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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화 〉1부 (40/315)



〈 40화 〉1부

그런  우려와는 달리 윤정은 딱히 이렇다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그건 시간이 지나도 그랬고, 덕분에 살짝이지만 마음을 놓을 수가 있었다.

'하긴..'

마음만 먹으면 지금 제일 잘 나가는 아이돌 그룹도 전부 불러다가 따먹을 수 있는 게 윤정이다. 그녀에게는 그럴만한 힘이 있으니까.

정확히 말하면 그녀가 속해있는 집안이 가진 힘이긴 했지만.. 사실  그게 그거니까.

그런 사람이 뭣하러 나같은 소시민한테 관심을 가지겠는가.


물론, '유한'의 얼굴이 어지간한 연예인들은 가볍게 씹어먹을 수 있을만한 수준이긴 하지만 윤정은 결코 쉬운 여자가 아니다.

내가 설정한대로라면 그랬다.

그렇기에 유한이 암만 잘생겼어도 그녀가 정해놓은 기준을 만족시키긴 쉽지 않을테지.

그리 생각하니 안심할 수 있었고, 마음이 편해지니 스스로 느끼기에도 어색하게 느껴졌던 표정또한 자연스러워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학생회 측에서 미리 잡아놓았던 이런저런 일정들이 끝이 났고, 그와 함께 도래한 건 대학생활의 꽃이라 할  있는 술자리였다.


술자리는 꽤 즐거웠다.


다만 딱 하나 문제가 있다면 술이 영 몸에 안 받는다는 것 정도?

원래 내 몸이었다면 고작 이 정도로는 얼굴  하나 변하지 않았을텐데 지금 들어와있는  몸은 대체 어떻게 되먹은 몸인지 몰라도 이제 고작 반 병정도 마셨을 뿐인데 벌써부터 얼굴이 뜨끈뜨끈했으니까.

머리도 살짝 어질어질했고.


"후우ㅡ"


볼에 양 손등을 가져다 댄채 얼마나 뜨거운지를 체크하다가 이내 자리에서 스르륵 몸을 일으켰다.


"응? 어디 가려고?"

"아, 살짝 어지러워서 밖에 나가서 바람  쐬려고."


"괜찮아? 같이 가줄까?"

"됐어. 요 앞에만 돌아다닐 건데 무슨."

피식 웃으며 이미 반쯤 몸을 일으킨 세린을 다시 자리에 눌러앉히고는 그대로 방을 빠져나와 호텔을 나섰다.

몸이 뜨끈뜨끈한 탓일까.

아니면 지금 입고 있는 니트가  전에 입고 있었던 후드티보다 얇아서 그런 걸까.

바깥으로 나오기 무섭게 싸늘하기 그지없는 공기가 몸을 확 덮쳐왔다.

'아 담배 마렵네.'


이럴   대 딱 펴주면 최곤데 말이다.


가만히 서 있기만 하니 더 추운 느낌이라 호텔 주변을  바퀴 돌고 들어갈 생각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순간적으로 어지러운  확 올라와서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진 뭔지 모를 구조물 옆으로 기어들어가 쪼그려앉았다.

누군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한 건  직후였다.

단체로 바람쐬러 나온 것일까.

자박자박하고 발자국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졌다.

"으.. 봊내 춥네.."

"아니  놈의 흡연장을 바깥에다가 만들어놓냐."

"그러니까  놈의 호텔이 손님에 대한 배려가 없어."


"야, 이게 무슨 호텔이냐? 걍 콘도지."

"콘도 말고 콘돔은 안됨?"

"뭐래, 미친 년이."


시덥잖은 소리를 주고받으며 킥킥대던 것도 잠시, 칙칙하고 담뱃불 붙이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윽고 코밑으로 맴돌기 시작한 건 찐한 담배냄새였다.

'시발.'


누군 마려워도 참고 있구만, 이건 뭐 금식수행하는 사람 앞에서 삼겹살 구워먹는 것도 아니고..

