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화
멀리서 들리는 말에 심장이 덜컥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뭐야, 무슨 일이야? 여전히 눈앞이 가려진 탓에 볼 순 없었지만 소리만은 정확히 들려오고 있었다. 놀란 마음에 그의 어깨를 잡은 손에 힘을 더하자, 곧이어 손바닥 아래서 그의 어깨 근육이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넌 여기 있어라.”
“네? 하지만!”
일순 줄곧 제 시야를 갑갑하게 해 주던 것이 풀어졌다. 갑작스레 들어오는 빛에 눈을 자연스레 찡그렸다 폈다. 눈앞에 그의 얼굴이 있었다. 눈을 뜨면 자신을 보아 달라는 것처럼, 그는 꼼짝하지 않고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내 눈가를 쓸었다. 내 동공에 담긴 자신의 모습이 마음에 드는 듯, 그는 한참이 내 두 눈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위급한 상황을 알리러 온 이가 있다고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의 행동은 느긋하고 상냥했다.
“나는 나가서 상황을 보고 오겠다.”
이어 나머지 묶은 끈마저 풀어 주는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여유롭기만 한 그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안도해야 할 텐데 마음이 술렁이고 있었다. 마치 불길한 심정이 제 감정을 찍어 누르는 것만 같았다.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니 어느새 겉옷까지 다 챙겨 입은 그가 보였다. 애초에 옷을 제대로 벗은 것이 아닌지, 빠르게 챙겨 입은 그는 잔뜩 구겨진 망토까지 챙겨 어깨에 매달았다.
“저기.”
어쩌면 내가 할 수 있는 말이 아닐지도 몰랐다. 주제넘은 말일 수도 있지만 지금 해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았다.
“……조심히 다녀와요.”
저도 모르게 벌려진 입술 사이로 말을 내뱉자 옷을 입느라 분주하던 그의 손이 우뚝, 하고 멈추었다.
“지금 유혹하는 건가?”
너털대듯 웃는 그의 목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코앞까지 다가온 그가 내 양 뺨을 붙잡았다. 뭐, 뭐. 왜?
“이렇게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서 말하는 폼이 꼭 또 해 달라 조르는 것 같군.”
웃음 짓는 그완 달리 잔뜩 표정을 구겼다. 진지하게 걱정되어서 말하는 건데 말하는 꼴이 꼭 초를 치고 그래. 한껏 표정을 구긴 채로 그를 바라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걱정 마. 별일 아닐 테니까. 애초에 여길 아는 사람은 우리 외에 아무도 없으니 우연찮게 찾아낸 이들뿐일 테다.”
“그래도…….”
그의 말에 대답해 주려다 입을 멈추었다. 잠깐. 그럼 엄마는 어떻게 알고 온 거지? 마치 이곳을 원래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태연하게 들어와 날 홀리지 않았던가. 다급함에 그의 소맷자락을 꼭 잡았다.
“그래도요. 혹시 모르니까 조심해요.”
그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감돌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다.”
문을 닫고 한동안 들리던 발걸음 소리는 어느덧 들리지 않게 되었다. 이 근처에서 벌어진 건 아닌가 봐. 이 장소가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을 감안하면 꽤 먼 곳에서 벌어진 일임이 틀림없었다.
도대체 누가 이곳을 알아차리고 찾아온 것일까. 애초에 그들에게 잔뜩 혼이 나 도망간 지가 언젠데 벌써 찾아왔다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누구지? 설마 또 날 찾으러 온 이들은 아니겠지?
호기심이 이성을 앞질렀다. 근처는 잠잠한 걸로 보아 잠시 정돈 얼굴을 내보여도 괜찮을 거야. 결국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창문으로 바깥을 살펴보기 위해 기웃거리는 순간이었다.
“딸!”
까, 깜짝이야! 무방비 상태로 있는 내게 갑작스럽게 나타난 이는 심장마비를 낼 정도로 놀라기 충분했다.
“어, 엄마? 여긴 어쩐 일이야?”
것보다 창문으로 나타난 연유를 알 수가 없었다. 어젠 당당할 정도로 당연하게 문으로 들어왔으면서 오늘은 왜 창문으로 모습을 드러낸 거지?
“어쩐 일이긴.”
엄마는 어제 볼 때보다 한껏 물올라 있었다. 생기 가득 찬 엄마의 손이 내 손을 잡고 이끌었다.
“이제 나가자.”
“나가자니, 어디를?”
“어디긴. 엄마랑 같이 이곳을 빠져나가야지.”
아. 그녀의 말에 순간 몸을 멈칫했다.
“아, 그게. 엄마 난…….”
이끄는 그녀의 손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여전히 내 마음은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채였다. 떠나지도, 이곳에 남을지조차 제대로 확신이 서질 않았는데 무작정 그녀를 따라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후. 그럴 줄 알았단다.”
내가 이럴 줄 알았다고? 그녀의 말에 퍼뜩 정신을 차리자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그녀가 내 양 뺨을 붙잡았다.
“네가 준비가 안 되어 있는 것 같아서 이 사람들을 불러왔지.”
“사람을 불러왔다니 누굴?”
설마. 이성보다 빠른 행동이 그녀를 향해 다시 한 번 더 말을 이었다.
“혹시 엄마가 지금 밖에 소동을 부리고 있는 이들을 데려온 거야?”
“네가 갈 준비를 전혀 하지 않는 것 같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단다.”
