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1부
아무래도 다들 각자 찔리는 구석이 하나씩들은 있다보니 그 누구도 섣불리 입을 열려고 하지 않았다.
덕분에 식사 자리는 달그락달그락하고 울려퍼지는 소리 외에는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그게 못내 신경쓰였던 것일까.
어른답게 가영이 총대를 메고 나섰다.
"그.. 새터는 어땠니?"
가영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묵묵히 식사에 집중하고, 아니 집중하는 척을 하고 있던 나머지 둘의 시선이 날 향해 날아와 꽂혔다.
아니, 세나야 그렇다 치더라도 지나는 어제 나한테 직접 들어놓고서 또 뭐가 그렇게 궁금하길래 저런 눈빛인 걸까.
순간적으로 확 몰려든 시선 때문에 움찔했던 것도 잠시, 일단 입 안에 넣고 우물거리고 있던 것부터 꿀꺽 삼켰다.
그리고는 살짝 웃으며 가영의 물음에 답했다.
"음.. 나름대로 재밌었어요."
"가서 뭐했냐?"
그러기 무섭게 끼어들어온 게 바로 세나였고.
"음, 이것저것?"
"술?"
"뭐, 술도 마시고, 게임같은 것도 좀 하고."
"게임? 술 게임?"
"아니, 대학생들이 무슨 술만 마시는 줄 아나. 그 왜 예능에 나오는 게임들 있잖아."
"장기자랑같은 건 안하디?"
"나야 뭐 3학년이니까. 나랑은 상관없지."
"신입생들은? 요즘 스무살들은 어떻디?"
왜 이리 꼬치꼬치 캐묻나 했더니만 그게 본론이었던 모양이다.
그에 바로 답하지 않고 '으음..'하는 소리를 내며 고민하는 척을 해보였다.
"어떠냐니?"
"그냥 보자마자 느껴지는 게 있을 거 아냐."
"음.. 그냥 귀엽던데?"
"귀여워?"
생각치도 못했던, 아니 정확히는 마음에 안 드는 대답이었던 걸까. 세나의 볼이 일순간 꿈틀하고 떨렸다. 가영이나 세나와는 달리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나가 내보인 반응도 비슷했다. 세나가 보여준 것보다 조금 더 격하긴 했지만.
두 딸의 불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영이 '어머'하고 작게 감탄하더니 이내 날 향해 질문을 던져왔다.
"혹시 마음에 드는 애라도 있었니?"
그 질문에서 묘한 간절함같은 게 느껴졌던 건 혹시라도 내게 좋아하는 여자가 생기면 아침마다 몰래와서 하는 짓을 그만둘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겠지.
그런 의도가 노골적으로 느껴지는 가영의 질문에 쓰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다들 완전 애기들 같더라고요."
"뭐래, 지도 아직 애기면서."
내 말이 우습기라도 했는지 세나가 어처구니 없다는 듯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나랑 누나랑 2살차이 밖에 안 나거든?"
"응, 그래서 나도 애기야. 응애 나 아기 세나. 햄 더 구워조."
"와.."
참으로 다행히도 스스로 부끄러운 행동을 한다는 자각 정도는 있었던 모양이다.
뻔뻔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과는 별개로 볼만큼은 발그레하니 달아올라 있었으니까.
"왜 귀엽냐?"
"방금 온몸에 소름 돋았어."
"너무 귀여워서?"
"그런 건 제발 방송에서만 해 누나.."
"너 방송에서 그런 짓 하냐?"
내 눈에는 나름대로 귀엽긴 했는데 지나가 보기에는 영 아니었던 모양이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는 표정과 함께 내뱉어진 지나의 발언에 결국 세나가 뒤집어 쓰고 있던 뻔뻔함이라는 가면이 폭발해버렸다.
"무, 뭔 소리야 방송에서 이런 짓을 왜해."
"그런데 밥상에서는 왜하는데."
