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1화 〉1부
자꾸만 터져나오는 기침 때문에 자연스럽게 앞으로 숙이고 있던 고개를 슥 들어올리니 눈으로 들어온 건 언제 당황하고 있었냐는 듯 걱정가득한 얼굴을 한채 날 내려다보고 있는 유린의 모습이었다.
그에 그녀와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싱긋하고 웃어보였다.
눈에 눈물에 고여있긴 했지만, 뭐 어쨌든 웃은 건 웃은 거니까.
"담배 피우면 기분 좋아진다길래 한 번 해봤는데 난 못 피우겠다. 자, 돌려줄게."
"..그."
"아, 닦아서 돌려주는게 맞으려나?"
"아, 아뇨..! 제, 제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럴 래 그럼?"
피식 웃고는 상체를 뒤로 쭉 젖혔다.
그렇게 벤치 등받이에다가 몸을 기대니 강원도답게 별이 총총 떠오른 밤하늘이 눈앞에서 아른거렸다.
그리고는 중얼거렸다.
"흐음..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그 말에 반응한 건지 바로 앞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기색이 전해져왔다.
"응? 안 들어가?"
"그ㅡ"
"또 죄송하니 어쩌니 할거면 그냥 하지 말고."
역시나 또 죄송하다는 말을 하려고 했나 보다.
유린을 향해 흘깃하고 시선을 던져보니 그녀가 입술을 잘근 깨물고 있는 광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렇게 죄송해?"
"..어쨌든 저도 잘못한 건 사실이니까요."
뭘까 이 고지식한 생물은.
"혹시 고등학교 때 뭐 선도부같은 거라도 했어?"
혹시나 싶어서 농담삼아 던져본 말이었는데 놀랍게도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유린의 몸이 흠칫하고 떨리며 정곡을 찔린 사람이나 보일 법한 반응을 고스란히 내보였다.
그리고 유린에게는 그게 숨기고 싶은 사실이었나 보다.
"그.. 티 많이 나나요?"
"그냥 왠지 모르게 느낌이 그렇더라."
"읏.."
"그런데 담배는 어쩌다가 피우게 된거야?"
선도부와 담배라니.
어울리는 조합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혹시 담배를 하도 압수하다보니 궁금해져서 피우게 된 걸까.
어쩌면 그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려니 예상과는 전혀 다른 대답이 유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사회생활 하려면 조금이라도 피우는 게 좋다고 그래서요.."
"아니, 그게 무슨.. 대체 누가 그러디?"
"그, 인터넷에서.."
어이가 없기도 하고, 워낙 생각치도 못했던 이유라서 헛웃음부터 나왔다.
"그런 이유면 그냥 피우지 마."
"네?"
"몸에 안 좋잖아. 남자친구도 싫어하지 않아?"
"..네? 남자친구요?"
"응? 없어?"
"네, 아직.."
아직이라는 건 아직 단 한 번도 누구와 사귀어본 적 없단 소리겠지.
"그랬구나. 미안. 분명 있을 줄 알았거든."
"아뇨.."
"그러면 아직 한 번도 못 사겨본 거야?"
"..네."
쪽팔려서라도 거짓으로 둘러댈 법도 한데 유린은 굉장히 솔직했다. 그렇다는 건 그게 그녀의 성격이라는 거겠지.
"이상하네. 분명 학교 다닐 때 남자애들한테 고백 많이 받았을 것 같은데."
"아뇨, 한 번도.."
"그래? 애들이라서 보는 눈이 없었나 보다."
은근히 이어지는 내 칭찬이 기분 좋았던 모양이다.
유린의 볼은 아까와는 다른 느낌으로 발그레하게 물들어있었다.
"흠.. 그러면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그러면 정말 없던 걸로 해줄게."
"네? 아, 네.."
"아까 그 이야기 있잖아."
일부러 주어를 생략하긴 했지만 그 이야기라는 게 뭘 말하는지 유린이라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내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오기 무섭게 유린이 몸을 흠칫하고 떨었다.
