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좀 괜찮냐?”
“.....과..장님.”
“...”
무거운 눈꺼풀을 겨우 떴을 때 내 앞엔 한과장이 앉아 있었다.
“몇..시죠?”
“8시.”
“아침이요?”
“아침이겠냐..”
“....”
어느새 난 일반병실에 옮겨져 누워있었다.
가볍운 환자복인대도 너무 무겁게 느껴지는 몸의 움직임에 상체를 일으키다 다시 눕게 된다.
“별다른 증상은 없다지만.. 그래도 택시가 반파 될 만큼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더라..”
“...회사는요?”
“지랄한다.. 네가 언제부터 회사를 챙겼다고..”
“하... 죄송..합니다.”
“뭐가?”
“여러 가지로요. 이번 계약건도 저 때문에 다 나가리 될..”
“뭐가 나가리가 돼? 계약서에 도장까지 다 찍고 오늘 벌써 공장에 오더까지 넣었는데..”
“.....”
“내가.. 미안하다.”
“...네?”
“보영씨... 정말 미안하다고...”
“뭐가요?”
“잠시... 돈에 눈이 멀었어.. 이렇게까지 할 줄은 정말 몰랐다.”
“그게 무슨 말이세요? 돈에 눈이 멀 다뇨?”
“.....”
“과장님!!”
“..그것보다.. 보영씨는 만나 봤냐?”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돈에 눈이 멀...윽!!”
“진정하라고.. 아무리 안전벨트로 몸에 큰 지장은 없었다지만 지금은 절대 안전하라고 의사가 그랬다고.”
“....말씀해.. 주세요. 돈에 눈이 멀 다뇨..”
“그것보다 보영씨는 만나 봤냐고..”
“.....”
“보영씨도 오늘 입원하는 거 같던데..”
“...네? 입원?”
“너.. 아무것도 모르냐?”
“입원이라뇨? 무슨 소리에요?”
“너 사고 나고.. 결혼도 미뤘잖아.. 쉬쉬하지만 알 사람은 다 아는 임신 사실 때문에..”
“임..신? 그게 무슨...”
“그것 때문에 저번 주였던 결혼식은 아예 파토 나고.. 그런데 엄청난 부자새끼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르겠단 말이야.. 남의 애나 임신하는 여자하고 왜 다시 결혼을 한다고..”
“그게 무슨 말이시냐고요!?”
“진짜 몰랐어? 보영씨 임신했었다는 거? 너 애잖아!”
“제..제 아이라뇨?”
“... 나도 엮인 게 있어서 도와주는데.. 진짜 사람이 할 짓이 못 되더라.. 울고불고.. 난리치는데.. 강제로 끌고 들어가서 낙태수술을..”
“무슨 말이냐고요! 그럼 보영씨가.. 오늘이 며칠이에요!?”
“....뭐?”
“오늘 며칠이냐고!!”
“...”
“보영씨.. 보영씨 어딨어요?”
“아마 지금쯤.. 수술실에서 나왔을...텐데..”
“으으윽!!..”
“이.. 이 친구야! 진정해! 그러다가 진짜 죽어.”
“이거 놔!! 이 개..... 죽여 버리기 전에.. 이거 놓으라고!”
“.....구..구대리!”
온 몸이 끊어지는 듯 한 고통을 느끼며 난 일인 병실에서 벽을 짚으며 걸어 나갔다.
팔에 꽂힌 주사바늘과 그것에 이어진 링거액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내 걸음을 쫓아오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져 깨지는 소리에도 난 무작정 병원 복도의 벽의 짚으며 간호사가 있는 곳까지 걸어갔다.
“사. 산부인과!!”
“..환자분 갑자기 일어 나시..”
“산부인과가 어디냐고! 산부인과 수술실! 수술실이 어디야!?”
“..”
“어디냐고!!!!”
“3..3층이요. 3층 복도 끝..”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난 또 벽에 기대게 된다. 다리까지 끊어질 듯 아파 고통스러웠지만 무작정 3층 버튼을 여러 차례 누르길 반복하며 천천히 내려가는 숫자를 원망스럽게 쳐다보게 된다.
느껴질리 없는 중력인데도 숫자가 줄어들수록 내 몸의 고통은 중력에 영향을 받는 듯 더 배가 되어갔다.
도착한 3층에서 난 아주 잠시 두리번거려 산부인과 수술실이란 안내 글을 확인했고 벽을 짚고 걸음을 재촉했다.
뽑힌 바늘이 완전하지 못했는지 내가 짚은 곳엔 선혈의 붉은 자국이 피비린내를 진동시키며 긴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환자분! 어디가 편찮..”
“이것 좀 열어주세요..”
“..네?”
“이 문이요!”
수술실이라 적혀 있는 유리문을 두드리며 난 소리를 또 지르게 된다.
“여긴 산부인과고요. 윗 층이..”
“알았으니까 여기 좀 열어달라고요!”
“.... 간호사!! 아니.. 경비! 경비 좀 불..”
‘지이잉~~.’
유리문이 열리며 한 대의 이동침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순간 말을 멈춰야 했다. 아니..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언뜻 본 침대의 끝엔 오보영..이라는 이름이 정중앙 투명한 비닐판에 적혀 있었기에 말도 잇지 못하고 날 부축하듯 잡고 있는 의사를 뿌리치며 침대에 달려들게 된다.
아무것도 모른 채 눈을 감고 있는 여자의 얼굴은 분명 보영이었다.
