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5화 〉 일상의 위기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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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4. 일상의 위기 (1)
그날, 에스테야는 나에게서 결국 사랑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다. 정확히는 내 입에서 그 말을 끌어내는데 성공한 거였지만, 그것만으로도 족하다 생각한다.
그리고 이젠 대놓고 나와 붙어다니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눈길 따위는 신경쓰지도 않고.
“차서운. 준비 다 했어?”
오랜만의 나들이였다. 아직 중간평가까지는 한참이 남았고, 에스테야는 나와 함께 시내로 가고 싶어했다.
나들이옷이 잘 어울렸다.
샛노란 색의 원피스에 새하얀 가디건이라니. 에스테야는 생각보다 자신에게 어떤 옷이 어울리는지 잘 알았다.
“나? 내가 뭐 준비할 게 있나.”
옷 입고 장갑 끼면 그만이지.
에스테야는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옷장에서 페도라를 하나 꺼내 내 머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의 취향이 아무래도 정장이라는 사실은, 나쁘지 않았다.
제법 잘 어울리긴 했으니까.
“좋아. 멋있다.”
멋있다니. 제법 가슴 한구석이 간질거리는 칭찬이다.
하늘이 저 멀리 구석이 조금 어두워서, 나는 우산을 챙겼다. 에스테야는 한사코 우산을 챙기기 싫다고 했고, 나는 그 속셈을 알고 있었다.
“같이 쓰려고?”
정곡을 찌르는 한 마디에, 에스테야의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꼭…그렇게 다 아는 체를 해야겠어?”
어깨를 오므린 채로 나를 올려다보는 모습이 생각보다 귀엽다. 한 쪽 손으로는 오전 내내 빗고 말려서 꾸민 머리칼을 손끝에 빙빙 돌려 감고, 그 작고 오똑한 코 끝으로 나를 찌를 것처럼 고개를 든다.
“미안, 미안. 가자.”
에스테야는 잠시 나를 더 응시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리곤 내 옆으로 달려와 팔짱을 낀다. 팔의 어느 한 부분에, 에스테야의 가냘픈 상체가 꾹 눌러 닿았다.
보드랍다. 말랑하고 따끈하게 덩어리진 두 감촉 사이로, 내가 자주 입맞추는 가녀린 가슴골이 닿는다. 너무 풍만하지 않아 오히려 만족스러운, 내가 가장 사랑하는 감촉이다.
내가 잠시 굳자 에스테야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내게 물었다.
“왜, 차서운. 평소엔 만날 파렴치하게 웃으며 만져놓고, 이렇게 닿으니까 좀 그래?”
웃겨서 한숨이 나왔다.
“허. 그렇게 보여?”
“…아님 말고?”
나는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로, 에스테야의 가슴을 왼손 손끝으로 꾹 눌렀다. 에스테야의 몸이 바짝 놀라 떤다.
“…읏.”
단번에 유두 끝을 찾아 눌렀기 때문이었다. 나를 올려다보는 눈빛에 당혹스러움이 가득하다.
“왜. 만날 파렴치하게 만지다보니 뭐가 어디있는지 다 알겠어서 그런건데?”
내 팔을 제법 세게 꼬집는 손길. 나는 피식 웃으며 에스테야의 꽃잎 한 장을 집었다.
“…흐으, 하, 으…!”
내 승리였다.
*
원피스에 가디건, 그리고 샌들은 생각보다 진리인 조합이다. 그것만큼 입은 여자애를 섬세하게 연출하는 소품은 그리 많지 않다. 평소와 다르게 머리에 신경을 좀 더 썼다면 더더욱.
에스테야는 장갑 낀 내 손을 잡은 채로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 이 세상이 내가 살던 세상보다 이삼백년 정도 더 뒤쳐지긴 했지만, 있을 법한 건 다 있다.
마카롱이나 케이크의 역사는 길었으니까.
“차서운. 이거 맛없지 않아?”
에스테야는 나보다도 더 디저트에 대해 몰랐다. 하긴, 그 오두막에서 나오질 못했을테니까.
“너, 당근 케이크도 안 먹어봤냐?”
조그마한 입술이 삐죽 튀어나온다.
“먹어봤겠어? 먹어봤겠냐고. 어?”
에스테야가 눈을 매섭게 뜬 채로 나를 올려다본다. 마냥 귀여울 뿐이라서, 에스테야의 이마를 손끝으로 꾹 눌러 주었다. 발끝으로 서선 어떻게든 나보다 좀 덜 작아 보이려는 그녀의 노력이 허망하게 무산된다.
“읏.”
“먹어보자.”
끄덕이는 고개를 따라 연한 분홍색 머리가 흩날린다. 내가 사는 것도 아니고 자기가 사는 거면서, 뭐가 그리도 좋은지.
먼저 카페 안으로 들어가 테이블 하나를 차지한다. 조금 조그마한 테이블이다.
따라 들어가면서 물었다.
“더 넓은 테이블도 있지 않아?”
에스테야의 얼굴이 이상하게 붉어졌다.
“…시끄러워. 앉기나 해.”
나는 어깨를 으쓱이곤,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몸을 뒤로 쭉 기대니 생각보다 등받이가 편했다.
“근데 시험공부는 더 안해도 돼?”
조금 걱정되긴 했다.
“시험공부?”
“그래. 시험공부.”
에스테야의 입가에 조그맣고 말랑한 미소가 맺힌다. 자신만만한 귀여움이다.
“걱정 마. 일부러 내가 읽은 책만 빼고 시험문제를 만들지 않는 이상에야 문제 없을거야.”
“자신만만한데?”
난 저렇게 자신만만하게 시험을 치러본 적이 거의 없었던 거 같은데.
“그야 필요한 책은 보면서 시험칠 수 있게 하거든.”