그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려던 말을 계속해서 이어나갔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네?"
유린의 입장에서는 정말 생각치도 못했던 질문이었던 것일까. 그녀가 눈을 크게 뜬채 반문해왔다.
"그ㅡ 애들이 나한테 스.. 폰 한다고, 걸레같다고.. 그랬잖아."
"..."
"네가 볼 때도 그렇게 보여?"
"..아뇨!"
제법 단호한 부정이었다.
대체 뭘 근거로 저렇게까지 단호한 건가 싶을 정도로.
"왜?"
"네..?"
"왜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어디 한 번 말해보라는 듯 싱긋 웃으며 그리 물으니 유린이 꼴깍하고 침을 삼켰다.
마치 엄청나게 중요한 한 마디를 꺼내들기 전에 마음의 준비라도 하는 것처럼.
그러더니-
"그.. 혹시 저 기억 안나세요?"
영문 모를 소리를 입에 담았다.
"..엉?"
이건 또 뭔 소리여.
"우리가 전에 만난 적이 있었던가?"
"그 자, 작년에 학교에서.."
"작년?"
작년 일이라면 내가 알 리 없었다.
그 때는 내가 이 몸으로 들어오기 전이니까.
'다음에 연락오면 기억을 찾을 방법이 없냐고 물어봐야 하나..'
가능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물어나 봐야 겠다고 생각하며 어느새 시무룩한 표정을 한채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있는 유린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척 했다.
다른 여자가 그딴 발언을 했다면 한 번 꼬셔보겠다고 수작부리는구나 했겠지만 유린은 딱봐도 거짓말 자체를 안 하는 타입인 듯 했으니까.
그 말은 실제로 둘이 만난 적이 있다는 뜻일텐데ㅡ
문제는 유린이 작년까지, 아니 불과 몇달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다는 거다.
지금까지 열심히 주워들은 것들에 따르면 극히 좁은 행동반경을 지닌 '유한'이 유린이 다니는 고등학교까지 찾아갔을 것 같지는 않고.. 그 말은 둘이 만난 장소가 대학이라는 건데..
'고등학생이 대학교에 올 일이 있나?'
따지고보면 있긴 했다.
논술시험같은 걸 볼 때라던지 혹은 학교를 견학시켜준답시고 대학에서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학교를 개방하는 경우가 종종 있으니까.
"그, 혹시 작년에 우리학교로 견학왔었어?"
"네..! 호, 혹시 기억나세요? 그때 저 도와주셨ㅡ"
내가 자길 기억해내는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것일까.
확 밝아진 얼굴로 나는 전혀 모르는 기억을 우다다다 쏟아내던 것도 잠시, 내 얼굴 위에 자리한 표정을 확인한 유린이 다시금 입을 꾹 다물었다.
뭐, 덕분에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것도 같았다.
작년에 유한이 다니던 대학으로 견학을 왔다가 모종의 이유로 곤란한 상태에 빠져있던 유린을 유한이 어떤 식으로든 도와주었던 것이겠지.
평범한 대학생 오빠가 그랬어도 바로 폴인러브를 해버렸을텐데 하물며 도와준 상대가 '유한'이라면 뭐..
'보자마자 반했겠네.'
분명 그랬을 거다.
허나 '유한'은 유린에게 자신에 관한 그 어떤 정보도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술자리에서 이래저래 주워들은 것에 따르면 '유한'은 여성에게 씨게 데인 적이 하도 많아 지나나 세나, 가영이 아닌 다른 여성들에게는 기본적으로 철벽을 치고 다녔던 것 같으니까.
그렇게 한 여름밤의 꿈같은 기억만 남기고 헤어졌던 잘생긴 대학생 옵빠와 대학에 들어와서 다시 재회하게 된 것이다.
그것도 그냥 재회한 게 아니라 같은 과 선후배 관계로 말이다.