내가 알고 있는... 보영씨가 평온히 잠들어 있었다.. 아무 표정 없이 눈을 감은 채.. 아무것도 모른 채..
“보..보영씨.. 보영씨!”
내 외침에도 보영은 눈을 감은 채 날 저지하는 남자들을 지나 복도를 미끄러지듯 지나갔다.
내 목소리에 감은 두 눈에서 눈물 한 줄기를 흘리는 보영의 모습에도.. 난 날 저지하는 남자들에 잡혀 비틀거리게만 된다.
“휘유~..”
“....”
“이제 일어나셨나?”
수술복을 입은 채 마스크를 벗는 남자는 엉뚱하게도 민우 놈이었다.
“그러게 말을 잘 들었으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 아니냐고.”
“이..개..개새끼... 인간 같지도 않은..”
“그래.. 그 얘긴 벌써 한 번 들었고.. 네 애새끼라도 보러 오셨나?”
“무..뭐!?”
“닥터 양!! 야!!!!!”
민우의 말에 구부러진 작은 은색 스테인리스 그릇 같은 걸 들고 나오는 수술복 차림의 남자가 민우가 아닌 날 향해 똑바로 걸어온다...
저 그릇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것만 같아서 고개를 숙이게 된다. 그런 내 행동을 두 남자가 또 저지한다.
내 고개조차 내 마음대로 돌리지 못하도록 턱을 억지로 잡아들게 만든 내 앞에.. 남자가..
“어라~.. 이 새끼 봐라.. 눈을 돌려!”
“야!!!”
“으으악!!!!”
사람의 사고는 엄청난 충격에 적응하기 위해 의식을 끊어 버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아마도 내 의식이 내 몸을 조정해 또 다시 의식을 잃게 만들었나보다... 희미해져가는 의식 속에 겨우 정신을 다시 차렸을 땐.. 이 병원에서 제대로 정신을 차렸던 그 병실 안이었다.
“괜찮아?”
“...”
“구대리.. 정신 좀...”
‘퍽!!’
“욱!!! 이.. 이 새끼가!!”
“네가 그러고도 사람이냐! 네가 사람이야!”
“이 친구가 미쳤나! 야! 내가 누군 줄 알겠어! 네 상관이..”
“상관이면 다냐! 이런 짓을 하고도 네가 사람이냐고!”
“이 새끼가 단단히 돌았나!!”
‘스스륵!! 쿵’
‘또각 또각 또..각.....’
“피..필민씨!!”
“보..보영씨?? 모..몸은 괜...찮아요? 우..우리 아이..는요! 아이..”
“괜찮아요! 정말 괜찮은 거예요!?”
“난....”
“이 새끼 미쳤어요! 보영 팀장님 위험하니까 떨어지세요.. 단단히 돌아서..”
“머..머리를 다친 거예요? 정말 괜찮..”
“....”
“피..필민씨..”
보영의 얼굴을 부여잡고 난 뭔가를 확인하듯 더듬기 시작했다. 그리고 손을 내려 보영의 배로 옮겨 만지게 된다.
“무..뭐 하는 거예요..”
“...”
“피..필민씨..”
“괜..찮은거죠?”
“...뭐가요?”
“우리 아이요.. 우리...”
“네에!??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
“꿈..꿨어요?”
“.............”
보영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다.
악몽?.. 흉몽??... 아니면 예지몽을 빙자한 경고??..
꿈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앞뒤가 안 맞는 기억 속의 흑백 화면 속에서도 선명히 보인 붉은 핏자국만은 아직도 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었다.
“꿈..이었어요?”
“....”
“이 미친.. 네 꿈을 우리가 어떻게 알아!?”
“...과..장님.”
“뭐!! 나 고소할거야! 직장 상사 폭행죄면 하극상하고 똑같은 거 몰라!!”
“과장님.. 정말 죄..송해요.. 필민씨가..”
“..”
“제가 이렇게 고개 숙여서 사죄드릴..”
“어!.. 팀장이 왜 사과를 하십니까. 이 새.. 구대리가 절 친 거지.. 오팀장님이..”
“그러니까요.. 제가 대신 사죄드릴게요. 정말 죄송..”
“과장님..”
“...뭐!?”
“잠시만.. 보영씨랑 얘기 좀 하게 잠시만 자리 좀 비워주세요.”
“.......”
“정말 중요한... 얘기라서 그래요.”
“...알았다!. 그래도 용서 못해! 나!! 진짜 고소할 거야!”
“네...”
“...뭐!?”
“아..닙니다.”
“에휴~.. 턱이야..”
투덜거리며 나가는 한과장을 쳐다보며 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된다.
한과장이 고소를 하겠다는 장난스러운 말 때문이 아니었다. 방금 전 있었던.. 너무도 생생했던 일이 꿈이라는 사실과 내 앞에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날 빤히 쳐다보는 보영의 건강한 모습 때문에 내쉬게 된 안도의 한숨이었다.
“보영씨..”
“...네?”
“생리 언제 했어요?”
“새..생리요?”
“네!”
“..........!!!!!!!”
“언제 했어요?”
“이..번 달은 아직...”
“계속.. 헛구역질만 나오고.. 음식을 못 먹었죠?”
“.....네.”
“다른 건요? 몸에 다른 이상은 없어요?”
“.......”
“다른 것도 있어요?”
“...벼..변..비...”
“......”
“서...설마요.. 민우씨랑 할 때엔 항상 안전한 날에만..... 필민씨.. 방금 우..리 아이라고 했어요?”
“...”
“그..그럴 리가 없어요.”
