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6화
“어디가?”
“어, 어?”
생각에 잠긴 채 익숙한 건물의 모서리 부분을 돌 때였다. 내 발걸음을 붙잡는 소리에 저도 모르게 멈춰 그곳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야 말았다.
“라디트?”
“어딜 그렇게 바삐 가냐고.”
“그야…….”
그 두 사람한테서 도망치려고 그런다, 라고 차마 말은 할 수 없어 침묵했다. 하지만 내 침묵이 올바른 답이 아니었던 것인지 라디트의 얼굴이 일순 더욱 찌푸려졌다.
“그 사람들한테 가?”
“뭐?”
“아까 네 이름을 부른 사람들 말이야.”
“라디트 네가 어떻게 알아?”
“그렇게 크게 부르는데 모를 리가.”
비단 내 귀에만 들어온 말이 아니었음을 다시 한 번 더 확신하게끔 해 주는 라디트의 말에 절망했다. 으으, 이럴 때가 아니야. 한시라도 빨리 도망쳐야 해……!
“가지 마.”
“어?”
말할 시간조차 아까워서 다시 발을 움직이려고 하는 순간, 라디트가 내 어깨를 붙잡았다.
“가지 말아 줘, 비시아.”
평소와 같이 어린아이의 투정이 담긴 소리가 아니었다. 간절함이 담긴 그의 표정이 한 시가 바쁜 상황을 잠시 망각할 정도로 애절하게 다가왔다. 잠깐, 얘는 지금 내가 어딜 갈 줄 알고 가지 말라고 하는 거지?
“라디트. 내가 어딜 가는데?”
“널 부르던 그 사람들한테 가는 거 아니었어?”
역시나. 혼자서 단단히 착각한 라디트를 향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절대로 아니야.”
“그럼……?”
“어…….”
그의 말에 순간 머리를 맞은 것처럼 멍하니 있었다. 그러게. 어디로 가지? 생각해 보니 이곳을 또 벗어나면 어디로 가야 할지, 마땅히 생각한 곳이 없었다. 이곳에서 수업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생존에 도움이 되는 수업은 전혀 아니었다.
“일단 여길 떠나긴 한다는 거네.”
예리한 자식. 그새 내 눈치를 읽은 라디트의 말에 순간 할 말이 없어져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눈빛을 읽은 라디트의 입이 재빠르게 움직였다.
“나랑 같이 가.”
“어?”
“나랑 같이 떠나자, 비시아.”
뭐? 그의 말에 황당함을 금치 못하고 입을 벌렸다.
“어딜 가려고?”
“어디든. 어차피 여기서의 생활에 한계가 있다는 건 너도 알잖아.”
“하지만 이렇게 급작스럽게?”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급작스럽게 내게서 멀어질 거라면 나랑 같이 떠나. 어차피 이곳에 온 경위도 그렇게 확실한 목적이 있어서 온 건 아니라며?”
그의 말에 순간 입을 다물었다. 그저 한순간의 오기일 줄 알았던 그의 말에선 진심이 엿보이고 있었다. 단순히 내뱉은 말이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자 내 입에선 당장의 망설임이 흐르기 시작했다. 나 하나 편해지자고 라디트의 평생을 멋대로 망치고 싶진 않았다.
“응? 비시아.”
“너 정말 괜찮겠어?”
내 말에 그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근래에 내게 주야장천 떠나자는 말을 일삼던 그였으니 이번이 기회라고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에드아르와 테이젤. 그리고 라디트의 사이에서 저울질을 잠시 해 보던 나는 이내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래 둘보단 맛난 밥 하나가 낫지!
“비시아 님!”
그 순간이었다. 나를 부르는 다수의 소리에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없어진 것을 알고 찾으러 온 사제들과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입을 떡하니 벌렸다. 으악, 저 없어요! 여기 없어요!
“아직 의상도 갈아입지 않고 어딜 그렇게 급히 가시는 겁니까!”
“하하, 그게요…….”
도망을 도망이라고 말하지 못하는 내 입에선 어물쩍거리는 말밖에 나오질 않았다. 아, 한시라도 빨리 벗어나고 싶었던 건데! 제 발을 붙잡은 라디트가 괜스레 미워 그를 향해 있는 힘껏 노려보았다.
“어쨌든 이렇게 마주쳐서 다행입니다.”