역시 담당일찐이라고 해야할까.
세나를 단번에 침몰시킨 지나가 막 생각났다는 투로 입을 열었다.
"아, 그러고 보니까 벌써부터 유한이 쫓아다니는 애도 한 명 있는 것 같더라."
"어머, 진짜?"
"응, 걔 이름이.. 유린이었나? 아마 그랬던 것 같은데.. 아무튼 어제 유한이 데리러 갔을 때 얘 뒤만 졸졸 쫓아다니고 있던데?"
"뭔 소리야. 걔는 그런 거 아냐."
지나의 발언에 그리 대꾸하고는 가영 쪽을 바라보며 허둥지둥 몇 가지 말들을 입밖으로 내뱉었다.
유린과는 절대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그냥 새터에서 같은 조가 된 적이 몇 번 있어서 그때 좀 챙겨줬을 뿐이라고.
그랬더니 걔가 졸졸 쫓아다니기 시작한 것 뿐이라고.
마치 가영이 유린과의 관계를 오해하기라도 할까봐 걱정하는 것처럼 변명들을 주르륵 늘어놓았다.
그것들이 선사하는 묘한 분위기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일까.
"그, 그렇구나.."
가영이 어색하기 짝이 없는 표정을 한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제게 고정된 내 시선을 피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슬쩍 고개를 옆으로 돌려버리더라.
덕분에 식탁 위로 내려앉은 건 묘한 침묵이었다.
허나 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가영이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커녕 그게 침묵이라는 사실조차 알지 못했던 세나가 스리슬쩍 끼어들어왔으니까.
"뭐야, 니 어제 술마셨냐?"
"어? 아, 응."
"어쩐지 뜬금없이 뭔 콩나물국인가 했더니만.. 이거이거 안 되겠구만."
"갑자기 뭔 소리야."
"메뉴 선정과정이 공정하지가 않잖아."
"뭐래.. 맛있기만 하면 됐지. 그리고 지나 누나도 같이 마셨거든?"
"으, 응? 언니도?"
설마 여기서 지나의 이름이 튀어나올 거라고는 생각 못했는지 움찔하며 당황하던 것도 잠시, 세나가 설마하는 표정을 얼굴 위로 띄워보였다.
"뭐야, 설마 둘이서 술 마셨어?"
정말로 그런 거라면 어떻게 자기만 쏙 빼놓고 그럴 수가 있냐고 따질 생각이었던 거겠지.
문제는 그 주제가 지나에게 있어 굉장히 민감한 주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세나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쓰린 속을 달래듯 새빨간 국물을 숟가락으로 푹 떠서 호록하고 들이키고 있던 지나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그 탓에 국물이 들어가선 안 되는 곳으로 들어가버리기라도 했던 모양이다.
황급히 숟가락을 내려놓은 지나가 콜록콜록하고 거친 기침을 연거푸 쏟아내기 시작했다.
그냥 사레가 들려도 충분히 괴로운데 하물며 지나는 고춧가루가 팍팍 들어가있는 국물을 마시다가 사레가 들려버린 상황.
당연히 괜찮을 리 없었고, 많이 괴로운지 지나가 자신의 가슴을 퍽퍽 소리가 나도록 두들겨댔다.
답지않게 눈물까지 글썽거리는게 보기 영 안쓰러워서 황급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물을 떠다가 바쳤다.
"누나 이것 좀 마셔봐."
내가 내민 걸 건네받아 꼴깍꼴깍 들이키고 나서야 가까스로 좀 진정이 되었는지 '후우..'하고 가볍게 한숨을 내쉰 지나가 세나를 째릿하고 노려보기 시작했다.
"아, 아니.. 내가 뭘 어쨌다고.."
당연히 세나의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큰 목소리로 항의하지 못하는 건 그동안 당한 게 많기 때문이겠지.
