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화
캉!
제 몸을 노리고 매섭게 달려들던 검을 아슬하게 막은 것은 그의 검이었다. 고막을 짓이기는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떨어진 두 검은 각장의 주인에게로 거칠게 돌아갔다.
나 아직 안 죽은 거 맞지? 무서워서 몸 하나 깜짝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레 제 몸으로 눈이 돌아갔다. 후우, 다행히 몸에 칼이 꽂히는 불상사가 일어나진 않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검에서 튀겨진 불꽃은 자연스레 그에게 옮겨붙었다. 항상 왕자님이라면 껌뻑 죽어 나가던 사람이었는데. 그의 매서운 눈빛에도 불구하고 맥시안은 허리를 조금도 굽히지 않은 채 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 왕자님께선 큰 실수를 하고 계신 것입니다.”
“내 명령을 불복하는 것보다 더 큰일이라. 하, 죽기 전에 무엇인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군.”
그는 재빠르게 맥시안의 목에 검을 가져갔다. 검이 일으킨 바람이 맥시안의 잿빛 머리카락을 흩날렸지만 여전히 맥시안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그녀가 이 사건의 원인이라는 소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을 없애는 것이 제일 아닙니까?”
“내가 그녀를 보호하라는 명령을 먼저 내렸을 텐데.”
“따를 수 없습니다. 제겐 그깟 소문보다 왕자님이 더 중요합니다!”
맥시안의 말에 일순 그가 쥐고 있는 검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맥시안의 흔들리지 않는 눈동자가 오히려 그의 눈동자를 떨리게 만들었다. 충직한 부하의 간언이라는 걸까. 나를 죽이려고 했던 것은 못마땅했지만 그를 대놓고 미워하기도 힘들었다.
어쩌면 그의 입장에선 내가 죽일 만큼 미운 사람일 수도 있었으니까.
“이곳에 비시아가 있다!”
돌연 맥시안이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를 들은 적들이 재빠르게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기 시작했다. 수많은 남자들 속에서 나 하나를 찾아내기란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비록 그가 날 망토로 숨긴다고 할지언정, 완전히 숨길 수는 없는 노릇이라 결국 찾아낸 이들 중 한 명이 큰 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비, 비시아 님!”
나를 보고 반색하는 그를 향해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 거지? 기뻐해야 하나? 아니면 떨떠름한 웃음?
“이래도 그녀를 감싸야 한다고 생각하는 겁니까?”
날카롭게 날이 선 맥시안의 말이 그에게 날아가 꽂혔다.
“그녀 때문에 이곳도 발각된 것입니다. 앞으로의 대사가 얼마나 중요한데 저딴 계집 때문에 그르쳐야 하는 겁니까?”
“더 이상 싸우지 말아요.”
더 이상 가만히 두고만 볼 순 없었다. 두 사람을 중재하고자 앞으로 나섰다. 맥시안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지만 듣는 당사자 앞에서 계속 말하는 모습이 보기 싫은 탓이기도 했다. 구구절절 옳은 말이긴 한데 내가 앞에 있다는 것 정도는 신경 써 줘야 하는 거 아냐?
맥시안을 힐끔 바라보다 여전히 자신을 적대시하고 있는 그의 눈빛과 마주치자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나도 너 싫어. 조상님이 레드 라이트를 켜고 1분에 1번씩 경보를 울리는 것처럼 볼 때마다 싫더라니.
결코 미워할 수도, 그렇다고 좋아할 수도 없는 그를 향해 입술을 샐쭉대곤 시선을 돌렸다. 뭔 일인가 싶어 어느새 다들 싸움을 멈춘 채 나와 그들을 바라보고 있은 지 오래였다.
그래.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어 죽어야겠어. 나 또한 다른 이들이 다치는 것을 이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랬기에 더더욱 주먹을 꽉 쥐었다. 엄마의 간사함이 이런 것일 줄은 예상도 못 하고 있었다. 새삼스럽게 깨닫는 엄마의 새로운 면모에 어딘가 모를 안타까움이 흘렀다. 꼭 이렇게 해야만 했어요?
그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나를 향해 빤히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자 어쩐지 자신이 없어진 난 시선을 재빨리 회피해 버렸다.
“싸울 것 없어요. 제가 떠날게요.”
“그럴 필요 없어.”
내가 말하기가 무섭게 그가 토를 달았다. 어째서? 그를 향해 놀란 눈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었다. 이 말을 바라는 것이 아니었나? 맥시안도 그렇고, 그 또한 바랄 거라고 생각했는데?
“넌 내가 지킬 거니까.”
다소 엉뚱한 말에 놀란 눈은 더욱 커졌다.
“맥시안 말 못 들었어요? 제가 가면 끝나는 일이에요.”
“아직도 이해하지 못했나? 가지 마.”
어린아이의 치기처럼 억지만 잔뜩 부리는 그가 도저히 이해가 가질 않았다. 쉽게 갈 수 있는 길을 두고 왜 돌아가려는 거지? 그 누구보다도 이득을 볼 사람은 그 자신인데?
“더 이상 다른 사람이 다치는 걸 보고 싶지도 않아요. 제가 이만 떠날게요. 그러니…….”
“보내고 싶지 않다!”
소리치는 그의 말에 순간적으로 귀가 멍해졌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로지 그의 소리만이 제 귓가에 맴맴 맴돌 뿐이었다.
“어?”
귓가에 한참 동안이나 맴도는 소리를 겨우 이해하는 순간, 제 입 밖으로 빠져나오는 말은 다소 멍청한 소리였다.
“지금…… 뭐라고…….”
