나가 추가로 늘어놓은 변명이 바로 원래는 자주 만나서 어울리던 사이였던 고등학교 때 친구들하고도 전처럼 자주 만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이사온 것 때문에?"
"아니, 걔네들 다 현실 콜오브듀티하러 갔어."
콜오브듀티면..
"군대?"
"응.."
뭐, 세나는 그리 말하긴 했지만 거리가 멀어진 탓도 분명 있을 것이다.
아무튼 이사 온 후로 첫 스타트를 그런 식으로 끊어버렸을 뿐더러 실제로도 행사같은 걸 제외하면 바깥에 나갈 일이 거의 없다보니 그 뒤로도 옷을 살 때마다 편해보이는 것들 위주로 사게 되었고, 그게 습관이 될 정도로 오랫동안 지속되다보니ㅡ
"저, 정신차리고 보니까 옷장 안에 후드티하고 트레이닝복 밖에 없더라고.."
그래, 그렇게 되셨단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좀 어처구니 없는 이유였던 것일까.
민망하다는 머쓱하게 웃고 있는 세나의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세나가 저 모양 저 꼴이 된 데에 내 탓이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었으니까.
"안 되겠다."
"으, 응?"
원래 계획은 세나의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 다음에 몸이 쑤신다는 핑계로 그녀에게 안마같은거나 좀 받으면서 묘한 분위기도 좀 연출해주고, 겸사겸사 방송하는 법이나 가르쳐 달라고 할 생각이었는데..
눈앞에 있는 이 안타깝고 글러먹은 존재부터 어떻게 좀 해줘야할 것 같았다.
내가 세나의 외모와 관련된 설정을 쌓아올리는데 들인 시간과 노력이 얼만데 언제까지고 저 몰골로 살게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저번에 이상형 월드컵할 때 봤던 사진을 보면 알 수 있듯 세나는 꾸미면 더 예뻐지는 타입이다.
그럴 의지가 없어서 그렇지.
"차 어딨어."
"주, 주차장에ㅡ"
"여기 지하주차장?"
내 말에 세나가 고개를 위아래로 붕붕 흔들어댔다.
"일단 안내해 봐."
그렇게 세나를 앞장세워 그녀의 차를 찾아낸 뒤 조수석에 올라타 명령했다.
"백화점. 아니다 동대문이 나으려나."
"..응?"
"옷 사러 가자."
"아, 옷 사려고? 그럼 그냥 내가 내 카드 줄테니까 인터넷으로 사고 싶은 만큼ㅡ"
"누가, 내 옷 산대?"
"..응?"
"누나꺼 살거야."
그리 말하며 싱긋 웃어보인 순간 팍 구겨진 세나의 얼굴은 황금같은 주말에 엄마한테 옷 사러 가자는 말을 들은 고등학생 시절의 나와 꼭 닮아있었다.
그렇기에 세나가 더 대단한 것이었다.
쇼핑이라면 질색부터 하는 편인 나를 자발적으로 움직이게 만들었으니까.
속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세나를 향해 턱을 까딱해보였다.
"뭐해? 출발 안 하고."
"아니, 그.. 옷 많은데.."
"후드티?"
"..."
"그래, 후드티도 옷이긴 하지."
"그, 그치?! 그러니까 꼭 새로 살 필요는ㅡ"
"그러니까 오늘은 후드티 말고 다른 거 위주로 보고 다니면 되겠다. 그치?"
세나를 향해 싱긋 웃으며 그리 말하니 그 순간 그녀의 표정이 꺼멓게 죽었다.
얼마나 시달리게 될지 안봐도 눈에 훤해서 벌써부터 피곤해하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엄마가 쇼핑가는 걸 따라나서던 아버지와 내 얼굴이 딱 저랬던 것 같은데 말이다.
"..그렇게 싫어?"
일부러 시무룩해하는 목소리를 쥐어짜내서 그리 물으니 퍼뜩 정신을 차린 세나가 애매하게 부정했다.
"아, 아니 싫다는 게 아니라.."
역시나 좋다고는 말 안 하더라.
"그러면 어쩔 수 없지."
내 말에서 탈출에 대한 희망이라도 느낀 것일까.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허연 김을 자신의 영혼이라도 되는 것마냥 흘려대던 세나의 얼굴이 언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었냐는 것처럼 순식간에 활짝 피어났다.
"그, 그치? 역시 오늘은 좀 그렇지? 겨울도 다 갔는데 그렇다고 벌써부터 봄 옷 입고 다니기엔 또 추우니까.."
그새 또 신이 나서 뭐라고 주절주절 떠들어대는 세나의 발언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서 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그것을 톡톡 두들겨대고 있으니..
"그.. 뭐해?"
어느새 말을 멈춘 세나가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물어왔다.
"아, 신경쓰지마. 별 거 아니니까. 그냥 통화 좀 할게 있어서."
"통화..?"
"응, 지나 누나가 전화를 받을지 모르겠네.. 일하는 중이려나?"
차라리 직접 올라가서 말하고 오는 게 나으려나하고 세나로 하여금 들으란 듯이 중얼대고 있으니 찔리는 구석이 아예 없지는 않았는지 세나의 얼굴이 살짝이지만 창백하게 변했다.
얼굴 위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띄워올린 세나가 날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내 눈치라도 보듯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목소리였다.
"어, 언니한테 전화는 왜?"
"글쎄?"
"..."
"왜일 것 같아?"
그런 그녀를 향해 싱긋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갈꺼지 쇼핑?"
그 말에 고개를 툭 떨어뜨린 세나가 결국 차를 출발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