돈이 없는 것도 아니고  사는 나이도 아닌데 진짜 한 갑 사서 피울까하고 고민하고 있으니 '스읍ㅡ'하고 담배빠는 소리가 잠시 끊어졌다.

"야, 근데 너도 봤냐?"

그렇게 내려앉은 침묵을 박살낸 건 상당히 뜬금없는 발언이었다.

"뭘?"

"그 선배 말이야."

"아, 하늘색 니트?"

"어."

"확실히 미치긴 했드만. 선배들이 호들갑 봊나 떨길래 뭐 그리 유난인가 했는데.."

"보니까 그럴만 하지?"

"어, 장난 없던데? 완전 연예인 보는 줄."


"어지간한 연예인보다 훨씬 낫지 않냐? 내가 볼 땐 그렇던데."

"흠, 생각해보니까 그렇긴 하네."


"여친 있을까?"


누군가 입밖으로 꺼내든 의문에 하나같이 열띤 목소리를 한채 열심히 나에 대한 품평을 늘어놓던 이들이 일제히 바람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그럼 없겠냐. 병신아."


"아니, 혹시 또 모르잖아."


"에휴, 이래서 아다 년은.. 야, 너 아다지?"

"뭐, 씹년아?"

"야, 니가  선배 지인이라고 생각을 해봐라. 그럼 그런 남자를 가만히 내버려 두겠냐?"


"..가만히  두지."

"내 말이.  선배 분명 시커먼스 자지일듯."

짧게 툭 내뱉고는 '쓰읍'하는 소리를 내며 담배를 한 번 빤 누군지 모를 후배가 다시금 말을  던졌다.


"솔직히 그 선배 봊나 꼴리게 생겼잖아."

"..그렇긴해."

"난 니트가 그렇게 꼴리는 옷인지 그 선배 덕분에 오늘 처음 알았잖아."

"아, 그리고 보니까 선배 중에 한 명이 니트남 여자친구 봤다던데."


"응? 니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 학생회 총무였나? 아무튼 그 선배가 우연히 봤대. 여자친구가 주차장에 내려주고 가는거."


날 마중나왔던 사람은 세린 뿐이었는데 학생회 총무라는 사람은 대체 어디서 날 본 걸까.

어리둥절해하고 있는 동안에도 여후배들의 대화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진짜?"

"어, 돈 개많은 년 같다던데ㅡ 뭐였지? 그 유명한 스포츠카 있잖아. 그거 끌고 왔다드만."

"씨발 역시 돈이 많아야 되나.."


"그러면 여자친구가 아니고 혹시 그거 아냐?"


"그거?"


"그 왜 있잖아.."

"스폰?"

"어, 그거."


"뭐.. 그럴 수도 있지."

"그 정도면 솔직히 얼마나 받을 것 같냐?"

"왜? 니도 해볼라고?"

"그 년은 얼굴하고 몸매도 장난 없었다던데 넌 얼굴이 빻아서 달에 천씩 준다고 해도 선배가 거절할듯."

뭐라고 해야할까.

기분이 굉장히 묘했다.


음담패설을 하는 입장이었다가 음담패설을 당하는 입장이 되니 그게 영 적응이  된달까.

그러는 동안에도 누군지 모를 후배들은 지들끼리 열심히 깔깔대고 있었다.

"아, 슬슬 들어가야겠네."

"하.. 니트남은 우리 방에는 안 오려나."


"방 한 번씩 바꾼다고 하지 않았어?"

"씨발 우리 방에도 남자  명만 넣어주지 무슨 죄다 전복 년들이야."


"난 그래서 편하고 좋던데."


"그렇긴 한데 재미가 없잖아. 재미가."


"그건 인정."

들어보니 슬슬 담배도 다 피웠겠다 다시 들어가려는 모양.

마침 잘 됐다고 생각했다.

슬슬 다리가 저릿저릿하던 참이었으니까.