“확실해요?”
“.....”
“우..선 검사부터 받아요. 약국에서 그런 거 팔잖아요... 임신..”
“....”
“왜.. 그런 표정을 지어요?”
“달..라 진 건 없잖아요.”
“....네?”
“아이는... 지울게요.”
“......”
“우리.. 아이는..”
“지금 뭐라고 했어요?”
“....”
“아이를 지운다고요!!!!?”
“그럼.. 어떡해요? 아이를 낳아요? 그 남자가 어떤 사람인..줄 알면서.. 필민씨가 사고 났다는 연락 받고.. 제가 가장 먼저 떠올린 사람이 누군지 아시잖아요.. 마..맞죠?.. 그 사람 짓...이..... 그럼 그 사람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인지..”
“무서워서!!.. 그래서 아이를 지운다고 지금 말하는 거야! 너 그런 여자였어! 아니면 나 같은 놈 아이는 도저히 못 키우겠다는 거냐!”
“그게 아니잖아요!!!”
“그럼요!”
“어!~~.. 보영아..”
손이 떨려온다.
꿈에서 봤던 그 잔인한 놈이 우연을 가장해 내가 있는 입원실로 걸어 들어왔다. 그리곤 너무도 친숙하게 보영이를 불렀다.
“맞네! 목소리가..”
“미..민우씨가..여..여긴 어떻게...”
“어떻게 긴.. 이 병원 과장놈이 내 친구잖아. 마침 두통이 있어서 들렸었는데..”
“....”
“어라~.. 많이 본 분이신데... 누구시더라?”
“.......”
“우리 구면이죠?”
“......”
“뭐야.. 이 분위기..”
고급 양복을 입고 있는 신사의 모습으로 민우는 나와 보영이 둘을 동시에 희롱하고 있었다.
그러나 나와 보영은 제대로 된 대답조차.. 어떠한 항변조차 내 놓을 수 없었고 그냥 꿀 먹은 벙어리처럼 떨기만 해야 했다.
“하긴 뭐.. 하루에도 몇 백 명이나 만나는데 어디서 만났을 수도 있겠지요.. 그나저나 몸이 많이 상하셨네.. 교통사고라도 당하셨나 봐요.”
“.....”
“....안전벨트 하셨으니 이정도지.. 아니었으면 골로 가셨겠네..”
“...”
“그래도 천만 다행이셨네.. 이정도로 많이 안 다치 신 게..”
“....덕...분에요.”
“네? 하..하하하.. 누가 들으면 제가 무슨 짓이라도 한 것처럼 들리겠어요.”
“....”
등골을 넘어 온 몸에 소름이 돋는다.
민우란 남자가 짓는 미소는.. 미남을 넘어 훈남인 인상에도 눈은 뱀처럼 변화 없이 날 노려보는 가운데 입 꼬리만 올려 웃는 모습에 소름이 돋는다.
“거래처 직원이라도 되시나.. 뭐 상관없나? 네가 결혼 전까지 자유를 만끽하게 해 준다는 약속을 했으니 누굴 만나든 상관이 없겠지?”
“..아..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네??..그..게 아니고..”
처음으로 보게 된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영이가 어떻게 민우를 대했는지.. 민우란 놈이 보영이에게 어떤 모습으로 보영을 대했는지를 처음으로 보고 느끼게 된다. 망원경이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봐왔던.. 모든 상황에서의 보영에게 느꼈던 답답함이란 것이 내 오판이었다는 걸.. 내가 아무것도 몰랐다는 걸 느끼며 보영을 변호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목구멍까지 넘어 왔지만..
입술이 움직이질 않는다.
“오빠!!!”
“미..미희야..”
“안 죽었네!.. 아휴.. 놀래라.. 연락받고 갑자기 무슨 날벼락인가 했는데.. 진짜 뭐냐!!!”
“여긴 어떻..게 왔어?”
“어떻게 오긴! 단축 번호 1번에 아직도 날 저장해 놨냐!? 송구스럽게 시리!!”
“...”
“그런....데.. 누구셔?”
“우린 그만 가지..”
“네???...아..... 네.”
“그럼 몸 조리 자~~알 하시고.. 그렇지 않아도 삭막한 시대에 살면서 이런 사고는 한 번으로 족하지 않겠습니까!? 그렇죠?....구..필민씨??”
말을 하며 살짝 고개를 틀어 내 침대 앞에 걸려 있는 명찰을 보며 이름을 강조하는 민우놈의 행동에 내 소름 돋음은 극에 달하게 된다.
“저 인간 뭐래!? 생긴 건 끝내주게 생겼는데 뭐 저렇게 살벌하냐?”
“...살벌해?”
민우와 보영이가 나간 병실에서 미희가 자리를 잡고 앉으며 조잘 거린다.
“오빤 못 느꼈어? 누구래?”
“...아..는... 그냥 아는 사람..”
“오빠 저런 사람하고 어울리지 마. 내가 남자를 좀 많이 겪어봐서 아는데.. 여자를 지 아랫것처럼 대하면서..”
“남편은?”
“응? 남편이 문제냐? 갑자기 병원에서 연락 와서 보호자를 찾는데!”
“...”
“어떻게 날 1번으로 지정을 했데.. 아직도 나한테 흑심이 가득한 거 아니야?”
“지랄을 해라.. 으윽~”
“그래도 천만 다행이네.. 자동차 완전히 박살났다며? 택시에 타고 있었는데 이정도면 진짜 천운이다! 천운!”