그러니 모르긴 몰라도 유린에게는 '유한'이라는 존재가 운명처럼 느껴지지 않았을까.
'씨바 나같아도 반하겠네..'
이제서야 좀 알 것도 같았다.
동기들이 그렇게 신나게 떠들고 있으면 소외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 마디 정도는 껴볼 법도 한데 유린이 끝까지 입을 꾹 닫고 버텼던 이유를.
덤으로 아까 내가 던진 질문에 그토록 단호하게 답을 할 수 있었던 이유도.
"미안.. 잘 기억이 안 나네."
"아.."
"그런데 혹시.. 나 때문에 우리 학교로 온 거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물어봤는데 놀랍게도 정답인 듯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도둑질이라도 하다 딱 걸린 것 같은 반응을 보일 이유가 없으니까.
덕분에 알게된 사실은 유린이 거짓말을 더럽게 못한다는 것이었다.
"아, 아뇨..! 자, 장학금 준대서.."
거짓말을 할 거면 이리저리 흔들리는 눈동자라도 좀 어떻게 하고서 하던가 저래가지고 과연 누가 속겠는가.
뭐, 장학금 자체는 진실인듯 했지만.
"진짜? 수능 진짜 잘봤나 보다."
"벼, 별로 그렇게 까지는.."
발등에 불이라도 떨어진 것마냥 허둥지둥할때는 언제고 칭찬을 해주니 이제는 또 부끄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모습이 그렇게 귀여울 수가 없었다.
왠지 모르게 뭐라도 해주고 싶을 정도로.
"그래서 아까 내가 물어봤을 때 아닐 것 같다고 했던 거야?"
"..네."
"왠지 고맙네."
"다, 당연한 건데요.."
"그래도."
그리 말하고는 물끄러미 유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유한을 좋아하는 유린의 입장에서는 그런 내 눈빛이 퍽 견디기 힘들었던 모양이다.
"그으 혹시 뭐 하실 말씀이라도.."
정확히는 왜 이리 뚫어져라 바라보는 거냐고 묻고 싶었던 것이겠지.
"그냥 고마워서. 처음이거든. 이렇게 선뜻 믿어주는 사람은."
"..."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으음ㅡ"
"괘, 괜찮아요."
"정말?"
내 물음에 유린은 답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나도 모르게 피식하고 웃었다.
"거짓말 정말 못하는 구나."
"..."
"흐음, 뭐가 좋을까.."
고민하는 척 하다가 배시시 웃으며 유린을 향해 손짓을 해보였다. 가까이 와보라는 뜻이었고, 그에 유린이 꼴깍하고 침을 삼키고는 조심스레 내쪽으로 몸을 숙인 순간ㅡ
"혹시ㅡ"
흘러내린 머리칼 사이로 살짝 드러난 앙증맞은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남자 꺼, 본 적 있어?"
그 순간 유린이 보여준 반응은 말 그대로 '화들짝'이었다.
바로 조금 전까지 내 숨결이 흩뿌려지던 자리를 양손으로 감싸쥔 유린이 뒤로 후다닥 물러났다.
그런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손가락으로 콕하고 찌르면 펑 소리를 내며 그대로 터져버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그, 그게 무슨ㅡ!"
"있어?"
"이, 이, 있어요.."
"정말? 어떻게?"
"그.. 인터넷에서.."
"야동?"
"..네."
"그러면 실제로는?"
"아, 아직.."
"다행이네."
유린의 대답을 듣고는 빙그레 웃어보였다.
다른 건 몰라도 그것만큼은 진심이었다.
다시 한 번 유린을 향해 손짓을 했다.
부끄럽고 민망한 것과는 별개로 내가 또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긴 했던 것일까.
유린이 슬금슬금 움직여 내 앞에 도달했다.
"사실 나도 아직.. 본 적 없거든."
원래 세계라면 모를까 이곳에서는 그랬다.
"..그러니까 여자 꺼 말이야."