맘같아서는 당장이라도 튀어나가서 엿을 구멍이란 구멍에다가 전부 쑤셔박아주고 싶었지만 아까보다 더욱 올라온 취기 때문인지 아니면  요상하고 묘한 기분 때문인지는 몰라도 몸이 선뜻 움직이질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몸을 일으킬 타이밍만 기다리고 있었는데ㅡ

"응?   들어가게?"


"..좀만 더 있다가 들어가려고."

"선배들이 지랄할텐데.."

"내가 알아서 할테니까 신경쓰지마."


여태껏 들려왔던 목소리들과는 전혀 다른 색을  것이 귓속으로 흘러들어왔다.


차분하면서도 서늘한 그 목소리에는 듣는 이의 기를 죽게 만드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러든가 그럼."

같이 들어가자고 제안했던 후배의 목소리가 퉁명스레 변했다. 기가 죽은 걸 티내지 않으려는 것처럼.

후배들은 등장할 때처럼 저벅저벅하는 발소리를 사방으로 퍼뜨리며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렇게 울려퍼지던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었을 때 쪼그려앉아있던 자세를 풀고 졸지에 은신처 비스무리한 역할을 해주고 있던 틈 사이에서 빠져나왔다.


그런  반긴 것은ㅡ

"미친 년들.."

담배연기인지 입김인지 알 수 없는 하얀 김을 허공에 대고 흩뿌리며 그리 중얼거리고 있던 여성, 아니 유린이었다.

여성치고는 살짝 큰 편인 지나와 비슷해보일 정도로 큰 키와 차갑다 못해 싸늘해보이는 인상.

그리고 단정하게 빗어내린 검은색 머리칼까지.

냉미녀 느낌이 물씬나는 미녀라서 윤정과 더불어 유이하게 이름을 외워둔 후배였다.


몸을 일으켜 모습을 드러내기 무섭게 호텔 안에 있는 동안 새카맣게 타버린 하늘에 시선을 두고 있던 유린과 눈이 딱 마주쳤고, 날 발견한 그녀가 손에 든 걸 입쪽으로 가져가다 말고 그대로 굳어버렸다.

그야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

유린 입장에서는 바로 조금 전까지 실컷 뒷담화를 깠던 상대가 갑자기 뿅하고 튀어나온 셈일테니까.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속으로 '봊됐구나..'하고 있지 않을까.

뭐, 그래도 유린에게는 참작의 여지가 있었다.


날 두고 열심히 입방아를 찧어댔던 다른 후배들과는 달리 그녀는 계속 침묵을 지켰으니까.


그리고 뭣보다ㅡ

'미인이란 말이지.'


그래, 사실 그 점이 가장 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마 유린까지 싹다 묶어가지고 어째서 남의 뒷담화를 함부로 하면 안 되는지 아주 확실하게 가르쳐줬겠지.

'저러다가 전신에 쥐나겠네.'


그런  속을 알 리가 없는 유린은 여전히 눈을 크게 뜬채 뻣뻣하게 굳어있었다.

분명 이럴 거라고 생각해서 되도록 끝까지 숨어있으려고 했던 건데ㅡ

안타깝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농담 아니고 계속 불편한 자세로 쪼그려 앉아있었더니 허벅지가 터질  같았으니까.

아무튼 저대로 내버려뒀다간 밤새도록 저러고 있을 기세라서 조심스레 말을 걸어보았다.

"그.. 안녕?"

결론부터 말하자면 역효과였다.


조심스레 인사를 건넨 순간 유린의 오른손 안에 갇혀있던 원통형의 물체가 요란하기 짝이 없는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으니까.


그렇게 떨어진 것이 또르르륵하는 소리를 내며  발밑까지 굴러왔다.

'전담파였구만.'


하긴, 전담이 액상 갈아끼울 때만 빼면 편하긴 하지.


그나저나 떨어질 때 난 소리가 살벌하던데..


'혹시 망가진  아니겠지?'