“안전벨..트를 하고 있었으니까..”
“어디 가다가 사고 난건데?”
“어디 간 게 아니고.. 서 있는데 와서 박더...”
뒷좌석에 앉은 날 굳이 안전벨트를 하게 했던 기사의 모습과 날 들이받은 트럭 운전기사를 떠올리며 뭔가가 어긋나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택시기사를 매수했다는 건 충분히 쉽게 의심할 수 있었던 상황이지만..
트럭이 달려와 택시를 박은 상황이 석연치 않았다. 졸음운전을 했다며 어쩔 줄 몰라 하던 트럭기사의 모습에 비해 너무도 절묘한 타이밍에 들이받은 상황이 계속 머릿속에 걸렸다. 만약 택시기사가 약속 된 장소에서 약속 된 시간에 편의점을 향해 나간 거라면...
그리고 머릿속에 스쳐지나간 민우 놈의 말.. 의사에게 ‘죽었냐.’라고 묻고는 대답에 ‘그럼 됐다’라는 말이 날 다시 소름 돋게 만들었다.
“괜찮아 오빠?”
“..으..응??”
“얼굴이 하얘졌어...”
“....잘 들어.”
“...뭐?”
“내 집 비밀번호 알지...”
“응.”
“..그럼.....”
“그 분은 갔어요?”
“...어떻게 왔어요.”
“네? 어떻게라뇨..”
“민우 놈하고 나갔잖아요.”
“.... 집에서 옷 갈아입고 다시 왔어요.”
보영의 말대로 아까와는 다른 편한 복장이었다.
편한 복장이기보다는 보영과는 어울리지 않는 몸에 달라붙는 운동복이었다. 바지는 엉덩이 굴곡과 도끼자국까지 그대로 보여주는 진회색의 트레이닝복이었고 상의는 바람막이 노란 후드점퍼를 입고 있었다.
병실에 들어와 모자를 벗은 보영은 흡사 변장을 한 듯 보였다.
“...”
“왜..왜요?”
“혹시.. 지금 변장한 거예요?”
“....네.”
“누가 봐도.. 보영씬데요.”
“아니에요!.. 들어오는 동안 아무도 몰라 봤어요. 민우씨 친구란 분도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는데 휘파람만 불면서..”
“..휘파람을 불어요?”
“......네.”
“돌아봐요.”
“....네?”
“뒤로 돌아서 똑바로 서 봐요.”
“.....”
의사 놈이 왜 휘파람을 불게 되었는질 금세 이해할 수 있었다.
완벽한 원을 그리는 두 개의 동그랗게 맞물린 엉덩이는 그 골짜기의 움푹 팬 틈까지도 선명히 보여주고 있었다.
“왜..왜요?”
“아~~.. 너무하네..”
“...네?”
“죽을 거 같이 아픈 사람 앞에서 그런 복장으로... 피를 쏠리게 해서 죽일 작정입니까?”
“....?”
보영이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날 쳐다보다 내 하반신의 볼록 튀어나온 환자복을 발견하곤 어이없어 한다.
“지금 농담할 상황이에요!?”
“목숨 건 개그라고 해두죠.”
“미쳤어...”
“큭큭..아야야...”
“괘..괜찮아요?”
“아뇨... 죽을 것처럼 아파요..”
“....”
“보영씨를 만나려면 슈퍼맨쯤은 돼야 하나 봐요. 만나면 만날수록 상처만 늘어가니...”
“...”
“하하하.. 농담이에요. 그냥 농담한 걸 가지고 그렇게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 제가 뻘쭘..”
“민우씨가....”
“...?”
“민우씨가 결혼을 한 달 미루자고....”
“...미루자니요? 결혼식장도 다 예약해 놓은 거 아니에요? 청첩장은요? 벌써 다 돌렸을 거잖아요.”
“저흰 청첩장 같은 거 안 돌려요..”
“네?... 그럼 결혼식장은...”
“그건 다시 예약하면 된다고..”
“갑자기 왜요?”
“.....모르겠어요.”
“.....”
“왜요? 짚이는 게 있어요?”
“보영씨.. 민우 놈이 다른 얘긴 안했어요?”
“...네.”
“.....”
“갑자기 심각한 표정으로 왜 그래요?”
“아니에요. 보영씨...”
“...네?”
“보영씨 저 믿..”
“앗!!”
“..왜.. 그래요?”
“자..잠깐만요...”
갑자기 보영의 얼굴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엉덩이를 살짝 들썩거린다.
“어디 불편해요?”
“..자.잠..시만요. 금방.. 올게요..”
벌떡 일어난 보영은 역시나 당황한 얼굴로 서둘러 병실을 빠져나가 뛰어가는 발소리를 들려줬다.
약 2~3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돌아온 보영은 애써 진정된 표정을 지으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무슨 일이에요?”
“생리가..”
“네? 생리라뇨? 생리면...”
“....”
내가 놀라 다시 질문을 하자 보영이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생리가 시작 된걸 말하듯 고개를 끄덕이며 조금은 부끄러운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난 보영의 얼굴을 쳐다보며 내가 각오했던 모든 것에 대해 어처구니없어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럴 리가 없어요. 분명히..”
“임신 아니라니까...”
“....분명히.”
“생리불순이었나 봐요. 스트레스가 원인인.. 말했잖아요.. 저 스트레스성 위염도 있었다고...”
“그럴 리..가 없는데...그럼 왜 헛구역질도 하고.. 갑자기 떡볶이도 먹고 싶다고...”
