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1부
"못 고르겠으면 그냥 내가 아는 곳으로 가는 게 낫겠다. 따라와."
포스 넘치게 말하고는 앞장서서 걸어가길래 어쩌면 바같은 곳으로 안내받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눈앞으로 나타난 건 룸카페 형식의 술집이었다.
느낌적인 느낌으로 커플들이 굉장히 많이 찾을 것같은 곳이랄까.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ㅡ
"두 명이요."
"네, 두 분이요. 잠시만 기다려주시겠습니까? 바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네."
"아, 혹시 커플이신가요?"
나와 지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혹시 커플이냐고 묻는 점원의 모습이 퍽 익숙해보였다.
그에 지나가 살짝 난감해하는 표정으로 무어라고 답하려 하길래 둘 사이로 끼어들었다. 은근슬쩍 지나의 손을 잡은 건 덤이었다.
"아, 그ㅡ"
"네, 맞아요."
"아, 그러셨군요. 커플 혜택이 있는데 혹시 원하신다면 안내해드려도 되겠습니까?"
"네."
그렇게 해달라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니 그때부터 점원이 이런저런 혜택들을 읊어대기 시작했다.
그걸 귀담아듣는 척 하고 있으니 꼬옥하고 마주잡은 손이 불편하기라도 했던 것일까.
지나가 자꾸만 손을 꼼지락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커플 전용 룸을 일반룸 가격에 이용하실 수 있으신데 커플 전용 룸으로 안내해드릴까요?"
"네, 그렇게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커플 전용룸으로 안내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리 말한 점원이 싱긋하고 웃고는 잘 보고 따라오라는 듯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정확히 그 순간이었다.
지나의 팔이 내 옆구리를 쿡하고 찌르더니 그녀가 눈빛을 통해 항의를 해왔다.
지금 이게 뭐하는 짓이냐고 묻는 듯한 그 눈빛에 어느새 저 멀리까지 걸어간 점원을 눈으로 흘기며 작은 목소리로 지나를 향해 물었다.
"왜?"
"..왜 거짓말을 하고 그래."
"할인해준다잖아."
"아니, 그거 얼마나 한다고.."
작은 목소리로 꿍얼꿍얼대기 시작한 지나에게 지지 않고 비슷한 목소리로 응수했다.
"아니, 돈 아끼게 해준다고 해도 뭐라 그래.."
"아니, 내 말은.."
"미안하게 됐네요. 이렇게 싫어할 줄 알았으면 안 했지."
"아니.. 그.. 하아.."
"이미 그렇다고 해버렸는데 이제와서 아니라고 할 수도 없잖아. 싫어도 오늘만 참아."
그리 말하고는 잡고 있던 손을 놓고 점원을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덕분에 내가 토라졌다고 생각한 걸까.
타다닥하고 퍽 다급한 발자국 소리가 가게 복도를 따라 메아리쳤다.
물론, 따라잡혀주지 않고 나도 속도를 높였다.
"이곳입니다."
그렇게 도착한 커플 전용 룸은 확실히 그 말에 어울리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
방의 색깔부터가 그랬다.
전체적으로 새빨간 것이 묘하게 야릇한 느낌을 풍겼으니까.
보는 이를 긴장하게 만드는 그런 빨간색이라고 해야할까.
"메뉴판은 저기에 꽂혀있고, 주문은 안쪽에 있는 유선전화를 통해 하시면 됩니다."
많이 바쁜 모양인지 그 설명을 마지막으로 쭐래쭐래 사라졌고, 덕분에 강렬하기 그지없는 커플 전용 룸 앞에 남겨지게 된 나와 지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의 눈치를 봤다.
"속았다.."
일반룸보다 넓은 곳을 일반룸 가격에 이용할 수 있다길래 이게 웬 떡이냐 싶어서 덥썩 물었더니만 설마 악성재고를 처분하기 위한 수작질이었을 줄이야.
저래가지고 과연 술이 들어가기나 할지 모르겠다.
허망하게 중얼거리고 있으니 복도에 계속 우두커니 서 있을 수만은 없다고 판단한 건지 지나가 방 안쪽을 향해 조심스레 턱짓을 해보였다.
"그.. 일단 들어갈까?"
그런 식으로 강렬하기 그지없는 첫인상을 남겼던 커플 전용 룸은 부담스러운 첫인상과는 별개로 내용물만큼은 굉장히 알찼다.
"그래도 뭐 쓸데없이 시뻘건 것만 빼면 나쁘지 않네.."
이전에도 몇 번 이곳에 방문해본 적이 있는 지나가 저렇게 말할 정도면 틀림없이 그런 거겠지.
"그래서 뭐 먹을래? 소주? 아니면 맥주?"
"음, 일단 메뉴판부터 보자."
그에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 지나가 벽쪽에 자리한 책장에 꽂혀있던 메뉴판을 들고 내 옆으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그것을 펼쳐보니ㅡ
-저희 룸카페는 숙박업소가 아닙니다. 생각하시는 것보다 훨씬 방음이 안 되는 편이니 주변 분들에게 폐가 될 수 있는 행위는 모쪼록 자제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라고 새빨간 글자로 쓰인 문구가 가장 먼저 눈으로 들어왔다.