설령 망가졌다 해도 책임져줄 생각은 없지만 상태가 어떤지 일단 확인이나 해둘 겸 은빛으로 칠해진 표면이 퍽 인상적인 그것을 조심스레 집어들었다.

참으로 다행히도 소리만 요란했던 건지 손으로 겉면을 슥 훑어봤지만 묻어나오는 거라고는 먼지밖에 없었다.

"자."

그래서 건넸건만 주인이라는 사람이 받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보아하니 아직 당황이라는 늪속에서 벗어나질 못한 모양.

여전히 딱딱하게 굳어있는 유린을 보며 피식하고 웃었던 건 그래서였다.


"뒷담깐 것 때문에 뭐라고 할까봐 걱정돼서 그래?"

"..."

"걱정하지마. 뭐라고 할 생각 없으니까."

그렇게까지 말했음에도 믿지 못하는 것 같아서 움직이다 말고 애매하게 멈춰버린 유린의 손을 내쪽으로 잡아당겼다.


유린의 손은 굉장히 부드러웠다. 그 부드러운 것 위에다가 유린이 떨어뜨린 것을 올려놓았다.

"어으 다리야."


그리고는 때마침 눈에  벤치로 다가가 그곳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서야 좀 정신이 돌아온 것일까.


"..죄송합니다."

즉시 내쪽으로 몸을 돌린 유린이 날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래서 물었다.

"뭐가?"


뭐가 죄송하냐고.


"..예?"

"다른 애들이 열심히 떠들 때 넌 한 마디도 안 했잖아."

"그, 그래도.."


"안 말리고 방조한 것도 죄다?"

"..네."


"됐어. 이런 거에 일일히 신경써봐야 귀찮기만 하고."


손을 휘휘 저은  화제를 돌렸다.

"그나저나 그거 전자담배 맞지?"

"네? 아, 네."

"한 번 구경해봐도 돼?"


"..네?"

"싫으면 어쩔  없고."


"아, 아뇨. 여기ㅡ"


차가워보이는 인상에 어울리지 않게 고개를 붕붕 흔들어대던 유린이 방금 내가 돌려주었던 것을 다시  향해 내밀었다.


그렇게 내밀어진 것을 받아서 요리조리 돌려보며 구경하는 척을 했다.


"이건 어떻게 쓰는 건데?"

"그, 까만 부분에다 대고 쭉 빠.. 아니,  들이키시면.."


"으렇게?"


유린이 손으로 가리켰던 부분을 입에 문채 말하니 그녀의 얼굴 위로 당황이라는 감정이 떠올랐다.


그렇겠지.


설마 그렇게 선뜻 입에 물거라고는 생각 못했을테니까.


그러거나 말거나 전자담배긴 하지만 오랜만에 니코틴 맛좀 볼겸 그대로 숨을 쭉 들이켰다.

그런 내가 딱 하나 간과한 부분이 있다면.. 지금 들어와있는  몸이  원래 몸하고는 많이 다르다는 것이었다.

알코올은 물론 니코틴으로 적절하게 시즈닝이 되어있던 원래 몸과는 달리 유한의 몸은 술은 몰라도 담배 쪽으로는 순결함  자체라 할 수 있었다.

원래 좀 피우던 사람도 한동안 안 피다가 오랜만에 피면 몸에 잘  받아서 어질어질하고 속도 메슥거리고 그러는데 하물며 담배라고는 한 번도 피운 적 없는 순결한 몸으로다가 늘 하던 것처럼 쭈욱 빨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는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그러면 어찌되는지 내 몸이 직접 확인시켜주었으니까.


'어우 미친..!'

 그래도 술기운 때문에 어질어질하던 머리가 순간적으로 핑 도는 듯 하더니 거칠기 짝이 없는 타격감이 목을 박박 긁어댔다.


아니, 대체  놈의 전자담배가 타격감이 이리 쎄단 말인가?

덕분에 콜록콜록하고 마른 기침을 연기와 함께 뿜어내고 있으니ㅡ


"괘, 괜찮으세요?"

머리 위에서 안절부절 못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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