억울하기는 한데 상대가 지나라서 따질 수도 없지, 한편으로는 자기만 따돌리는 것 같아서 섭섭하지,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세나의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으휴 정말..'
대체 누가 동생인지.
뭐, 외모가 되니 그런 모습마저도 귀엽긴 했다.
귀여운만큼 안쓰럽기도 했고.
"알겠어. 알겠어. 나중에 누나하고도 마시면 되지?"
세나를 향해 그리 말했던 건 어디까지나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좋아하더라.
"누, 누가 술 마시고 싶어서 그런 줄 알아? 왜 나만 쏙 빼놨냐 이거지!"
대꾸는 그리하긴 했는데 입꼬리만큼은 위를 향해 올라간채 연신 움찔움찔대고 있었으니까.
"그때 아마 누나 방송 중이었을걸?"
"윽.. 그, 그래도 톡으로 물어볼 수는 있잖아."
"누나 방송 중에 방해하는 거 싫어하잖아."
틀림없이 그럴 거다. 자기가 하는 일을 굉장히 진지하게 생각하는 세나니까.
아니나 다를까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하고 있던 세나가 결국 고개를 끄덕여 긍정했다.
"그으건.. 그렇긴 한데.."
"그래서 연락 안 했던 거야. 누나만 따돌리려고 했던 게 아니고."
이해했냐는 투로 그리 말하니 세나가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상태로 얼마나 지났을까.
살짝 민망했던 모양인지 애꿏은 밥하고 햄만 푹푹 떠먹던 세나가 슬그머니 내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그래서.. 어, 언제 마실 건데."
"응?"
"술."
짧게 대꾸한 세나가 슬쩍 시선을 반찬 쪽으로 돌리며 말을 이었다.
"어, 언제 마실 거냐고."
"음.. 나보다는 누나 일정에 맞춰야하지 않을까? 나야 뭐 개강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백수니까."
알아서 하라는 뜻으로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보이니 세나가 스리슬쩍 내 의견을 물어왔다.
"혹시 뭐.. 가보고 싶은 데 있냐?"
"가보고 싶은 곳? 음.."
당연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애초에 집 근처에 뭐가 있는지조차 잘 모르는데 그런 게 있겠는가.
그럼에도 고민하는 척을 해보였다.
"글쎄 잘 모르겠네. 누나는?"
"나, 나? 나야 있긴 한데.."
"그러면 거기로 가면 되겠네. 시간 비는 날 있으면 알려줘. 맞춰볼게."
"그, 그래."
그 대화는 그렇게 마무리 되는 듯 했다.
묵묵히 침묵을 지키고 있던 지나가 갑자기 끼어들어오지만 않았다면.
"안 돼."
내가 자기만 특별히 신경을 써주는 게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는지 은근히 입꼬리를 씰룩씰룩대고 있던 세나가 갑자기 들려온 지나의 목소리에 반응해 호들짝 놀랐다.
아예 어깨까지 움찔하고 떨면서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게 어떤 모습인지를 자기 몸으로 몸소 펼쳐보이던 것도 잠시 참으로 놀랍게도 세나가 반항을 시도했다. 무려 지나를 상대로 말이다.
"뭐야, 갑자기 왜 그러는데."
"밖에서 먹는 건 안 돼. 먹을 거면 집에서 먹어."
"아니, 그러니까 왜?"
이해가 안 간다는 투로 던져진 세나의 질문에 지나는 답을 하지 못했다.
그렇겠지.
내가 술에 취하면 막 엉겨들고 끼부린다는 걸 어찌 말하겠는가. 그것도 내가 바로 옆에 버젓이 앉아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차 끌고 나갈 거 아니야. 집에 올 때는 어떻게 오려고."
"그거야 뭐.. 대리 부르면 되잖아. 아니면 택시타도 되는 거고."
"..아무튼 안 돼."
"아니 그러니까 대체 왜.."