"어.."
"아, 음.."
덕분에 안 그래도 묘하게 어색하던 분위기가 아찔할 정도로 어색하게 변해버렸다.
이 분위기를 초래한 장본인을 그냥 내버려둘 수 없었던 것일까.
퍼억-!
지나가 황급히 손을 움직여 메뉴책을 다음 장으로 넘겼다.
순간적으로 얼마나 힘을 줬던 건지 사람 패는 소리가 다 나더라.
그런 식으로 술자리를 시작하기 전부터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헤프닝이 벌어지긴 했지만, 술상만큼은 무사히 확보할 수 있었다.
새빨간 색이 인상적인 자몽 소주와 치킨 가라아게, 그리고 훈제 연어 샐러드까지.
그것들이 점원의 손에 들려 테이블 위로 등판하니 처음에는 부담스럽게만 느껴졌던 새빨간 방이 꽤나 그럴 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더 기분이 묘했다.
마치 모텔에 들어가서 떡치기 전에 술 한 잔 하는 느낌이었으니까.
의자랍시고 구비해놓은게 물침대를 생각나게 하는 물컹물컹한 무언가라서 더욱 그랬다.
"으, 음 그러면.. 먹을까?"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환경으로부터 묘한 느낌을 받았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는지 그리 말하는 지나의 표정은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제 딴에는 나름대로 어색한 심정을 숨긴다고 숨겨본 것 같은데 지금 하고 있는 얼굴만 보면 아무 소용 없어보였다.
"..응."
그런 식으로 어색하기 그지없는 분위기 속에서 시작된 지나와의 술자리는 생각외로 수월하게 이어졌다.
아무래도 성격이 성격이다보니 지나가 뭐 활발하게 떠들고 그러지는 않았지만, 그녀는 굉장히 뛰어난 청자였으니까.
내가 새터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줄 때마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끄덕이는 식으로 맞장구를 쳐주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게 퍽 중독적이었다.
물론, 이런 식으로 이야기만 나누다가 끝낼 생각은 절대 없었지만.
이게 어떻게 얻어낸 기회인데 하하호호 떠들기만 하다가 끝낼 수는 없지.
암, 그렇고 말고.
이야기를 많이 했더니 목이 탄다는 것처럼 자연스레 술이 담긴 잔을 입쪽으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그것을 꼴깍꼴깍 소리를 내며 들이키다가ㅡ
주륵-
살짝 흘려주었다.
덕분에 턱을 타고 미끄러진 것이 입고 있던 옷 위로 토도독 떨어졌다.
정확히는 바지 위라고 해야할까.
새하얗던 바지 위로 빨간 얼룩이 스멀스멀 번져나가는 모습은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아 씨.."
"자."
그에 표정을 찌푸리고 있으니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 지나가 티슈 몇 장을 내밀어왔다.
"고마워."
솔직하게 감사를 표하고는 지나로부터 건네받은 티슈를 이용해 바지 위로 생겨난 얼룩을 툭툭 두들기기 시작했다. 참으로 공교롭게도 술이 떨어진 곳은 허벅지 안쪽이었다.
제대로 보고 닦으려는 것처럼 한껏 뒤로 젖히고 있던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에 맞춰 헐렁하던 바지가 일순간 팽팽하게 변했고, 덕분에 그 전까지는 헐렁함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것의 윤곽이 바지 위로 슬며시 도드라졌다.
'어떻게..'
지나 쪽에서는 잘 보이려나.
속으로 그리 중얼거리면서 얼룩을 제거하는데 열중하는 척 했다.
지나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다름아닌 그러고 있던 와중이었다.
술을 마시니 갈증이 났던 걸까.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일까.
한 컵 가득 따라놓았던 물을 벌컥벌컥 들이킨 지나가 그것을 대충 옆에다가 내려놓고는 내게 말을 걸어왔다.
"..많이 흘렸어?"
"응? 어, 조금?"
"안 닦이면 그만 닦아."
"내버려두면 얼룩지잖아."
"얼룩이야 지우면 되는 거고."
만류하는 이유가 뭘까.
도무지 모르겠다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지나의 말대로 닦는 것을 멈추고 손에 쥐고 있던 티슈들을 대충 구겨서 휴지통 안에다가 던져넣었다.
툭ㅡ
동그랗게 구겨진 것이 휴지통 안으로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야릇한 침묵이 방 안으로 내려앉았다.
"아, 맞다.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그리고 정확히 그 때부터 태세를 전환했다.
"..새터에서 술게임 배운 것까지."
"거기까지 했구나. 흐으음.."
말은 하지 않고 텅 빈 잔에다가 술을 따랐다.
쪼르륵하는 소리와 함께 투명하던 잔 안으로 빨간 액체가 넘실거리기 시작했다.
그렇게 반쯤 채운 것을 그대로 입쪽으로 가져와 쭉 들이켰다.
