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 일상의 위기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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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5. 일상의 위기 (2)
그것이 입술의 단맛인지, 크림의 단맛인지는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무엇이 문제랴. 달콤했다는 사실만이 중요할텐데. 나는 에스테야의 흔들리는 동공을 바라보며, 방금 내가 탐한 조그마한 입술을 손끝으로 가볍게 매만졌다.
에스테야가 고개를 푹 숙인다.
“…으. 꼭 이런 데에서 이래야 해?”
“그럼 어디서 해?”
귀여웠다. 부끄러워하는 모습도 예쁘다.
나는 가만히 에스테야를 내 품에 꼭 끌어안곤, 주변을 한 차례 쏘아보았다.
뭘 봐, 씨발것들아.
세드릭 기스테르를 꺾은 이가 바로 에스테야 체라서스다. 전쟁중인만큼, 마녀와 마법사의 기강과 서열은 그 힘으로 나뉜다.
에스테야의 권속인 나도 덩달아 제법 어깨를 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이전이라고 해서 어깨 안 펴고 다니던 건 아니었지만.
“…이러고 있으면, 내가 너한테 잡혀 사는 줄 알 거 아냐.”
“아니야?”
“…맞긴 한데. 으. 아냐, 아니야. 아니라고!”
나는 에스테야의 꽃망울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에스테야의 조그마한 손이 내 코트 깃을 급하게 움켜잡는다. 한 손으로는 제 조그마한 입술을 막아, 낯부끄러운 신음이 흘러나가지 못하게 했다.
“…흡. 차, 차서운….”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날 올려다보긴 하지만, 그 속에 마냥 싫은 마음만 가득한 건 아니었다.
상황이 부끄러운거지, 내가 싫은 게 아니다.
눈물 찔끔 흘린 눈동자 안 깊은 곳을 진득하게 바라보다보면 느낄 수 있었다. 아니, 굳이 그러지 않아도 내 팔을 밀어내지 않고, 어느새 내 가슴팍에 조그마한 머리를 기댄다.
오목눈이도 아니고, 귀엽게시리.
“차서운.”
“왜?”
“이러고 있으니까 내가 당근 케이크를 먹을 수가 없잖아.”
에스테야의 입술이 뾰로통하게 튀어나왔다. 나는 그 입술에 가볍게 입맞춰준 다음, 붉어진 에스테야의 뺨을 어루만졌다.
“내가 먹여주면 되지.”
“…어?”
오른손을 뻗어 당근 케이크를 폭신하게 눌러 자른다. 포크 끝으로 가볍게 찍어 들어올려선, 에스테야의 입 앞으로 가지고 왔다.
생각해보다 더 행복했다.
“자, 입 벌려. 케이크 들어간다.”
“…치. 그건 또 무슨 농담이람.”
눈은 가늘게 뜨면서도, 에스테야가 입을 벌렸다. 조그마한 입 안으로 당근 케이크를 밀어넣었다. 오물거리는 조그마한 두 뺨이 사랑스럽다.
“…살면서 이런 일이 있을 줄 몰랐는데.”
내 독백에, 에스테야가 나를 빤히 올려다봤다.
“무슨 뜻이야?”
“네가 제일 좋다는 뜻이야.”
에스테야의 뺨이 다시 발갛게 달아오른다.
“아니…그렇게 갑자기 그러면…다, 당황스럽잖아!”
하지만 맞는 말인걸.
살면서 정말로 이세계 픽업트럭에 치여선, 분홍 머리 미소녀를 품에 끌어안곤 몇 번이고 탐하다가, 결국 사랑놀음에 빠져서 연애질이나 하고 있을 줄 어떻게 알았을까.
그것도 내 설정대로 만들어진 세상의 비어있는 곳에서.
가끔은 꿈만 같기도 했지만, 내 허벅지 위를 가볍게 누르는 이 소담하고 부드러운 감촉은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진짜다.
나는 가만히 에스테야의 허리를 안아 끌어당겼다. 품 안에 폭 안기는 그녀의 조그마한 몸뚱이가 좋다.
“…차서운?”
에스테야가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올려다본다.
조용히 속삭였다.
“여기서 할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읏.”
속내를 들켰는지, 에스테야가 괜히 내 팔뚝을 꼬집었다.
마녀나 마법사들의 성격은 생각보다 괴팍하고, 철저한 계급사회에서 아랫사람이 느끼는 스트레스는 현대보다 더한 편이다. 주변의 권속들이 나를 부러운 눈빛으로 보는 건 그런 이유겠지.
자신들은 그저 마녀들에게 착정당하거나, 마법사들에게 겁탈당할 뿐인 인간가축에 불과하니까.
내 처지가 부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근 케이크 다 먹으면, 어디로 갈래?”
내 질문에 에스테야가 잠시 고민했다.
“음…잠옷이나 새로 맞출까.”
“호오?”
*
필스 부인의 재단 클럽.
대단히도 기괴한 네이밍 센스다. 살면서 나는 한 번도 맞춤 옷가게가 ‘재단 클럽’ 따위의 이름을 쓰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명성 하나는 확실히 있는 모양인지, 얼마 전 꼴사나운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누웠던 세드릭 기스테르도 저 멀리서 보일 정도였다.