날 보고 꽤나 안도하는 이들의 말이 내겐 퍽 아니꼽게 들려왔다. 나는 마주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야.
“길이라도 엇갈려서 그분들에게 바로 인도하지 못했으면 어떻게 하나 싶을 정도였어요.”
“네?”
불안한 단어에 저도 모르게 반문하자 사제의 얼굴이 살짝 기울어졌다.
“비시아 님을 잘 아시는 분들 같던데요. 이름도 언급하셨고…….”
“비시아!”
저를 잘 안다는 ‘그분’들의 정체는 곧바로 드러났다. 저 멀리서도 잘 알 수 있을 만큼 한결같은 외모로 제 시선을 사로잡는 이들이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하하. 망했군.
재빠르게 라디트의 뒤에 냉큼 숨었으나 이미 모두의 시선은 내게 집중된 뒤였다. 오히려 어리둥절해진 사제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비시아, 무얼 하시는 건가요? 예를 갖춰 인사하지 않고.”
거기다가 한술 더 떠 날 똑바로 지명하면서까지 말하는 친절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내가 곧 죽어 가도 눈물 한 방울 흘릴 것 같지 않은 잔인한 처사였다. 이 나쁜 놈들.
이 이상 몸을 숨긴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애초에 제 이름까지 부르고 그들의 시선이 내게 다 마주하고 있는 데서야, 제 몸 하나 숨긴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갈 수 있을지 몰랐기 때문에 쭈뼛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앞으로 나서자마자 둘의 눈동자가 동그래지는 것을 자신의 육안으로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얼굴이 뚫어질 정도로 다가오는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워진 난 고개를 옆으로 슬쩍 피하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간만이에요. 테이젤, 에드아르.”
“비, 비시아 님!”
까, 깜짝이야. 내가 존칭을 칭하지 않을 거란 예상은 하지 못했는지 사제의 입에서 매우 큰 소리가 나왔다. 머, 뭐야. 원하는 대로 안 숨고 나왔잖아……? 어정쩡한 표정으로 이러지도 못한 채 그를 바라보고 있자 매우 놀란 사제의 표정이 그대로 내게 내리치려는 순간이었다.
“비시아!”
사제보다 한 발짝 더 앞선 테이젤이 사제의 앞을 가로막았다. 그뿐만이었으면 다행이었을 텐데. 사제와 라디트의 눈이 크게 떠지다 못해 빠지게 만들려고 작정한 것일까. 테이젤은 그 자리에서 당장 날 자신의 품 안으로 껴안고야 말았다.
숨이 막힐 정도로 뜨거운 껴안기에 숨이 막히는 것도 잠시. 자신을 옭아매듯 껴안는 느낌에서도 상냥함이 느껴지자 그를 밀쳐 낼 수가 없었다. 미는 대신, 찌그러질 것만 같았던 코를 간신히 들어 올려 테이젤을 향해 올려다보았다.
“정말…… 어디로 사라졌던 겁니까! 제가 얼마나, 얼마나……!”
이 격한 껴안기와 한시라도 떼어 놓기 싫어하는 집착적인 성정 때문에 도망쳤던 건데요……. 하지만 제게 격한 반가움을 표하는 사람에게 그렇게까지 진실된 말을 전할 필요가 있을까 싶어 말을 아꼈다.
그저 이 껴안음이 더욱 격해지기 전에 놓아 달라는 말을 하기 위하여 그의 등을 살포시 손으로 두어 번, 두들겼을 뿐이었다.
“아아, 비시아!”
하지만 무언가 잘못 알아들은 것일까. 내 행동과 동시에 갈비뼈에 위력을 가하는 테이젤의 힘이 더욱 거세어졌다. 윽. 자, 잠깐만. 이거 놔. 놓으라고……!
“이다지도 상냥한 당신이 도망을 쳤다니. 역시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의 손아귀 힘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순간이었다. 두 귀에 생생하게 들리는 테이젤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을 뻣뻣하게 굳히며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질되었다.
“도, 도, 도, 도망이요……?”
“아닙니다. 그렇게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비시아. 일부의 낭설일 뿐입니다. 당신이 끌려가지 않기 위해 반항한 것은 충분히 알 수 있었어요.”
평정심조차 제대로 취하지 못한 채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그를 향했건만,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인지 여전히 온화한 테이젤의 미성이 내 귀를 달콤하게 녹였다. 그보다 반항은 무슨 뜻이지?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저에게 진실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그, 그게…….”