“필민씨 다이어트 한 번도 안 해봤죠?”
“다이어트요?”
“생리불순으로 인한 호르몬작용으로 여자들은 가끔 이럴 때가 있어요.”
“....”
할 말을 잃게 된다.
“정말.. 생리 시작했어요?”
“.....그럼요?”
“혹시.. 거짓말 하는 거 아니에요?”
“...참나. 그런 걸 왜 거짓말을 해요.”
“보여줘요.”
“네에!!????”
“보여주라고요. 정말 생리를 하는 건지.. 아니면 날 안심시키려고 하는 건지.. 확인시켜달라고요.”
“미....미쳤어요!?”
“거짓말이죠? 제가 엉뚱한 생각이라도 할 까봐.. 거짓말 한 거죠?”
“...징..그럽다고 하지나 말아요!”
“...”
보영이가 일어나 닫혀 있는 병실 문을 한 번 확인하곤 천천히 트레이닝 바지를 내린다.
분홍색의 팬티를 입고 있는 보영의 하체를 뚫어져라 쳐다보는 날 조금은 부담스럽게 느꼈는지 주저했고 곧 팬티까지 내려 내게 하얀색의 패드를 보여준다.
보영의 말대로.. 분명 패드의 중심엔 선혈의 붉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포비..돈이죠?”
“..”
“빨간약..을 뿌려서..”
“냄새라도 맡게 해드려요?”
“.....”
“어..어머!!”
깜짝 놀란 보영이가 팬티를 급히 끌어 올려 입을 때 분명 보영의 보지 틈사이로 붉은 빛 액체가 흘러나오는 걸 볼 수 있었기에 더 이상의 의심조차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제 됐어요?”
“....”
“정말 임신 아니니까.. 괜한 생각하지 말아요. 그런데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었어요? 민우..씨가 결혼을 미룬 이유라도 알고 있어요?”
“....아마.. 끝까지 갈 작정인가 봐요.”
“끝..까지 가다뇨?”
“결혼식을 미룬 것도.. 제 몸이 완쾌 될 때까지 기다리려는 게 분명하고.. 아마도 그동안 절 회유도 하려고 시간을 벌려고 들겠죠.”
“민우씨가 그렇게까지 한다고요?”
“확실..할 거예요. 이번에 겪은 교통사고도... 민우 놈이 게임 같이 인생을 즐긴다고 했죠?”
“...네.”
“그럼.. 맞을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보영씨가 얘기했잖아요. 민우란 놈이 무서운 놈이라고..”
“....”
“상류사회에서.. 결혼을 미루거나 파혼이라도 하면.. 타격이 크겠죠?”
“당연하죠..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미루거나 파혼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차라리 살다가 성격차이라는 흔한 이유로 이혼을 하면 했지...”
“이혼하고 파혼하고.. 그게 그거 아니에요?”
“엄연히 다르죠.. 파혼이란 건.. 둘 중 누구 하나한테 문제가 있다는 것이고.. 그건 문제가 있는 한 명한테만 타격을 주는 게 아니니까요. 명예가 걸린 일이기도 하고요.”
“이혼이 더 치명적이지 않아요?”
“작년 한 해 동안 이혼율이 얼만지 아세요? 하루 평균 310쌍 이상이에요. 평균치로만 봐도.. 결혼 한 부부 중 1/3은 이혼을 했다는 거죠..”
“그렇게 많이요?”
“네..남자들은 그런 거에 둔감하지만.. 여자들은 민감하거든요.. 그래서 아직까지 양 가의 명예가 걸려 있는 결혼식은 절대로 미루는 일도,, 파절하는 일도 없어요. 결혼 후에 이혼하는 것까진 부부개인사로 차라리 낫다는 생각을 하는 게 일반적이고요.”
“그러려면 왜 결혼을 한데요? 그렇게 복잡하게 이혼을 정당화하려면 차라리 나 같으면 그냥 파혼을 하고 말지..”
“그게 제가 사는 세계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거죠...”
“민우 놈이 별다른 말이 없었다고 했죠?”
“....네.”
“그럼.. 지금 바로 집으로 돌아가요.”
“...네?”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시라고요. 그리고.. 연락도 하지 말고요.”
“....”
“알았죠?!”
“..네.”
“..전 걱정하지 말고.. 빨리 가요.”
생각에 정리가 필요했다.
확실한 건 날 태운 택시기사와 내가 타고 있던 트럭 운전자까지 사주할 만큼 민우란 놈이 위험한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번화가에서 가까운 병원이 아닌 이곳으로 날 태우고 온 구조대원까지... 아주 치밀하게 짜인 각본에 의해 내게 경고를 보내는 민우 놈의 무서움을 깨닫게 된 지금 섣불리 무슨 행동을 할지에 대해서도 고민하게 된 나였다.
민우 놈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만약 내기란 것을 넘어 말을 했던 네토플레이인지 게임인지를 하는 놈의 정신 상태부터 파악을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난 링거가 달린 봉을 끌어 휴게실 쪽으로 걸어가 동전교환기에서 동전을 바꿔 컴퓨터에 밀어 넣었다.
네토를 검색해본다.
운동선수 이름.. 수도꼭지 회사.. 일본어로는 생선이나 소시지의 표면이 변질 된 것이라는 뜻의 단어 풀이... 내가 찾는 단어의 뜻이 아닐 거란 생각에 페이지를 넘기려던 순간.. 연관검색어에 네토성향..이라는 단어를 발견하게 되었다.