순간적으로 제 귀가 잘못된 줄로만 알았다. 그러지 않고서야 저런 말들이 그의 입에서 순순히 나올 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전히 결연한 표정의 그를 바라보는 순간, 나는 저도 모르게 도피하듯 생각의 회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설마 아직도 그 허황된 소문 때문인가요?”
“……아냐.”
“그, 그럼 내가 당신의 아이를 임신했을지도 모른다는 것 때문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는 여태껏 맥시안의 목을 겨누던 검을 넣었다. 대신 그 손을 향해 날 향해 뻗었다.
“내가 더 이상 널 다른 누군가에게 보내고 싶지 않아서다.”
그의 말에 눈을 깜빡였다. 마치 제삼의 외국어를 들은 것처럼 그의 말이 쉽게 받아들여지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그의 말을 곱씹고 나서야 깨닫게 되자 더욱 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니 지킬 것이다.”
왜 이제야. 항상 날 물건 취급할 땐 언제고 왜, 하필 지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오늘따라 도통 이해하기 힘든 말들만 잔뜩 말하는 통에 그 자체를 판단하기가 힘들었다. 무언가 심장에 대고 울컥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간신히 결심을 내린 후에야 이런 말을 해 주는 그가 밉기만 했다. 동시에 어딘가 모르게 가슴이 울렁거리고 있었다. 일찍 말이라도 해 주지.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었을 텐데.
힐끔 시선을 돌려 옆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주위를 에워싼 적들은 지금 그가 가지고 있는 병사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많은 숫자였다. 엄마가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데려왔는지 의문이 들 정도로 그들의 수는 얼핏 보아도 많은 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겨우 물건 취급을 하지 않는 그의 말이 기뻤다. 하지만 그 기쁜 마음에 안주하고 이 상황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그가 다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그 마음은 다른 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난 더 이상 이곳에서 피비린내를 맡고 싶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래도 누군가 다치는 건 싫어요. 당신이라면 더더욱.”
“비시아.”
“나만 가면 다 괜찮아질 거예요. 아무도 다치지 않을 거고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완전히 돌려 교단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 무리는 내가 바라보자 몸을 움찔하더니 이내 전투태세를 거두고 날 바라보았다.
“그렇죠?”
나는 그들에게 강요하듯 대답을 재촉했다.
“약속해요.”
“……알겠습니다. 약속하죠. 저희의 사명은 비시아 님을 데려가는 거니까요.”
“그렇다네요.”
순순히 약속을 받아 내어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다는 눈으로 날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미안해. 이게 최선인 것 같아. 나는 그가 뻗었던 손을 가볍게 어루만지고는 이내 떼어 내었다. 그래도 넌 내 밥들 중에서 꽤나 맛있는 밥이었어.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여전히 일시 정지한 것처럼 멈춰 서 있는 그를 두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한 걸음. 두 걸음. 어째서인지 한 걸음 한 걸음이 쇠구슬이 달려 있는 것처럼 무겁기만 했다.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여러 차례 옮겨 그들에게 다가가자 기다렸다는 듯 그들이 날 보호함과 동시에 안내하기 시작했다.
“내 이름!”
그 순간이었다. 뒤에서 강하게 소리치는 목소리에 깜짝 놀라 뒤돌아보지 않는다는 생각도 잊어버린 채 고갤 돌렸다.
“내 이름은 루드릭이다!”
처음으로 말해 주는 그의 이름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자신의 이름은 귀하다며 믿지 않는 자에겐 결코 알려 주지 않겠다고 말했던 그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고 있었다. 오로지 나에게 전달하기 위해, 다른 사람이 듣든 말든 말하는 그의 목소리는 한차례 계속되었다.
“널 데려가겠어! 그러니 꼭 기다려라!”
“비시아 님. 가시죠.”
나를 재촉하는 이들에 의해 그의 말에 대꾸는 할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만큼은 바라볼 수 있었다. 나를 바라보는 눈빛. 어둠보다도 더욱 칠흑 같던 눈동자가 나를 향해 반짝이고 있었다.
“루드릭…….”
나는 그의 이름을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이제야 내게 이름을 알려 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를 믿는다고? 아님 정말로 나를 데려가기 위해?
“기다렸어, 딸.”
얼마 가지 않아 그들이 안내한 곳엔 당연하다는 듯이 엄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여전히 화사한 웃음을 간직한 채로 날 맞이하는 그녀를 보자 인상을 찌푸렸다.
“……엄마.”
“네가 오기를 기다렸단다.”
어련하시겠어요. 나완 달리 수완도 머리 회전도 좋으신 분인데. 입만 열면 자꾸만 비뚤어진 마음이 튀어나올까 봐 한참을 머뭇거렸다. 다행히도 그녀는 내 말을 재촉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그저 내 곁에서 보폭을 맞추며 기다릴 뿐.
“저 엄마한테 묻고 싶은 게 많아요.”
간신히 그녀를 향해 말을 꺼내자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래. 나도 오랜만에 만나니 너와 할 이야기가 많구나. 하지만 그 전에 도착하고 나서로 미루는 건 어떨까? 여긴 듣는 귀가 너무 많아서 말이야.”
엄마의 말에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대로 듣는 귀가 너무 많았다. 물어볼 것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그중 다수는 내 종족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그리고 터무니없는 나의 소문과 정체에 대해서도 말이다.
“저기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동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두 발로 걷는 것에서 말로, 말에서 마차로 이동수단이 바뀌어 갈 때마다 주변 풍경도 바뀌었다. 어느새 화려해진 마차에 탑승했을 땐 주변 풍경 또한 제법 화려해진 시내가 거리의 풍경을 아름답게 메꾸고 있었다.
그리고 그곳엔 내가 탈출한 지 백만 년은 되어 보이는 곳이 보이고 있었다.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