안색이 새파래져서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한 것인지 알지 못하는 엄마는 인자하게 웃을 뿐이었다. 아무리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그렇지! 오로지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행동에 붙든 팔을 더욱 강하게 잡았다.
“그럼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
“왜 그런 자들까지 걱정하는 거니? 넌 오로지 너만 걱정하면 된단다.”
이기적으로 발언하는 그녀의 표정은 아주 평온해 보였다. 별 거 아니라는 듯한 그녀의 행동에 더 이상 이곳에 있을 순 없었다. 나는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간단하게 챙겨 입었다. 엄마라지만 더 이상 이런 행동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선뜻 선택을 못 해도 이건 아냐, 엄마.”
엄마를 바라보는 나를 향해 그녀는 싱긋이 미소 지었다.
“엄마의 곁으로 다시 오길 기다리고 있을게.”
짤막하게 흔드는 손을 뒤로하고 나는 문을 나섰다. 그에게 향하는 발걸음은 점차 빨라지다, 이내 뛰는 걸음걸이로 바뀌기 시작했다. 전쟁터라면 이제 지긋지긋했지만 이번 일만큼은 달랐다.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이야. 스스로를 재촉하는 생각은 점점 자신의 발에 채찍질을 했다. 다행히 승산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날 구하기 위해 온 이들이라면 교단의 이들이 대부분일 텐데. 그들의 원하는 목적을 손쉽게 들어준다면 여기 있는 이들을 가만히 둘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가 가서 말려야 해. 적어도 이곳을 들키게 한 것에 있어 책임은 져야만 했었다. 그들이 날 데려와 이 사달이 벌어진 거라고 할지언정, 엄마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내 책임도 있었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텅 빈 복도만이 날 반갑게 맞이할 뿐이었다. 조용한 분위기 또한 싸움이 한바탕인 곳이라곤 볼 수 없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고개를 돌려 나가는 문을 바라보았다. 어렴풋이 함성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이 일자 이내 그쪽을 향해 발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둑하게 잠들어 있는 복도의 끝에서 문고리를 잡는 순간, 나는 두말할 것 없이 당겨 활짝 열었다.
“비시아?”
육중한 문이 질질 끌리는 소리는 소리가 심상찮았던 걸까. 마침 문 근처에서 재빠르게 돌아보는 그를 향해 다가갔다. 어안이 벙벙한 그의 눈이 내가 점차 다가갈수록 험상궂게 변하기 시작했다.
“그곳에 있으라는 말 못 들었나? 왜 여기로 온 거지?”
“막으러 왔어요.”
“하, 네가?”
조롱하듯 날 바라보던 그가 망토로 감싸듯이 앞을 막았다. 마치 다른 이들에게 보이지 않게끔 하는 그의 망토가 내 모습을 감쪽같이 가려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안정이 되질 않는 것인지 그는 연신 힐끔거리며 날 바라보았다.
“허튼소리 그만하고 그냥 안전한 곳으로 피신해 있도록.”
“하지만 저들은 날 찾으러 온 거예요!”
“…….”
짧은 순간 그가 몸을 눈에 띄게 움찔거렸다. 하지만 이내 검을 고쳐 잡은 그의 눈엔 더 이상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그럴 리 없다. 저자들은 그저 날 처리하기 위해 온 자들일 뿐이다.”
억지를 부리는 그의 모습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럴 때 억지를 부려서 될 일이 아닌데. 그의 망토를 치우며 그에게 항의하기 위해 앞을 바라보는 순간이었다. 멀리서 그를 향해 달려오는 이가 보이자 순간적으로 소리쳤다.
“조심하세요!”
“왕자님!”
내 목소리와 동시에 맥시안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행히 적이 검을 내려치는 속도보다, 그의 속도가 더 빨랐다. 그는 재빠르게 자신이 든 검으로 상대의 검을 쳐올린 다음, 방심한 틈을 타 상대의 목에 가차 없이 찔러 넣었다. 소리조차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검붉은 선혈이 검의 궤적을 따라 퍼지자 저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눈앞에서 펼쳐진 참상이 끔찍하기 그지없었지만 애써 머릿속에서 지워내었다. 그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야.
“위험하니 이만 들어가.”
그는 다시 한 번 더 내게 단호하게 말했다. 정말 내가 필요 없는 걸까? 눈을 돌려 앞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난전을 치르고 있는 그들의 모습은 위태롭기만 해 보였다. 애초에 수리를 맡기느라 대다수의 병력이 그곳에 있어 이곳에 남은 이들이 얼마 없는 탓도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멀리서 그를 애타게 부르짖던 맥시안이 빠르게 다가왔다. 그의 안색을 살피던 그가 망토 뒤에 있는 날 발견하는 순간 안색이 돌변했다.
“그녀는…….”
“다시 돌려보낼 참이다. 네가 문까지 데려다주도록.”
“……알겠습니다.”
순순히 복종하는 맥시안의 말에 날 감싸고 있던 망토를 비켜 내었다. 일순 무방비 상태가 된 나를 본 맥시안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이질적으로 반짝였다. 어? 그를 향해 입을 열기도 전, 맥시안은 순간적으로 자신의 손에 들고 있던 검을 내게 휘둘렀다.
“비시아!”
가까이서 날 향해 외치는 소리가 어쩐지 아득하게만 들려왔다.
너를 먹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