아니, 그렇지 않을까?
뭐, 아무튼 지금 중요한 건 그딴 게 아니고ㅡ
"그래서 말인데.."
슬쩍 말꼬리를 늘어뜨리면서 꼴깍하고 침 삼키는 유린의 귀에 대고 들려주었다. 그 소리가 메아리가 되어 내 귀로 돌아왔다.
"너만 괜찮으면ㅡ"
"..."
"우리 서로 꺼 보여주기로 할까?"
은밀하게 전한 제안.
그런 내 제안의 유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꿀꺽하고 침 삼키는 소리는 덤이었다.
그렇게 몸을 앞으로 기울인 채 유린의 귀에 대고 속닥이던 것도 잠시, 몸을 스르륵 뒤로 물렸다.
그리고는 여전히 술기운 때문에 뜨끈뜨끈 거리는 얼굴에 대고 파닥파닥하고 손부채질을 해보였다.
그러다가ㅡ
"..역시 남자 쪽에서 먼저 이러는 건 좀 그러려나?"
슬쩍 유린 쪽을 힐끔거리며 떠보듯 물었다.
"아, 아뇨..! 꼭 그렇지는.."
"그러면?"
"..."
"보고 싶어?"
질문을 받고는 입술을 꾹 깨물고 있던 것도 잠시, 결국 유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한 번,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고개를 푹 숙였다.
마치 한순간의 욕망에 패배해버린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것처럼.
그런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가자."
그리고는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고 아까 눈여겨보았던 장소로 향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호텔의 주차장 쪽에는 야외 화장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도 호텔답게 나름대로 번듯한 규모였다.
심지어 매일마다 따로 관리를 하는 건지 깨끗하기까지 했다.
"어, 어딜.."
"화장실."
"네..?"
"여기서 할 수는 없잖아. 그렇다고.. 방으로 갈 수도 없고."
유린의 의문에 답해주고는 다시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렇게 도착한 주차장 야외화장실은 호텔 건물하고 멀리 떨어져있음에도 불구하고 환하게 불이 밝혀져있었다.
여자화장실과 남자화장실.
둘을 놓고 잠시 고민하다가 남자 화장실로 향했다.
"자, 잠.."
다시 한 번 느끼는 거지만 유린은 거짓말을 참 못했다.
만류하듯 말하는 것 치고는 손에 힘이 하나도 실려있지 않았으니까.
"그러면 돌아갈거야?"
여기까지 왔는데?
대충 그리 말하는 듯한 시선에다가 실망이라는 감정을 살짝 섞어주니 그런 내 눈빛이 '여자'의 자존심을 자극하기라도 했던 모양인지 유린이 입술을 꾹 깨문채 날 따라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왔다.
"..잠궈줄래?"
철컥-
자물쇠 잠기는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에 흠칫하고 몸을 떠는 척을 해보였다가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조심스레 걸터앉았다.
"후우.."
그리고는 유린으로 하여금 들으란 듯이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앞으로는 술 조금만 먹어야겠다."
내가 이러는 건 어디까지나 취했기 때문이다.
라는 어필을 해준 뒤 고개를 들어올려 화장실 문에 등을 찰싹 붙이고 있는 유린을 바라보았다.
"우리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 소문나면 진짜 애들이 말한대로 되겠다. 그치?"
"아, 안 내요! 절대로!"
"쉿."
조용히 하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내 몸짓에 유린이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런 유린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ㅡ
"그.. 그럼 나, 나부터 할까?"
슬쩍 던져보았다.
꿀꺽하고 침 삼키는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울려퍼졌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민망했던 것일까.
얼굴을 민망함으로 새빨갛게 물들이고 있던 것도 잠시, 유린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그러더니..
"저, 저부터 할게요.."
혹시라도 누가 들을세랴 내게도 간신히 닿을 정도로 작은 목소리로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지이이익하고 지퍼 내려가는 소리가 화장실 안으로 울려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