내 여자가 다른 남자와 관계를 맺는 상황을 관음하는 기호.. 네토에 대한 설명을 가장한 광고 페이지와 애매모호한 뜻풀이에 다시 검색을 시작했고, 네토라레란 단어를 확인하게 되었다.
일명 NTR....
믿고 있던 여자가 보여주는 배신에 의해 배덕감과 함께 쾌감을 느끼게 되는.. 전제조건으로 초반엔 여자의 주인인 남자가 모르거나 알면서도 모른 채하는 순서를 지나...
뭔 소리인지 잘 이해가 가질 않아 몇 번이고 다시 읽게 된다.
간단히 말해 자신의 여자를 뺏기면서 느끼게 된 감정들의 변화에 쾌감을 느끼게 된다는 말인데.. 내 경우와 교차하며 생각하니 그나마 쉽게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민우 놈이고..
보영이 여자 주인공,... 그리고 지금까지 난 주인공 몰래 여자를 뺏는 입장이었던 것이다. 내가 이해한 내용과는 좀 다른.. 소설이나 게임에서의 이 네토라레란 주인공은 찌질하고 답답하고.. 변태기질이 다분한.. 그러면서 남자 구실은 제대로 못하는 놈인 것만은 확실해 보였지만.. 민우 놈과는 일치하는 면이 하나도 없었다.
민우 놈이 결코 찌질하지도.. 그리고 어느 하나 모자란 놈도 아니었기에 이 네토라레란 관계가 이루어 질 수 있을까에 대해 고민하던 난.. 보영과 민우놈의 섹스를 떠올리게 된다.
너무나 짧은 런 타임.. 그리고 자세히 보진 않았지만 분명 나와는 비교도 안 될 작은 물건...
신이 공평하다고 그나마 느끼게 된 이유였던 그런 민우의 상황만이 이 게임과 소설들의 주인공과 일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결말이 비극이 되는 네토라레의 내용과는 일치 될 리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즐기며 게임이라는 변태적인 놀이를 하는 민우 놈도 결국엔 보영과의 결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과.. 날 가지고 놀 충분한 재력과 권력이 주인공들과는 다른 자존심을 담고 있을 거라는...
“구필민 환자님.. 여기서 이러시면 안 된다고요!”
“네?.,...금방 들어 갈 겁니다.”
“경찰에서 조사한다고 나오셨어요. 병실로 빨리 가보세요.”
“경..찰이요?”
“네. 교통사고에 대해서 물어 볼게 있다고..”
“이 시간에요?”
“.....가끔 오기도 해요.”
“....”
병실로 돌아간 날 기다리고 있던 건 김검사였다.
“...”
“그렇게 노려보지 말라고. 나도 몰랐던 일이니까.”
“그게 말이 됩니까?”
“말이 되니까.. 여기 왔겠지?”
“....”
“몸은 좀 괜찮나?”
“..덕분에요.”
“일종의 경고라고 생각하시게.. 정말로 끝을 내려고 했으면 그런 번거로운 방법을 쓸 친구가 아니었으니까..”
“이게 경고라고요? 그럼 작정하고 죽이려고 했으면? 아무리 썩어빠진 대한민국이라고 해도 그게 쉽게 가능한 일입니까?”
“왜? 궁금하나?”
“....”
“돈이 있고, 수사를 할 수 있는 권력을 회유할 수 있는 친구가 민우란 친구라는 거 몰라? 덧붙이자면.. 사망원인까지 공표하는 의료진도 민우의 수하라는 생각은 안 해 봤나? 모든 국가에서 사람의 목숨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대표적인 구릅이 세 개가 있다고, 군대, 사법권, 그리고 의사야! 사람을 죽이고도 서류만 작성하면 넘어갈 수 있는 족속들이 누군지 잘 생각해 보라고.”
“.....”
“하지만.. 이번 사건은 정말로 난 관계가 없었다는 걸 알려주러 왔네.”
“그걸 알려주려고 여기까지 행차하셨다고요?”
“큭큭~.. 제대로 열 받았군..”
“지금 웃음이..... 알겠습니다. 경고는 너무나 잘 받았네요..”
“그리고..”
“..”
“민우의 의지가 먼질 알았으니 목숨 부지하려면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도 알았겠지? 이건 다시 놔두고 감세.”
“김..검사님..”
“...응?”
“민우란 분... 의식이 오락가락 할 때 들었는데요. 네토..게임이란 게.. 뭡니까? 알아보니까.. 네토란게 자기 여자를 남한테 뺏기는..”
“....”
“그런 걸 즐기는 족속입니까? 민우란 사람이?”
“......후~.”
“...”
나가려던 김검사는 처음으로 접객용 의자에 앉아 날 쳐다본다.
폼에서 전자 담배를 꺼내 입에 물며 아주 잠깐 동안의 생각 정리를 하곤 날 노려보듯 쳐다보던 시선을 걷고는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민우란 캐릭터.. 어떻게 봤나?”
“케..릭터요? 돈 많은 집안에서 태어나서 남부러울 거 하나 없는 도련님.. 아닙니까?”
“그리고?”
“....성적..능력이 좀 약..한...”
“큭큭..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는 일이 빈번할수록.. 사람이란 게 감정이 무뎌진다고 하더군. 그런 놈이 난생처음으로 자신의 것이 자신의 뜻대로 움직여지질 않으니 얼마나 재미있겠나..”
“재미요??”
“아마 그 배덕감마저도 신선한 충격과 쾌감으로 느껴질 걸..”
“.......”