"크으ㅡ"
지나는 그런 날 만류하지 않았다. 이제 슬슬 그만 마시라고 할 법도 한데 말이다.
'하긴..'
그럴 수밖에 없겠지.
방금 본 것이 머릿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을텐데 다른 데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는가.
그러니 더욱 신경쓰이게 만들어줘야겠지.
"후우.. 조금 덥네.."
그리 말하며 입고 있던 옷의 앞섬을 잡고 펄럭펄럭 해대니 그제서야 지나가 반응을 보였다.
"..더워? 히터 좀 줄일까?"
"아냐."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것처럼 고개를 설레설레 젓고는 그대로 손을 밑으로 내려 옷자락을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그대로 까뒤집으려고 하니ㅡ
"무, 뭐하는 거야.."
지나의 입에서 참으로 그녀답지 않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당혹감과 당황이 그득하게 담겨있는, 허나 단순히 그것뿐만은 아닌 목소리.
"응? 답답해서 잠깐 벗고 있으려고."
"..."
"아, 안에 티 입었어. 걱정 안해도 돼."
싱긋 웃고는 지나의 제지 때문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던 작업을 재개했다.
스륵-
일부러 느릿하게 옷자락을 걷어올렸다.
최대한 많은 소리가 날 수 있도록.
덕분에 천이 살결을 스치며 나는 소리가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나한테도 그 정도인데 안 그런 척 하며 아까 전부터 묘하게 내게 감각을 집중하고 있는 지나야 말할 것도 없겠지.
이왕 이렇게 된 거 서비스나 좀 더 얹어주자는 느낌으로 안에 받쳐입은 티셔츠가 딸려올라가도록 손을 움직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내 배가 살짝 드러난 순간ㅡ
"물 좀 더 달라고 해야겠다."
지나의 고개가 반대쪽으로 홱하고 돌아갔다.
덕분에 샛노랗게 물들어있는 머리칼 사이로 설핏 드러난 지나의 귀는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것을 빨갛게 물들이고 있는 감정이 흥분일지, 당황일지는 오직 지나만이 알고 있겠지.
내가 후드티를 전부 벗을 때까지 그러고 있을 생각인 걸까.
보아하니 그런 것 같아서 후드티를 반 정도 걷어올린 뒤 지나의 이름을 불렀다.
"윽, 누나."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래서 한 번 더 불러주었다.
"누나, 나 꼈어."
그제서야 다시 내쪽으로 돌아앉은 것일까.
부스럭하는 소리에 맞춰서 몸을 꿈틀꿈틀해보였다. 마치 그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그.. 가만히 있어봐. 도와줄테니까."
야릇하다기 보다는 차라리 귀여운 느낌에 가까운 내 모습을 보니 아까부터 그녀를 괴롭히던 감정이 한결 가신 걸까.
지나의 목소리에는 약간이지만 웃음기가 섞여있었다.
"응."
그 말에 답을 하고는 꿈틀꿈틀 움직이던 것을 딱 멈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옷을 잡아당기는 힘을 느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미리 작업을 해둔 덕분에 티셔츠가 후드티를 따라 딸려올라가 있는 상황인데 그런 식으로 무리하게 잡아당기니.. 순간적으로 가슴께까지 훅하고 딸려올라간 티셔츠가 다시금 풀썩 내려앉았다.
"후, 땡큐."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척 가볍게 숨을 내쉬며 이제 좀 살았다는 표정을 하고 있으니 지나가 두 눈을 질끈하고 감고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봤구만.'
덕분에 알 수 있었다.
지나가 방금 그 광경을 봤다는 걸.
"옷 이리 줘."
그렇게 건네받은 후드티를 착착 접어서 곱게 개어준 뒤 적당히 옆에다가 내려놓고는 아까에 비해 한결 가벼워진 상의의 앞섬을 잡고 펄럭펄럭 흔들어보였다.
"후.. 그래도 좀 덥네.."
당연하다면 당연한 말이지만 내가 후드티 밑에 받쳐입은 티셔츠는 그냥 티셔츠가 아니라 티셔츠 중에서도 특히 얇은 것이었다.
어느 정도냐면 살짝 땀에 젖는 것만으로도 속이 살짝 비쳐보일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지나는 내 몰골을 확인한 후로 자꾸만 눈을 어쩌지 못했다.
보기만 하는 건데 뭐 어떻냐는 본능의 속삭임과 동생인 유한의 야릇한 모습을 훔쳐보면 안 된다는 이성의 외침 사이에서 갈팡질팡하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런 지나의 동요를 알아차리지 못한 척 내가 낼 수 있는 것중에서도 최대한 순진한 것을 골라내어 입밖으로 내뱉었다.
"누나."
"..응?"
"누나는 안 더워?"
잠깐의 침묵.
"..어, 괜찮아."
그리고 그게 지나가 잠깐의 침묵 뒤에 내놓은 대답이었다.
"진짜?"
"..어."
"그러면 한 번 만져봐도 돼?"
지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