그의 말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입술만 뻥긋거렸다. 어떻게 내가 진실을 알릴 수가 있을까. 잘못 말하면 이 순간 바로 골로 갈 판인데.
테이젤을 바라보던 눈을 돌려 에드아르를 향해 힐끔 시선을 바라보았다. 최대한 안타까운 눈빛으로 에드아르를 보자 내 시선을 눈치챈 것인지 에드아르의 어깨가 눈에 띄게 들썩거렸다. 가만히 있지 말고 너도 좀 뭐라고 말 해 봐! 너도 그때 있었잖아!
하지만 에드아르는 내 시선을 신경 쓰긴커녕 날 껴안고 있는 테이젤의 팔을 불태울 것처럼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노려보고 있었다.
“……그쯤 하지. 지금은 비시아를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안도해야 할 때가 아닌가.”
결국 참지 못하고 에드아르가 한마디 응수를 하자 내 목에 얼굴을 묻었던 테이젤이 마지못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후……. 알겠습니다. 일단은, 그러도록 하죠.”
일단이라는 말이 심히 거슬렸지만 테이젤이 한 수 양보했다는 사실에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 살았다는 걸까.
“자, 그럼 갈까요? 비시아?”
자신을 향해 곱게 미소를 짓는 테이젤을 바라보며 어깨를 힘없이 떨구었다. 아무리 둘러보아도 그가 내미는 손 위에 제 손을 올리는 것 외엔 다른 선택지가 없는 것만 같았다.
주변에 내 편이라곤 하나 없었다. 그나마 다른 대책안일 것 같았던 라디트는 그저 얼빠진 채로 멍하니 이 상황을 일관하고 있을 뿐이었다. 끝났다. 실낱같던 희망도 끊기는 순간 몸에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탈출구를 찾는 대신 그를 향해 손을 내미는 순간이었다.
“지, 지금 이게 무슨 짓인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폐하.”
내 앞을 막아서는 이는 생각조차 못 했던 예상외의 인물이었다. 그런 그의 행동을 가만히 볼 수 없었던 것인지 에드아르의 눈썹이 단박에 찡그려졌다.
“……내가 반대로 캐묻지. 지금 나의 사랑스런 반려를 데려가려고 하는 길을 지금 막아서는 것인가?”
“반려요?”
놀란 사제가 깜짝 놀라 그를 향해 반문했다 재빠르게 고갤 숙였다.
“그, 그게 아닙니다! 다만 비시아, 아아니. 폐하께서 지칭하는 반려는 저희 신녀 후보 중 한 명이십니다. 이렇게 갑작스럽게 데려가시는 건 되지 않는 일입니다!”
내 앞을 가로막은 이가 당황해하며 손을 재빠르게 저었다. 언제나 늘 경건한 마음과 몸가짐을 해야 한다며 좀처럼 흔들리지 않던 하얀색 치마가 갑작스러운 몸짓에 너풀거렸다.
“……뭐?”
사제의 말에 이번엔 놀라워하는 것은 다름이 아닌 에드아르였다. 뒤에서 데려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테이젤 또한 조금 커진 눈으로 날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엿한 신녀 후보가 된 이상 아무리 폐하라고 할지언정 마음대로 후보생을 데려가실 순 없습니다.”
그녀의 말에 어리둥절해 하는 것은 테이젤과 에드아르뿐만이 아니었다. 나 또한 교단 측에서 보호해 줄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해 멀뚱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얘네가 새삼스럽게 나한테 왜 이러지?
“……신전의 뜻 중에 이러한 내용이 있었다는 것은 처음 듣는군.”
“죄송합니다.”
사제는 머리를 공손하게 조아리며 말했지만 여전히 의사를 굽힐 생각은 전혀 보이질 않고 있었다. 그 어떠한 말도 들리지 않는 답답함 속에서 테이젤이 앞으로 나섰다.
“그녀의 동의는 구하시고 이러시는 겁니까?”
“물론입니다.”
나? 가만히 있다 그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더 확인하듯 오르내리자 눈을 크게 깜빡였다. 내가 오면서 그런 동의도 했었던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들의 말들 중에서 딱히 생각나는 것은 없었다. 아, 이래서 구두계약은 안 된다고 그렇게 현실에서 배웠는데.