“여기 과장 얘기 들어보니 민우 놈이 거시기 수술도 생각중이라고 하더군.. 함구령과도 같았던 그 쪽 문제까지 자네 때문에 고쳐보려는 거 같단 말이야.”
“..결혼을 미룬 다는 것도..”
“알았으면 잘 하라고. 미뤄봤자 2~3주 정도니까.”
“2~3주라는 건..”
“핑계는 아주 간단하지. 얼마 남지 않은 보영씨 아버지의 교육감 선거를 이용한다는 핑계로 남들이 전부 호응할 수 있는 얘기로다 말이야. 사실 갑자기 결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타이밍 상 더 안 좋아 보였다더군.”
“....”
“만약에 일이라도 틀어진다면.. 교육감이 문제겠나? 보영씨를 안 건드린다는 얘기였지 고통을 안 준다는 얘긴 아니었으니까 말이야.”
“고..통이라뇨?...”
“내가 알고 있는 민우란 친구는.. 받은 건 꼭 갚아줘야 한다는 주의란 말이야. 보영이가 바람 피운 게 문제가 아니라면 말이야. 자기 뜻대로 움직이지 않고 반항하는 걸 더 못 참겠다는 인간이라고 생각해본다면...”
“그럼.. 보영씨 아버님한테 해코지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
“설...마요. 아무리 그래도 아내가 될 사람의...”
“나야 모르지.... 그럼 몸조리 잘하시고~.. 민우 놈이 원하는 건 짖지도 물지 않는.. 잘 조련되어 죽으라면 죽을 줄도 아는 셰퍼드란 종이란 것만 알아두라고..”
김검사가 나가자마자 난 서둘러 보영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사실을 보영이도 확실히 알아야만 한다는 걸 느꼈고 앞으로도 끝까지 모른 채를 해야 할 것이란 걸 알려주기 위해 전화를 걸게 된다.
[여보세요..]
“보영씨 저에요.”
[잠시 만요.. 블루투스가... 아.. 잠깐만요...]
“...”
[됐어요.]
“집이에요?”
[거의 도착했어요. 블루투스 이어폰이 없어졌어요. 스피커 모드니까 울리더라도 조금만 참아줘요. 금방 도착해요.]
“보영씨 제 말 잘 들어요. 무조건.... 무조건 민우란 놈이 시키는 대로 하세요.”
[그러라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고!!... 무조건.. 우선은 민우 놈의 비위를 다 맞춰주라고요. 어떤 짓을 시키든 간에...”
김검사의 말과 검색해본 자료를 통해서라면 민우 놈은 날 통해서 모든 사건을 발생시킬 목적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보영이에겐 어느 정도의 안전이 보장 된 상태라는 생각을 유추할 수 있었다. 반항이나 저항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알았죠! 무조건..”
[도착했어요. 잠시만......]
“.....”
[덜컥....]
부스럭 거리는 소리가 핸드폰을 통해 전해지며 잠시 동안의 침묵이 이어졌다. 그리고 곧 들려온 보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건 내게 하는 말이 아님을 쉽게 알 수 있었기에 난 더 바짝 귀에 핸드폰을 대며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집중한다.
민우 놈이 보영의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것이 분명했다.
[민..우씨..]
[어디 다녀오나?]
[우..운동이요.]
[.....]
[산책..겸 운동 다녀왔어요..]
[산책을 차를 타고 다녀오나?]
[네?.. 근처엔.. 마땅한 곳이 없어서요..]
[..들어가지.]
다행히 핸드폰은 꺼지지 않았다.
‘삐삐’ 거리는 비밀번호 누르는 소리와 계단 오르는 소리.. 그리고 다시 도어락을 여는 소리가 이어졌고 곧 소파에 앉는 소리와도 같은 둔탁한 마찰음이 들려왔다.
[어..쩐 일이세요..]
[....]
[.....]
[내가 오는데 이유가 있어야 하나?]
[늦..은 시간이라서...]
[이 늦은 시간에 어딜 다녀왔지? 아~.. 산책 다녀왔다고 했지..]
[..네.]
[정말 산책을 다녀왔나?]
[그..그럼요.. 그럼 이 시간에 어딜 다녀..왔겠어요..]
[당신은 참.. 솔직한 사람이야.. 얼굴에 다 드러나고..]
[..네??..그게...]
[....]
[.......]
[뭐하나?]
[...네..네?]
[뭐하냐고.. 안 벗어?]
또 다시 부스럭 거리는 소리와 둔탁한 충격음이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왔다.
보영의 핸드폰은 아까 봤던 점퍼 안에 들어 있는 게 분명했다. 그건 조금 더 작아진 민우 놈의 목소리로 확인 할 수 있었다.
[요즘 한동안 안했더니.. 다 잊었나?]
[...]
[으음~...그렇지....]
[....]
시작 됐다..
평소와 마찬가지로 보영은 민우 놈의 무릎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자지를 빨아주고 있을 것이다. 그 미세한 소리까지는 들려오지 않았지만 확실했다.
[음~~~~..]
[....]
[연습이라도 하나?.. 많이 늘었군..]
[쯔읍~.. 여..연습이라뇨...]
[...왜 그렇게 놀라지?]
[마..말도... 안 되는 얘길...하시니까...]
[................]
[...]
[됐으니까.. 평소처럼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
[왜?]
[저.. 생리 시작했어요..]
[...]
[죄..송해요.]
[그래서?]
[...네?]
[그래서 못 하겠다고?]
[지..저분하잖아요.. 그리고 생리 땐 민우씨도....]