사실, 내 입장에서 그가 딱히 악역은 아니다. 어차피 죽긴 할 거지만, 세드릭이 가시검 칼릭스의 피통을 왕창 깎아 주긴 할 테니까.
게임과 현실은 다르다.
그리고 소설은 현실의 열화복제판.
피가 흐르고 근골이 으깨진다면, HP바가 좀 닳아 사라지는 게 아니라 전체적으로 느려지고, 둔해진다. 그건 곧 내가 최후의 위협인 가시검을 처치하기가 상당히 용이해진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차서운.”
탈의실 문 안쪽에서 에스테야가 나를 불렀다.
뭐야. 무슨 일이야?
“왜?”
“그으…이게….”
우물쭈물하는 목소리.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생각해보니까, 에스테야가 내 시야에서 벗어난 건 지금이 처음이었나.
“에스테야?”
아무래도 안되겠다.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서, 탈의실로 다가갔다. 에스테야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무슨 일 없는거지?”
그 때였다.
탈의실 커튼 옆으로, 에스테야의 새하얗고 가냘픈 팔이 삐죽 튀어나왔다. 내 팔뚝을 잡곤 끌어당긴다. 커튼 사이로 에스테야의 달아오른 얼굴이 보였다.
“…잠깐 들어와 봐.”
뭘 하려는지는 모르겠는데, 정말 에스테야는 천재였다. 나를 발기시키는 천재.
“…후, 좋아.”
나는 심호흡을 하고, 주변을 살핀 다음, 커튼 안으로 몸을 숨겼다. 에스테야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얼굴 다음으로는 그 어깨에 눈이 갔다.
오, 맙소사.
“…에스테야.”
“…왜?”
내가 한 발짝 다가가자, 에스테야의 등이 탈의실 벽에 부딪혔다. 에스테야의 눈이 이만큼 커진다. 조그마한 손을 뻗어 내 가슴을 짚어 민다.
“아니, 그으, 하, 하자는 게 아니니까…!”
“그럼 뭔데?”
뭐길래 속이 반쯤 비쳐보이는 네글리제를 입고 날 부른건데? 그것도 탈의실에? 나는 빳빳하게 굳어가는 목을 주물러 풀고, 에스테야의 손목을 잡아챘다.
“…힉.”
“빨리 말 안 하면, 너 큰일나.”
“그, 그냥…이런 거 어떻냐고 묻고 싶은데…입고 나가기 부끄러워서…불렀어.”
에스테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눈망울이 이리저리 굴러간다.
그냥 보여주기 위해서라.
“에스테야.”
“…어.”
“조용히 할 자신 있어?”
에스테야의 눈이 이만큼 커졌다. 고개를 급하게 가로젓는다.
“아니, 없, 없는데? 절대 없는데…?”
“뭐…들켜도 상관없긴 한데.”
손을 뻗어 에스테야의 허리를 확 감아 끌어당겼다. 놀라 파르르 떠는 가냘픈 몸이, 바스락거리는 네글리제의 마찰음에 섞여든다. 흡, 하고 들이마시는 숨소리도.
“서, 서운…?”
“할 거야.”
어떻게 이 모습을 보고 참아. 그랬으면 내가 벌써 성인군자의 반열에 들지 않았겠냐고.
천천히 허리띠를 풀자, 에스테야가 고개를 연신 가로저었다.
“아, 아, 안돼…. 조, 좀만 참아, 응…?”
“참으면 뭐 해 줄 건데?”
“이, 있다가 기숙사 돌아가서….”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어차피 기숙사 가서도 또 할건데?”
“…미쳤어, 정말로.”
“여튼, 다른 협상책을 내밀어 봐. 얼른?”
천천히 손을 밑으로 뻗어, 에스테야의 네글리제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제법 자극적이다. 아, 얼른 답삭 안아 들곤 저 조그마한 입술 사이에서 새어나올 쾌락 어린 신음을 만끽하고 싶다.
내 가벼운 몸짓에도 발발 떨며 내게 안기던, 그 따스하고 부드러우며 달콤한 행위를 반복하고 싶다.
“…그, 그거 해 줄게.”
“그게 뭔데?”
천천히 치맛자락을 들어올렸다. 에스테야의 뽀얀 허벅지가 점차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손으로 내 손등을 눌러 내리지만, 내려질 리가 없었다.
“너, 네가 좋아하는 그, 그으….”
“그?”
내가 좋아하는 거라. 무엇을 생각했길래 이렇게 뜸을 들이는건지. 아마 저 조그마한 머리를 굴려서, 내게 뭘 내줘야 당장의 곤란을 피해갈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겠지.
“…꼬리, 해 줄 테니까….”
아?
정말로?
“너, 무르기 없기다.”
에스테야의 가냘픈 턱을 손끝으로 들어올리고, 그녀를 잡아먹을 기세로 내려다보았다. 에스테야는 조그맣게 고개를 끄덕이곤 눈알을 옆으로 돌렸다.
“진짜지, 에스테야?”
“…그래. 해, 해 줄테니까…지금은 안 돼. 알았지?”
이 정도라면, 접시 위의 마시멜로를 아낄 만한 조건이다.
“좋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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