반대할 거면 좀 그럴 듯한 이유라도 내놓든가 그런 것도 없이 무작정 반대를 외치는 지나의 행동에 세나가 표정을 살짝 찡그렸다.
"유한이 얘 맥주 한 캔만 마셔도 헤롱헤롱하는데 니가 감당할 수 있겠어?"
컴퓨터도 겨우 드는 년이 그런 일이 가능하기나 하겠냐는 지나의 발언에 세나의 입술이 삐죽하고 튀어나왔다.
"무슨 뜻인지 알겠지? 그러니까 괜히 밖에 나갔다가 둘다 다쳐서 돌아오지 말고 얌전히 집에서 먹어."
"씨이이.. 지는 밖에서 먹어놓고.."
"뭐? 야, 유세나. 너 방금 뭐라 그랬냐?"
어처구니가 없다는 투로 내뱉어진 지나의 발언에 세나의 얼굴이 분칠이라도 한 것처럼 허옇게 변한 순간이었을 것이다.
보다 못한 가영이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지나야 그만."
"아니, 엄마 난 진짜 걱정돼서ㅡ"
"그만하래도."
일단 분위기를 살벌하게 만들고 있는 주범이라 할 수 있는 지나부터 제압한 가영이 이내 세나 쪽으로 눈을 돌렸다.
"세나 너도 인정하지? 지나 말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니라는 거?"
"아, 아니.."
"세나 너도 많이 마셔봐야 한 병이잖니."
"소, 솔직히 그 정도까지는 아닌데.."
"아니야? 세나 너 예전에 술먹방인가 뭔가 한다고 소주 두 병정도 마시고 엄마한테 언니는 누구냐고 그러지 않ㅡ"
"와아아아악!!!! 와아악!!!!"
예고없이 튀어나온 흑역사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세나가 빼액하고 소리를 지르며 양팔을 퍼덕퍼덕 흔들어댔다.
그러다가 이미 늦었다는 걸 깨닫고는 새빨갛게 물든 얼굴을 손바닥에다가 파묻으며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진짜 그랬어요?"
"아, 유한이는 그때 잔다고 못봤겠구나. 글쎄 새벽에 고모 방으로 찾아와가지고 '언니, 언니는 누구에요? 여기 우리 엄마 방인데..'하는데.. 아, 동영상도 찍어놨는데 보여줄까?"
"그, 그런 걸 왜 찍어!!"
"왜 찍기는 귀여우니까 찍어놨지."
"다, 당장 지워!! 아니다 엄마 휴대폰 방에 있지?"
자기 손으로 직접 이 세상에서 없애버려야 안심이 좀 될 것 같았나 보다.
언제 털썩 주저앉아 있었냐는 듯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킨 세나가 성큼성큼 가영의 방으로 향했다.
"세나야?"
어느새 방 앞에 거의다 도착한 세나를 부르는 가영의 목소리가 주방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대체 언제 꺼내든 것인지 알 수 없는 휴대폰 하나가 보란듯이 쥐어져있었다.
"가봐야 소용 없으니까 얼른 다시 와서 앉으렴."
가영의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한 세나의 눈동자가 확 커졌다.
"아니면 유한이한테 보내버릴까? 어디보자 유한이 번호가.."
"아, 앉으면 되잖아..!"
흑역사를 인질로 잡은 가영은 참으로 무자비했다.
덕분에 세나는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가영이 내민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조약에 얌전히 자기 이름을 적어넣을 수밖에 없었다.
그야말로 삼전도, 아니 세전도의 굴욕이었다.
그 정도면 좀 봐줄 만도 한데 가영은 끝까지 자비가 없었다.
"으음, 이왕 이렇게 된 거 그 날은 가족끼리 다 같이 모여서 한 잔하는 걸로 할까?"
"..."
"그래, 그러는 게 좋겠다! 으음, 언제가 좋으려나.."
그렇게 생각치도 못하게 세 사람과의 술자리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언젠지는 아직 미정이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