[상관없으니까. 계속 하라고.]
[....민우씨..]
[..]
[....알겠어요.]
머릿속에 장면들이 그려진다.
들려오는 소리에 상상력이 더해지며 보영과 그리고 의자에 앉아 있을 민우 놈의 모습이 그려졌고 주먹을 쥐게 된다. 주객전도란 말을 떠올리며.. 보영에게 협박하듯 얘기하는 민우 놈을 속으로 욕하게 된다. 불륜이라고 할 수 있는 나와의 보영이에 대한 관계도 잊은 채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작은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도 화가 나기 시작했다.
[....느끼기는 하나?]
[..무..무슨?]
[...]
[너무 내 생각만 했나보군.. 자네가 느끼는 지에 대해선 단 한 번도 생각해 본적이 없으니..말이야.]
[....]
아주 작게 질겅거리는 소리가 비릿한 피로 인해 들려오는 소리임을 확신하며 민우 놈의 말을 듣고 있었다. 갑자기 분위기를 변해 말하는 민우놈의 말투에 오히려 공포란 감정과 함께 불안감이란 느낌을 받게 된 나였다.
평소와 달리 부드럽게 얘기하는 민우의 말투가 날 더 그렇게 느끼게 만들었고.. 그건 보영이에게도 마찬가지인 듯 아무 말도 없이 침묵만을 일관했다.
[내 가방..]
[...네?]
[가방 안에 있는 작은 상자 있으니까 가져오라고.]
[툭~... 찌이익~..]
[마저 뜯으라고..]
[부스럭~ 쓰으윽 찍~.툭]
[이..이게 뭐에요?]
[여기에 씌워라.]
[ㄴ....네???]
[내 말이 안 들려?]
[....]
[말아서 여기에 입구부터 천천히 밀어 끼워 넣으라고.]
[미. 민우씨..]
[왜? 싫어?]
[...아..니에요.]
잠시 동안의 침묵과 함께 부스럭거리는 소리마저도 조용해 졌다.
[천천히.... 조여서 아프다고.]
뭔가를 하고 있는 게 분명했지만.. 최신 핸드폰의 스피커 모드라고 해도 한계가 있었다. 아주 작게 들려오는 소리를 분간조차 할 수 없어 귀에 밀어 넣듯 핸드폰을 더 바짝 대보지만.. 역시나 어떤 행위를 하는 지조차 알 수 없었다.
[됐다.. 이제 다시 올라타라.]
[미..민우씨...]
보영의 목소리가 심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아~.. 이렇게 굵은 건 넣어본 적이 없지!?]
[왜...왜 이래요..]
[다 들어가니까. 걱정 말고 다시 올라타라고!]
[민우..]
[쓰읍~~! 말 안 들을래?!]
[....]
[뭐하냐고!]
[....으.......윽.... 아..아파요.... 도..도저히 안 들어갈 거..]
[철퍼덕~!!]
[악!!!!!!!]
[들어가잖아..]
[아!!]
[그럼 이제 움직여.]
[아..아파요.]
[아파? 아파서 못 움직이겠다고?]
[...네..... 이..거 빼고.. 하면 안 돼요? 윽...]
[너만 아픈 게 아니라고. 나도 아픈데 참고 있잖아!? 그럼 고마워하면서 스스로 움직여야지!...]
[악!!...미..민우씨.. 잘.. 잘 못했어요.. 그..그만...]
[뭘 잘 못해?]
[....]
[잘못한 거 하나도 없다고.. 그러니까 평소처럼 움직이라고.]
[아악!... 그..그만....해요.. 정말...]
[힘들어? 그럼 내가 도와주지..]
[으윽! 윽!!!! 아윽!!! 그...그만!!! ]
[그만은.. 후~.. 안되겠다. 내가 제대로 해 줄 테니까.. 엎드려라.]
[민우씨.. 이..이런 거 실..싫어요.. 제...제발..]
[엉덩이 치켜세워!!!]
민우의 목소리가 핸드폰 스피커를 통해 크게 울려왔다.
[그렇지!.. 우리 보영씨는 말도 잘 듣잖아!? 항상 순종적이고... 내 말이면 독약이라도 받아먹을 정도로 아니야?]
[.......]
[아니냐고!]
[마..맞아요. 그러니.... 아악!!!!]
[퍽!~ 퍽!~~ 퍽퍽~! 퍼어억~~~]
[헉..헉.. 좋..지... 미쳐버릴 정도로 좋냐?....헉~헉~~]
살이 부딪히는 소리와 보영의 고통에 절은 고함소리가 핸드폰 너머에서 내 귀를 강타한다.
말 그대로 내 귀를 통해 전혀 예상치 못했던 충격으로 뒤통수를 가격당한 난.. 결국 핸드폰의 통화 종결버튼을 눌렀고, 이를 악물며 눈을 부라리게 된다.
민우가 어떤 취향의 소유자인질 이젠 너무나 잘 알게 된 난.. 오히려 거부감을 느꼈다.
싸움구경만큼 재미있는 게 남의 정사장면이라고 했고 그런 상황에서의 관음이란 자극적인 쾌감이 얼마나 큰질 이미 미희란 여자로 인해 깨닫게 되었지만.. 그건 내게 있어서 남의 여자일 경우였다.
잠시 동안의 착각일지라도 내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를 상황에 난 목숨까지 걸려 했었기에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섹스 소리에 쾌감이란 감정은 전혀 없는 분노만을 먼저 느꼈다...
‘........... 네토..라레??.. 좋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