“…오픈북 테스트라고?”
등에서 식은땀이 주륵 흐른다.
미친.
오픈북이라고?
오픈북 테스트의 두려움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로 아마 대학의 진학여부를 판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개인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오픈북 테스트는 말 그대로 ‘책을 가져와서 시험을 봐도 된다’라는 순진하고 천진난만한 시험유형이 아니다.
그 안에는 교수님의 악랄하고도 끔찍한 저의가 숨어있다.
‘책을 보고도 풀지 못할 거다.’
그게 바로 오픈북테스트의 진가다.
“에스테야, 너 설마…책 들고 가면 된다고 생각해서 마음 편하게 있는 건 아니지?”
“…어?”
에스테야의 표정을 보니 맞군.
“잘 생각해 봐. 교수님이 바보냐? 책 보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를 내게? 그렇게 해서 100명 중에 90명이 90점 이상을 맞으면 학점은 어떻게 나눠?”
“…아?”
미치겠다.
“에스테야. 오픈북 테스트는 책 보고 푸세요, 따위의 시험이 아니야.”
토끼처럼 놀란 눈을 떠서는 연신 깜박인다. 정말 몰랐던 모양이다.
내가 이세계에 와서 마녀에게 대학생활을 가르치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아니, 이제는 마녀 이전에 연인인가.
하, 낯간지럽네.
“그럼…뭔데?”
“책을 보고도 풀지 못할 거다, 라는 의미지.”
순식간에 에스테야의 표정이 굳어갔다.
“…나 어떡하지.”
“왜.”
“시험이…일 주일 남았어.”
미쳤네. 그냥 조졌네. 그냥 완전히 조져버렸네. 에스테야는 당근 케이크가 나오기도 전에 벌써 울상이었다. 다행이다. 케이크 먹고 울면 달랠 방법이 없는데.
“일단 케이크 먹고, 그 다음에 다시 생각해보자. 오케이?”
“…알았어.”
에스테야는 눈가에 찔끔 맺힌 눈물을 소매로 닦았다. 주변의 눈길이 그리 썩 좋진 못했다. 그야, 단 한 번에 화려한 낙뢰로 기스테르를 쓰러트렸으니 적이 많아질 수밖에.
“…먹여줘.”
에스테야가 대뜸 내 손에 포크를 쥐여줬다. 확실하게 고백을 나눈 뒤로는, 제법 대범해진 모습이 마음에 들긴 했다. 눈을 깜빡이며 빤히 나를 바라보는데, 거절하기가 제법 힘들다.
주변의 눈초리가 좋지 못함에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닐텐데. 아예 각오하고 확실하게 스탠스를 정한 거겠지.
“…어휴.”
당황스러워하는 내 모습을 되려 즐거워하는 모습에 한숨이 다 나왔다. 에스테야는 킥킥거렸고, 나는 케이크의 모퉁이를 포크로 눌러 잘라냈다. 가볍게 입 안에 넣어주자, 생크림이 입술 주변에 조금 묻는다.
진부하지만, 한 번 해보고 싶은 게 있었다.
“에스테야. 잠깐 이리 와 봐.”
아, 벌써 가슴이 간질거리는 거 같다. 나는 알지만, 에스테야는 내가 지금 뭘 하려는지 모르겠지? 되게 뻔한 스킨십이지만 한때 즐겁게 보았던 드라마의 장면을 재현해본다는 건 재미있는 일이다.
“…어?”
에스테야는 입술에 크림이 묻은 것도 모르고 의자에서 일어나 내게 왔고, 나는 가볍게 무릎을 두드렸다.
“…여기서?”
그녀의 얼굴에 살짝 걱정이 드리워진다.
“잡아먹는 거 아니니까 걱정 마.”
“정말이지…?”
“그럼. 정말이지.”
에스테야는 살짝 나를 못 믿겠다는 눈치로 바라보다가, 한숨을 푹 쉬곤 내 무릎 위에 앉았다. 가냘픈 허리를 팔뚝으로 감아 안으면, 몸에 바짝 달라붙는 보드라운 감촉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었다.
“왜 이렇게 열이 나, 에스테야.”
“…씨, 몰라.”
부끄럽겠지.
아마 사람들 다 있는 데에서 스킨십을 한다는 건, 익숙하지 않은 일일 것이다. 그것도 이런 카페처럼 모두가 볼 수 있는, 모여있는 개방된 공간에서는 더더욱.
키차이 때문에 에스테야가 내 무릎 위에 앉아있음에도 눈높이는 비슷했다.
“잠깐 눈 감아봐.”
“…왜.”
“너 입술에 크림 묻었어. 좀 닦아주려고.”
그제서야 에스테야가 몸에 긴장을 풀었다.
“아, 난 또 뭐라고. 차서운, 그거 하나 닦아준답시고 여기까지 날 불러다 앉힌거야?”
“사실 그건 핑계고, 좀 안고 싶었거든.”
둘러대는 내 말에 에스테야는 아무런 의심도 하지 못했다. 내가 무슨 짓을 할지.
“얼른 닦아주기나 해.”
“눈 감으면.”
가느다란 눈으로 나를 잠깐 노려본다. 하지만 그 모습도 오히려 귀여울 뿐이다. 뱀에게 휘감긴 토끼가 제아무리 눈빛을 흘긴들 맛있어보일 뿐이지 않을까.
“…알았어. 감으면 되잖아, 감으면.”
투덜거리다 에스테야는 결국 눈을 감았고, 나는 에스테야의 입술에 묻은 크림을 가볍게 내 입술로 깨끗하게 탐했다.
“…아.”
당황스러워 말도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는, 에스테야의 붉어진 얼굴이 참 보기 좋았다.
“차, 차, 차서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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